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WTe-fTBavSo&feature=youtu.be
<주일설교 영상>
나폴레옹은 ‘약속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은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힘들다는 뜻이겠죠.
우리는 다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잘 지킵니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우리가 가장 많이 깨는 약속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듯 그렇게 사람들에게 했다면 인간성 나쁜 사람으로 벌써 낙인이 찍혔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구원 여정에서 약속을 어김으로 언약이 파기 된 사건이 배경입니다.
십계명에 명시된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고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자연적인 인간에겐 절대 불가능하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그걸 보여줍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은 구원의 유일한 해답이신 예수그리스도께로 계속 역사를 이끌어 가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구원의 이치와 심오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매 주일 들어야 할 말씀이 이 구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안에 위로가 있고 세상을 살아갈 능력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한번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다시한번 생각하며 감사하는 시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1. 오늘 모세의 기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들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백성들은 두 달 여 만에 시내산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산 정상에 우레와 번개와 나팔소리 가운데 임재하신 장엄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대면합니다.
조상들에게 들어왔던 하나님의 영광을 난생 처음 멀리서나마 목격한 것이죠.
얼마나 신기하고 놀랍고 한편 두려웠겠습니까?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실패를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본 게 이스라엘사람들의 신앙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눈앞에서 더 한 기적을 본다고 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 자연적으로 출생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냥 어떤 신기한 걸 보았다, 대단한 신인가 보다 그 정도 인식 밖에는 못한다는 것이죠.
이스라엘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애굽에서 알았던 그런 많은 신 중 하나라는 의식을 넘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을 가나안땅의 수많은 우상신들 중 한 분으로 혼동하잖아요?
무속인들이 예수신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인식입니다.
어떤 무속인의 신당을 보니 마리아상도 있고 예수님상도 갖다 놓았더군요.
사람들이 종교는 다 똑같다 말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이런 상태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정국가로서의 불안한 출범식을 갖게 됩니다.
그 불안이 오늘 사건에서 현실이 된 것이죠.
하나님과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시내산에서 엄숙하게 조약을 체결합니다.
거기에도 보면 희생제물의 피가 언약의 증거물이 됩니다.
죄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역시 속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죠.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여기서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조약식에서 하나님은 선민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통치하는 국가로서의 법률을 주십니다.
십계명을 포함해 지킬만한 여러 가지 건전한 사회법을 지정해 주시죠.
그리고 나서 모세는 좀 더 자세한 하나님의 지시를 받기 위해 혼자 시내산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났고 모세는 산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밑에서 모세를 기다리던 이스라엘사람들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본문 앞 32장에서 모세의 형 대제사장 아론을 몰아붙여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게 합니다.
이 금송아지 신상에 제사를 지내고 먹고 마시고 춤추며 문란한 여흥에 취해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보았던 대로 하는 것이죠.
아무리 하나님의 두려운 영광을 보고 무서워 떨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했지만 이게 자연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오던 모세가 이 기가 막힌 광경을 보고 십계명 돌판을 집어 던져 깨뜨려 버립니다.
모세가 성질이 나빠서 집어 던진 게 아닙니다.
이 관계는 이미 끝났다는 뜻입니다.
계약이 깨졌는데, 계약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이 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사람들을 징계하시고 이들과 다시는 함께 하지 않으실 것을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들을 위해 중재하는 기도를 하게 된 것이죠.
2.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허망하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을까요?
이것은 반대로 우리 믿음과 구원의 신비함을 확실히 알게 합니다.
이들은 믿지 못했는데, 왜 우리는 믿게 되었냐는 거예요.
이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눈으로 보고도 이렇게 믿음에 실패했는 데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어지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약시대의 성도들과 비교해 볼 때 이들에겐 성령께서 개별적으로 임하시지 않았을 때입니다.
구약시대엔 하나님의 종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도 모세와 여호수아 같은 지도자들에게만 외적으로 성령이 임하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을 인지하기가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집트의 문명 속에서 살았잖아요?
이들은 뼛속까지 애굽 문명에 젖어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바르게 배우지도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 되기엔 이런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애굽이 친근하듯 사람들에겐 세상이 그렇습니다.
사람들에겐 이 세상이 현실적이지 하나님이 현실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윤우를 가르치는 게 어떤 성경공부보다 제일 어렵습니다.
