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애굽기1장1절-22절 (출애굽의 전조)

남수연 2023. 10. 16. 22:47

https://www.youtube.com/watch?v=lwbqlAqQK_A 

지난 주까지 창세기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창세기 11장까지를 고대사라고 했죠.

천지창조와 모든 것의 기원이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믿냐고 하겠지만, 그건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사람이 절대 알 수 없는 사실을 유일하게 성경이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고대사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존재하게 되었다는 뿌리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잃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죠.

이후 12장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마침내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성경은 알려주십니다.

이런 믿음은 내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아는 우물 안 개구리 안목을 훌쩍 벗어나게 합니다.

성경을 믿을 때 우리는 태초부터 세상의 종말까지를 알게 되죠.

이 땅에서부터 천국을 알고 영원까지 알게 됩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만큼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들하고는 사실 진정한 대화가 안되는 것이죠.

오늘 출애굽기는 창세기의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기록한 성경입니다.

창세기 끝에서 성경 한 장을 넘겼지만 그 사이 삼백여 년이 지나갔습니다.

오늘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연결해 보는 정도로 살펴보고 전체 출애굽기는 다음 기회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는 우리의 구원 여정과 믿음의 삶에도 찰떡같이 들어맞는 성경입니다.

성령께서 모두에게 이스라엘이 아닌 나의 이야기로 들려주시길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액굽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1) 오늘 이스라엘의 노예 상황을 설명하는 두 단어는 번성학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단어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은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학대당하는 데 번성할 수는 없죠.

우리나라가 일제강점기를 지날 때 뼈아픈 역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중 사할린 동포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사할린은 동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러시아의 섬입니다.

그곳에 일본이 육만여 명의 우리 국민들을 강제 이주시켜 탄광과 벌목장에서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중노동과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해 죽었습니다.

일본이 2차세계 대전에 패망한 뒤 사할린에 있는 동포들은 국적도 없이 방치되고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됩니다.

거기 있던 사람들은 다시 러시아의 혹독한 강제 노역을 하게 되죠.

2000년대가 되면서 우리 정부가 이들의 귀국을 추진해 37백명 정도의 사할린 동포들이 영구 귀국했습니다.

아직도 사할린에는 25천명 정도의 우리 민족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한 민족이 이렇게 노예의 삶을 사는 데 과연 인구가 번성할 수 있을까요?

사할린 동포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칠십여 년 만에 인구 육만 명이 삼만 명 이하로 줄어듭니다.

오늘 이스라엘 인구수를 줄이려고 애굽왕이 온갖 방법을 동원하죠.

심지어 남자 영아들을 살해할 정책을 폅니다.

1절에서 칠십 명으로 시작한 이스라엘이 사백 년 뒤 출애굽 시점에서 이백만 명이 된 것은 자연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큰 민족을 만들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께서 친히 이행하신 것이죠.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고,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합니다.

 

2) 그런데 번성과 학대라는 두 상황은 애굽을 탈출해 가나안땅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할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은 큰 민족을 이루어 가나안땅으로 데려가시겠다는 그 때가 가까이 왔다는 의미입니다.

애굽의 잔혹한 학대는 강력한 출애굽의 동기를 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집트는 고대엔 세계 4대 문명의 발생지였습니다.

출애굽 당시에도 문명과 문화가 인근 어느 나라보다 발전했던 선진국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가나안땅의 국가들은 후진국이죠.

이스라엘이 애굽에 거주한 지 본문 당시로는 삼백 년을 넘었습니다.

모두가 애굽에서 태어난 사람들이고 애굽은 그들의 세상입니다.

미국 이민자들의 2세대만 돼도 국적만 미국인이 아니라 거의 뼛속까지 미국인입니다.

나일강 하구의 고센땅은 농사짓고 가축 기르기에 좋은 풍요로운 땅입니다.

강대국 애굽에서 안전하게 일하며 잘 먹고 살 수 있는데, 누가 가본 적도 없고, 내 땅도 없는 가나안으로 가려 하겠습니까?

이백만 명을 어떻게 일일이 설득해서 출애굽을 시킬 수 있겠습니까?

유일한 방법은 더 이상 애굽에서 못 살 만큼 괴로워야 나갈 생각을 하겠죠.

