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마라와 엘림 (출애굽기15장22절-27절)

남수연 2020. 8. 11. 22:32

https://www.youtube.com/watch?v=ZJ7z0GGb77g

 

지난 주 홍해의 기적을 통과한 이스라엘은 본격적인 광야로 진입합니다.

본문 앞 모세와 미리암의 노래를 보면 이스라엘백성들의 벅참이 느껴지죠.

이제 정말 지긋지긋한 종살이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더 이상 죽어라 일해서 주인에게 갖다 바치지 않아도 됩니다.

일하는 가축 취급을 받는 노예가 아닌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게 죄와 사망과 사탄의 지배에서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똑같습니다.

오늘은 홍해 건너 광야에서 첫 번째 만난 시련인 마라의 쓴 물과 위로의 장소 엘림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마라와 엘림이 반복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성도들의 구원 여정을 관찰 카메라로 보여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들을 보며 왜 내 인생에 마라와 엘림이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죠.

마라를 어떻게 통과할지, 하나님은 마라에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것을 잘 깨닫고 위로와 힘을 얻으시길 축복드립니다.

 

1. 이스라엘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던 마라의 샘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은 시내산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엄청난 기적의 현장을 통과한 만큼 모든 것이 잘 될거라는 기대치도 한껏 높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흘 길을 걷고 걸었는데 오아시스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급하게 챙겨온 식수가 바닥을 보이자 점점 이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고 흥얼거리던 노래소리는 한숨 소리도 바뀌어 갑니다.

큰 기대와 부푼 희망은 걱정으로 변하고 점점 불안이 엄습합니다.

이러다 우리 다 죽는 거 아냐?

기대가 실망으로 변할 때 사람 마음이 제일 힘들잖아요?

그 때 다행히 ‘마라’라는 오아시스를 발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의 분노가 폭발합니다.

그 물은 식수로 쓸 수 없는 수질이 아주 나쁜 쓴 물이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음식 중에 마라탕이라고 있죠?

거기서 말하는 마라는 ‘마비 될 정도로 맵다’는 뜻입니다.

오늘 나오는 마라는 맵다는 뜻이 아니라 히브리어로 ‘쓰다’라는 뜻입니다.

단지 입맛에만 쓴 게 아니라 쥐어짜는 고통을 말할 때도 씁니다.

룻기에서 나오미가 해외생활 중에 남편과 세 아들을 다 잃어버리죠.

모든 것을 잃고 베들레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동네 사람들에게 자기 이름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불러 달라 합니다.

마라가 그런 것입니다.

뼈아픈 고통입니다.

광야 첫 여정부터 마라를 만났다는 것은 세상 광야의 실태를 보여줍니다.

광야는 필요할 때 풍족히 공급해 주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라의 물을 일부러 쓴 물로 만드신 게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도처에 깔린 게 마라의 샘이잖아요?

뭔가 얻으려고 갔는데, 실망만 하게 되는 것이죠.

갈증을 없애려고 마셨는데 쓰디 쓴 물이 속을 다 휘젓고 아프게 하는 것이죠.

출애굽 성도들에게 광야 여정은 연출이 아니라 실제 생활입니다.

그들이 마라를 만난 상황은 우리의 삶에서 똑같이 일어납니다.

바닥나는 통장과 늘어가는 빚이 그런 것이죠.

행복을 기대하고 가정을 꾸렸지만 가정에서 가장 쓰디쓴 고통을 맛봅니다.

평생 성실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왜 내게 병마가 찾아옵니까?그렇게 희생했건만 보답은커녕 배신감을 맛보죠.

지난주도 이런 마라의 쓴 물을 만난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쓴 물을 여러 컵 들이켜고 아직도 속이 아프실지 모릅니다.

 

1) 마라에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 샘은 계획 된 교육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우연히 지나가다 만난 곳이 아닙니다.

출애굽 때부터 이들은 계속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고 있습니다.

광야 사흘 길을 걸었는데, 구름 기둥이 인도하지 않았다면 모두가 일사병과 탈진으로 한 나절도 못 걸어 죽었을 것입니다.

사막에서는 우리 몸에서 시간당 1리터의 물을 뺏긴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광야에서 40년을 생존한 것은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에 들어올 때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두려워 간담이 녹았던 것입니다.

오늘도 구름기둥이 없었다면 살아서 여기까지 올 수가 없는 것이죠.

