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무너진 성벽 (느헤미야1장1절-11절)

남수연 2019. 10. 15. 20:15

오늘부터 살펴 볼 느헤미야는 성경을 기록한 인물 중에서 좀 독특한 사람입니다.

선지자도 아니고 예언자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닙니다.

포로 된 나라에서 높은 공직에 오른 공무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느헤미야가 안정 된 지위와 평탄한 삶을 내려놓고 폐허가 된 고국 예루살렘을 재건한 이야기가 느헤미야서입니다.

이번 주부터 살펴 볼 느헤미야를 통해 어떻게 믿음과 삶이 짝을 이루고 살게 되는지를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 한 사람만 위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사는 복된 삶으로 잘 인도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1. 느헤미야서의 배경 역사에 대해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성경 이스라엘 역사의 후반기에 나라가 바벨론의 침략에 멸망하죠.

수도 예루살렘은 무참히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남은 자들은 포로가 되어 멀리 바벨론제국으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70여년 뒤 이 바벨론제국이 페르시아에게 멸망합니다.

페르시아의 새 군주 고레스왕은 유대인 포로의 귀환명령을 내립니다.

고국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은 가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세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약탈해 왔던 성전의 금은 기구들을 돌려주고, 원하는 대로 성전건축을 돕겠다는 파격적인 조서를 내립니다.

70년 뒤에 다시 본토에 돌아오게 하실 거라는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된 것이죠.

1, 2차 포로귀환자들의 이야기가 에스라서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1차 귀환자들은 큰 포부를 갖고 돌아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합니다.

오늘 교독문인 시편에서 당시의 감격이 생생하게 느껴지죠.

그로부터 다시 80년 뒤 에스라가 이끄는 2차 포로귀환자들이 돌아와 백성들에게 말씀과 율법을 가르치고 신앙을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다시 10여년 뒤 느헤미야가 3차 포로귀환자들을 이끌고 돌아와 성벽을 중건해 예루살렘성에 사람이 살게 하고 모든 체제들을 정비합니다.

비로소 나라가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이죠.

사실 느헤미야는 바벨론에서 태어난 포로 삼 세대 정도에 해당합니다.

보통 이민 삼 세대 쯤 되면 부모님의 조국이지 내 조국은 아니게 되죠.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서 아직도 무너지고 불탄 채 남아있는 예루살렘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 느헤미야는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하기 위해 삼차 포로귀환자들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돌아온 것입니다.

 

2. 이 포로귀환 사건과 귀환자이 보여준 나라 재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것이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닐 것입니다.

이 바벨론 포로귀환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된 것입니다.

포로귀환이 보여주는 핵심적인 의미는 이것이 장차 메시야를 보내셔서 이룰 완전한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인물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설명하고 상징하는 시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목적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써 내려 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약성경이 나에 대해 쓴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신 것은 그들이 거기서는 죄를 회개하고 바르게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를 않잖아요?

하나님이 택하신 자기 백성이기에 계획한 때가 되자 무조건적으로 포로 딱지를 떼고 약속의 땅 고국으로 돌아오게 한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잘 설명해 주는 모델인 것이죠.

그런데 그 예언대로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이스라엘은 왜 여전히 능욕과 수치를 당하고 예루살렘은 왜 여전히 폐허로 남아있는 것일까요?이사야서에서 예언대로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실 때는 다윗의 영광 같이 될 거라고 하셨잖아요?

물론 포로귀환이 예수님이 이루실 완전한 하나님나라의 측면에서 기록된 것이지만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적용되어야 하잖아요?

이것은 본토에 돌아간 성도들이 감당할 믿음의 책임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어느날 떨어진 귀환명령과 같습니다.

내 노력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적용시켜 무조건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는 것, 또 성도 개인의 구원의 삶을 잘 세우는 것은 우리에게도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면 그 다음 모든 게 자동적으로 하나님 뜻대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시겠지는 믿음을 가장한 불신이고 태만입니다.

사람이 아무 것도 안 해도 모든 걸 완벽하게 하나님이 혼자 다 해버리시면 애초에 왜 선악과 같은 걸 만드셨겠어요?