사람들이 예수님 믿겠다고 나오는 상황도 비슷하잖아요?

무언가 나를 너무 힘들게 할 때 하나님이라도 좀 믿어볼까 교회에 발을 들여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도 우리가 기대하고 의지하는 세상 것들이 다 끊어지고 나서야 진정으로 하나님만 바라게 됩니다.

그게 연단을 받는 기간이죠.

유독 집착하고 미련을 둔 것이 끝까지 믿음의 발목 붙잡아 구원도, 연단도 지체되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혹독한 학대에서 도망치고도 광야 40년 동안 얼마나 미련을 못 버리고 애굽 타령을 합니까?

하나님이 때로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을 끊어버리시는 것도 그래서일 것입니다.

나를 영원히 살게 하시고, 이 땅에서도 잘 살게 할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연단을 통해서 완전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게 되면 그때는 세상 것이 아무리 풍족해져도 거기에 다시 인생의 목적을 두지는 않게 되죠.

우리가 거기까지 가야 평안하고 안전합니다.

 

2. 이 애굽에서의 학대를 통해 성도들이 구원의 여정에서 겪는 고난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이스라엘이 번성해 갈 때 마침 학대를 담당할 새 왕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일부러 보내실 필요도 없습니다.

남을 괴롭히고, 사기 치고, 폭력적이고, 최악의 악인 전쟁까지 일으키는 악한 인간들이 주변에 항상 대기하고 있잖아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일부러 고난을 주신다기 보다는 누구나 당할 수 있는 고난 중에서 그나마 일부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조가 들어섭니다.

왕이니까 역사로서야 요셉을 알았겠죠.

그러나 삼백 년 전 나라를 구했던 외국의 영웅이 지금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죠.

성경의 가나안땅엔 오늘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가 전쟁 중입니다.

오늘 본문 당시에도 이집트와 북방의 세력들이 그 지역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이런 문제 제기가 되는 것입니다.

두렵건대 그들이 더 많게 되면 전쟁이 일어날 때에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갈까 하노라 하고

이스라엘 인구가 무섭게 늘어나는 걸 보고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유럽국가들이 인구가 줄어드는 게 큰 사회문제가 되자 이민자들을 대거 받아들이기 시작했잖아요?

우리나라도 인구 감소로 이런 정책으로 가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죠.

유럽 국가들에 주로 이슬람교을 믿는 무슬림들이 이주해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이들의 숫자가 너무 늘어나 문제입니다.

무슬림 여성들의 출산률은 보통 네 명, 다섯 명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런 상황을 분석해 30년 뒤엔 유럽 본토인이 오히려 소수민족이 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무슬림들은 공공연히 우리가 유럽에 살고 있는 목적은 유럽의 이슬람화라고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유럽은 없어질지 모릅니다.

타민족이 내 나라에서 번성한다는 것은 굉장한 불안감을 줍니다.

지난주 어떤 기사에 보니까 중국 쇼핑앱을 이용하는 우리나라 이용자가 급증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중국 알리바바 산하 해외직구 사이트인 알리익스프레스라고 있는데, 거기를 이용하는 우리나라 이용객 순위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나라 토종 쇼핑 앱인 쿠팡, 11번가, G마켓 다음이 알리익스프레스라고 합니다.

옥션보다도 백만명 정도 앞질렀다고 하더군요.

알리익스프레스는 매일 전용 고속선을 이용해 삼 일 안에 우리나라로 물건을 배송한다고 합니다.

중국의 저렴한 가격에 배송까지 빨라지니 우리나라 쇼핑앱들의 운명도 어찌될지 모르는 것이죠.

중국산 쇼핑앱들이 무서운 속도로 우리 소비 시장에 펴지고 있습니다.

이런 뉴스를 보면 왠지 불안하잖아요?

애굽왕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2) 고심하던 애굽왕은 이스라엘 인구가 늘어나지 못하게 극악한 인구조절 정책을 씁니다.

(1) 첫째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중노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애굽의 무기와 장비들을 보관할 도시건설에 이스라엘 사람들을 장기간 동원한 것이죠.

