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출애굽기 13장17절-22절 (광야로 들어서다)

남수연 2020. 7. 21. 13:32

https://www.youtube.com/watch?v=cD33vHYscC8&t=191s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탈출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기 위해 무서운 광야로 들어섭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성도들의 믿음의 여정에 비견되죠.

물과 숲이 무성한 오아시스에 머물 때 삶이 광야라는 걸 잠시 잊지만, 이어지는 험악한 여정에서 여기가 광야임을 다시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사람이 광야를 지나지 않으면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거의 대부분 성도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광야를 지났을 때 비로서 광야가 나를 바꿔 놓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죠.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 광야에서 얼마나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지를 보며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을 그렇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다 광야를 살아가지만 똑같은 광야가 아닙니다.

성도들에겐 광야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금 과정이 얼마나 험난하든 반드시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으시리라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를 통해 인생 광야를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안전한 길로 잘 인도받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해 구원의 중요한 과정들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출애굽은 성도들의 구원여정의 전체 그림을 기가 막히게 펼쳐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배우가 아니라 우리처럼 구원이 절실한 죄인들입니다.

이 출애굽 여정은 등장한 이스라엘 한명 한명의 실제적인 구원의 기록인 것이죠.

그래서 출애굽 사건은 똑같이 광야를 가는 성도들에게 배움을 줍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을 잘 배우기 위해서는 애굽을 나간 이야기만이 아니라 애굽에 들어가게 된 이야기까지 잘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전과정이 맞춰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먼저 이스라엘이 애굽의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을 간단히 정리해 보는 게 필요합니다.

창세기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간이 육의 사람이 된 경위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즉시 가동되기 시작하죠.

첫 사람 아담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죄인 되었듯이 둘째 아담인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해 조상이 될 한 사람이 선택됩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가나안 땅의 북쪽 멀리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이렇게 제안하고 약속을 하십니다.

내가 지시하는 땅, 가나안으로 가라 그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말씀에서 아브라함의 혈통이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성경 전체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여기서 ‘네 씨’는 단순히 혈통적인 후손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단어는 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수이고, 창세기 3장15절에서 나온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에서 ‘후손’과 같은 단어입니다.

너무 분명하게 아브라함의 자손이자,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실 예수님이 만민의 복이 될 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안대로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땅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열두 아들을 낳죠.

그 중 야곱의 아들인 요셉이 형들의 시기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대로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마침 가나안땅에 큰 흉년이 들고 형들이 애굽에 곡식을 사러 왔다 요셉과 재회하죠.

그래서 야곱과 가족들 칠십여명이 생존을 위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죽고 나서 왕이 바뀌고 이주민 이스라엘에 대한 정책도 바뀝니다.

미국도 대통령에 따라 이주민들에 대한 정책이 자주 바뀌잖아요?

이스라엘은 정책에 의해 전쟁포로와 같은 노예 신분으로 전락합니다.

지금 출애굽한 사람들은 싸워 보지도 않고 태어나 보니 그냥 종이고 노예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다 죄의 종으로 태어난 것과 비슷하죠.

이스라엘은 착취에 시달리고 학대가 점점 심해지자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출애굽기 1장은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구원해 가나안땅으로 데려 가시려고 모세를 보내십니다.

이렇게 출애굽이 시작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성경과 신앙의 이치를 깊이 알고 싶은 사람들은 의문을 갖게 됩니다.

왜 이스라엘은 애굽으로 가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가나안땅을 주기로 약속하셨다면 거기서 눌러 살게 하셨어야지 왜 가뭄을 만나고, 왜 요셉을 예비하셔서 애굽으로 내려 보내셨냐는 것입니다.

잘못 이해하면 애굽의 종살이는 상황을 조장하신 하나님의 책임처럼 되버리는 것이죠.

이런 문제가 잘 풀리지 않으면 구원이라는 중대한 진리가 일관성 있고 호쾌하게 뚫리지 않습니다.

