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VoxQM47MWJ8&feature=youtu.be
오늘 이스라엘의 광야시리즈 5탄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특별한 드라마가 아니라 출애굽 성도들의 일상이고 인생입니다.
열가지 재앙, 홍해가 갈라진 기적, 구름기둥과 불기둥만 생각하면 현실과 동 떨어진 먼 옛날 건국신화 같이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기적이 보호하시는 일상이고,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 함께 하시는 일상인 것이 다를 뿐입니다.
광야생활의 기적 하면 또 빼 놓을 수 없는 게 기적의 양식 만나입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생존할 양식을 내려주신 하나님의 실질적인 돌보심이자 이를 통해 알려주시려는 여러 가지 신앙의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성경은 이 만나 사건을 아주 중요하게 해석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큰 은혜가 말씀을 통해 모두에게 충만히 부어지길 기대합니다.
1. 먼저 만나가 내린 배경과 당시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한 만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지난 주 이스라엘은 엘림에서 전에 누리지 못했던 편안한 시간을 보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이 이런 것이구나 아주 만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림은 광야여정에서 잠시 머무는 곳이지 목적지 가나안이 아닙니다.
우리는 좋아하고 원하는 걸 만나면 오래 머물고 싶어 하지만 하나님은 목적에 따라 우리를 이동시키십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백만명을 인도하고 기르셨다는 걸 현실적으로 따져 보십시오.
서울 인구의 1/5이 구름떼처럼 광야에서 생활을 한 것입니다.
한 장소에서 인구 이백만명이 식용수를 사용하면 광야의 샘물은 금세 바닥이 납니다.
출애굽 때 데리고 나온 가축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인근 풀과 초목도 다 뜯기고 없어질 거잖아요?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들을 인도하실 때 순종훈련만 목적으로 장막을 접었다 폈다 하게 하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수 억 명의 성도들을 세상광야에서 기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많은 성도들이 다 각자 하나님의 돌보심에 부족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살아온 날들과 지금을 생각할 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완벽한 계획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머물러 있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렇기에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구름기둥의 사인을 잘 보며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구름의 사인이 무엇인지는 다 아시죠?
꾸준히 말씀과 함께 하며 받는 인도와 기도, 환경의 변화를 주시하며 분별하는 것입니다.
구름기둥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나님의 계획에도 차질이 없으시고 우리 삶도 평탄합니다.
오늘은 엘림에서 구름기둥이 계속 남쪽으로 인도합니다.
목적지인 가나안 땅은 북쪽인데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죠.
게다가 이곳은 엘림과는 다른 삭막한 신광야였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뭔가 잘못되는 게 아닌가 싶은 때가 자주 있습니다.
하나님은 현재 뿐 아니라 이 길이 장차 어느 길에 연결될 지까지 보고 행로를 인도하십니다.
그렇기에 당장 원하는 일이 틀어졌어도 조만간 왜 그랬는지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잖아요?
지금 이스라엘이 광야에 놓여진 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애굽을 나온지 한 달이 지나다 보니 가지고 온 식량이 다 떨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한 달 정도 식량이면 충분히 버티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무언가를 찾아서 먹이실 거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을 거예요.
그렇기에 오늘 곡식이 다 떨어지니 야단이 난 것입니다.
하루만 못 먹어도 이 여정은 큰 혼란과 낭패를 예견할 수있죠.
결국 다시 이들의 불평과 원망이 쏟아져 나옵니다.
오늘 원망의 강도가 만만치 않습니다.
3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말이 안 되는 억지와 불평인 것 아시죠?
왜 이스라엘은 장애물이 생길 때 번번히 이럴까요?
더 신기한 것은 여기까지 오며 이들이 수 없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불평을 하는데도 하나님은 책망도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들의 원망하는 말에 대해 엉뚱하게도 내 영광을 보여주겠다, 내가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려주겠다 이런 말만 하십니다.
왜 저들에게 저렇게 오래 참으시고 관대하실까 생각해 보니 사실 저에게도 그러셨더군요.
