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애굽기34장29절-35절 (모세 얼굴의 광채)

남수연 2016. 6. 14. 17:45

 

미켈란젤로의 걸작 중에 모세상이 있습니다.

대리석을 쪼아 만든 이 작품을 보면 미켈란젤로를 왜 천재 조각가라고 하는지 저절로 인정이 됩니다.

긴 수염에, 한 손에 십계명 돌판을 들고, 뚫어지게 한 곳을 응시하는 모세상을 보고 있노라면 모세가 살아서 벌떡 일어날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실제 미켈란젤로가 이 작품을 만든 뒤 이 석상의 무릎을 망치로 치며 왜 아무 말이 없냐며 소리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놀라운 모세를 탄생시켰지만 생명이 없는 모세상을 보고 인간 작가의 한계를 느꼈던 것이죠.

그래서 석상의 무릎 쪽에 그 망치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상에는 희한한 부분이 있습니다.

모세의 머리에 난 두 개의 뿔입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하나님의 종인 모세가 왜 마귀처럼 뿔을 달고 있냐고 묻습니다.

그 이유의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시내산에서 사십일을 하나님 앞에서 대면하고 내려온 모세의 얼굴 피부에 사람들이 두려워 할 만큼 기이하고 강력한 광채가 났다고 하죠.

본래 히브리어로 기록된 성경을 번역할 때 이 광채라는 단어가 이란 단어와 비슷해서 라틴어 성경에 모세에게 뿔이났다로 번역한 것입니다.

그래서 뿔달린 모세가 탄생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 모세의 광채를 둘러싼 의미를 나누려고 합니다.

광채와 뿔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고대에서 뿔은 권위의 상징이었고, 성경에서도 종종 뿔을 위엄과 권력으로 표현합니다.

사무엘서2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라고 합니다.

또 시편 9210절을 보면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라고 합니다.

즉 모세의 얼굴에서 힘있게 뿜어져 나오는 신비한 광채는 단순한 빛이 아니라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뿔과 같다는 것이죠.

그래서 라틴어 성경에서 광채를 의도적으로 뿔로 번역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광채이건 뿔이건 간에 하나님을 대면했던 모세의 얼굴에 인간세계에는 전혀 없었던 하나님의 신비한 영광스러움이 묻어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서 가까이 하지 못할 정도의 빛을 뿜어내는 모세의 모습이 얼마나 굉장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신약 성경에서 이 빛이 우리에게도 있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46장을 보면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바울사도가 모세의 광채를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여 알게 됨으로 빛을 가진 것처럼 빛이 있는 데, 얼굴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영광스런 하나님을 아는 빛을 우리가 갖게 되었냐하면 예수님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면 하나님도 모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은 세상은 어두움에 처해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기 때문에 눈을 뜨고 사는 것 같지만 사실 더듬으며 사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을 아는 빛이 있으면 내세와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눈을 뜨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세와 이 땅에서의 인도하심과 우리 자신이 밝히 보이십니까?

세상엔 눈 뜬 사람과 아직 소경인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이 빛을 받은 것이야말로 오늘 모세처럼 성도의 뿔이고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받은 모세의 권위에 백성들은 가까이 오기도 두려워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눈에 모세가 과거의 모세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래 이들에겐 모세에 대해서 처음부터 탐탁치 않은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노예 공동체 출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우리가 알다시피 바로의 영아살해 정책을 피해 부모가 바구니에 담아 나일강에 띄운 것을 바로 공주가 발견하고 양자를 삼지 않았습니까?

왕궁에서 40년을 살았고, 그 이후로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자기 백성과 함께 수모를 당한 적도 없는 그런 모세가 난데없이 하나님의 전령이 되어 나타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공동체에도 장로가 있었고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굴러들어 온 돌이 박힌 돌을 뺀 겪이죠.

그래서 모세가 이 민족을 이끌기가 더 어려웠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야여정에서도 걸핏하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모세를 돌로 칠 태세였잖아요.

본문의 앞에 보면 모세가 이미 일차적으로 시내산에 올라가 사십일을 보내고 십계명 돌판을 받아 내려왔습니다.

