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BA0XYVKk8nM&feature=youtu.be
코로나19의 상황이 좋지 않아 이번 주부터 다시 비대면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교회 중직자를 세우는 날인데 성도님들이 이 자리에 함께 참여하지 못해서 정말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실시간 영상예배로 함께 하시는 모든 성도님들도 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축하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광야시리즈 6탄으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지도자를 세우는 내용입니다.
지도자를 왜 세우시는지가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오늘 임직예배에 잘 맞고 주의 일을 위해 힘쓰는 모든 성도님들께도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오늘 본문은 광야 교회인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로 세워져 가고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하나님나라를 세워 가십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실 모세를 따라 애굽을 탈출하게 된 이스라엘은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상황 속으로 밀어 넣어진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생활은 매일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날들의 반복이었습니다.
한 달 뒤도, 일년 뒤도 달라질 게 없는 뻔한 생활인 것이죠.
그런데 얼떨결에 모세를 따라 나왔더니 홍해바다가 갈라지고, 하늘에서 양식이 우수수 내려오는 얼떨떨한 기적이 일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난감한 것은 이제부터는 이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었는데, 이전에 살던 애굽과는 완전히 다르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에서 받아먹고 사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사람 주인의 눈만 의식하고 살았는데, 구름기둥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눈을 늘 의식하며 사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애굽식으로 사는 게 더 편합니다.
성도들도 본성적으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삶과 광야의 삶이 눈에 띄게 다르듯이 세상을 따르던 삶과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공통적인 부분은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일을 하고, 알던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들을 위해 저녁을 준비하지만, 그 내면은 전혀 똑같지가 않죠.
겉은 비슷한 일상인데, 그 내용은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늘 재확인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애굽에서 살던 방식과 하나님 백성으로의 삶이 다르다는 것을 가장 확실히 인식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그것은 실생활을 규제하는 법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세상 국가에서 국민들의 의식 수준과 생활을 규정짓는 것도 법입니다.
본문 뒤 21장부터 23장까지를 보면 하나님이 아주 촘촘하게 생활 속 법규를 정해 주시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염소 새끼를 그 어미에 젖에 삶지 말라
사람들이 고기를 더 맛있고 부드럽게 해 먹으려고 우유에 삶는 것이죠.
새끼가 먹고 살았어야 할 그 어미의 젖으로 어린 새끼를 삶는다는 것이 둘 다에게 얼마나 측은한 일입니까?
하나님은 그런 것 못 보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애굽에서 상상도 못했을 생활의 규범을 주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의 단 벌 옷을 저당 잡았으면 밤에는 다시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그 옷이 없으면 그 사람은 밤에 덮고 잘 게 없지 않냐는 것입니다.
밤에 돌려주고 아침에 다시 돌려받고, 다시 밤에 돌려주고 아침에 다시 돌려 받고, 그렇게 이상한 법을 주시는 것이예요.
너 살만하면 그렇게 까지 가난한 사람을 모질게 대하지 말라는 것이죠.
나그네와 과부를 위해 밭모퉁이를 다 거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바닥에 떨어진 이삭까지 긁어 모아가는 게 세상 기업주들이잖아요?저는 이런 율례와 생활법 부분을 읽을 때마다 구절마다 하나님의 자비와 넓은 품이 느껴져서 너무 은혜를 받습니다.
이스라엘이 달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게 아닙니다.
율법의 통치를 받음으로 애굽 사람들과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생활을 지금 이스라엘이 시작하고 있는 것이죠.
모세가 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일이 있으면 내게로 오나니 내가 그 양쪽을 재판하여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알게 하나이다
재판을 통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생활에서 지켜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활법규에 보면 어떤 법은 지키지 않으면 돌에 맞아 죽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하나님의 법이 내 행동과 생활을 정말 규제하고 있나요?
대한민국 법에는 규제를 받으면서 하나님의 명령과 법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면 과연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인가 의문이죠.
광야교회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 백성으로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의 성도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예배와 봉사와 전도와 경건생활의 목적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고, 그런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배는 잘 드리지만 삶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상관없이 산다면 어떻게 하늘나라 시민이라고 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그게 아니라는 걸 더 잘 압니다.
오늘 광야 교회가 세워져 가는데 최초의 조직이 군사조직이 아니라 율법과 규례를 가르쳐 지키게 하는 조직이라는 게 의미심장하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면 전쟁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게 앞으로 있을 가나안 정복 전쟁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완벽하게 주신 지켜야 할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광야 교회에 주셨던 율법의 속뜻까지 이해하고 지킬 수 있는 게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명령들이죠.