주님을 따라 온 삼십 오년에 얼마나 잘못한 게 많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은데도 내가 원하는 대로 밀고 나갔을 때도 참 많았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은 정말 오래 오래 참아주신다는 걸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지금 이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직 하나님께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잖아요?
살아온 날들은 얼마나 고되고 팍팍했습니까?
죽어라 일했지만 정당한 댓가라는 건 없었습니다.
어제 저녁 뉴스에 일본 군함도에 끌려가 일했던 인부들 사진이 나오던데, 진짜 얼마나 못 먹었는지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더군요.
이스라엘 노예들의 삶이 뭐가 더 나았겠습니까?
늘 부족한 음식으로 굶주림을 채웠겠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짓밟히며 살아왔던 사람들입니다.
믿을 것은 눈에 보이는 한 자루 곡식뿐이지, 누가 내게 자비를 베풀고 이유없이 사랑을 베푼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들입니다.
힘들고 고된 인생을 계속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성마른 성품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금방 화를 잘 내고, 다른 사람의 언행에 쉽게 고까워하고, 부정적이고, 상처 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니까 참 사람의 딜레마가 좋은 환경에서 잘 자라면 내심 교만해 지고, 어렵게 자라면 부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애굽에서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계속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이 극에 달할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지켜보십니다.
오히려 모세는 이들의 행동을 탓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시는 것 같아요.
‘쟤들이 너무 힘들게 살아서 그래’
‘쟤들이 아직 믿음도 없잖니’
우리는 남을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게 참 부족합니다.
내 생각에 좀 못 미치면 벌컥 화가 나고 세상 나쁜 사람을 만들어 버리죠.
하나님의 인내하심으로 오늘 우리가 여기까지 왔는데 말입니다.
지난 주에 제가 오래 알고 지내던 권사님과 긴 통화를 했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의 가정생활들이 다 그렇잖아요?
가족 서로에게 받은 상처로 함께 살면서도 긴장관계,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사는 집들이 많습니다.
이 권사님도 남편이 과거에 잘못한 일들, 현재의 맘에 안 드는 생활 모습들로 모든 다툼의 진원지가 남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욥기 성경묵상을 하다가 우리처럼 매일성경 옆면에 달려 있는 해석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에 써있는 말이 ‘욥의 친구들의 잘못이 무엇인가, 옳은 말은 줄줄이 하면서 욥을 위로하지 못했다’라는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 남편이 신앙적으로 잘못된 것, 무질서한 생활, 흡연 문제, 이런 걸 늘 지적하고 기도는 했지만 남편을 위로하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죠.
생각해 보니 다 했는데, 위로만 안 했었다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쌓인 상처와 불신 때문에 정말 위로가 아까워서 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죠.
그 날 권사님이 남편에게 처음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고 합니다.
‘당신 그 동안 너무 고생했어. 지금 일이 잘 안 되도 괜찮아. 그거 당신 잘못 아냐. 우리 지금 있는 대로 조금씩 먹고 소박하게 살면 난 충분해’
그러고 나자 늘 남편과의 사이에 있던 껄끄러움과 긴장감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걸 느끼며 요즘 산다고 하시더군요.
이사야서66장1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잖아요?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오늘 본문을 보면 그냥 음식을 던져 주시는 게 아니라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하시는 게 느껴집니다.
우리도 조금씩 더 노력해서 모두를 위로하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공부하느라, 경쟁사회에서 돈 버느라, 큰 짐에 눌려 살아가는 우리 자식들이 좀 부족해 보여도 오늘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듯 이해하고 위로의 말을 자주 전하는 모두가 됩시다.
2) 이렇게 광야에서 다 굶어 죽을 상황에 빠진 이스라엘에 하나님은 하늘에서부터 양식을 내려 주십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만나는 식물의 씨와 같았다는 걸 알 수 있죠.
새벽에 이슬과 섞여서 내린 만나는 이슬이 마르면 작은 곡식 알갱이처럼 진 주변에 하얗게 쌓여 있었습니다.
마치 싸락눈이 하얗게 덮여 있는 것 같이 보였을 것 같죠?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른 아침에 이 만나를 모아서 굽고 찌고 가루를 만들어서 떡을 만들어 먹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이 만나를 주식으로 먹고 살았습니다.