그 때 이 사람들이 불타는 산 가운데로 들어간 모세가 죽은 줄 알고 아론에게 금송아지를 만들라며 이렇게 말하죠.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모세가 없어졌으니 잘 됐다, 이제 우리끼리 하자는 것입니다.

더구나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마시고 뛰어놀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에게 딱 걸리고 난 뒤에도 그들이 여전히 방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가진 모세는 그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세상을 이길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면 뭐가 단단히 잘못 된 것입니다.

며칠 전 실손보험을 타내려고 가짜 환자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뉴스가 나왔죠.

거기서 가짜 환자의 녹취 음성이 나오는데 얼굴이 화끈 했습니다.

나는 사고 났다 하고 입원했어. 저녁 8, 9시 되면 집에 가서 자고, 교회 갔다가 아침 10시 돼서 병원으로 다시 와.’

교회가 얼마나 사기 치는 집단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개인적으로 사회생활에서 늘 무시당하고 호구로 보인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피고 말씀대로 지키고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악한 사람이나 못된 직장상사라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살아가면 사람들도 저 사람 뒤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느낌을 은연 중에 안다니까요.

몇 년 전 북한 선교와 탈북자 사역을 하던 케네스 0선교사님이 북한에 들어갔다 붙잡혀 간첩행위로 억류되었습니다.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고 강제 노동을 했는데 2년 만에 풀려났죠.

몇 달 만에 몸무게가 27킬로그램이나 빠져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잘 먹고 살 때문에 걱정하는 것도 사실 복이죠.

0선교사님이 죽어서나 나올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감시원들이 달라붙어 숨 쉴 틈도 주지 않더니 날이 갈수록 0선교사님이 하는 일에 참견도 하지 않더라고 합니다.

보던 안 보던 분명하게 일하고 뭔가 다른 점을 점점 느끼게 되었던 것이죠.

0선교님께 조용히 찾아와 정말 하나님이 계시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석방 될 즈음에 한 간수가 우리는 간수고 당신은 죄수인데 왜 당신이 더 행복해 보이냐고 묻더랍니다.

성도들은 멸시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스스로 예수님을 닮아 낮아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매일 앉아서 삶을 의논하고 조언을 구하고 지혜를 받아 삶을 경영하는 사람은 낮은 지위에 처해도 결코 그 권위를 잃지 않습니다.

대단하고 큰일을 하는 사람만 위대한 게 아닙니다.

평범한 작은 우리의 삶도 예수님이 이끄신다면 작아도 값나가는 보석같이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 있고 빛나는 삶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매일 무엇을 생각하고 누구와 대면하냐에 따라 변합니다.

무신론자이며 만들어진 신이란 책을 쓴 리차드 도킨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틀림없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 말고 인생을 즐기십시오.’

그의 말대로 인생을 즐긴 사람은 삶에서 인격에서 세속이 묻어날 뿐입니다.

사람들도 다 알고 속물이라고 하잖아요?

창조주의 거룩하고 빛나는 영광에서 등을 돌린 사람들은 아무리 배우고 치장해도 세속에 쩔은 땟국물이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기업인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그들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대기업의 총수가 비리에 연루되어 마스크를 차고 휠체어에 앉아 검찰 조사를 받으러 들어가는 모습에서 영광은커녕 비루한 인간의 정체를 볼 뿐입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오히려 그에 비해 빈곤하기 짝이 없는 영혼이 더 부각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가진 것들을 사람에게 줄 수밖에 없습니다.

탐욕과 암투와 비리와 부정과 오만과 고집과 음란과 끝없는 불만족이죠.

세상이 결코 줄 수 없는 만족과 존귀와 거룩한 뿔은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가까이 나오는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앉아 조용히 나를 아뢰고 말씀에 순종할 때 나날이 우리의 영광의 뿔을 높여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와 자녀들이 이런 사람들이 되도록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삶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문에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왜 하나님을 대면했던 첫 번째 사십일 때는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없었냐는 것입니다.

사십일이 부족해서 두 번째 사십일을 더해서 팔십일을 하나님과 대면해야 영광의 광채가 나는 것일까요?

이런 사실에 의문을 갖지 않으면 오늘 성경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으로 가까이 간다고 해서 무조건 그 영광이 전이되는 것은 아닙니다.