엘리야도 이 광야를 가다 탈진해서 쓰러졌잖아요?

그러니까 분명히 구름기둥이 안전하게 보호하며 이리로 데려오신 것입니다.

안전하게, 그러나 나쁜 곳으로 데려다 놓으셨다니 좀 당황스럽죠?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아무리 쓰디 쓴 마라와 같다 해도 단지 운이 나빠서, 아니면 우연찮게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안 믿는 것은 하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서 성도들을 인도해 주시지 않는다면 양육비도 주지 않는 배드파더스와 뭐가 다르시겠어요?하나님이 실망스럽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인 마라의 샘으로 성도들을 데려오신 것은 큰 수업을 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 여정은 항상 배우는 것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야 했습니다.

24절을 보면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말했다고 합니다.

그냥 점잖게 몇 마디 한 게 아닙니다.

원문의 단어는 계속 원망했다는 뜻입니다.

기대가 무너지고 실망할 때, 생명의 위기를 느낄 때, 사람들은 속에 있는 쓴 물을 왈칵 토해 냅니다.

이들이 내뱉은 쓴 물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사흘 전엔 분명히 홍해의 기적을 보고 이젠 정말 하나님을 믿는 것 같았지만 마라를 만나니 거짓임이 드러납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실 것을 못 믿는 것입니다.

조금만 힘들면 ‘이제 광야에서 다 죽겠구나’ 겁먹고 히스테리를 부리고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나왔는데 위기를 만나게 하셨다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 화가 납니다.

사람 간에도 화가 쉽게 나면 신뢰감이 깨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구약의 성도들이나 신약의 성도들이나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원래 마라는 사람의 힘으로 그 쓴 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아시고 데려다 놓으신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때 하나님을 찾지 않거든요.

우리도 뭔가 마음에 불편한 게 있고 힘들어야 하나님 생각을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불가능인 마라에서 문제를 해결하시고 자신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정말 저 사람 어려운 일 좀 있으면 좋겠다, 하나님 찾게 그럴 때가 있다니까요.

마라는 할 수 없이라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우리를 유도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나왔다 해도 우리가 쉽게 믿음을 가진 게 아닙니다.

수많은 마라를 거치며 믿었다, 실망했다, 나갔다, 들어왔다를 얼마나 반복했습니까?

그러면서 신실하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조금씩 알아가며 믿게 된 것입니다.

마라에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우린 아마 하나님을 믿지 않았을 게 분명해요.

하나님은 모든 마라에서 신실하게 도와주셨습니다.

그러나 마라를 만났어도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그 물을 고쳐주십니다.

아니면 하나님 믿지 말라는 것과 똑같은 것이죠.

마라에서 늘 도우신 하나님을 알기에 이젠 아무리 쓴 마라를 만나도 원망하지 않고 견디며 주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김광해 권사님이 은혜자매가 림프종 진단을 받았을 때, 하나님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는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많은 마라의 샘을 지나며 결국 우리를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2) 또 하나님은 우리를 마라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하십니다.

이제 광야로 이들을 데려오신 하나님은 본격적으로 자기 백성으로 훈련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는 목적이 있으십니다.

물론 우리의 영의 아버지가 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모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자녀를 낳았으면 얘를 어떻게 키워야겠다, 이 장점을 살려서 앞으로 먹고 살 직업을 찾아줘야 겠다 그런 생각이 없는 부모는 없습니다.

내가 부자니까 평생 집에서 놀고 먹게 하겠다는 부모가 있습니까?

올바른 부자일수록 자식들 경제교육, 경영교육 더 혹독하게 시킵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신 것은 단지 가나안에 데려다 놓으시고 꿀이나 빨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평생 꿀을 빨며 편히 살 가나안땅을 기대했겠죠.

그렇게 이 땅의 육신에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구원의 목적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사회복지사가 아니시잖아요?

쌀 떨어지면 쌀 갖다 주시고, 병들면 약 갖다 주시고, 장사 잘되게 사람 몰아다 주시고 그게 하나님의 본분이시겠습니까?

그런 줄 알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섰다면 분명히 이 신앙의 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믿고 따라 나왔는데 마라의 쓴 물 앞에 데려다 놓으시잖아요?

하나님은 이 백성으로 거룩한 백성을 삼기 위해서 택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도 마찬가지죠.