물론 만나 한 가지만 40년 동안 먹고 살았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똑같은 음식 하나만 40년을 먹습니까?
만나는 쌀과 같은 주식이었고 물론 그 자체만으로도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기에 필요한 최적의 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만 먹고 살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도 해물 순두부 몇 번 먹으니까 질려서 돈까스도 먹고, 뚝배기 알밥도 먹고 그러는데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 때 엄청난 가축들을 끌고 나왔습니다.
염소와 젖소가 매일 젖을 내줄텐데 그걸 버리겠습니까?
원래 하던 대로 우유도 먹고 치즈도 만들고 그랬겠죠.닭은 매일 계란을 낳았을거잖아요?
광야에서 두 번째 유월절을 지킨 때를 보면 유월절 양도 잡아서 고기를 먹거든요.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이 고기 타령을 할 때 메추라기를 몰아다 주셔서 한 달간 먹었다고 하죠.
너무 우격다짐으로 40년간 만나만 먹었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러실 수도 있지만 이스라엘사람들은 신비의 사람들이 아니라 고기 먹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잖아요?
신명기에 보면 모세가 이렇게 말하죠.
광야에서 40년 동안 너희 옷이 헤지지 않았고 신발이 닳지 않았도다
이 말씀도 문자적으로 40년 동안 한 벌 옷으로 살고 신발 하나로 살았다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어떻게 옷이 저절로 세탁이 되고 섬유가 헤지고 떨어지지 않겠어요?
어린아이 때 입은 옷은 몸이 성장하면 저절로 따라서 옷이 커져야 되는 데 그럴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
성경을 너무 경전처럼 신비롭게만 보면 내 실생활에 받아들이기가 점점 어려워져요.
하나님이 이들을 얼마나 완벽하게 광야에서 돌보셨는지 40년 동안 잘 먹이고 잘 입혀 주셨지 않냐는 뜻이죠.
광야에서 유목민처럼 살았어도 거지꼴로 다니게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양은 털이 자라면 깎아 줘야 하는 데 당연히 깎아서 양모를 짜서 옷을 지어 입었을 것입니다.
성막 만들 때 보면 제사장의 옷을 얼마나 정교하고 멋지게 만듭니까?
출애굽 때 받아 온 금 은 보석까지 장식해 멋지게 차려 입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이전 보다 못하게 만들어 놓으신 분 있으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지금은 이전의 일들을 청산하고 고쳐가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기로 작정했다면 다른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먹이고 입히십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워봐서 알지만 해 주고 싶어도 못해 주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책임지고 싶어도 능력이 없어서 우리는 못하는 게 많잖아요?하나님은 해 주고 싶으신 대로 할 수 있는 전능하신 인도자이십니다.
홍해가 앞에 있다면 확 갈라 버리시잖아요?
그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 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우리 인생에 영원한 공급자가 되시는 하나님아버지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처럼 광야에서 곡식 자루가 비어가고 있다 해도 하나님은 해결하실 방법이 수도 없이 많으십니다.
다만 오늘 이스라엘처럼 원망하며 낙담하지 말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기대하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의 기도를 보면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잖아요?
의식주로 고민하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데서 구하지 말고 공급자께 기도하십시오.
2. 만나는 이렇게 성도들의 실질적인 생활을 책임지고 공급해 주시는 것임과 동시에 만나를 통해 우리를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목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매일의 만나를 통해 어떻게 우리를 훈련하실지를 본문에서 말씀하시죠.
4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매일 아침 하루 필요한 만큼의 식량을 주심으로써 시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 그것은 믿음의 훈련이고 의존하는 훈련입니다.
자기 힘으로 살던 자존자의 삶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의존자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들이 들어갈 가나안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의 중심부엔 물을 끌어다 농사 할 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이른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심으로 농사를 짓는 곳이 가나안입니다.
거기도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 곳인 것이죠.
애굽 처럼 마음대로 강물을 끌어다 농사짓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내일도 나를 위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그 믿음을 갖는 게 제일 큰 훈련이었고 이스라엘은 번번히 실패합니다.
사람의 본성상 누구를 믿는 게 잘 안되는 거예요.