욥기에 보면 심지어 사탄도 하나님 앞에서 대화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탄도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야 되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첫 번 째 사십일과 두 번째 사십일의 차이가 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두 사십일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냐는 것이죠.

그 사이에 바로 금송아지 숭배 사건이 있었고 첫 번째 주셨던 십계명 돌판이 깨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불과 한 달 전에 계약했던 계명을 어기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기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의 언약은 깨지고 무효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금송아지 앞에서 먹고 뛰놀며 애굽에서 배운 대로 문란한 제사를 드리는 그들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고 불같이 분노합니다.

하나님이 친수로 직접 써 주신 십계명 돌판을 집어 던져서 깨뜨려 버릴 정도로 모세가 절망감으로 분노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하나님 앞에서 언약을 맺고 율법을 들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보란 듯이 등을 돌려 타락한 삶으로 돌아갑니까?

그야말로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배신한 것입니다.

모세는 아마도 시내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엄청난 영광과 권능과 실체를 본 이스라엘이 이제 자기들의 약속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리라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광란의 모습을 보고 이 백성이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을거라는 사실에 완전히 절망한 것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알잖아요.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킬 수 가 없으니 십계명 돌판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집어던진 것이죠.

그런데 모세가 여기서 달라진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을 향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서서 중재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3232절에 보면 이렇게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이들을 버리시려거든 자기의 이름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죄의 본성을 따르는 인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았고 그래도 그들을 구원해 내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런 죄인인 것을 모르셨겠어요?

우리가 죄인인 걸 모르셨겠어요?

아니예요, 죄인인 줄 알면서도 하나님이 구원하려 하신거예요.

그런데 그 사이에는 누가 필요해요?

중보자가 필요한 거예요. 그 죄를 막아 줄 수 있는.

그런데 이 백성의 죄의 실상을 모세 혼자 깨달았은 것입니다.

동역자였던 아론도 우상숭배의 죄에 가담했잖아요?그러니 죄를 깨달은 사람이 빌어야지 누가 죄를 빌겠습니까?

그 역할을 모세가 자청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의지를 다해서 전력으로 범죄하는 어쩔 수 없는 인간, 그리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 그 죄를 대신 빌 중재자가 필요하신 하나님, 이게 바로 예수님의 속죄와 중보의 십자가입니다.

모세는 나중에 백성들 앞에서 간곡하게 말합니다.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내 말을 안 들어 축복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 중보자인 모세는 얼굴에 광채가 남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했지만 이후에 하나님이 준비하신 완벽한 중재자가 오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백성들은 바로 모세와 같은 그 선지자를 기다리잖아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들 사이에 많은 술렁임이 있었는데 그 중에 저가 그 선지자가 아니냐 그런 말이 바로 이 뜻입니다.

메시야, 그리스도, 다윗의 자손, 그 선지자 이것이 다 모세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백성들을 중보해 줄 완벽한 중재자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말들입니다.

성경에서 우리가 계속해서 발견해야 할 것, 그리고 어떤 관점을 갖고 성경을 읽어야 하냐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기록한 것이니라.

그러니까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구약성경에서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그걸 통해 중보자이고 속죄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와 이미지들을 계속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만나야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걸 모르면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갑자기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데 왜 죽으시냐는 겁니다.

구약성경이 그러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계속해서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그 걸 모르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상한 사건일 뿐입니다.

 

모세가 오늘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를 가진 것은 단지 하나님을 마주 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은 무슨 빛나는 광선 검이나 하나님을 돋보이게 하는 효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름답고 인자와 자비와 사랑과 오래참으심과 거룩과 권능과 위엄에 가득 찬 신성 자체이고 그 인격이 한없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영광을 가졌다는 것은 단순히 마주보고 있어서 물든 것, 이염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자신이 동일하게 갖게 되었을 때 영광의 형상을 닮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형상,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 데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배우고 주님의 성품을 아는 것으로 주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방황하는 자녀를 보고 눈물로 기도해 본 사람만 방탕한 죄인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압니다.

한 영혼이 구원받기를 위해 마음이 썩어 본 사람만이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예수님의 상한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아들의 형상을 닮게 하시기 위해서라고 했지 세상을 닮은 자녀를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힘써 주님을 배우고 행하는 자녀가 되어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희생의 모습이 점점 나타나야 맞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고집과 권위와 교만만 늘어 가면 단단히 잘못된 것이죠.