신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법과 계명의 정신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법을 우리는 광야 이스라엘이 생활에서 지켜나갔듯이 그렇게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법을 지키는 데 실패했지만 우리는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예레미야서에서 신약성도들의 비밀을 계시해 주셨죠.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할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을 통해 오신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우리는 해 낼 수 가 있게 된 것입니다.
요즘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모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예배를 통해, 성경묵상을 통해 배우고 깨달은 말씀들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로 더 든든히 서 가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 이렇게 광야 교회를 하나님의 율법으로 세우는 것은 모세 혼자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마침 미디안 부족의 제사장이었던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내와 아들 둘을 데리고 모세를 찾아옵니다.
미디안 부족은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에게서 나온 부족이고 겐족속이라고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미디안 족속을 반은 좋게 반은 나쁘게 기록합니다.
뒤에 보면 미디안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기들의 종교축제에 초대해 큰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또 사사기 때 이스라엘을 약탈하고 괴롭혔던 민족이 미디안입니다.
반면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정착한 미디안 족속 사람들이 성경 도처에 나옵니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이 칭찬했던 레갑족속도 겐 족속입니다.
이드로가 미디안의 제사장인데 본문 앞에서 참된 개종을 하고 하나님을 예배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체적으로 볼 때 성경은 이드로를 긍정적인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지혜로운 이드로는 2백만 공동체의 문제를 오직 모세 혼자 판결하는 모습을 유심히 봅니다.
그리고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하는 것이 옳지 못하도다
왜 그렇습니까?18절에 이유를 말하죠.
너와 또 너와 함께 한 이 백성이 필경 기력이 쇠하리니 이 일이 네게 너무 중함이라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모세 혼자서 재판하고 율법을 가리키는 것은 역부족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해가 뜨기도 전에 장막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섰을 것입니다.
해가 질 때까지 쉬지 않고 소송을 해결하지만 밤이 되어 그냥 돌아가야 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는 언제 쉬고, 언제 자기 자신을 돌보겠습니까?이걸 보면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했는지를 알 수 있죠.
지금도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많은 사역자와 성도들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뜻을 위해 헌신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일반적인 기쁨들을 다른 사람처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해 아래서 수고하여 얻은 것을 가족들과 같이 단란하게 누리는 게 하나님이 주신 분깃이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주님을 더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더 차질 없이 잘 수행하기 위해 그 권리마저 드리는 헌신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그랬잖아요?
나도 베드로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니며 사역할 권리 있다, 그러나 복음을 위해 이 권리마저 주 예수께 다 드리고 싶다.
내가 충분히 누릴 권리가 있는 작은 것 하나를 주님을 위해 포기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클래식 성악곡 듣는 것을 좋아하는 데, 음악을 들으면 시간이 훌쩍 갑니다.
음악과 같은 예술도 결국 인간 심연의 슬픔을 끌어내는 것이잖아요?
사람이 다 마음에 슬픔이 있기에 거기 땡기는 것이죠.
결국 좋아하는 음악을 많이 듣는 것도, 성령 충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일부러 한동안씩은 음악을 스스로 금지합니다.
믿음의 최선을 위해 아주 작은 내 행복을 포기할 때 저는 하나님이 큰 헌신 때 만큼 기쁘게 축복하시는 걸 많이 느낍니다.
오래동안 믿음이 정체된 것 같으면 이런 것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헌신하고 있는지는 어느 정도 정해져 있잖아요?
그런데 이 부분, 여기까지는 내 특권이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철벽을 쳐 놓은 그 부분에서 조금이라도 믿음의 성장과 주님의 뜻을 위해 포기하는 것이 있다면 이제까지의 헌신 이상의 큰 기쁨과 활력소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멋지십니까?
모세가 하고 싶은 만큼 최대한 헌신하고 충성하도록 두시잖아요?그리고 넌지시 이드로를 보내셔서 이젠 됐다, 그만하면 내가 네 맘 충분히 알았다 그러시며 모세를 돌보시잖아요?
오래 신앙생활 하신 분들은 아마 그런 것 경험하셨을거예요.
누군가를 통해, 환경을 통해 살며시 짐을 덜어 주실 그런 때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충성을 정말 기쁘게 여기셨던 것 같습니다.
