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홍해를 건너다 1 (출애굽기14장10절-16절)

남수연 2020. 7. 31. 01:11

https://www.youtube.com/watch?v=Ms5v1H3-NG4

<2020년7월26일 설교영상>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한 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행군합니다.

가장 빠른 길은 지중해를 따라 북쪽으로 난 블레셋사람의 길이었죠.

그런데 지난 주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막으셨습니다.

오히려 홍해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도록 방향을 정해 주셨죠.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서 어이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홍해 바다 앞에 여장을 푼 이스라엘 백성들이 뒤를 보니 애굽 군대가 추격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공포가 진중에 퍼지고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배신하실 수가 있습니까?분명히 더 좋은 길로 데려가실 줄 알았는데.

그러나 이날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모세가 홍해를 가른 이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없죠.

구급차가 지날 때 차들이 양쪽으로 바짝 붙어서 길을 내 주는 것을 모세의 기적, 홍해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홍해를 가르고 바다를 건넌 이 사건은 구원여정에 대한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기적, 의문이 많은 사건들은 구원의 중요한 이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귀를 열어 큰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1. 먼저 이 큰 기적이 가리키는 구원의 여정에 담긴 진리가 무엇일까 입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들을 다 구원의 원리에 맞춰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 자체 내에서 구원의 원리로 해석한다면 그것을 우선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삼천 오백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일이 지금 내게 실효성 있게 적용됩니다.

오늘 홍해를 가르고 2백 만 명의 이스라엘 민족이 건너간 사건을 신약성경 고린도전서10장2절에서 바울사도가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이 사건이 민족의 집단 세례라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여정에는 세례가 들어갑니다.

세례는 사람들이 정한 교회 전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신대로 하는 것입니다.

홍해를 세례로 보는 것은 교회 시대의 성도들이나 구약시대 성도들이나 반드시 세례가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세례가 무엇인지가 오늘 홍해를 건너게 하신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열쇠가 되는 것이죠.

오늘 홍해 도하사건이 단순히 갈 길이 없어서 바다를 열어서 건너게 하신 것은 아닐거잖아요?

다 중요한 뜻이 있어 이런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죠.

성경은 우리가 왜 세례를 받는지를 여러 가지 면에서 설명해 주십니다.

우선적으로 세례는 죄를 회개하는 행위입니다.

본래 세례는 강물에 완전히 잠겼다 다시 일어나는 침례 방식이었습니다.

이런 세례는 죄인으로 살던 내가 물 속에 잠겨 죽고,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나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그런 방법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옛사람이 죽었다는 뜻이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세례에 대해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구원의 과정 안에는 예수님만 죽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도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십니다.

많은 성도들이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세례를 통해 가르쳐주시는 성도의 삶을 벗어나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홍해 길로 인도하신 것은 옛사람의 죽음을 근접하게 체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너희는 죽어야 한다는 세례의 의미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죠.

홍해의 물보라를 온 몸에 맞으며 좌우에서 넘실대는 물기둥 사이를 황급히 걸어갈 때 누군들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실제로 그들이 홍해를 건넌 뒤 돌아보니 애굽의 군사들은 그 물에 휩쓸려 죽어 있었잖아요?내가 저 죽음의 바다를 건너 왔다는 것에 오싹했을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 홍해에 세례라는 구원의 단계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과 같은 홍해를 통과하며 세례의 의미를 우리와 똑같이 인식하게 하시려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기 전에 본성대로 살았던 옛사람이 죽는 것이 홍해이고 세례입니다.

홍해에서 올라오는 그 순간은 이전의 내가 아닌 새사람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신 것의 의미 중 하나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이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전에 없던 예수님의 생명과 예수님의 성향이 들어온 것이죠.

그리고 이젠 그 새생명을 따라 예수님의 성향을 키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성의 나쁜 죄를 죽이며 사는 것은 평생 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끊임없이 앞장 서려는 옛사람의 본성과 죄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옛사람을 죽이고 옛성향을 버리며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까울 게 아무 것도 없는데 말이죠.뭔가 손해보고 내 것이 빠져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그 악한 것들이 빠져 나간 자리를 하나님의 선한 것과 복된 것들로 채워주시지 않을거라면 왜 옛사람의 행실을 버리라고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광야길에 근심이 어리고, 슬픔이 오고, 뒤엉켜 풀기 어려워진 관계들로 괴로워지는 것은 아직도 옛사람이 앞장 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내 성질을 죽이고 죄의 본성을 부인할수록 과거의 슬픈 것들 대신 하나님의 희락과 평강이 우리를 가득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여전히 옛사람으로 살아가기에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출애굽 성도들은 옛사람을 버리는 데 광야 4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평생 입었던 죄와 세속의 옷은 어찌나 우리의 피부에 밀착되어 있는지 그걸 벗겨내기가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 옷은 오래될수록 벗기가 더 힘듭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 일찍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힘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기독교 언론사에서 교회에 다니는 중고생들 5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신앙생활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1위는 어머니였습니다.