윤우한테 하나님이 호랑이도 만드시고, 하마도 만드시고, 윤우도 만드시고.
그렇게 창세기 그림 성경을 가르치면 윤우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노아의 홍수에 대해 얘기하면 그 때 물고기는 살았냐 죽었냐 이런 걸 의심스럽게 물어 봅니다.
벌써 자기의 다섯살 인생에서 경험한 세상과 안 맞는다는 걸 느끼는 것이죠.
‘이게 다 무슨 소리지?’ 그런 심각한 표정을 짓습니다.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믿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정확히 내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이 믿어지는 것은 하나님이 해 놓으신 기적입니다.
성령이 만지시지 않으면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사람의 인위적인 조작으로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믿음을 주입시키려 한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이런 담백하고 밋밋한 설교를 계속 듣다가도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과정은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대로 그냥 믿을 뿐입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하나님께 대해 죽어있던 영을 신비하게 다시 되살려 주시는 것이죠.
다시, 창세기에서 아담을 만드신 뒤 숨을 불어 넣으셔서 생령이 되게 하신 상태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본래는 그렇게 성령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교제할 수 있는 영적인 존재로 만드셨잖아요?
아담의 범죄 이후 성령이 떠나셨기에 육체적 인간만이 남은 것이죠.
성령이 모든 사람에게서 떠났다는 것을 이미 창세기 6장3절에서 진술해 놓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죄로 인해 성령이 떠나셨기에 예수님이 오셔서 속죄해 주셔야만 다시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속죄와 성령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단계입니다.
성령님이 없으시니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새 영이 될 수도 없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실패는 그런 의미에서 예견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이런 한계를 모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시고 그걸 잘 지키게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인 것입니다.
가룟유다를 부르신 것도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는 제자로 부르지 않았어도 예수님 주변을 맴돌다 주님을 밀고했을지 모릅니다.
그에겐 예수님 곁에서 복음을 듣게 하는 것이 주님의 최선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거듭나게 하셔야 하나님을 알게 되지만, 그러기 전까지는 계속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을 따르는 게 최선인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이 성취 된 시대에 태어난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창조주신게 믿어지고 예수님이 구주가 되신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백성들은 그들이 진지하게 따랐다면 복이 되었을 계명을 그렇게 빨리 어기고 구원의 언약이 깨지기에 이른 것입니다.
3. 이 범죄하고 언약이 깨진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서 모세가 중재자로 나섭니다.
본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이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땅에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그들 중에 들어가셨다가는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신성이 한순간 이들을 진멸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지만 인간의 죄로 인해 멀리 계셔야 하는 하나님의 딜레마 같은 것이죠.
단,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때문에 이들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주기는 하신다고 합니다.
약속에 무성의한 이스라엘과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이렇게 다른 것을 잘 새겨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셨다면 하나님 편에서 깨실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들을 잘 붙드시길 축복드립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들을 위해 중재하며 뜻을 돌이킬 것을 이렇게 간구합니다.
12절, 주께서 내게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지 않으셨나이까
13절, 그렇다면 주의 길을 내게 보이시고 내게 주를 알려주시옵소서.
모세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강은 알겠지만 내용이 쏙 들어오는 문장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응답하신 내용을 보면 무엇을 구했는지 알 수 있겠죠.
14절에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이 대답을 보면 모세가 구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이스라엘을 이끌고 같이 가 주시는 것이었다는 걸 알 수 있죠.
‘나는 너희들과 같이 가지 않으시겠다’는 뜻을 돌이켜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요청에 하나님이 기다리셨다는 듯 너무 순순히 허락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가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사실은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시라는 것입니다.
왜 아니시겠습니까?
어떤 부모가 자녀와 함께 하는 걸 마다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싶으십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마음을 이미 알고 이런 간구를 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지 않는 가나안땅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라고 한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모세는 알고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의 궁중에서 왕자로서 40년, 미디안광야에서 목자로서 40년을 지냈잖아요?
애굽의 화려함 뒤에 숨은 암투와 권력의 허무, 광야의 쓸쓸함과 고독을 모세는 처절하게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셨을 때, 모세의 인생이 달라진 것이잖아요?
다시 그때로 돌아가는 삶은 상상도 못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전의 삶으로 절대 돌아가지 못합니다.
시험을 만나 잠시 교회를 떠났던 사람들도 결국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며 알게 된 나의 진정한 정체성과 생의 의미들을 어떻게 원점으로 돌리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겠습니까?