우선, 아브라함과 약속한 가나안땅의 핵심은 기름지고 좋은 지형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곳, 사람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징을 가진 장소입니다.

그게 천국이죠.

그렇기에 구원받은 성도들만 살 수 있고 죄인들은 거기 살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일곱 부족이 나중에 여호수아의 정복전쟁에서 진멸되고 쫒겨난 게 그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살았습니까?

가족 간의 시기와 다툼이 결국 동생 요셉을 죽이는 음모까지 갑니다.

큰 아들 르우벤은 서모와 간통을 저지릅니다.

유다는 매춘을 하죠.

멸망 받을 가나안 부족보다 나은 게 무엇입니까?

이들이 천국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가족사입니다.

가나안 부족이 그 악을 인해 심판을 당하는 마당에 똑같은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넘겨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완전히 어긋납니다.

이들이 만난 가나안땅의 큰 흉년은 백퍼센트 하나님의 징계를 의미합니다.

이들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사실 죄로 인해 쫒겨 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말씀이 성경에 있습니다.

역대하33장8입니다.

하나님이 다윗과 솔로몬에게 이런 약속을 하셨다는 내용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이 내가 명령한... 모든 율법과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의 조상들에게 정하여 준 땅에서 옮기지 않게 하리라 하셨으나

내가 그들을 다시는 이 땅에서 옮기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영어로는 ‘I will not again’입니다.

내가 다시는 안 그러겠다, 그렇다면 이전에 이들이 잘못해서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서 옮기신 적이 있다는 것이죠.

바로 가나안에서 쫒겨나 애굽의 종이 되었던 야곱의 자손들 이야기입니다.

그 흉년에 다 굶어 죽게 두지 않으신 것은 아브라함과 맺은 만민의 구원자를 보내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들은 저절로 구원을 받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도 예수그리스도의 속죄로 구원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애굽에서 탈출할 때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바르게 하죠.

속죄가 없이는 이집트인들이 받은 죽음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13장 앞을 보면 이 유월절 규례를 자자손손 철저히 지키도록 계속 강조하시잖아요?

구약의 성도들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 예수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담보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시대나 신약성경 시대나 구원의 길은 단 하나입니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속죄를 거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의 길에 들어서지 못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믿고 구원의 여정에 들어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곧바로 가나안 땅에 입성하면 되겠죠.

그런데 왜 이렇게 출애굽기가 뒤로 길게 이어집니까?

이들이 애굽을 탈출해서 한 열흘이면 족히 들어갈 가나안 땅을 들어가는 데 사십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부터 몇 주간, 광야시리즈를 통해 그때 광야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지를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2. 오늘 말씀에서는 광야의 첫 여정에서 먼저 보여주시는 중요한 점을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방법’뿐 아니라 ‘구원 얻은 뒤의 여정’도 하나님이 계획하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원하셨으면 반드시 인도하십니다.

1) 먼저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경로를 정해 주십니다.

이제 애굽을 벗어났으니 모세를 필두로 너희끼리 가나안 땅을 잘 찾아가라 하고 이들을 떠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40년을 왕자로 자라며 애굽 전역을 배웠던 사람입니다.

이후 가축을 치며 40년간 미디안광야를 두루 다녔습니다.

모세가 출애굽의 경로를 짰어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잘 짰을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세하게 모든 경로를 정하시고 앞장까지 서서 데려가십니다.

성도들의 인생 여정은 내가 전체 판을 짜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계획해도 하나님이 그 길에 문을 열어 주지 않으시면 소용없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특히 중대한 진로와 결정에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 계획을 틀어버리기도 하십니다.

17절에 보면 가나안 땅으로 가는 제일 빠른 길이 있음에도 그 길로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그 길은 애굽에서 북쪽을 향해 난 왕의 대로라고 불리는 도로입니다.

각국의 왕들이 이 길을 오가며 전쟁을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길로 이동하면 열흘 정도면 충분히 가나안 땅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연히 그 길로 갈 줄 알았겠죠.