남자들을 건축 현장에 잡아두고 계속 힘든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번성하자 노동의 강도를 점점 더 높여갑니다.

 

(2) 두 번째로 히브리 산파들에게 영아 살해를 지시합니다.

15절을 보면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은밀히 부릅니다.

히브리 여인들의 해산을 도울 때 아들이면 질식시켜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는 것입니다.

딸들은 살려두어 노동력으로 쓰고 아들들은 죽여서 민족의 번성을 막자는 것이죠.

십브라와 부아에게 아기들을 죽이라는 사탄의 칼이 쥐어진 것입니다.

너무나 두렵고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아기들을 살리던 행복한 직업이 아기를 죽이고 부모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낙태 전면 허용 방향으로 법이 개정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존재인 태아를 살해하는 일에 기독 의사들이 믿음과 양심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아예 분만실을 닫고 진료만 하는 병원으로 바꾸고 있다고 합니다.

분만실을 운영하면 낙태 시술도 해야 하기 때문이죠.

*양샘 병원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여성 기독병원인데, 거기도 분만을 안 한다고 들었습니다.

낙태시술을 거부했다 고발당하면 의료법상 진료거부행위가 돼서 벌금과 자격정지 처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왕의 명령이 법이던 시대에 산파들이 어떻게 추상같은 왕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거역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두 산파가 바로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이유가 17절에 나오죠.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산파들이 왕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공포를 주셨다는 게 아닙니다.

공포로치자면 애굽왕이 더 공포스러웠겠죠.

21절을 보면 산파들이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분명히 짚어줍니다.

경외심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만 가질 수 있는 마음이고, 가장 진실하고 겸손하고 온당한 마음입니다.

경외심 안에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 하나님을 순종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열망이 들어 있습니다.

산파들의 경외심은 죽음을 각오하고 애굽왕이 아닌 하나님께 복종을 선택한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현대 신자들에게 많이 부족한 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입니다.

경외심의 부족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험의 부족 때문일 것입니다.

산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었을까요?

생명이 태어나는 일은 항상 신비롭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산모들이 건강한 아기를 출산하는 걸 보며 하나님의 경이로운 손길을 느꼈을 것입니다.

학대라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손들이 번성하는 걸 산파가 최전선에서 목격하는 거잖아요?

성경은 오늘 하나님을 경외한 산파들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해서 기념하게 하셨습니다.

세계사에서 투트모세라고 알려진 이 애굽왕을 성경에선 이름 없이 그냥 왕이라고만 부르는 것과 대조적이죠.

오늘 산파들은 왕의 명령에 앞장서 애굽을 위해 공을 세울 수도 있었습니다.

산파들이 그렇게 세상에서 부귀를 얻었다면 하나님나라에서 가장 치욕적인 이름이 되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얻을 이득을 포기한 희생에 대해선 하나님이 대신 보상해 주십니다.

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단 한 명의 히브리 남자아기들을 죽이지 못했다면 무슨 변명을 하든 왕이 이들을 죽였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호하시면 손끝도 대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흥왕하게 해 주십니다.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복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을 위한 헌신의 결과를 묻는 베드로의 질문에 걱정하지 말라고 똑같이 대답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8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 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우리의 삶도 힘들고 고되지만 산파들과 같이 하나님나라를 위해서도 늘 믿음의 용기를 내야 합니다.

나의 헌신으로 하나님나라는 성취되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속히 이뤄지도록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죠.

믿음을 발휘해서, 한편으로는 내 삶의 어려움과 싸우고, 동시에 하나님을 위해서 기쁘게 헌신한다면 반드시 두 가지 모두 승리하게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3) 셋째로, 산파들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왕은 노골적으로 전국에 영아살해령을 내립니다.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스스로 아들을 강에 던져야 할 뿐 아니라 애굽인들에게도 그럴 권한을 준 것입니다.

바로의 명이 엄중했기에 고센땅엔 엄청난 회오리가 몰아 닥쳤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로의 명대로 자식을 나일강에 던졌을까요?

자식을 자기 손으로 나일강에 던질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애굽 병사들에게 어린 자식을 뺏기며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두고 보지는 않으셨습니다.

