느헤미야

느헤미야2장11절-20절 (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주신 것)

남수연 2019. 10. 31. 14:42

https://www.youtube.com/watch?v=6M6UZLIMcuc

<2019년10월27일 설교영상>


우리는 요즘 느헤미야를 통해 믿음의 성벽세우기를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까지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 공사를 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게 된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벽공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들려줍니다.

지난 여름 태풍 폭우로 산사태가 나고 돌과 흙더미에 매몰 된 집들이 많았습니다.

집을 덮친 흙더미를 어떻게 들어내야 할지 망연자실한 사람들의 모습을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은 제가 가 봐서 알지만 모든 건축물들이 다 돌로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도 토성이 아니라 무거운 돌을 쌓아 축조한 것입니다.

높다랗게 쌓았던 육중한 돌들이 무너져 내려 백오십년 세월에 흙이 덮이고 굳어져 버린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돌 몇 개 치우기도 힘들거예요.지금처럼 중장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의 맨손으로 도시를 둘러싼 돌더미를 치우고 성벽을 다시 쌓는다는 것은 엄청난 대공사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큰 일을 진행시킨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해서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느헤미야시대의 성벽재건은 교회시대인 오늘날엔 하나님의 나라와 성도들의 총체적인 삶인 믿음의 성벽을 쌓는 것입니다.

오늘부터는 느헤미야가 성벽 재건공사를 해 나가는 모습에서 믿음을 잘 세우는 실제적인 방법을 배우고 적용하면 되겠습니다.

 

1.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의 중심엔 내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엄청난 대공사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지지와 도우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힘겹게 매일의 일터에서 싸우며 나 한사람, 내 식구들의 삶을 지켜냅니다.

때로 그것조차도 육중한 돌덩어리를 들어 올리는 것만큼 버겁고 힘이 빠집니다.

느헤미야가 그 무거운 돌무더기와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내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임을 포착해야 합니다.

누군가 확실히 내 편, 전폭적으로 도와주는 진실한 내 편이 있다면 얼마나 듬직합니까?

흔들거리는 울타리 같이 기댈 게 못되는 허약한 사람 울타리도 힘들 때는 얼마나 큰 의지가 됩니까?

잘못 알고 기댔다 넘어졌던 적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성벽 건축의 전 과정을 보면 느헤미야가 의지했던 것은 오직 내 하나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친구도 사는 데 서로 의지하고 도움을 주고받지만 더 완전하게 나를 이해하는 내 편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속을 다 털어놓지는 못합니다.

가족이라 해도 나만 알고 있는 깊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각자 고독한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내밀한 것까지 하나님과는 공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기대어도 흔들리지 않는 울타리이고 내 속사정까지 살피고 도우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내 편이십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에게 그렇게 완벽한 내 하나님이셨기에 느헤미야가 그런 큰 일을 해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11절과 12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해 사흘을 머문 뒤에 성벽공사를 위한 행동을 개시합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머무른지 사흘만에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을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잖아요?느헤미야가 오직 하나님께만 지시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재건은 느헤미야가 숙명처럼 받아들인 일이고 치밀한 준비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얼마나 둘러봐야 할 게 많고 함께 일할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겠습니까?

그러나 느헤미야는 삼일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누구와 만났겠습니까?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과 의논했다는 뜻입니다.

그랬더니 내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해 나갈지 방법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해결해야 할 급박한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과 의논하십니까?

물론 신자들은 무언가를 결정해야 할 때, 큰 돌덩이가 앞을 꽉 막고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도 하루를 시작할 때, 사업 계획을 할 때,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힘든 상황을 돌파할 때, 느헤미야의 삼일과 같은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묻는 우리에게 당연히 길을 인도하십니다.

다만 기도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고 기도해도 하나님의 지혜를 길어낼 만큼 깊이 기도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기도해도 여러 생각들이 떠돌아 다니는 것 같은 기도에서는 지혜를 얻어내기가 힘듭니다.