데살로니가전서 4장3절,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에베소서 1장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우리가 단번에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어 거룩하게 된 것은 영적인 신분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육의 변화, 인격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고 아무 기대도 안 하신다면 우리가 화 날 일입니다.

옛날과 똑같이 우리를 더럽게 두신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죠.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변할 수 있는 게 능력입니다.

사람이 안 변하려 하고 못 변하잖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능력이 있으신데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데 마라가 필요합니다.

마라는 우리를 속상하게 하고 괴롭히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마라로 데려다 놓으시면 거기서 내 약점이 나타납니다.

내가 돈을 이렇게 좋아한 사람이었는지, 그렇게 질투심이 많은 사람인지, 남의 눈을 얼마나 의식하는지, 착한 일을 하지만 그 감춰진 동기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이 마라 앞에서만 드러납니다.

그런 나를 자꾸 봐야 내 속에 있는 죄가 미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환경이기도 하지만 힘들게 하는 누군가 사람을 통해서일 때가 많습니다.

힘든 환경도 사람들이 좋으면 이겨내기가 쉽죠.

처지도 기가 막힌 데 사람까지 기가 막힌 사람을 데려다 놓으시기에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기 위해 최적의 사람을 데려다 놓으십니다.

그 사람만 만나면 내 단점이 울컥 나오게 되는 사람이 우리의 마라입니다.

그래서 계속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나 환경은 나를 고칠 때까지 반복되고 지속됩니다.

번번히 그게 튀어나올 때, 그런 내가 점점 싫어져야 사람은 겨우 자기 단점을 고칠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품 중에 그래도 예수님의 성품이 희미하게 비치기 시작한 게 있다면 백프로 마라의 쓴 물을 수없이 들이키며 그렇게 된 것 아닌가요?

마라는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키시는 곳임을 알기에 이제 마라를 만나면 먼저 내가 뭘 고쳐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일이 전혀 없이 억울하게만 만나게 되는 마라는 거의 없다고 봅니다.

마라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많은 약점과 단점으로 나와 타인을 괴롭히며 살았을 게 분명합니다.

 

2.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마라의 샘물을 단물로 고쳐 주십니다.

마라가 계속 되면 우리는 다 거기서 죽습니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지 죽이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출애굽의 의미가 그렇듯이 죽은 영혼을 되살리시는 구원에 초점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마라의 몹쓸 쓴 물은 밖의 환경이 아니라 죄인 자신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모습을 대면한 것이죠.

25절에 나와 있듯이 쓴 물을 단 물로 고친 방법은 독특합니다.

모세가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십니다.

그 나무를 물에 던졌더니 쓴 물이 단물로 변하죠.

인간 안에 있는 사망의 상태, 죽음의 물이 바뀌려면 그 안에서 무엇을 바꿔서 되는 게 아닙니다.

밖에서 무언가 들어와야 하는 것이죠.

모든 수양하는 종교들의 한계가 이것입니다.

본성이 그대로 있는데 수련으로 다듬기만 하는 것이죠.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이 가리키신 그 나무를 생명나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라고 해석하는 데 동의합니다.

우리 안에 반드시 예수님이 들어오셔야만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영혼의 구원도 그렇고 마라와 같은 고통의 현실에서도 똑같습니다.

이미 썩은 물, 생명이 살 수 없는 쓴 물이 단물로 바뀌려면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출애굽 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 이스라엘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내리시는 모든 솔루션은 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만나도 예수님이시고, 반석을 쳐서 나온 물도 예수님이시고, 죄를 지어 불뱀에 물려 죽어갈 때 장대에 달린 놋뱀도 예수님이십니다.

좀 뒤에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 왕과 백성의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런데 그 뒤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올라간 동안에 이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것 아시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은 그걸로 끝났어야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들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때 모세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시나요?

모세가 금송아지를 태워 빻은 가루를 물에 뿌려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좀 이상한 행동이죠?

금을 아주 아주 곱게 분쇄하면 붉은 빛이 됩니다.

이들이 포도주 색 물을 마신 거예요.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보혈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라와 같이 생명이 없는 죄인의 영에 오늘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한 나무, 예수님을 던져 넣어야 생명이 살아납니다.

가영자매가 언제 묵상방에 이런 말을 올렸더군요.

‘진짜 복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삶 같아요.’

맞아요 정말 맞아요.

마라와 같이 쓰디 쓴 우리 인생도 예수님이 들어오시면 고쳐집니다.