그런데 18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 길이 아니라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이스라엘 사람들을 인도하셨다고 합니다.

20절에서 좀 상세히 이동경로를 알 수 있는데, 그걸 참고로 보면 경로가 아주 이상합니다.

북동진 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부지런히 가도 추격하는 애굽 군사를 따돌리기가 힘들 텐데 반대로 애굽 땅인 남쪽방향으로 내려오는 길입니다.

엉뚱하게 홍해를 끼고 애굽 쪽으로 역주행하고 있는 것이죠.

아마 사람들이 상당히 웅성거렸을 것입니다.

왜 빠르고 편한 길을 두고 이 길로 가냐고 항의도 들어왔을 것입니다.

우리도 원하고 기도했던 길이 아닌 딴 길로 인도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계획한 길로만 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광야 여정에서 가장 큰 혼돈은 내가 원하는 길과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블레셋 사람의 길을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편하고, 빠르게 성공할 길을 원합니다.

그런데 거기엔 무서운 손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17절에 하나님이 왜 그 길을 막으셨는지 알려주시죠.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거기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길에 숨어서 도사리고 있는 적을 보지 못합니다.

그 일대를 장악한 블레셋은 절대 길을 비켜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나오기 직전에 ‘너희는 애굽인들에게 금은 보화와 재물을 요구하라’고 하셨던 기억나시죠?
이스라엘은 화려하게 치장하고 애굽을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의 길에서라도 성도들을 초라하게 끌고 다니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이걸 보고 그냥 보내주겠습니까?

전쟁에 숙달된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공격해 다 뺏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죽이고 노예로 끌고 갈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벽돌이나 만들며 노동만 하던 사람들이지 전쟁 훈련을 받은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시면 그 전쟁인들 뭐가 문제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역사이지 신화가 아닙니다.

실제 전쟁에는 칼에 찔려 사람들이 죽어 넘어집니다.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갑니다.

전쟁 통에 받는 충격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트라우마로 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출애굽을 후회하며 정신없이 애굽을 향해 도망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판단으로만 선택한 길에서 이런 것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여기저기 찢기며, 정신을 못 차리게 얻어맞아 믿음을 다 잃어버릴 지경까지 가는 것이죠.

우리는 지독히도 내가 원하는 길로 고집스럽게 가려고 합니다.

내 경험과 판단만으로 세상적인 길을 택하고 열심히 하나님보다 앞서 갔기에 수많은 비탄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는 인간의 경험과 기술이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저도 이스라엘 광야를 지나보았는데, 거기서 사람이 여러 날 생존한다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하나님만이 광야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아십니다.

오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한 가지 영적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대개, 내가 나서서 싸우는 길이기 보다, 내가 죽는 길입니다.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길은 블레셋과 싸우는 길이 아니라 홍해에서 죽는 길이라는 것이죠.

내 앞에 문제와 적군들과 맞붙어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늘 달라붙어 싸우려는 나의 옛사람이 홍해 바다에서 죽고 성령의 힘으로 매일 다시 사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잘 사는 길은 죽는 길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죽으면 사실 더 잘 이기며 살 수 있습니다.

또 이것은 영적인 원리를 가르치는 것 뿐 아니라 실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살피시며 삶을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전쟁을 만날 때 혼비백산해서 도망칠 것을 내다보시고 그 길을 막아 주시는 것이죠.

저 길로만 가면 다 잘 될 텐 데 왜 안 열어 주시냐는 것은 내 생각일 뿐입니다.

잘 되는 길이 아닌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내 자녀들 마음 헤아리듯 우리를 헤아려 주십니다.

재들이 저런 문제를 만나면 포기하고 그냥 쭉 뻗을 텐데.

이 시험은 너무 과해서 못이길 텐데.

이 충격은 버텨내지 못할 텐데.

하나님이 눈높이를 완전히 우리와 같이 하시고 우리에게 맞는 길을 골라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누가 제일 강자입니까?

