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시내산 언약 (출애굽기24장1절-11절)

남수연 2020. 9. 2. 01:20

www.youtube.com/watch?v=5GkyeJ28mMY

광야시리즈 일곱 번째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공식적인 계약, 언약식을 체결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의 복잡한 절차에는 구원에 대한 중요한 의미들이 당연히 담겨 있겠죠.

로마서와 히브리서 같은 성경은 우리가 구원 받는 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알려줍니다.

반면, 오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식은 그것을 눈으로 보여 주고 머리속에 각인되게 해 줍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구원의 골격들은 똑같은 것입니다.

오늘 마음속에 이 귀한 그림을 잘 카피해 놓으시기 바랍니다.

코로나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겠고 앞으로 인류가 또 어떤 종류의 위기를 만날지 예측하기가 무섭습니다.

과거에는 우리 믿음을 위해 누군가 떠 먹여 주었다면 앞으로는 각자 말씀을 먹고 생존해야 하는 환경이 되어 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구원의 중요한 골조가 더 단단히 세워질 것입니다.

가정에서 예배드리다 보니 집중하기에 좀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큰 은혜로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언약식의 진행과정과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에도 이 의미들이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언약식은 19장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19장의 말씀에서도 필요한 부분을 같이 볼 것입니다.

1.하나님이 어떤 내용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식을 갖게 되었나를 먼저 보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찾아오셨을 때 이들에게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것 같은, 그렇게 분명한 존재가 아니셨습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있는 신처럼 민족의 토속신 정도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세를 보내셔서 이들을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시는 과정에서 그나마 하나님이 어떤 신이신지를 인식하게 된 것이죠.

열가지 재앙으로 애굽을 심판하시고, 홍해를 가르시는 여타의 신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게 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철저히 보호해 주시고, 만나를 공급해 주시는 보호자 하나님도 알게 됩니다.

우리도 그동안 이들의 광야생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석 달을 광야에서 함께 하신 하나님이 시내산에 도착하자 본론을 꺼내시는 것입니다.

19장4절입니다.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이 정도면 내가 누구인지 너희가 알았을 것이라는 말씀이죠.

그러니 나와 언약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주실지를 분명하게 제시하십니다.

(5,6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정확한 언약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을 잘 듣고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는 것이죠.

그러면 하나님은 이들의 하나님으로 통치해 주시고 제사장나라로 삼으시고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이스라엘이 제대로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 ‘애굽 같은 강대국을 만들어 주시겠구나’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와서 이루실 메시야왕국이 로마제국 같은 큰 나라, 잘 사는 나라로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것이죠.

오늘날 성도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면 이 세상에서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은 죽어서 천국에 갈 수있다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것과 똑같은 내용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한 백성들에게 최고의 복을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고, 우리가 거룩해 지는 것이고,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제사장의 사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소유하시면 누가 우리를 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사탄도 감히 하나님의 소유에 함부로 손을 대진 못합니다.

우리는 전에 죄로 오염된 채로 살았고 그 죄는 인격과 삶에 악한 열매들을 만들어 얼마나 나를 괴롭게 했습니까?

죄의 짐이 얼마나 무거웠는지는 예수님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그 짐을 다 내려놓고 나서야 비로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처음 믿을 때 보다 점점 더 거룩을 향해 가고 있고, 더 좋은 열매들이 맺히고 있습니다.

또 가족과 이웃 죄인을 이끌고 하나님의 제단에 나갈 수 있는 제사장의 역할을 우리가 아니면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하신 가장 큰 복입니다.

우리 쪽에서는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며 섬길 때 이 언약이 제대로 성취가 되는 것이죠.

이럴 때 삶의 축복은 당연히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 조건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 하자시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신 신이 내가 너희를 지배하겠다 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으시죠.

이 언약의 체결까지 하나님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의사를 물으십니다.

우리에게도 수없이 반복해서 믿을 의사를 물으셨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관계는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군주와 백성의 관계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하나님이 어떤 마음으로 이 언약을 체결하셨는지 예레미야서에서 밝히십니다.

팔백여년이 지난 후에 이 날의 언약을 회상하며 이스라엘이 그걸 깨뜨렸기에 새 언약을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실 때 그 옛날 마음을 얘기하십니다.

예레미야 31장 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새)언약은 내가 (옛날에)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그때는)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애굽에서 인도하고 시내산에서 세운 언약은 하나님이 그들의 남편이 된 언약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조약을 맺으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신부를 데려 오려는 신랑의 사랑과 같다는 것이죠.