마귀는 분주한 생각과 근심거리로 우리 기도를 요란하게 합니다.

옛날 권사님들이 기도줄을 잡는다는 말을 많이 하셨습니다.

모든 잡념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께만 닿는 집중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죠.

다시 한번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믿음의 성벽을 세우는 신자들의 생활은 기도와 말씀을 통해 배운 하나님의 경영방식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을 분별하고 따르려면 매일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만 하는 기도는 벼락공부 같은 것입니다.

저도 벼락공부 좀 해 봤습니다.

당장 그 날 시험은 넘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벼락공부는 실력이 안됩니다.

꾸준히 지속해야 실력 있는 신앙이 됩니다.

전에 살펴보았듯이 느헤미야처럼 항상 하는 기도의 자리, 그리고 깊이 하나님만 대면하는 첫 삼일 같은 기도생활을 꼭 하시길 권고드립니다.

아주 힘들게 자신과 싸워야 이 복된 기도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때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을 내 하나님이라고 야무지게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연히 내 아버지시고 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그것이 느헤미야처럼 입에 찰지게 붙지 않는걸까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 내 주님이시라는게 피부에 닿게 느껴지지십니까?

어떻게 하면 느헤미야처럼 당차게 내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 확신을 가지려면 역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내 하나님이란 확신은 사실 현실적으로 늘 느끼고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편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잖아요?

내가 누구 편에 있는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고 내가 알 수 있잖아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신게 분명치 않다면 내 쪽에서 하나님의 것, 하나님 편에 선 것이 확실치 않아서 그렇습니다.

느헤미야가 내 하나님할 때 저는 당신의 느헤미야라는 강한 믿음과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늘 내 하나님, 나의 하나님그렇게 말했잖아요?

그 속에 있는 또 다른 말은 나는 하나님의 다윗이야’ ‘나는 하나님 편에 서있어인 것입니다.믿지만 내 하나님이시란 확신이 부족하다면 이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과연 하나님께 속했나, 과연 하나님 편에 서있나.

이것을 점검하고 나를 자꾸 하나님 편에 세우는 인식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고,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가운데 어느덧 우리 입에서도 하나님께 내 하나님이라는 말이 감격스럽게 흘러 나올 것입니다.

 

2.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생각대로 느헤미야는 성벽공사를 추진합니다.

느헤미야는 기도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말을 한번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생각을 분명히 알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 생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카카오 사장이 생각하는 사람이 검색하는 사람을 이긴다고 했다죠.

우리가 무엇을 생각하고 계획할 때 보통 세 가지 마음이 뒤섞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 내 생각, 마귀의 생각입니다.

이게 참 신비죠.

어떻게 성령님이 생각이나 악한 영의 생각이 내 생각과 교류가 가능한 것인지.

아마 영적인 존재들이기에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대개 내 생각은 성급하고, 마귀의 생각은 부정적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은 명철하게 판단하되 희망적입니다.

내 생각대로 성급하게 한 일은 대부분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마귀가 주는 부정적인 생각은 의욕이 떨어지고 포기로 이어집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세밀한 생각을 잘 구별해서 따르면 결과가 성공적입니다.

성령님의 지혜는 불가능해 보일 때도 벗어날 묘수를 보여주십니다.

그 지혜를 받으면 문제와 붙어 싸워볼만한 자신감이 생깁니다.

잠언 246절에서 말씀하잖아요?

너는 모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모사가 많음에 있느니라

내 머리를 쓰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머리는 지극히 평범하고 가진 것만으로 뻔한 것을 생각해 냅니다.

저는 가끔 참고할 게 있어 제 옛날 설교를 읽어 봅니다.

그런데 거의 매번 이런 말을 내가 했었나하고 놀랍니다.

하고도 잊어 버린 걸 보면 그게 원래 제 머릿속에 있어서 나온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또 잠언 20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죠.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찰랑거리는 물과 같습니다.

