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U6AnFw-M-4U&t=1475s
지난 주에 이어 오늘도 홍해의 기적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지난 주는 신약성경의 해석으로 홍해를 건넌 것이 세례와 같다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구원 과정 속엔 세례의 의미처럼 옛사람이 죽고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는 매일의 홍해 앞에서도 본성대로 살려는 마음을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구원의 여정은 옛사람이 앞장서서 갈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광야가 그걸 말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세미한 인도와 말씀의 구름기둥을 잘 따르지 않는다면 광야에서 방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애굽군대가 홍해로 뒤쫒아 오다 몰살 된 내용을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애굽군대의 홍해에는 심판과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해 좀 폭넓게 알아야 우리의 구원이 견고해 집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귀를 열어 말씀을 깨닫고 믿게 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오늘 말씀을 보면 애굽군대를 홍해에 뒤엎으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잘 읽어보면 하나님의 영광은 심판과 구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심판도 하나님의 영광이고 구원도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17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모세에게 이르시죠.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바다로) 들어갈 것이라
18절,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애굽을 심판함으로 영광을 나타내시겠다고 하죠.
또 그걸 통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알게 해서 어떻게 하시겠다는 것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시겠다는 것이죠.
1) 먼저 애굽군대를 심판하시는 이유와 속 뜻을 살펴 보겠습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려면 출애굽 사건의 의미부터 알아야 합니다.
다 알고 계시죠?
출애굽 사건은 단지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우는 한 민족의 건국 역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나라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서 난 한 씨를 통해 만민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오시는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저지하는 사탄의 세력들도 그때부터 지금까지 총력을 다해 방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4백년간 억류해 왔고, 지금 출애굽을 가로막는 애굽의 배후에는 그 사탄의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굽군대를 심판하신 것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한편 당대 한 국가로서의 애굽을 징벌한 것은 인간의 탐욕과 죄에 대한 심판입니다.
요즘 우리가 이사야서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시 악하게 살고 있는 민족들을 다 심판하시겠다고 매일 경고하시잖아요?
애굽처럼 한 민족을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억류해 놓고 종으로 부리는 게 얼마나 악한 것입니까?
가끔 뉴스에 지적장애인들을 데려다 착취하며 노예처럼 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악행이죠.
애굽군대의 심판은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악을 판단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심판을 통해 세상나라에 하나님을 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한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패배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신들의 승리와 동일시 되었습니다.
최강 애굽 군대를 패배시킨 여호와 하나님이 가장 큰 신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시 고대인들 인식에 눈높이를 맞춰 존재를 나타내시는 것이죠.
너희가 만들어 섬기는 우상신이 아무 것도 아니다, 여호와가 참 신이다라는 걸 보여주고 구원으로 이끄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홍해의 기적을 통해 주변 나라들이 비로서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다음 장을 보면 홍해를 건넌 뒤 모세가 지은 시가 나옵니다.
거기 14절, 15절을 보면 이렇게 되었다고 하죠.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홍해의 소문을 들은 가나안 나라들이 위대하신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죠.
실제로 이 소문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상징적인 한 가족의 이야기가 여호수아서에 나옵니다.
광야생활 40년을 마친 이스라엘이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이야기가 여호수아서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이 점령한 가나안 첫 성읍이 여리고성입니다.
이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진멸될 때 유일하게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있죠.
기생 라합과 가족들입니다.
라합은 여리고성을 미리 살피러온 정탐꾼을 숨겨 주고 구원을 약속받죠.
그때 라합이 정탐꾼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홍해에 애굽 군대를 수장시킨 여호와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온다는 소문에 가나안 주민들의 간담이 녹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그게 얼마나 강력한 사건이었는지 40년이 지난 뒤에도 그걸 기억하고 떨고 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의도대로 그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는 사람의 대표자가 라합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심판하십니다.
어떤 방식으로 심판하시며 온 세계를 경영하십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이 이만큼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이 땅의 하나님의 심판은 그걸 통해 누군가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십니다.
천재지변이 있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러나 종말에 있을 심판에서는 더 이상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직 그 준엄한 심판을 보고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더욱 감사하며 섬기게 될 뿐입니다.
우리의 잘못 된 삶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징계하십니다.
그 징계를 민감하게 깨닫고 늘 회개하며 하나님 앞으로 돌이키는 복된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2. 그런데 오늘 애굽에 대한 심판의 과정에서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어떤 부분에서 탁 걸릴 때가 있죠.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하나님이 바로의 군대를 홍해바다에 쓸어 넣으시려고 왕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들어서 뒤쫒아 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홍해 사건을 예고하실 때 앞에서도 여러 번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뒤를 따라가면 그 때 내가 그들 위에 물을 뒤엎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만 하나님을 비판하는 게 아닙니다.