민수기25장을 보면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대적했을 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우리가 모세처럼 충성하지 못해도 작은 즐거움을 때로 참고 점점 더 주님을 따르는 것도 주님께서 인정하시고 귀히 여기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드로가 볼 때 모세도 백성도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인간 모세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가 있는 것이죠.
큰 집단이든 작은 집단이든 한 사람만의 헌신으로 이끌어 갈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작은 교회지만 저는 진짜 우리 성도님들이 없으시면 못합니다.
신약성경에서도 교회 일을 나누어 맡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사도행전에서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서도 이런 문제가 생기죠.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부흥되자 사도들이 바빠집니다.
몰려드는 사람들과 그들이 가져온 헌금으로 구제하는 일까지 하다 보니 한계가 있는 것이죠.
결국 구제에 틈이 생기며 사람들이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세우며 이렇게 말하죠.
6장3절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우리 성도님들이 다 스스로 맡을 일을 맡아서 하시기에 저는 약한 체력으로한 주간 기도하고 말씀 준비하며 지금까지 목회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모세의 문제의 대한 이드로의 처방도 똑같잖아요?19절, 너는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사건들을 하나님께 가져오며 그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쳐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나머지 일은 사람들과 분담하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율례와 법도를 연구해서 백성들이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가르치는 전체적인 조직을 총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 가운데 사람들을 뽑아 각자의 능력에 맞게 일을 분담시키라는 것입니다.
이드로가 가만히 보니까 이 재판이라는 게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하는 것이잖아요?각자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율법에 정해준 대로 하면 됩니다.
판단이 어려운 일들만 모세에게 가져가면 되는 것이죠.
이방인인 이드로가 기가 막히게 핵심을 꿰뚫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 내에서도 이드로가 제시한 사역의 분담이 잘 적용됩니다.
모든 봉사자들은 각각 하나님을 섬깁니다.
각자 자기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법에 근거해서 맡겨진 일을 할 때 교회 전체가 분열되지 않고 하나가 되어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광야 교회에 처음으로 조직된 것은 율법을 가르쳐 지킴으로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모든 조직과 봉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가르치고, 함께 지켜 예수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간다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것을 늘 염두에 두고 올바른 봉사자와 직분자들로 설 수 있으시길 축원드립니다.
3. 본문에서 이드로는 공동체의 지도자로 세울 사람들의 자격을 정확히 제시합니다.
21절,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라
‘능력 있는 사람’이 백성들을 인도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있는 사람이 누구냐면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1)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이드로의 이해가 기가 막힙니다.
이드로가 보기에 당대에 내노라 하는 능력자라면 누가 있을까요?애굽제국의 바로왕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이드로가 앞에서 바로왕을 패망시킨 하나님을 찬양하잖아요?
바로왕이 어쩌다 참패를 당하게 되었냐를 생각하면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사람,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세상을 다스리고 선악을 심판할 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적인 힘을 가졌어도 전쟁에 지는 사람입니다.
내 능력과 수완과 이루어 놓은 것들을 대단히 여기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곧 무능력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가만히 분별해 보십시오.
분명히 그 분들이 다 실력자이고 능력자라는 걸 보게 되지 않습니까?
2) 또 진실한 사람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신뢰할만 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가 신뢰할 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만이 사욕을 따르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의 나라를 위해 믿음직하게 일하는 것입니다.
3)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에 돌아 올 이익에 대해 속까지 초연한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 재판에서는 노골적으로 정의보다 돈이 판결을 좌우하잖아요?
돈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기에게 돌아 올 이익을 재빨리 계산합니다.
지도자들도 이런 문제들에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신앙을 지도함으로 성도들에게 얻게 될 이익에 은근히 마음을 두는 것이죠.
내가 기도해 줌으로, 말씀을 가르쳐 믿음을 이끌어 줌으로, 아낌없이 봉사함으로 뭔가 인정을 받고 이익을 얻을 것을 은근히 염두에 두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고 상벌을 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이런 시험을 물리치고 거룩한 주님의 교회를 세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하나님의 법과 말씀 위에 광야교회가 세워져 가듯이 우리도, 우리 교회도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과 말씀을 배우고 행하는 위에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충성되게 봉사하고 헌신한 성도님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직분자로 섬기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능력있는 새 직분자들을 세우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몸 된 우리교회가 더욱 아름답게 세워지고 온전해 지리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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