내가 너의 남편이라는 말은 약점 투성이 부부관계에서 하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신랑되심과 남편되심을 말할 때는 항상 교회를 위해 목숨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염두에 두신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모든 관계에서 진정한 사랑을 주고 받지 못하며 삽니다.

누군가 한 사람에게조차 만족한 사랑을 받지 못하기에 외롭고 허무한 것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인간의 근원적인 외로움은 사라집니다.

저도 젊을 때는 외롭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믿고 난 뒤엔 외롭다는 걸 모르고 삽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채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사랑을 알기 전엔 사실 언약서에 싸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진실하심을 믿기에 서약을 하고 주님을 따르게 된 줄 믿습니다.

모세를 통해 전달 받은 하나님의 이 언약 제안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당장은’ 수락합니다.

 

2. 언약의 당사간에 합의가 되었으니 이제 언약식을 갖게 됩니다.

1)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시내산으로 내려오십니다.

언약의 당사자가 현장에서 직접 마주하게 되는 것이죠.

환상으로가 아니라 실체이신 하나님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구약성경에서 이것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

19장을 보면 하나님이 현현하시는데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덮이고 나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다고 합니다.

온 산이 크게 진동하여 백성들이 두려워 떨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권능을 동원해서 한껏 자신을 과시하며 나타나신 것일까요?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실제로 이런 위엄과 영광을 수반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성경 곳곳에서 선지자들이 환상 중에 본 하나님은 이런 형언할 수 없는 영광 중에 계셨잖아요?

이 하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셨을 때를 신약성경에서 한번 더 기록하죠.

바로 베들레헴 마굿간에 아기로 오신 일입니다.

이 때는 시내산의 엄청난 영광을 인간의 몸으로 가리고 오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 충만했다고 요한사도는 기록했죠.

본질적인 성품의 영광은 그대로 지니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과 똑같이 되셔서 사람들과 어울리시고 함께 먹고 마셨다는 게 정말 성육신의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이런 황홀하고 장엄한 영광 중에 계시는 성부하나님과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진 채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 얼마나 신기합니까?

2) 이 하나님 앞에는 또 다른 계약 당사자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게 되죠.

1절을 보면 세 그룹으로 사람들을 나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산 아래, 제사장 아론과 두 아들, 70명의 장로들은 산 중턱에, 그리고 모세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올라갑니다.

여기서 일반 백성들보다 제사장 그룹들은 좀 더 가까이 나오게 하십니다.

이들이 백성들의 대표가 되어 현장의 증인이 되고 가르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게 하시고 더 아는 은혜를 주셨다면 지금도 목적은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백성들을 산 아래에 두고 올라오지 못하게 하신 이유는 앞 19장에 나옵니다.

우선 그들이 신기한 하나님 임재의 현상을 보려고 흥분해서 하나님 앞으로 몰려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죄인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인 공의가 그들의 죄를 보는 순간 치실 것을 우려하신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이 언약에서 캐치해야 할 중요한 요소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백성들을 신부로 맞이하시려는 데, 하나님의 공의가 이들의 죄에 대해선 가차 없는 심판을 실행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게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3. 하나님과 죄인 이스라엘이 언약을 하기 위해 이 문제가 해결되야 하기에 제단과 제물이 필요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백성 두 당사자 사이에는 제단을 놓았죠.

제단은 백성들의 죄를 제거하기 위한 속죄의 제물을 드리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충돌을 이 제단에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제단 앞에 놓은 열 두지파의 돌기둥은 모든 이스라엘백성들을 이 속죄에 포함시킨다는 뜻입니다.

5절을 보면 청년들이 대표로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한 소를 잡아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레위기에도 보면 하나님께 번제를 바칠 때 제물을 잡는 것은 제사장이 아니라 제물을 바치는 당사자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1장4절입니다.

(제사를 드릴 사람은) 그는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그는 또 그 번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죄인이 스스로가 제물을 잡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뜨는 게 원래 모세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양의 머리에 안수해서 죄를 전가한 뒤 제사장에게 넘기고 홀가분하게 돌아오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는 제물의 목에 칼을 대어 죽여야 하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때 예배자는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죄로 인해 한 생명이 대신 죽는 것을 직접 체험할 때 죄의 심판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도 구약시대 율법대로 비둘기 한 마리든, 어린 양이든 이렇게 죽여 제사를 드렸다면 지금처럼 무심히 죄를 짓게 되지는 않았을까요?

오늘 청년들은 제물과 씨름하며 처참히 죽는 제물의 모습을 똑똑히 경험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 제물에게서 나온 피를 받아 여러 양푼에 나누어 담습니다.

그 절반을 제단에 뿌립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일지라도 피의 속죄 없이는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예배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기록한 언약서를 가져와 백성에게 낭독해서 들려 줍니다.