자동으로 다 복종하게 만드셨겠죠.

하나님은 책임과 자유의지를 가진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잖아요?

믿기만 하면 신앙이 우리 삶을 저절로 복되게 바꾸는 게 아닙니다.

에스라서에서 그 사실을 자세히 보여줍니다.

처음 귀환자들은 성전을 지으라는 고레스왕의 칙서를 들고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당당하게 성전을 건축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돌아간 귀환자들이 현실을 보니 녹록치가 않았습니다.

재건을 방해하는 주변국들이 너무 많고 위협적인거예요.

이들이 두려워 성전 지대도 못 놓고 한동안 제단만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에스라서는 전합니다.

또 당장 자기들 살 집을 지어야 했고 땅도 개간하고 농사도 지어야 했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성전을 짓는 것은 차일피일 미뤄지게 되는 것이죠.

그사이 이스라엘이 강성해지는 데 위기를 느낀 주변 나라들이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이들의 공작은 우리 믿음을 가로막는 마귀의 궤계를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건축을 밀어붙이지 못한 사이에 고레스왕이 죽고 다음 왕이 즉위합니다.

기회가 왔을 때 믿음으로 밀어 붙이는 것이 때로 필요한 것입니다.

방해 세력들은 새 왕에게 이스라엘이 성전과 성곽을 완공하면 분리 독립할 것이라는 중상모략의 편지를 보냅니다.

그래서 결국 공사를 중단하라는 왕의 조서를 받아냅니다.

그렇게 해서 성전공사는 중지됩니다.

보다 못한 하나님은 학개선지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시고 스가랴선지자를 보내 독려하셔서 겨우 성전 공사를 끝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너지고 불에 탄 성벽공사는 손도 대지 못하고 남아있는 것이죠.

우리 믿음에 적용이 되십니까?

많은 성도들이 성전만 간신히 들여 놓고 산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성곽을 견고히 세우고 그 안에서 죄를 통제하고 악의 세력을 방어하고 안정적인 삶을 꾸려가질 못한다는 것이죠.

사도바울도 믿음의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보고 한탄하고 책망했잖아요?가나안 땅으로 귀환한 유대인들과 이런 성도들의 삶이 똑같은 것입니다.

삶에는 항상 해결해야 할 문제 투성입니다.

먹고 사는 게 급하고 이 땅에 내 집을 세우는 문제가 언제나 더 다급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통치하실 믿음의 성곽을 세우는 건 늘 지체되는 것이죠.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져 있지만 내가 살 도시의 성벽은 두텁게 세웠을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나와 내 가족들이 살아야 하니까.

그들은 행복하게 잘 살았을까요?

하나니가 보고한 귀환자들의 형편이 어떻습니까?

포로에서 면하고 돌아가 생활하는 사람들이 각 지방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너진 도성을 방치한 채 무능하게 살아가는 포로난민 취급을 받는 것이죠.

이게 진실입니다.

현실에 밀려 견고한 믿음을 세우지 못하면 온갖 나쁜 것들은 막을 도리 없이 우리 삶을 넘나들 것입니다.

단지 구원받은 것만으로 모든 삶이 저절로 형통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믿음을 굳게 세우며 생활을 돌봐야 둘 다 무너지지 않습니다.

 

3.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믿음의 성벽을 세울 수 있을까요?

1) 현실과 일치 된 믿음만이 견고한 성벽이 됩니다.

느헤미야는 수산성에서 부족할 것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면 나오지만 재산도 상당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의 삶을 조종하는 핸들은 현실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왜 연고자도 없는 예루살렘 형편을 묻고 황폐한 모습에 슬퍼하겠습니까?

예루살렘은 느헤미야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이고 하나님을 상징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현실적으로 보장 된 삶을 내려놓고 믿음의 땅인 폐허가 된 예루살렘으로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위해 지금 안정된 직장을 두고 그럴 수가 있을까요?