그것을 길어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기도의 만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잘 살아내고 공들여 계획하는 일들을 잘 성취하려면 매일 그 모략과 지혜의 물을 길어 올려야 합니다.

 

또 느헤미야서에는 단 한 줄의 초자연적인 기적도 나오지 않습니다.

성벽공사는 모조리, 일일이 다 사람의 손으로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응답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김광해 권사님 손이 낫길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의사를 통해 수술 받는 게 제일 좋은 치료라고 판단하고 사람 손으로 수술을 받아 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사람의 손을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자연세상에서는 거기에 맞는 법칙대로 살게 하셨기에 하나님의 응답도 표적이 아닌 이상 그렇게 주십니다.

대홍수 다음에 하나님이 이렇게 노아에게 말씀하시죠.

창세기 822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특수하게 개입하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자연에 부여한 법칙대로 세상이 질서 있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이죠.

우리가 뿌린 대로 거두고, 노력한 만큼 얻고, 원인에는 결과가 있다는 합법적인 원리를 무시하고 요행을 바라는 게 믿음이 아닙니다.

단 한 줄의 기적도 없지만 느헤미야는 52일 만에, 백오십년동안 손도 못 댔던 성곽을 완공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내 마음에 주신대로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 기적 같은 일은 충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많이 다르죠.

기도하면 지혜를 주시고, 사람을 감동시켜 주시고, 내가 끝까지 해 낼 수 있게 붙들어 주시고, 내가 못하는 부분은 하나님이 선하신 손이 은밀한 중에 움직이십니다.

기도하되 기적이 아닌 일상적인 삶으로도 위대한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기적 신앙에만 관심을 기울이면 아름답고 자연적인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세상과의 불균형과 부조화를 강한 믿음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진실한 믿음은 세상에서도 통합니다.

느헤미야가 그걸 보여줍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이 주신 생각대로 하는데 모든 게 얼마나 합리적이고 탁월한지 모릅니다.

 

3. 느헤미야가 내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대로 일하는 과장이 이후에 나옵니다.

우리의 사회생활, 가정생활에서도 이렇게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1) 12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성벽의 형편을 파악하러 비밀리에 움직입니다.

내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몇몇 사람과 함께 나갈새

성벽 재건은 과거에도 시도되었지만 주변 나라들 훼방으로 중지되었습니다.

남이 나보다 잘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죠.

본문 앞 10절에도 이 역사를 지독하게 방해하는 세력들이 벌써 움직입니다.

느헤미야가 성벽 공사를 하겠다고 대낮에 돌아다닌다면 사람들의 호응을 얻기도 전에 적들이 일을 훼방할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시작도 안 된 일을 다 된 일처럼 떠벌이고 다닙니다.

사람은 신중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사람의 입이 얼마나 가볍습니까?

그래서 말로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느헤미야는 한밤중에 예루살렘 성벽을 한바퀴 돌며 상황을 점검합니다.

실제로 성벽을 점검해 보니 무너져 내린 돌더미로 통행조차 어렵다는 걸 알았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이고 문제해결의 첫 걸음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은 얼마가지 않아 원망과 좌절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현실을 점검하고 때로 철저히 절망해야 합니다.

그 일이 얼마나 돌무덤처럼 무겁고 내 힘으론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절감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분일초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해낼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죠.

그래야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해서 믿음으로 이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2) 현실을 완벽히 파악한 느헤미야는 다음 단계에 들어갑니다.

함께 일할 유다사람과 제사장과 귀족들을 모아놓고 자신이 총독으로 온 이유를 밝힙니다.

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처참하게 파괴 된 예루살렘을 직접 답사하고 왔기에 그 속상함을 쓰라리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입으로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좋은 말은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얼마가지 않아서 그것이 말 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업에서도, 사람관계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몸이 고달파야합니다.

몸이 편하면 일도 사람도 얻지 못하는 것이죠.