내용을 다 듣고 난 뒤 백성들은 계약에 동의를 하죠.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그때 모세는 남은 피를 백성들에게 뿌립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우슬초에 피를 적셔서 백성들에게 뿌렸다고 합니다.

그들이 입은 흰 옷에 제물의 피가 여기저기 튀어 붉게 번지는 것이죠.

결코 이들이 이 언약식에서 관객이 아닌 것입니다.

피가 내 몸 여기저기에 튀고 묻혀 지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피를 뿌리면서 모세는 이렇게 말하죠.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이 말의 뜻은 제물의 피가 이 언약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무고하게 희생 된 제물의 피를 볼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여기시겠다는 것이죠.

그리고 이 피가 하나님의 제단에 뿌려졌듯이 언약하는 사람들에게도 반드시 뿌려져야만 언약이 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쪽에서도 이 피로 인해 죄를 용서받게 되었다는 걸 인정한다는 뜻인 것이죠.

지금 뿌려진 이 피는 단지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 그 피가 없었다면 자기의 죄악으로 인해 지금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을 수조차 없었잖아요?그걸 현장에서 보여줌으로 언약의 피가 실제로 죄를 사한다는 걸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본문1절에서 장로들은 멀리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9절에 언약식을 마친 뒤에는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피의 언약을 통해 이제 이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오도록 용납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발 아래 주변은 사파이어를 깐 듯 신비하고 청명했습니다.

이들을 두렵게 했던 우레와 구름과 산을 뒤흔드는 소리들은 사라졌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사랑과 평안과 위로가 이들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식을 마친 이스라엘 대표들이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십니다.

11절, 그들이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궁극의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영원히 하늘나라 하나님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걸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은 잔치 집에 다니시며 먹고 마셨다는 것을 복음서가 오히려 강조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죠.

모두의 구원이 완성되는 요한계시록에서 다시 천국의 혼인잔치가 열립니다.

우리의 구원은 잔치와 같은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식탁은 성찬식을 통해서도, 성도들의 식탁교제를 통해서도, 미리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 매일 우리 가족들이 모여서 나누는 식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평범한 음식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가족들과 음식을 먹을 때 행복한 천국의 식탁을 누리시길 축복드립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언약이 체결 된 것입니다.

 

4. 이 피의 언약식은 백퍼센트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의 원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성도들 역시 언약의 피로써 하나님의 자녀 관계가 성립됩니다.

시내산의 옛언약은 이스라엘의 문제로 인해 실패했고, 하나님은 완벽한 새언약을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22장20절 마지막 만찬에서, 십자가에서 흘리시는 피가 바로 시내산 때와 같은 언약의 피라고 말씀합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오늘 본문에서 모세가 제물의 피를 제단에 뿌렸듯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제단에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피를 부으신 것이죠.

십자가에 달려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내산에서 피를 흘리고 죽어 완전히 각이 떠져 해체 된 제물과 하나도 다를게 없는 모습의 죽음이셨잖아요?

또 시내산 언약에서 백성들의 몸에 이 피가 뿌려진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 피가 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저들의 흰 옷에 제물의 붉은 피가 묻는 것 자체가 충격이잖아요?

자기 옷에 뿌려진 피에 대한 인상은 좀 끔찍하고 또 강렬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에서 아주 쇼크가 될 강렬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신자들은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속죄의 피가 나를 구원한다는 것을 내가 확고히 믿는다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붉은 피가 온 몸에 뿌려진 충격적인 경험처럼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이 그만큼 선명하게, 마치 피의 잔을 들고 마신 듯이 절대 부인할 수 없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언약의 피가 없다면 아무도 하나님께 용납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시내산의 언약식을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대립되는 사랑과 공의의 문제가 제물의 피를 통해 해결 된다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피를 볼 때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신다는 새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소유하셨고, 하나님이 가지신 가장 좋은 것들로 우리를 기르시고 양육해서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제사장과 같은 영광스런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국교회 이미지가 더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최근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싶은’, ‘이중적인’, ‘사기꾼 같은’ 부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잇속만 차리는 교회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에게 주신 제사장의 사명과 너무 동떨어진 결과입니다.

그동안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은 열매일 것입니다.

오늘 언약식을 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은 결과 계약은 파기 되고 심판을 받은 것을 두렵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새언약의 피를 믿음으로만 견고한 구원을 얻는 것이지만 말씀대로 지키지 않는 믿음은 검증되지 않은 믿음입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들을 잘 지키며 하나님의 자녀 됨을 누리며 매일 행복한 천국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