나는 고침 받은 인생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성도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잘 모를 때 지나 온 과거의 쓴 고통과 아픔과 수치는 이제 잊어 버리세요.

그걸 고쳐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잖아요?

이 나무를 던져 넣고 뭐라고 하십니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니라

예수님이 오시면 다 회복시키시고 치료해 주십니다.

 

2) 그리고 삶의 마라에서 어떻게 도움을 얻을지를 모세가 보여줍니다.

오늘 마라의 샘을 만났을 때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고 모세 탓을 하며 원망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을 만난 모세는 다릅니다.

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한 사람은 원망하고, 한 사람은 기도합니다.

문제의 해결은 기도한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원망한 사람들은 문제에만 매달리고 누구 탓을 할지부터 찾아냅니다.

그들은 마라의 쓴 물을 해결할 방법을 얻지 못합니다.

모세는 사람이나 문제와 승부한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기도로 승부합니다.

기도 없이 문제와 맞서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과 실랑이부터 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세처럼 하는 게 우리에게 주신 해답입니다.

마라의 문제는 아무리 골똘히 생각하고 방법을 궁리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습니다.

밤새 온갖 궁리를 다하면서 왜 단 십분도 하나님께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문제와 씨름하기 전에 하나님과 기도의 씨름을 하면 문제를 더 빨리 해결하게 되는 것을 다 경험해 보셨잖아요?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물론 우리 사정을 아십니다.

마라로 데려오신 하나님이 그걸 모르시겠어요?

그래도 오늘 모세가 기도할 때 단물로 고치는 방법을 주신 걸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원인도 알게 하시고, 해결 방법과 지혜도 주십니다.

마라에서 우리는 기도를 배우고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문제를 벗어나면 우리는 대번에 기도부터 멀리하게 되잖아요?

마라에서 기도를 배우면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단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필요한 성도는 마라에서 기도를 배운 사람입니다.

 

4. 마라를 지나면 엘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라에서 한바탕 소동을 겪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엘림으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곳은 샘이 열두 개나 있고 종려나무가 칠십 그루나 있는 거대한 오아시스였습니다.

여기서 열둘이나 칠십 같은 숫자는 이스라엘 민족 이백만이 머물기에 충분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이 오아시스 곁에서 난생 처음 노동이 없고, 쫒김이 없고, 불안이 없는 행복을 느껴보았을 것입니다.

마라를 지나면 하나님은 엘림을 주십니다.

거기서 장막을 치게 하시죠.

얼마나 달콤하고 완벽한 휴식이고 안식이었겠습니까?

어느 순간에 보면 ‘그 쓴 물들은 다 어디로 갔지?’‘언제 내 곁에 이렇게 좋은 것들이 있고 내가 이걸 누리고 있지?’

그런 엘림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란이 고3의 마라도 곧 지나가고 엘림의 대학생활이 올 거예요.

은혜언니도 마라를 지나 엘림의 행복이 시작되고 있잖아요?

 

말씀을 마칩니다.

마라도 하나님이 인도하신 곳입니다.

사실 믿음과 인격의 좋은 것들은 마라에서 얻어집니다.

우리의 인생이 광야인지라 메마르고 평범한 나날을 계속 가면 점점 마음이 굳어지고 냉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마라를 만나 우리 삶에서 실망감을 느낄 때,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낄 때 믿음으로 돌이키게 유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고 완악해지고, 불안정해지고,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마라 앞에서 다시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마라를 고쳐주신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그러시잖아요?

내가 가르치는 율례를 잘 따르면 너희가 걱정하는 애굽의 모든 질병들을 주지 않겠다.

마라의 상황에서 염려에 빠지지 말고 생각하십시오.

염려하지 말고 구하라고 하신 말씀대로 오늘 모세처럼 즉각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정이 다 안 좋아 보일 때 우울감에 빠지지 말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의지와 믿음으로 할 수 있는 것을 순종하면 문제의 근원은 우리 주님께서 치료해 주시고 해결해 주십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인생이 마라 같을 때도 있고 엘림 같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림보다는 마라가 훨씬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또 돌이켜 보면 마라가 많아서 불행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마라에서 돌보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쓴 물은 결국 단 물로 변했었기 때문이죠.

우리를 마라와 엘림으로 인도하시며 점점 더 좋은 믿음의 사람, 인격의 사람으로 바꾸시며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광야인생을 잘 이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