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내가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옵소서 (느헤미야5장)

남수연 2019. 11. 11. 23:28

https://www.youtube.com/watch?v=yMfu6iHT37A

<2019년11월10일 설교영상>

요즘 칠레는 국민시위가 방화, 약탈로 격화되어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습니다.

지하철요금을 오십원 올린 것에 중고생들이 반발한데서 시작되었다고 하죠.

칠레의 고름이 터졌다고들 합니다.

그 원인엔 심각한 빈부격차의 문제가 있습니다.

칠레의 소득 불균형이 얼마나 심한지 상위1%가 부의 26.5%를 차지하고 있고 하위 50%는 겨우 2.1%를 갖고 나눠먹고 있다고 합니다.

최저임금 월48만원에서 교통비로 삼분의 일이 나가는 판에 요금을 또 올렸으니 폭발한 것이죠.

홍콩 사태를 보아도 그렇고 칠레의 경우도 그렇고 어떤 종류든 사람들의 불만이 쌓이면 국가적 위기로 이어집니다.

사회 내에 불행한 사람이 많아지면 결국 혼자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이죠.

가까운 사람, 우리 가족들이 행복하면 우리도 편합니다.

가까운 사람의 마음을 살피고 복지를 잘 챙겨주는 게 내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당시 이스라엘에도 빈부격차가 심했다는 걸 보여줍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니 굶어 죽지 않으려면 농성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죠.

느헤미야는 가난한 귀향민 공동체를 데리고 성벽중수 공사에 혼신을 다하고 있을 때입니다.

이 갈등은 자칫 성벽 재건이 실패로 돌아가게 할 아주 큰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고 술술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느헤미야가 이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고 성벽공사를 완수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믿음의 성벽쌓기에 큰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예루살렘에는 무너진 성벽처럼 무너진 삶이 있었습니다.

본문 1절에 보면 가난한 백성들이 부자들을 성토하며 성벽공사의 현장으로 몰려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무슨 큰 행사가 열릴 때 농성자들도 모여들잖아요?

당시 사회상이 어떤지 2절부터5절까지 이들의 말에 잘 드러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당장 굶주린 자식들을 데리고 구걸이라도 해야겠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없는 살림에 페르시아 왕에게 세금을 내려고 밭도 잡히고 집도 잡혔다고 합니다.

지배국들이 식민지에서 무자비하게 걷어가잖아요?더 안타까운 사람들은 빚 때문에 자식들이 남의 집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귀향민들은 부푼 꿈을 안고 바벨론에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것일까요?자식들을 잘 키워보자고 왔는데 자식들을 사지에 몰아 놓게 된 것입니다.

성벽만 무너진 게 아니라 개인의 삶도 다 무너져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성벽이 무너지면 서서히 삶도 무너집니다.

무너진 채 방치 된 예루살렘은 이들의 예배가 무너져있다는 걸 말합니다.

구약성경시대의 가나안땅,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다스리며 복을 주시는 땅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잘 섬기면 젖과 꿀이 보장 된 곳이죠.

물론 이 땅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누리게 되는 영생과 하나님나라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선 하나님이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들과 언약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언약대로 복을 주셔야 하는 것이죠.

신실하신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시지 않으시니 지금 같은 흉년과 지독한 궁핍은 사람들이 약속을 안 지켰다는 뜻입니다.

포로귀환 후에 세워진 이스라엘집단의 신앙이나 삶이 여전히 과거와 똑같았다는 기록이 이후 성경들에 다 기록되어있습니다.

포로귀환자들이 복지의 땅에 돌아는 왔지만 무슨 기반이 있겠습니까?

사실 페르시아에서 자리 잡고 살 만한 사람들은 대다수가 거기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귀환자들 가운데는 고국을 새로운 기회로 알고 내려온 사람들이 다수였을 것입니다.그렇다면 이젠 복을 내려 주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을 바짝 의지해야 하는 것이죠.

쥐어짜도 나올 게 없는 지독한 궁핍은 이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찾고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욥기 3841절에서 이렇게 자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피조물이 하나님을 향하여 본능적으로 부르짖을 때 먹을 것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쌍한 자에게 마음이 동하시고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의 아버지라고 하셨잖아요?

의지할 아버지가 계신 데 사람들은 삶이 다 무너지기 까지 도움을 구하지 않는다는 게 안타까운 것입니다.

수렁에 빠졌다면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빠져나와야 합니다.

오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에게 몰려와 손을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에게서 해결책이 나왔다면 하나님 앞에 직접 손을 내밀면 얼마나 든든하게 잡아 주시겠습니까?