신앙의 세계에선 하나님을 많이 의존하는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갈수록 알아지는 게 무엇입니까?
나를 뭘 보고 믿냐는 거예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게 내가 최강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자꾸 하나님은 주님의 큰 힘에 의지하라는 거예요.
우리를 무능하고 유약하게 하시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큰 힘에 의지해서 강해지라시는 것입니다.
2) 또 만나 훈련은 우리를 낮추는 훈련입니다.
이 기적의 한 가운데 있던 모세가 이렇게 가르칩니다.
신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것은 너를 낮추시기 위함이라고 하셨죠.
매일 하루 분의 양식을 받아서 사는 삶은 어떨까요?
내일도 하루치 음식을 주실 게 분명하니 마냥 행복하고 맘 편히 살 수 있을까요?
먹고사는 능력만큼 인간의 자존심을 좌우하는 게 또 있겠습니까?
돈 버는 능력이 가장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내 힘으로 내 목숨이 걸린 양식을 해결하지 못하고 하루씩 하나님께 받아 먹으며 사는 것은 사람에게 가장 큰 훈련입니다.
우리는 내일 먹을 걸 비축해야 하고 지갑에 내일 쓸 돈이 없으면 불안하죠.
하루치의 만나로 먹고 사는 삶은 자기 힘을 과시하며 남보다 잘 살려는 사람의 탐욕과 교만한 죄성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광야인생 중에 만나의 시간을 주시는 때는 나를 낮추시기 위함입니다.
하루치의 양식, 하루치의 건강, 하루치의 평안, 하루하루 하나님이 주실 것만 바랄 수밖에 없는 시간이라면 그게 만나의 시간입니다.
내 힘으로 돌파할 수 없는 절대 불가능한 상황에 몰리는 때죠.
그 때는 내게 어떤 능력이 있든 먹히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과가 안나고 실력대로 두각이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옛날엔 잘 하던 것도 버벅 대고 무능함을 느끼게 됩니다.
대인관계엔 자신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대하는 사람마다 감정이 꼬입니다.
매일 그런 상황을 만나며 ‘내 힘이 아니구나, 하나님 밖에 방법이 없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 매달리려니 내게 더덕더덕 붙은 불의와 죄가 자꾸 걸리는 것이죠.
양심적으로 생각해도 내 나쁜 인격과 행동으로는 하나님께 구하는 걸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자꾸 고치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도 광야생활에서 만나의 시간을 통과하며 성도로 훈련되고 성장합니다.
우리를 낮추시는 이유는 궁핍하고 쭈그러져 살라는 게 아니십니다.
복을 주셔도 안심하실 만한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자존감을 무너뜨리시려는 게 아니라 남과 비교해서 항상 고개를 뻗쳐 드는 교만함을 무너뜨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축복을 받은 뒤 실족해서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왠지 요즘 일이 잘 안되고, 사람 관계도 힘들고, 자꾸 낙담될 일만 많이 생긴다면 만나의 시간이 다시 찾아온 것인지 모릅니다.
내게 뭘 고치시려는지 잘 순종해서 다시 복된 시간을 꼭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만나의 위로와 공급도 필요하고 만나의 연단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이 과정을 인도해 주시고 마침내 우리로 복의 사람들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또 이 만나에는 지금까지 살펴 본 그 이상의 중요한 사실을 한 가지 감추고 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이 만나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요한복음6장3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오늘 이스라엘이 먹고 광야에서 생존했던 만나는 저 멀리, 많은 시간이 지난 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육체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 온 만나가 그들을 살렸듯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산 떡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영생의 존재로 다시 살리십니다.
예수님은 내 몸을 받아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 뿐 아니라 주님과 우리가 연합되는 것을 강조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만나를 꼭꼭 씹어 먹어 그 영양이 육체에 골고루 작용했듯이 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언행이, 예수님의 인격이 성령님을 통해 내 안에 있고 내게서도 배어 나오는 것이죠.
이 광야 인생에서 매일 예수님을 섭취하고 예수님과 연합해서 더 강한 성도가 되고, 메마른 광야도 축복의 땅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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