우리 민욱형제가 회사에서 받는 월급보다 캘리그라피 온라인 강의로 돈을 더 잘 법니다.

거의 청년사업가 수준인 것 같습니다.

민욱형제가 쉽게 돈을 버는 게 아닙니다.

회사만 다녀도 힘든데, 집에 돌아가서 강의를 관리하고 백 명이면 백 명 수강생의 질문에 일일이 다 답변을 해 준다고 합니다.

수강료만 받고 온라인 강의만 던져 주고 편하게 있었다면 인기 강좌가 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밤이슬을 맞아가며 현장을 체크했기에 황성옛터처럼 허물어진 성읍의 수치를 통감하며 말할 수 있었던 것이죠.

느헤미야의 말에서 사람들은 오가며 보았던 무너지고 불탄 흉한 성벽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런 예루살렘은 민족의 죄와 무능과 수치의 역사잖아요?

주거환경이 나쁘면 자존감도 나빠집니다.

평생 불탄 성벽을 보며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성에서 버림받은 자식들처럼 자괴감과 우울감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들이 씁쓸한 현실을 직면할 때 느헤미야는 성벽재건을 하자고 촉구합니다.

,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

믿음의 성벽이 무너진 삶은 수치입니다.

우리 믿음이 잘 세워지면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은 내 하나님만 의지하는 성도들에게 수치를 당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수치를 당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엘서22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를 기이히 대접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영히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사람들이 결단할 수 있는 최종적인 무기를 꺼냅니다.

왕의 술관원이었던 내가 유다총독으로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셨다.

즉 하나님이 성벽 중수를 하도록 우리를 돕고 있다는 것입니다.

공동체의 리더가 하나님과 확실하게 동행할 때 구성원들이 그 은혜를 나눠 받게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사는 것을 자녀들이 볼 때 그들도 믿음의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벽재건축을 허가하는 왕의 조서를 보여줍니다.

가장 큰 저해요소가 해결된 것입니다.

성도는 무능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사실 무능하다는 실의에 빠질 때가 많은데 어떻게 유능해집니까?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왕의 조서를 어떻게 받아냈습니까?

기도로 받아냈잖아요.

우리도 역시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 구함으로 현실적인 대책을 늘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사람들이 놀라운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 하매

가장 큰 기적이 무엇입니까?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다같이 그래 해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 믿음의 가정을 세워가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왜 움직이시지 않겠습니까?

사람의 마음도 돌려 놓으시고, 없던 용기도 부어주시고,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실 것을 믿고 낙심되는 마음을 기도로 강하게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방해하는 장애물은 늘 존재합니다.

19절에 보면 이 위대한 성벽공사를 시작하려고 할 때 그 원수들이 다시 나타나 비웃고 업신여깁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선한 손이 함께 하시는 일에도 난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일이 막힌다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믿음으로 잘 살고자 할 때 꼭 낙담시킬 일이 생깁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할 때 맥 빠지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스스로 약하게 여기는 내 안의 산발랏도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렇게 그 모든 방해를 물리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 하였느니라

이 땅의 하나님나라는 다 성도들의 크고 작은 헌신과 세상 속에서의 자취를 통해 이뤄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형통하게 이끌어 주십니다.

매일 믿음의 성벽을 쌓는 우리를 하나님은 형통케 하실 것이고 앞으로도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종인 성도들을 통해 계속 세워질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편안한 삶을 버리고 무너진 도성에서 수치를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온 느헤미야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이전엔 느헤미야에게서 하나님을 위해 아름답게 헌신했던 성도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저는 느헤미야에게서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우리 모두는 무너진 삶을 살았잖아요?

예수님은 수치스러운 삶을 벗어나 당당하고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믿음의 성벽을 세우도록 우리 삶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하나님이다. 너도 나의 것이 되어다오. 내가 너를 형통하게 하리니 나의 종아 나와 함께 내 나라를 세우고 복된 기업과 유산을 상속 받거라

 주는나의산성교회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