또 이들의 절박한 처지를 신앙의 측면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만 관심을 두고 자식을 세상에서 성공시키기 위해 키운다면 결국 자식을 사지로 몰아넣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 죄의 종으로 팔려가는 것이죠.

그리스도의 종으로 키워야 마귀의 종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 부모세대의 불신앙이 결국 자녀들의 불행으로 대물림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도, 신실하지 않은 얕은 신앙도 특단의 변화가 없다면 대물림 되는 것이 자연적 이치입니다.

우리의 것을 물려주지 않으려면 열심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서 하나님의 것을 물려받게 해야 합니다.

오늘 이들의 무너진 삶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는 어떤 문제든, 죄든, 우리 삶을 무너뜨리게 두면 안됩니다.

우리에겐 모든 것을 구하면 주시겠다 약속하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주님께 손을 내밀어 적극적으로 벗어나 복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다음은 느헤미야가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이 문제를 해결해 가는 지를 보겠습니다.

느헤미야의 성벽공사는 백오십년 동안 굳어진 흙더미를 걷어내고 무거운 돌을 다듬고 새로 쌓아 올리는 굉장한 중노동이었습니다.

게다가 주변나라들은 건축을 중단시키려고 살해 협박까지 합니다.

그래서 한 손에는 연장을 들고 한 손엔 창을 잡고 일했다고 하죠.

하필 이때 그동안 곪았던 사회적인 문제가 터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파산당한 사람들의 문제까지 떠 앉게 된 것이죠.

파산당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난다는 게 어지간히 도와줘서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좀 도와줘 본 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전력을 다해 성벽공사만 해도 힘든 판에 이런 일까지 덮치니 정말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십니까?’ 란 말이 저절로 나올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런 때가 있잖아요?

할 만큼 하고 있는데 하나님이 거기다 다른 짐을 또 얹어 놓으시는 바람에 무릎이 휘청할 때요.

느헤미야처럼 헌신한다면 오늘 같은 일은 막아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느헤미야서를 계속 읽어보면 이뿐만이 아닙니다.

숨 돌릴 틈이 없이 계속 사건이 터집니다.

우리가 느헤미야의 입장이라면 하나님의 처사를 납득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번번이 앞을 막아서는 암초를 당연하다는 듯 뚫고 나갑니다.

이것은 느헤미야가 이미 험한 산을 수도 없이 넘으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얻은 신앙의 실력이고 강단인 것입니다.

무슨 일을 꿋꿋이 할 수 있는 원동력은 믿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감당하지 못할 시련은 주지 않으심을 믿고 우리도 때때로 앞을 막아서는 모든 문제들을 느헤미야처럼 꿋꿋이 뚫고 나가야 되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까요?6절에 느헤미야는 고리대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귀족과 부자들에게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즉각적으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요즘 욱해서 내 뱉은 말로 곤혹스러운 정치인들 많죠.

욱해서 내 뱉고 나면 그 다음은 상대방 눈치 볼 일만 남잖아요?

7절을 보면 느헤미야가 깊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깊이 생각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이 문제의 해법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마지막에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로 마무리 되죠?

역시나 사건 내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수많은 사람의 가난 문제를 어떻게 한 사람 느헤미야가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 괜히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도 그래서 최저임금을 올렸지만 여기다 이 해결책을 쓰면 그게 다른 데선 독약이 돼서 이젠 저쪽에서 죽겠다고 하잖아요?

급하게 대응하는 해결책은 점점 상황을 꼬이게도 합니다.

우리도 살면서 일이 생길 때마다 허둥대며 닥치는 대로 해결하려고 하죠.

그렇게 해서 웬만한 일들은 그런대로 꾸려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늘 그렇게 했듯이 기도로 지혜를 구하며 문제를 깊이 생각하고 행한다면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에게는 오늘 문제가 성벽재건 공사의 성패를 건 분수령이 되는 사건입니다.

지금은 성벽공사가 급박하니 좀 돌아가 있으라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성벽공사에 투입되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농성하던 가족과 형제들과 같이 화가 나서 돌아가 버렸을 것입니다.

만일 분노하며 귀족과 부자들에게 갈취한 것을 다 돌려주라고 했다면 이 성벽공사의 큰 조력자들이 다 등을 돌리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사람들 사이에 끼이는 경우가 있죠.

그때 잘못하면 양쪽에서 다 원망을 듣게 됩니다.

지난 번 사드 때도 중국과 미국사이에서 그랬잖아요?

이번에 홍콩 시위 때문도 또 그런 양상이 될까 우려들을 합니다.

홍콩 민주화를 지지하는 홍콩유학생과 우리 대학생들이 중국 본토 유학생들과 충돌을 빚고 있다고 하죠.