32%가 신앙생활에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이 어머니라고 답했습니다.

목회자다, 아버지다 라고 답한 학생들은 15%정도 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되신 성도님들 이 사실을 묵직하게 받아들이셔야 할 것입니다.

결국 애굽에서 오래 살았던 어른들은 다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우리의 광야 인생도 똑같습니다.

홍해 이후의 삶에서 구원 백성으로 성숙해 가지 못한다면 평생 광야 훈련만 받다 끝나는 것이죠.

심지어 히브리서에서는 이들의 광야 40년 역사를 예로 들어 우리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히브리서 4장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홍해를 건넜지만 변화를 거부하며 불순종한 출애굽의 선민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2. 우리 인생에서 홍해와 같은 상황들이 여전히 일어나는 것은 바로 그것을 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를 배치하신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옛날과 같이 내 힘으로 꾸려가던 대로 살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힘은 오기, 경쟁심, 분노, 탐욕, 비교의식, 우월감, 인정욕구, 그런 것들이죠.

오늘도 내 앞에 홍해가 있는 것은 내가 다시 또 그 힘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시려는 것입니다.

어느새 앞장서 휘젓고 가던 다리가 거대한 홍해 앞에서 후들거려 맥없이 풀려 주저 앉게 하시는 것이죠.

빠져나갈 구멍이 있으면 내 옛사람은 또 살아서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쁜 버릇이 통하지 않는 코너로 몰아넣어 야코가 죽어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려는 것이죠.

사실 이렇게 큰 홍해 바다를 만나는 것은 특별한 상황입니다.

우리 삶에서 자주 일어나진 않아요.

대개 우리는 내 힘으로 통제 가능하고 해결 가능한 일들 속에서 살죠.

그래서 옛사람이 펄펄 살아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지난 주도 굳이 나를 굽히지 않고, 굳이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도 이렇게 살아서 나오셨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자꾸 우리 앞에 홍해를 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자면 매일의 삶이 영적으로는 홍해입니다.

훈련 된 성도일수록 이 작은 문제도 홍해라는 것을 빨리 깨닫습니다.

그래서 성장할수록 매일이 홍해 앞에서 있는 것처럼 근신하며 살게 되는 것이죠.

여기가 내가 죽어야 할 곳이라는 걸 아는 것입니다.

어디 고개를 쳐들고 내 힘으로 해보겠다고 어리석은 실패를 자초하겠습니까?

갈수록 하나님 말씀대로 혼신을 다해 나를 바꾸고 싶은 열망을 느끼며 조금씩 더 거룩한 성도가 되어가는 것이죠.

거룩과 올바른 인격도 훈련으로 강화되듯이, 불만과 불신과 짜증도 반복하면 훈련 효과가 있어 점점 강화됩니다.

출애굽 시작부터 이어지던 이스라엘의 불평과 원망은 점점 더 쎄게 홍해 앞에서 튀어 나옵니다.

11절,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고 끌고 와서 죽이려느냐

어떻게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합니까?

12절, 이럴 줄 알고 처음부터 우리가 애굽 사람이나 섬기며 산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스라엘은 광야 40년 동안 이렇게 옛 본성을 반복하며 남을 탓하고, 현실을 한탄하고, 신경질을 부립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가나안 땅을 정탐시키셨을 때 이들은 왜 이런 강한 가나안 부족과 싸워야 하냐며 신경질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내리신 처방은 40년 광야생활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할 때까지 훈련시키시고 인내하십니다.

우리는 조급하지만 하나님은 얼마든지 기다리십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스스로가 이것이 옳다 판단하고 자기의지로 결단하고 따르는 출발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앞이 막히고 힘들 때마다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 이유가 무엇일까요?그들은 가나안땅을 그저 애굽보다 조금 더 나은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그 정도 혜택이라고 생각한다면 신앙생활은 늘 갈등일 것입니다.

누군가의 권유로 혹은 교회를 나오면 뭐가 좀 낫지 않을까로 시작은 할 수 있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가지는 못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모세를 따라 억지로 끌려 나왔기 때문에 이미 예견된 것입니다.

사람을 억지로 끌고 데려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시죠?

예수님을 믿을 때 내 스스로 결단하는 시점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겠다, 예수님이 내 구주시고 나의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겠다, 이런 전인격의 결단을 하셨습니까?

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광스런 천국을 확신하고 나를 불행하게 했던 옛사람을 매일 죽이며 주님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 앞에 홍해를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홍해는 내 힘으로 건널 수 없습니다.