소은이하고 우영이예요.

어른들이 다 허리를 숙여 이 아가들 눈높이에 맞춰서 쩔쩔 매잖아요?

우리도 얼마나 연약한 자들입니까? 그렇게 쎄지 않습니다.

주님은 갓난아기의 부모처럼 우리를 지키십니다.

제가 과일 중에서 복숭아를 좋아합니다.

우리 딸 서원이도 저를 닮아서 복숭아를 좋아합니다.

요즘 복숭아가 나오기 시작해서 몇 개 사다 놓고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지금처럼 제가 복숭아 하나를 온전하게 깎아 먹은 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복숭아가 값이 싼 과일은 아니죠.

한 개에 이삼천원 하다 보니 많이 사다 놓질 못합니다.

그래서 복숭아를 먹을 때 두 개를 꺼내서 서원이랑 같이 먹었는데, 매끈한 살은 서원이를 주고 저는 대개 발라 먹게 됩니다.

돈이 없어서 그걸 못 사먹을 정도는 아닌데도 이상하게 그렇게 되더군요.

인간 부모 마음도 자식에겐 좋은 것만 먹이고 싶은데 하나님 마음이 어떠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블레셋을 만나 식겁할 이스라엘의 마음을 헤아리시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 부모만 못하게 우리를 인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안심하며 믿음의 여정을 따라가시길 바랍니다.

 

2) 그런데 19절에 특이한 일이 하나 끼워져 있습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나올 때 350여년 전 죽은 요셉의 유골을 메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죽을 때 자손들에게 너희가 애굽에서 나갈 때 내 유골을 가져가라고 단단히 맹세시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이들이 요셉의 유골을 메고 나갈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요셉의 말대로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애굽 왕 바로의 종살이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이 식민 지배하던 우리 민족을 자유롭게 살라고 풀어준다는 게 상상이 갑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풀려난 것은 지구 역사상 가장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셉의 말대로 기적같이 하나님이 찾아오셨으니 이제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실 일만 남은 것입니다.

요셉의 유골을 볼 때 이스라엘은 남은 약속을 믿고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과거 우리는 다 하나님의 신실하고 기막힌 인도를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절대 잊지 말고 증표를 삼아 남은 광야 길을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3) 그리고 광야에서는 이들을 실제로 인도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없이는 광야를 횡단할 수 없습니다.

광야를 내리 쬐는 강렬한 태양을 구름기둥이 막아줍니다.

급격히 기온이 내려가는 광야의 밤에는 구름 기둥 안에서 빛이 나와 이스라엘을 보호하고 어둠을 밝혀 줍니다.

현실적인 성도들의 삶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단지 기후 현상이 아닙니다.

본문 전후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실제로 함께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 구원의 여정을 같이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며 함께 이 길을 걸어 주시잖아요?

또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방향을 지시하고 언제 떠나고 머물지를 정해주는 매일의 인도자였습니다.

지금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보이지 않습니다.

언제 일어나 걷기 시작해야 할지, 어느 방향으로 걸어야 할지를 가르쳐주던 출애굽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에겐 무엇이 있습니까?

내 발의 등불이 되고 내 길의 빛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잖아요?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라 가는 길이 바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요즘 우리가 함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훈련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때로 우리는 오래 광야를 걷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지치고 피곤해 한없이 초라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광야를 행군하는 이스라엘은 거대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비호를 받으며 무서운 광야를 살아남은 전설적인 민족으로 세상에 소문이 나고 있었습니다.

삶이 찬란하지 않다 해도 주님이 우리 안에 커질수록 우리는 찬란해 집니다.

내 삶이 가장 빛날 때는 성공하고, 사랑받고, 건강하고, 많은 것을 누릴 때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 안에서 늘 말씀하시고 나를 가득 채울 때입니다.

그때가 사람들 눈에도 우리가 가장 빛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결국 축복의 장소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출애굽의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은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갈 길을 지도하시며 평생 우리와 함께 걸어가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