아마도 그러기 힘들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가 믿음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현실이 믿음보다 더 중요했다면 아마 교회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현실과 믿음의 무게를 뒤집을 수 있는 것은 매순간 우리가 영생을 살고 있다는 인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미 영생에 진입해 있는 것이잖아요?

요한사도는 너희에게 이미 영생이 있는 것을 알라고 했습니다.

물론 육체의 죽음이라는 한 지점을 통과하겠지만 이미 영원한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삶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할 때 이 땅에서의 시간들은 모세의 시편에서처럼 밤의 한 경점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이 땅의 삶은 소중합니다.

소중하기 때문에 모든 순간을 더욱 영생과 결부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도 직업도 하루하루의 시간도 이것이 영원한 미래에서도 중요할까를 생각하며 현실을 살아갈 때 현실과 믿음이 점점 일치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런 신앙의 인식을 강하게 하는 것은 훈련입니다.

기도와 말씀의 훈련이죠.

느헤미야의 기도를 보면 모세의 율법서와 이미 기록된 일부 성경들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은 재미없고,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종교의 경전이 아닙니다.

성경의 말씀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감동을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으로 지금 우리에게 또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시편119편을 보면 말씀이 우리를 얼마나 강하게 바른 길로 이끄는지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고상하게 하고 지혜롭게 해줍니다.

칠순 노인 성도라 해도 성경을 늘 읽고 성경을 가까이 하는 분들을 보면 지혜롭고 총명합니다.

바뻐서 성경을 펴지 못했던 우리 성도님들, 다시 한번 강력하게 권합니다.

성경을 펴십시오.

그럴 때 우리 믿음의 모호함이 걷히고 현실로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또 느헤미야는 문제를 깨닫자 즉각 기도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현실적으로 해결방안을 찾아 헤매지 깊이 기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일상의 작은 문제조차도 기도를 방해합니다.

지난 주 기도하기 전 물 한잔을 뜨러 주방으로 갔다가 온수기가 고장 나 뜨거운 물이 안 나오는 걸 발견했습니다.

일단 물을 떠서 들고 자리에 앉았는데, 생각이 어디로 먼저 가겠습니까?

왜 온수가 안 나오지?, 온수기 AS를 불러야 하나, 이번에 싱크대 교체하신 분을 불러야 하나 이런 생각이 계속 머리 속에서 맴돌더군요.

문제가 생기면 가장 완전한 해결법은 오늘 느헤미야처럼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위태할 때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은 평소에 기도한 경험이 없고, 기도 응답에 대한 체험이 없고, 기도 훈련이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매일 교회와 성도님들을 위한 중보와 저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거의 매일 힘듭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재미없는 걸 반복하는 게 제일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운동을 못하는 거잖아요?

신앙은 저절로 되는 단계까지, 적어도 억지로 시작할 수 있는 정도까지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기 시작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면 어느덧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지혜를 얻게 되고, 평안과 확신도 얻게 됩니다.

매일 기도로 믿음의 성벽을 세워 악의 세력을 막아내고 승리하도록 훈련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하루하루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이 곧 믿음의 방벽이 됩니다.

평범한 나날이 무너지면 믿음도 무너지기 쉽습니다.

11절을 보면 느헤미야가 술관원이 되었다고 하죠.

술상무 정도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왕의 의전을 살피고 왕의 안전을 책임지는 최측근이 술관원입니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느헤미야가 어떻게 살았을 것 같습니까?

자신의 인생을 위해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준비하며 성실히 살았을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간 사람들, 잘못한 것도 잘 드러나죠.

사람들은 그걸 보며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성공한 사람들, 돈 번 사람들, 높은 지위와 부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들 단지 금수저라서 그런 자리를 획득한 것이 아닙니다.

피나는 노력 없이 어슬렁거리다 그런 게 얻어 걸리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인정받을 만큼 실력을 길러가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일입니다.

내 분야에 당당할 만큼 전문성을 갖춰야 합니다.

세상을 망할 것, 나쁜 것으로만 여기고 세상일이나 직업에서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인격에는 선과 악 외에 중립이 없지만 돈과 자연을 포함한 이 세상은 중립적입니다.