역사를 볼 때 바로왕의 이 작전도 목적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2장을 보면 나일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울 만한 일이 일어나죠.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모세가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처음엔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겨서 키웁니다.

아기가 자라서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자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띄우죠.

그런데 히브리 아기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바로의 공주의 손이 모세를 건져 냅니다.

자식이 없던 공주는 모세를 양자로 삼고 모세는 왕자의 신분으로 40살까지 애굽 왕궁에서 살게 됩니다.

이후 자기 민족을 괴롭히는 애굽인 작업반장을 우발적으로 죽이고, 광야로 도망쳐 40년을 삽니다.

80살이 되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셔서 출애굽을 위해 다시 애굽으로 보내십니다.

그런데 애굽의 동족에게 돌아가서 봤더니 모세만 살았던 게 아닙니다.

성인 남자들의 숫자가 자그마치 60만명이었습니다.

만일 그때 영아 학살이 성공했다면 80살 된 모세 아래로 남자들이 하나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바로의 명으로 한동안 아기들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그 명령은 중단되었고 이스라엘 남자들은 60만 명으로 불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막을 것을 막아 주십니다.

 

(4)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고난 중에 하나님은 계획하신 것을 선하게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영아학살 정책이 결국 모세를 왕궁으로 보낸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721, 바로의 딸이 그를 데려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모세가 출애굽의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왕궁에서 성장한 것입니다.

이런 모세 정도가 되어야 대등하게 바로왕을 상대로 출애굽을 추진해 갈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마치 요셉이 팔려 갔는 데 알고 보니 그 길이 총리가 되는 길인 것과 참 비슷하죠.

우리가 이걸 통해 또 확신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환경이 절망의 구렁텅이 같을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돌아보면 이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죽을 것 같았던 일들로 인해 우리가 오히려 살아났잖아요?

혹독한 환난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께 나와서 구원을 받았고, 처절한 고통 때문에 우리가 연단 되어 믿음에 용사가 되었습니다.

잠언 말씀을 기억합니다.

잠언 173 도가니는 은을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그릇에 담긴 은과 금을 뜨거운 풀무불로 녹여야 불순물이 제거되죠.

우리도 그렇게 연단하신다는 것입니다.

많이 힘드시죠?

밤새 잠도 못 주무시고, 통증은 계속되고, 앞날에는 아무 대책도 없고, 삶이 두렵고 그러시죠.

이런 세상에서 아무 고통과 문제 없이 살 것이라고 어떻게 기대하겠습니까?

지금도 폭탄에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목숨을 잃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윤동주시인이 쓴 쉽게 씌어진 시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인생은 어렵다는 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시인은 절대로 쉬운 시를 쓰며 살았던 분이 아닌데도 자기를 그렇게 채찍질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이 영과 육의 치열한 전쟁 중인데 나만 안일하고 편하길 바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내 인생을 동정하기로 친다면 한이 없습니다.

사는 게 괴롭고 인생은 녹록하지 않지만 이 가운데서 주님께서 오히려 우리를 연단 하시도록 마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의 때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실전이 아니라 단지 훈련일지 모릅니다.

우리의 감정은 잘 동여매고, 믿음과 의지를 더 강하게 훈련해 언제든 실전에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출애굽기는 창세기의 약속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역사입니다.

가나안땅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은 큰 민족을 이루고, 또 학대를 받게 되죠.

두 가지가 다 필요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망했던 세속 세상의 상징인 애굽의 악마 같은 얼굴을 보아야 우리는 출애굽을 결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힘들게 세상을 살아가고 질병과 물질과 사람에게 시달리는 것은 죄와 세상으로부터 출애굽 시키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또 그 속에서 더욱 거룩한 자녀로 연단시키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만을 경외했던 산파들의 목숨을 건 헌신으로 하나님의 뜻이 막힘없이 진행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모세를 왕궁으로 들여 보내십니다.

거기서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길러내신 것이죠.

시련 가운데서도 용기를 내고, 하나님나라를 위하는 담대한 믿음을 갖도록 우리에게도 권고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에 대한 보상은 산파와 모세의 삶을 보라고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와 자녀들이 연단되고 훈련되어서 하나님나라를 위해 산파들 같이, 모세 같이 복되게 충성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