하나님 앞에 날마다 고개를 숙이고 말씀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알 뿐 아니라 힘써 순종함으로 날마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광채를 가진 모세의 행동입니다.

33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다음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35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나중에 모세의 얼굴의 광채만을 주시해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자연세계에서 영적인 현상이나 경이로운 분위기를 감지하면 사람들은 빠져듭니다.

자연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두렵고 신비한 것이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 사람은 하나님을 떠올려야 하는 데 그 자체를 그냥 우상으로 만들어 복을 빌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우상이 존경스러워서 섬기는 게 아닙니다.

자기의 복을 위해 섬기는 것이죠.

장엄하고 신비한 일출을 보면 거기에 대고 빌잖아요.

별똥별이 순식간에 떨어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사람들은 복을 빌잖아요?이미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경력이 있는 이 백성들은 곧 모세를 숭배할 태세였습니다.

금보다 더 빛나는 모세의 위력에 대고 빌려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가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우상숭배의 요소가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는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고 그 선하심으로 인해 스스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에 섬기는 것입니다.

이게 비슷한 것 같지만 다른거예요.

복을 섬기면 기복주의고 우리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깁니다.

모세가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이유는 백성들이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주목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의 얼굴에 비추인 하나님의 영광의 작은 편린을 모세의 특별함으로 볼까봐 가려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유일하게 섬겨야 할 경이로우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본체셨지만 인간의 육체로 철저하게 자신의 영광을 가리고 이 땅에서 사셨습니다.

수많은 기적과 착한 일을 하시고 항상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빛을 받았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교회에 나와 얻은 종교적 아이템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치장하고 과시합니다.

기도를 많이 한다는 것으로, 봉사를 많이 한다는 것으로, 성경을 많이 읽은 것으로, 영적 현상을 경험했다는 것으로, 결국 자기를 높이는 것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입니다.

아차 하는 순간 우리는 이런 죄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죄의 본질에 대해 계속해서 들어야 하고 주일에는 더구나 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죄 중에서 한 주간을 살았기 때문이죠.

죄에 대한 회개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는다면 설교가 변질된 것입니다.

우리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들이 아니잖아요.

매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와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반성하고 예수님의 속죄를 의지하고 깨끗해져야 비로서 그 심령에 하나님이 축복해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복된 것입니다.

죄를 진탕 짓고 왔는데 아무리 축원합니다. 복을 받을지어다남발해도 속으로는 그게 믿어지지 않습니다.

양심이 있는 것이죠.

내가 하나님을 믿는데도 왜 이런 저런 힘든 일들만 생기고 마음도 편치 않고 그렇습니까?환경을 통한 우리 마음의 연단이기도 하지만 복을 받을 만큼 회개한 상태가 안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겨우 일용할 양식을 주고 근근이 살아갈 힘만 주시는 것이죠.

그러나 힘들 때 우리가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 때 우리 영혼이 착해지고 믿음이 연단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한테나 가족들에게 나쁜 일이 생길까봐 조바심하며 사는 것은 믿음도 약화시키고 겁이 많고 불안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아무렴 세상을 살면서 좋은 일만 있겠습니까?

우리 몸이 세월이 가도 한없이 건강하겠습니까?

그러면 왜 세상이라고 해요, 천국이라고 하지.

신앙생활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게 있다면 좋을 때 보다 나쁜 일이 있을 때 더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주변에 힘든 일이 없을 때 사람들은 늘어지고 나태해집니다.

잘되고 좋은 일이 많아지면 틀림없이 교만해집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하나님이 앞에 나와 회개하고 마음이 착해집니다.

그래서 시련이 있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 낮아지고 착해진 마음을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바울사도는 모세의 광채보다 더 좋은 광채를 우리가 가졌으니 곧 복음의 광채라고 해석합니다.

구약의 직분에도 그런 영광이 주어졌는데, 영원한 생명을 주는 복음을 맡은 우리의 직분이 그보다 얼마나 더 영광되겠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과 중보에 대해서 잘 정리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 앞에 나가 대면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점점 하나님을 알아가고 주님의 겸손과 존귀와 능력의 빛으로 덧입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삶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을 비추는 복된 삶이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6년6월12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