신자들도 이런 말씀은 뭐하러 하셨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바로의 마음이 완악해서 이스라엘을 따라 붙었다고 하면 되잖아요?굳이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고 하시냐는 거예요.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십 여 차례 그 말씀을 반복해서 하십니다.
이정도면 일부러 그것을 더 강조하시는 것이죠.
성경을 읽다 보면 이렇게 걸리는 부분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그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가지 않으면 그 의문이 나중에 의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하나님이 진짜 믿을만한 분이신지 잘 알아야 오래오래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람도 오래 사귀어 마음이 서로 검증된 사람들은 길게 아름다운 우정을 이어가게 되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은 우리 감정의 측면에서도 자라고 성숙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냉냉하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바로와 애굽군대를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은 자칫하면 하나님에 대해 감정적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어 이해를 잘 해야 합니다.
(1) 여기서 하나님이 완악하게 하셨다는 것은 본래 착하고 동정심이 많은 바로왕을 하나님이 나쁜 사람을 만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가 자기 스스로 마음을 완악하게 했다는 말도 여러 번 나옵니다.
사실 이들이 얼마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악랄하게 지배했습니까?
이스라엘이 더 큰 민족이 되면 독립전쟁을 하고 나갈까봐 남자 아기를 낳으면 다 나일강에 던져 죽였잖아요?
이런 잔인한 지배는 역사상 전무후무합니다.
하나님께 열 가지 재앙을 당하고도 이스라엘 노예들이 제공했던 노동력과 편하게 부려먹던 걸 포기하지 못하고 뒤쫒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악하고 탐욕스러운 마음 그대로 굳혀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완악하게’를 옛날 개역한글 성경에서는 ‘강퍅하게’로 번역했었죠.
이 ‘완악하다’는 말의 뜻은 무언가를 바꿨다는 말이 아닙니다.
원래 있던 것을 ‘굳게 묶다, 강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바로가 원래 갖고 있던 마음을 그대로 굳어지게 했다는 뜻이죠.
상황을 보고 갈등을 하거나 흔들리지 않게, 본래 가졌던 마음대로 밀고 나가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잔인하게 한 민족을 압제하고 종으로 부리던 애굽에 대한 심판은 당연한 것입니다.
2) 그래도 완전히 이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광야 40년에서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애굽보다 못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왜 애굽은 돌이키지 못하게 마음을 굳혀 놓으시고 이스라엘은 구원해서 가나안땅으로 들여 보내시냐는 것이죠.
누군가는 완악하게 두고 누군가는 오히려 감화하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냐는 것입니다.
구원할 자와 심판받을 자를 정해 놓으신 게 아니냐는 것이죠.
여기서 사람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의문에 대해 바울사도가 로마서9장에서 또 해석을 해줍니다.
로마교인들이 이렇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미 구원받을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안 믿는 게 하나님 책임 아니냐고 한다는 것이죠.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바울사도가 변호합니다.
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그리고 유명한 토기장이 비유를 이야기 합니다.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하나님이 창조주의 권한으로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을 만드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바로와 같이 마음을 완악하게 두고 심판의 본을 보여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신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마음을 감동하여 복음을 믿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신다는 것이구요.
구원과 심판에는 창조주의 주권이 절대적인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구원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왜 저 사람이 아닌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구원을 받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진실한 성도들이라면 다만 이것만 알 뿐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구원받을 더 나은 자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우리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구원의 길은 하나님이 단독으로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하나님과 단절 된 죄인들이 어떻게 그 길을 찾아내고 믿느냐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한에 속해 있습니다.
이사야 45장 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 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그냥 완악하도록 유기 된 사람들에 대해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대로 하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복음을 들려주시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들을 때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고 라합처럼 하나님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3.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의 과정과 거기서 주시는 교훈도 살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모세가 지팡이를 번쩍 든 순간 홍해바다가 쫙 갈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을 보면 그렇지 않죠.
21절,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
사람들이 기적에 압도당하도록 드라마틱하게 쫙 갈라지게 하면 더 좋을텐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밤새 동에서 서로 강한 바람을 불게 하셔서 물이 차츰 갈라져 양쪽으로 물기둥이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한 순간에 바다를 가르실 수도 있었죠.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먼저 요단강을 건너가잖아요?
그때는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발을 들여 놓자마자 요단강 물이 즉시 끊겨 상류 쪽으로 높다랗게 벽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때는 한쪽에만 물기둥이 세워졌습니까?
강을 막으면 하류 쪽으로는 저절로 물이 끊기잖아요.