어떤 사람, 어떤 인격체가 이용하냐에 따라 선하게도 쓰이고 악하게도 쓰이는 것입니다.

실력과 재능과 기술도 마찬가지죠.

모든 의사들이 존경하는 의사 순위에서 부동의 1위는 장기려박사입니다.

그의 생애를 보면 평생 하나님의 뜻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아름답게 의술을 베푼 성도가 한 사람 보입니다.

장박사님은 월남하기 전에 김일성을 치료했던 권위자였습니다.

탄탄한 장래가 보장되었지만 신앙의 자유를 위해 월남한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병원을 세웠습니다.

장박사님이 아니면 치료도 못 받고 죽었을 사람이 부지기수였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치료비가 없는 사람에게는 슬그머니 뒷 문을 열어주곤했다고 합니다.

처방전에다 영양실조니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라고 써서 간호사에게 준 적도 있습니다.

성도들이 얼마만큼 세상에 빛처럼 소금처럼 침투해서 영향력을 끼칠지엔 제한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영광도 믿음의 성벽도 어느날 로또처럼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하루하루 믿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은 반드시 우리 인생에 아름다운 성벽이 될 것입니다.

4) 이렇게 우리 믿음의 성벽이 견고해져 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무너진 하나님나라의 성벽을 세우도록 인도하십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예루살렘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꾸 그 문제에 관심이 생기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13절 기억하시죠?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저도 그랬습니다.

개척교회는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런 것 다 소용없습니다.

어느 날 심중에 교회나 개척해 볼까?’ 이런 생각이 훅 들어오는 데 어떡하겠어요?

하나님이 우리 안에 진로에 대한 소원,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원, 그렇게 소원을 불어 넣어 주십니다.

아주 불현 듯, 사랑스럽게, 달콤하게 그런 생각이 시작됩니다.

처음엔 교회 오고 싶다는 정도의 소원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다 점점 믿음의 성장에 대한 소원을 주시고, 교회와 성도들을 세우기 위한 소원을 주실 것입니다.

그때 그 소원을 밀쳐 버리지 말고 느헤미야처럼 따르는 것이 우리의 더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물론 따르기까지에는 갈등도 있고 편안한 삶이 유혹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느헤미야가 소원을 무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냥 수산성에서 산해진미를 먹으며 높은 사람들과 어울려 편안한 삶을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원을 따르지 못한 죄책감과 후회 속에서 괴로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왕의 마음이 변심해서 한직으로 내쳐져 실패감에 젖어 우울한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이 자꾸 신경이 쓰이고 마음에서 떠나지 않으면 순종할만한 믿음의 단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당장 힘들 것 같고, 안락한 현실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한다면 포기한 것 이상 더 충만히 채워주시는 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인생이 그렇게 바뀌잖아요?그리고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을 스스로 기록해서 우리에게 전해 주며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도 자신을 위해 견고하고 거룩한 믿음의 성을 세우시오. 그리고 그 믿음으로 나처럼 하나님나라를 위한 성을 세우시오

 

말씀을 마칩니다.

포로 귀환이 시작되고 90년이 지난 느헤미야에 이르러서야 성전과 거룩한 도성과 거룩한 백성들이 다 구비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라면 고레스왕을 감동시키셨을 때, 일차 귀환자들이 믿음으로 담대히 밀어붙였다면 일찍 이뤄졌을 일입니다.

그랬다면 오랫동안 무너진 수도 하나를 재건 못하는 난민 취급을 받으며 멸시당하며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의 체질이 약할 때 삶이 형통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형통이 삶의 형통입니다.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하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그 때에 내가 왕의 술 관원이 되었느니라

느헤미야가 언제 술 관원이 되었다고 합니까?

원어대로 보면 그렇게 형통하길 기도하였더니, ‘그렇기에내가 왕의 술관원이 되었다고 해석이 됩니다.

형통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기도로 모든 것을 시작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힘있는 믿음의 삶을 세우고, 매일 인도하시는 대로 사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기쁘게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