13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14절,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우리는 오늘 내가 선 곳이 홍해임을 알기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 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믿음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기도로 지혜와 용기를 얻어 내가 할 수 있는 평범한 일을 완벽하게 해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 보이지 않게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홍해와 같은 환경과, 우리를 뒤쫒는 어둠의 세력을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3. 그런데 홍해가 갈라지고 그 물보라 속을 통과했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왜 이후로도 끝없이 하나님을 의심했냐는 의문이 생깁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도와주셨다고 간증까지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적을 본다고 다 믿음과 신뢰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홍해의 기적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끝까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게 그걸 보여줍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권능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 데는 애굽 사람들을 심판하신 열 가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알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자하심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신인지, 마음을 바꾸고 떠나실지 어떻게 알겠냐는 것이죠.

이들의 의심은 광야 생활 내내 계속됩니다.

그 의심은 일이 터질 때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지 의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에도 나를 도와줄까’ 의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상대가 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을 보기까지는 그 진심을 믿지 않는경향이 있습니다.

자식들이 언제 부모를 믿게 됩니까?

돈이 많아서 척척 사줄 때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 부모 자신을 위해 써야 할 것을 포기할 때입니다.

우리가 어렵게 살던 시절엔 그런 부모님을 더 의지하고 신뢰했었습니다.

모든 걸 해 줄 능력이 있는 부모 밑에서 요즘 애들은 오히려 부모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내 부모가 나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자식의 마음은 언제나,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전에 삼시세끼라는 프로에서 차배우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딸을 낳아 키우며 살다보니까, 그래 쟤를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에덴동산의 아담도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지혜로워질까 봐 못 먹게 하는 거라는 사탄의 말을 더 믿었잖아요?

나를 위한 희생을 보기 전엔 사람들은 사랑을 의심합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을 누가 믿겠습니까?

신자들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고 신뢰하게 되려면 하나님의 희생까지 가봐야 압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희생인 십자가까지 가 봐야 비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출애굽의 여정을 시작으로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들을 이끌고 십자가 까지 가시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피를 뿌리는 언약식을 하고, 죄를 속죄하기 위한 제사법을 주시고, 유월절을 지키게 하시고.

그렇게 이스라엘을 이끌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까지 끌고 가시는 것이죠.

대개의 성도들은 그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홍해 앞에서 깨닫게 됩니다.

앞뒤가 막힌 막막한 순간, 답이 없는 좌절과 고통의 순간, 육체의 아픔으로 신음하는 순간 문득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떠오르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내가 살기 위해서 이렇게 힘든데,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시려고 저 고통을 견디며 죽으셨구나.

그 십자가가 사랑이라는 것에 눈물이 나고, 그 십자가의 주님을 붙잡으면 살 것 같은 힘을 얻어 무서운 홍해를 건너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모금씩 맛보며 점점 더 그 사랑을 믿고 안심하고 따르게 되는 것이죠.

그걸 모르면 출애굽 성도들처럼 하나님을 의심하고, 애굽 방식을 끝까지 못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도 없는 데, 그나마 내가 살던 방식까지 버리면 어떻게 될까 두려워 못 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늘 더 늦기 전에 애굽으로 돌아가야 하는게 아닌가 갈등 속에 모세에게 끌려 다녔듯이 오늘날 많은 성도들도 그런 것입니다.

‘교회를 더 다녀야 돼, 말아야 돼.’

하나님의 희생을 보기까지 열 가지 재앙도 홍해의 기적도 다 하나님이시니 당연한 것이고 우리를 데리고 나왔으니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신뢰관계가 아니면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이번에도 나를 도우실까 의심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마음, 나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수 있다는 십자가의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의 방황은 끝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이 속죄를 완성하셔야 하고 성령께서 우리에게 다시 오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광야 40년은 예수님이 왜 목숨을 버려 우리 죄를 속죄하고 성령을 보내주시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길이, 그 방법이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가셔서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을 확신하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홍해 앞에서의 상황은 내 힘으로 살아날 방법이 없게 만드신 것입니다.

차라리 우리 눈에 더 나아보이는 것은 지난 주 막으셨던 블레셋의 길일지 모릅니다.

그 길에선 적어도 칼이라도 한번 휘둘러보고, 도망갈 퇴로라도 열려 있었잖아요?

하나님을 따라와 보니 앞에는 홍해, 뒤에는 무장한 무적군대로 포위해 놓으신 것입니다.

이럴 때 생각해야 할 것은 이곳은 내가 죽어야 하는 곳이구나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려고 하시는 데 살 길을 자꾸 찾으면 홍해를 건너가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홍해를 향해 담대하게 기도의 손을 드십시오.

모세가 손을 들기 전까지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주를 향해 도움을 요청하며 손을 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

또 우리는 모세처럼 아직 연약한 믿음으로 홍해 앞에 서있는 이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해야 함을 배웁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정처 없이 흔들리는 내 자식들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연약한 성도 앞에서 이렇게 든든한 믿음의 중보자가가 될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홍해에선 배워야 할 게 아직 많습니다.

홍해의 기적은 과연 사실이었을까의 논쟁, 누군가를 시험에 빠트리게 하는 애굽 군대의 멸망, 왜 저들을 수장시키셨냐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다음 주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