늘 해오던 평범한 일이 오늘도 그렇게 될거라 보장되지 않은 것을 알기에 우리는 쉬운 일도 기도해야 합니다.

복잡하게 꼬인 문제에는 더더욱 기도 밖에 더 있겠습니까?

느헤미야가 기도하며 깊이 생각해 내 놓은 해결책이 7절 이후에 나와 있습니다.

먼저 귀족과 부자들을 모아 놓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꿔줄 때 높은 이자를 받은 게 잘못이라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율법에도 금지된 것이기에 듣는 부자들이 할 말이 없이 조용했다고 하죠.

또 율법엔 같은 민족을 종으로 삼지 말라고 했는데 빚 대신 어린 자식들을 데려다 종으로 삼은 것도 책망합니다.

너희가 이런 율법을 지키는 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아니겠냐고 설득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에 근거해 따지니 결국 이들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해결책을 낸다면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귀족들이 잘못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되자 느헤미야는 당장 해야 할 적정한 선을 제시합니다.

일단 이자는 앞으로 절대로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일을 해야 먹고 사니 담보물은 우선 돌려주라고 합니다.

또 당장 어린 자식들을 먹일 수 있도록 취득한 재물의 백분의 일을 돌려주라고 합니다.

빚을 무조건 탕감해 주라는 말이 아니라 벌어서 갚게 하라는 것이죠.

또 십분의 일은 어림없지만 백분의 일은 선심 쓸 만 하잖아요?

교회 시대에 예수님이 주신 원칙은 옷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한 벌을 주는 것이지만 사람이 그게 안되잖아요?

집 두 채 있는 사람에게 한 채를 가난한 사람을 위해 내 놓으라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시험에 들 문제입니다.

느헤미야는 부자들이 양보할 수 있는 적정선을 제시한 것이죠.

또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이제 높은 이자를 내야 할 처지에서 벗어났으니 하루 벌어 하루 먹더라도 자기 힘으로 열심히 살라는 것입니다.

양쪽에서 들어도 타당한 해결책을 내놓자 양쪽이 다 수궁을 하는 것이죠.

그러자 느헤미야는 얼른 제사장을 불러와서 맹세까지 시킵니다.

아예 공증을 한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 바뀔지 모르게 변덕스럽잖아요?

이렇게 성벽재건이 실패로 돌아갈 뻔한 중대한 고비를 또 넘어갑니다.

우리도 이렇게 고비를 넘어가는 것입니다.

일이 많고, 힘들고, 바쁠수록 기도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어떤 문제든 해답을 찾아냄을 믿고 기도로 우리 성벽을 위협하는 위기 마다 잘 지켜내시길 축복드립니다.

 

3. 마지막으로 본문에서 드러나는 느헤미야의 삶과 인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 중에 드러나는 느헤미야는 정말 놀라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대개 권력 있고 돈 많은 사람은 없는 사람 형편에 진심으로 공감하기가 힘듭니다.

그런데 오늘만 아니라 8절에서 느헤미야의 선행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노예로 팔려간다는 것은 생애 희망이 완전히 꺼졌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손가락 하나에 목숨이 달린 사람을 구해주는 데 이미 힘을 써왔다는 것이죠.

어쩌면 노예 신분의 아픔을 갖고 살아왔기에 이들의 처지가 남의 일 같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느헤미야의 성품이 선천적으로 동정심과 긍휼이 많아서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느헤미야의 성품은 단칼에 악을 도려내는 정의와 강직함과 추진력을 두드러지는 사람입니다.

완전히 이타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남에게 관대하던 우리도 어느 순간 정반대로 옹졸하고 냉정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와 스스로 놀랄 때가 있잖아요?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때로 너무 비정한 나, 너무 이기적인 반응을 하는 내게 놀랍니다.

그게 우리 본성의 모습입니다.

그게 위장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 특히 가족 앞에서, 혼자 운전석에 앉았을 때, 상관없는 사람을 대할 때 불쑥 나오죠.

성령께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를 부드럽게 품어주시지 않으면 본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하며 순종하는 사람 느헤미야에게 이런 예수님 같은 마음이 느껴지는 건 당연한 것이죠.

내 속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담이 흘러나온다면 다시 겸손하게 성령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때입니다.

14절을 보면 느헤미야는 유다의 총독으로 근무했던 십이년 동안 월급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금과 가난에 시달리는 서민들을 생각할 때 자기 월급까지 챙길 순 없었다는 것이죠.

이렇게 가난한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누가 가질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잖아요?우리가 정말 쪼들리고, 한 푼이 아쉽게 살고 있진 않다면 남의 형편을 헤아리고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이 되야 할 줄 믿습니다.