그렇게 되어 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이제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여정은 모세와 이스라엘처럼 까마득히 끝이 보이지 않는 광야 너머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내일 내 앞에 무슨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곳을 향해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가시면 두려울 게 없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평생 동행, 영원한 동행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함께 해 주실 것만 응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개역한글성경에는 내가 너를 편케 하리라 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올라가셔서 정복해야 할 모든 싸움을 함께 해 주실 뿐 아니라 우리를 편안하게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이렇게 수많은 좌절과 어려움과 죄악 속에서도 편안히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구한 것이 또 있습니다.
13절,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하나님은 이미 계약을 파기한 이 사람들은 내 백성이 아니라고 돌아서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죠.
그러나 모세는 이 범죄하고 버림받은 이백만 명이나 되는 무리들 앞에서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실 것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모세와 같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로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엔 중재자가 있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역할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왜 모세가 이들의 과오를 짊어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용서를 구해야 합니까?
나중에 모세가 이스라엘의 반역에 지쳐서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하죠.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지금 모세는 마치 이 백성을 자기가 밴 것처럼, 자기가 낳은 것처럼 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 모세가 이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백성을 모세에게 맡기셨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 백성을 모세가 맡아주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원치 않는 이런저런 짐을 지게 됩니다.
사람이든, 타고난 환경이든, 육체의 질고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든, 때로 평생 그 짐을 무겁게 지고 살아갑니다.
시편66편은 이렇게 우리가 짊어진 짐의 비밀을 풀어줍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시고, 은과 같이 단련하시기 위해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다는 것입니다.
평생 벗어 던지고 싶은 짐이라 할지라도 돌이켜 보면 그 짐이 우리를 정신차리고 앞만 보고 달려가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거센 물살이 흐르는 시내를 건널 땐 무거운 돌멩이를 메고 건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생의 짐들은 우리의 인격을 다루어 주고 이 세상을 정신 차리고 살게 하는 안전장치인 것입니다.
그래서 네 짐을 함부로 내려놓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젊은 나이에 많은 돈을 벌고 인기를 거머쥔 철없는 연예인들의 상상을 초월한 방탕한 모습이 얼마나 충격적입니까?
저들에게 부양할 가족이 있고, 생계를 위해 정신없이 일에 매달려 살아야 했다면 저렇게 인격이 무너지진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 무거운 짐을 지고 광야 40년을 이스라엘과 함께 떠돕니다.
그가 죽을 때 백이십세였지만 그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신명기는 기록합니다.
모세가 그 무거운 짐을 넉넉히 질 수 있도록 계속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이 짐을 지지 않았다면 그는 미디안광야에서 짐승을 유목하며 평생을 살았을 것입니다.
이백만명의 짐을 벗어 놓고 한적한 개인의 삶을 살았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주신 짐을 지고 살아간 모세의 빛나는 생애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이 짐을 지고 간구하는 것을 얼마나 기특하고 고맙게 생각하셨겠습니까?
자식이 가족을 위해 묵묵히 짐을 질 때 부모의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지는 모든 짐은 하나님께서 허락하고 지워주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짐들은 때로 우리를 노엽게 하고, 허리를 펴지 못하게 힘들고, 손발이 묶인 것처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짐을 우리에게 얹으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짐을 통해 우리 믿음과 인격을 단련하시며 점점 더 복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모세의 중재로 이스라엘은 첫 번째 실패의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다음 장에 보면 모세가 다시 하나님이 새겨주신 십계명 돌판을 받죠.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영원한 중보가 되셨기에 우리는 이스라엘백성들처럼 거듭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이 이 믿음 위에 세워지도록 늘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가족과 이웃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 지워주신 짐을 기꺼이 지시길 바랍니다.
질 수 있는 능력과 축복도 주실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헌신 하고 짐을 질 때, 복을 바라고 그걸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짐을 내가 져 주길 바라시는 걸 알기 때문에 짐을 지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특히 주의 나라를 위한 짐을 지게 하십니다.
모세와 같은 크고 무거운 짐은 아닐지라도 내가 활동하는 영역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라는 영적인 리더의 짐을 주십니다.
그 일을 충성되게 감당해 내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때 우리는 모든 수고를 보상받고 가장 큰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이렇게 예수님께 인정받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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