성경은 분명히 사해 쪽으로 흘러가는 물길이 완전히 끊겼고 상류 쪽으로만 20킬로 위쪽까지 거대한 물기둥이 세워졌다고 기록합니다.
홍해는 왜 좌우로 갈라졌습니까?
바닷물은 강물과 달라서 한쪽을 막아도 반대쪽에서 계속 물이 보충됩니다.
그러니까 양쪽으로 가로막아 물기둥을 세우신 것이죠.
홍해도 요단강처럼 얼마든지 한 순간에 가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밤새 강한 동풍을 불어서 새벽에 갈라지게 하셨을까요?
저는 이런 게 궁금하더군요.
그런데 성경 어디에도 설명이 없으니 알 수가 없는 것이죠.
모든 성경을 무조건 영적으로 꿰어 맞추는 해석은 좋은 게 아닙니다.그래서 저는 현실적인 방향에서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13장을 보면 바로의 손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의 인도를 따라 밤낮 없이 진행했다고 합니다.
거의 사흘을 애굽 군대의 추격을 의식하고 계속 걸어서 홍해 앞까지 온 것이죠.
그들 중에는 어린 아이와 노약자들도 있었고 짐승들도 많았습니다.
홍해 앞에 장막을 부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야말로 파김치가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건너야 할 홍해는 한강처럼 만만한 폭이 아닙니다.
내륙 쪽으로 길게 들어 온 홍해 바다는 폭이 300킬로에 달합니다.
그곳을 건넌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죠.
그런데 지도를 보면 홍해가 북쪽 끝에서 두 개로 갈라집니다.
그 중 하나가 수에즈운하가 있는 수에즈만입니다.
이쪽의 홍해는 폭이 20킬로 미만인 곳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 어디쯤을 건너갔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것이죠.
본문을 잘 보면 이들이 홍해가 완전히 갈라진 새벽에 건너가기 시작해서 만 하루가 걸려 반대쪽에 상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밤새 천천히 홍해를 가르신 것은 하룻길을 걸어야 할 이스라엘이 쉬어야하는 신체적인 문제를 고려하셨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육체를 가진 존재임을 아십니다.
지치고 피곤할 때 아시죠?
또 일어나서 걸으라고 재촉하면 몸도 마음도 견디질 못한다는 걸 하나님은 아십니다.
예수님도 오래 걸으시고 힘드셔서 사마리아 우물 곁에 털썩 주저 앉아 계셨잖아요.
하나님은 우리가 쉴 때와 더 힘을 내서 걸어야 할 때를 잘 아셔서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19절을 보면 동풍이 바다를 가르고 말리는 동안 앞서 인도하시던 여호와의 사자가 구름기둥과 함께 이스라엘의 진영 뒤로 이동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성육신하시기 전 예수님을 구약성경에서 지칭하는 말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진영의 뒤로 가셔서 애굽 군사들을 꼼짝 못하게 어둠에 가둬 두십니다.
그 밤 강한 바람 소리를 들으며 장막 안에서 이스라엘은 뒤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고단한 몸을 쉴 수 있었던 것이죠.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홍해의 기적이 자연현상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 진도에도 홍해의 기적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죠.
조수간만의 차이가 클 때 바다 밑의 높은 지형이 길처럼 바다 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에즈만은 깊이가 100미터에 달하는 곳도 있습니다.
물길이 열릴 수 있는 얕은 바다가 아닙니다.
하루 종일 이 깊은 바다가 좌우로 갈라져 있었다는 것은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또 누군가는 홍해 중에서 얕은 늪지대를 걸어서 건넜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애굽 군대는 왜 그 늪지대에 빠져 다 수몰되었겠습니까?
홍해는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적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 어거스틴은 “기적이 없었더라면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완성 된 기적을 주시길 기도하죠.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은 여러 가지 요건을 고려해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구원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자는 동안 조금씩 그 기적이 일어나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어 온 날들에 하나님의 기적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우리는 없었을 것이잖아요?
크고 작은 홍해의 기적을 경험하며 여기까지 온 우리들은 하나님의 기적이 위기 앞에서 길을 내 주셨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홍해의 기적은 사탄과 사람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심판을 당하지 않고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오늘 예배 중에도 역사하셨습니다.
뒤에는 애굽군대,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을지라도 하나님은 앞서가시며 길을 열어주시고 때로 뒤로 가셔서 뒤쫒는 원수들을 처리해 주십니다.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잠재우신 하나님의 자상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홍해가 더디게 갈라지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고려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믿음을 연단하고 계신지도 모르죠.
다음 주 부터는 홍해를 건넜으니 광야로 갈 것입니다.
매일 말씀을 통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말씀대로만 살려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가 처음 가보는 인생의 광야길을 안전하게 인도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로 데려가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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