어릴 때부터 해야 하고, 가진 것이 적을 때 작은 것에서부터 훈련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느헤미야는 많은 사람들을 풍성하게 대접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17절부터 18절에 나오죠.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백오십 명이 있고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한 마리와 살진 양 여섯 마리를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우리교회도 풍성한 식탁이 자랑이지만 느헤미야의 식탁은 정말 대단하죠.

저는 느헤미야가 십이년동안 이렇게 많은 것을 베풀 수 있는 돈이 다 어디서 났는지가 궁금했습니다.

매일 백오십명 이상의 식사를 제공하려면 그 돈이 얼마입니까?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어마어마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본서 11절을 보면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고 시작됩니다.

구약성경에 느헤미야의 아버지 하가랴의 이름은 느헤미야서에서만 딱 두 번 언급됩니다.

보통 이스라엘사람들이 자랑처럼 늘어놓는 구약성경 족보에 하가랴는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의 집안이 왕족도 아니고 큰 권력자의 집안도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조상들이 신발도 못 신고 포로로 끌려갔을 텐데 어떻게 이런 부자가 되었을까요?

대강 계산해도 느헤미야의 재산은 그냥 농사나 져서 모을 수 있는 재산이 아닙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도 그의 공력과 충성에 대해 아닥사스다 왕이 보상한 것에서 시작되었을 것 같습니다.

당시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 얼마나 많은 땅과 부를 소유했겠습니까?

고대엔 왕들이 충신과 측근에게 땅과 노비를 다 하사하고 그랬잖아요?

느헤미야의 엄청난 재산은 개인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느헤미야는 왕의 식탁에서 의전을 챙기던 사람입니다.

왕과 신상 문제를 의논하고 개인적인 대화를 나눈다는 게 보통 지위가 아닙니다.

무명의 노예 집안에서 이런 큰 권세와 엄청난 부를 이루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왕의 손을 통해 주신 것이죠.

우리가 그런 축복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사랑과 같은 과분한 은혜를 입고 주님의 식탁에 앉은 사람들이잖아요?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모든 것을 다 누가 주셨습니까?

저는 예수님을 믿은 이후로 좋은 직장을 주셨고, 환경을 바꿔주셨고, 점점 더 좋은 것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이 남다른 헌신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에겐 받은 은혜와 축복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군말 없이 충성하는 것이죠.

우리는 다 속으로 계산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축복과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는 헌신을 생각해 보면 금방 계산이 나오잖아요?그래서 헌신하는 성도들은 자기 노고가 크다는 생각이 아예 들지 않습니다.

누가 그걸 알아줘야 당연하고 몰라주면 섭섭해 하지도 않습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12년을 예루살렘에서 일했잖아요?

왜 그렇게 오래 있었겠어요?느헤미야는 생활의 근거지가 페르시아입니다.

아마 가족들, 친척들, 깊이 교제하는 사람들이 다 거기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유다땅에 머물렀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할 일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뒤로 가면서 보면 알겠지만 여기를 좀 손대고 나면 저기가 문제고, 거기를 수습하고 돌아 와 보면 사람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떠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한 수고가 그런 것입니다.

열매가 있고 늘 보람이 있다면 기쁘게 감당할 수 있겠죠.

그런데 느헤미야처럼 십년이 가고 이십년이 가도 우리 헌신의 결과는 기대이하인 경우가 많습니다.

믿음으로 매달리는 게 의미 없이 느껴질 정도로 요지부동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합니다.

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하나님은 이렇게 꿋꿋이 주님을 따르며 우리가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셔서 반드시 현세와 내세에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느헤미야와 같이 강단 있는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게 되시길 소원합니다.

우리 주나산의 자녀들이 다 느헤미야처럼 큰 사람이 되어 많은 사람을 살리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일군들이 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힘겹게 믿음의 성벽을 쌓아가는 데 느헤미야처럼 또 다른 일들이 덮친다 해도 낙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기도하며 주님을 의지하면 다 우리가 감당할 만한 일들입니다.

더 단단한 근육이 생기려면 아시다시피 좀 더 강도가 높은 운동이 필요한 것처럼 믿음의 근육도 그래야 생기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도 암투가 벌어지는 페르시아 궁전에서 수없이 위기를 넘기며 지금의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믿음에도 아직 자신이 없고 신앙을 위해 무언가를 자꾸 하는 것도 버거우시다면 꾸준히 예배드리고 말씀을 잘 들으며 은혜 안에서 자라가시길 바랍니다.

받은 은혜를 따라 점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복되다는 것을 알고 봉사하는 기쁨도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매일 느헤미야와 같이 기도로 깊이 생각하며, 성령님이 주시는 따뜻한 마음으로 이웃을 돌보고 큰 지혜를 얻어 믿음의 성벽을 잘 쌓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