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그 반석의 물을 마시라 (출애굽기17장1절-7절)

남수연 2013. 12. 30. 12:29

2013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지난 일년동안 쉬지 않고 달려오신 성도님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돌봐주신 은혜로 큰 과오 없이 일년을 지내온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 우리 성도님들 가정에도 크고 작은 시련이 있었지만 잘 넘어올 수 있게 인도해 주셔서 오늘 평안하게 예배를 드리니 얼마나 감사한지요.

마지막 주일 설교로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중에 있었던 한 사건을 선택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요즘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화두가 되고 있죠.

인터넷에 건국대학교의 한 졸업반 학생이 안녕들하시냐길래 라며 올린 4장짜리 응답형 대자보가 붙은 내용을 한 번 훑어 보았습니다.

대자보에 올린 요즘 대학생활을 보니 코끝이 찡해지더군요.

사계절의 대학생활을 담담하게 적었는 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봄에는 '흩날리는 벚꽃잎'과 함께 학자금 대출이자 연체 문자를 받았습니다.

여름에는 토익공부에 여념이 없지만 이번에도 9백점을 못 넘겨 사람취급을 받지 못할까 걱정합니다.

가을에는 내가 아닌 나를 자기소개서에 꾸역꾸역 적어 넣습니다.

겨울에는 취업에 떨어져 28세 거구인데도 신생아처럼 울었습니다.

철없어 보이는 대학생들도 두려운 광야같이 막막한 미래를 놓고 힘들게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겠더군요.

돌이켜보니 우리 모두가 지난 일년도 다 이런 광야 같은 길을 걸어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이 땅의 우리 삶의 무대를 상징합니다.

식량이 떨어져 만나를 구하면 그 다음 고기가 필요하고, 고기를 얻으면 물이 떨어집니다.

오랜만에 오아시스를 만나 한숨 돌리는가 싶으면 곧 장막을 거둬 떠나는 것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이었습니다.

우리도 일년 내내 무어 그리 떨어지는 게 많은 지.

좀 한숨 돌린다 싶으면 왠 문제는 또 불거져 나오는 지.

오늘 광야에서 물이 떨어진 이스라엘백성들의 사건을 통해 지나온 한 해를 돌아보고 새날을 용기 있게 맞이하게 해주시길 소망합니다.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하는 노정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선지 둘째 달이라고 앞 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벌써 광야에서 머문 지 한 달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여행도 한 일주일 넘으면 지치고 집이 그리워지지 않습니까?요즘같이 힘이 딸리니 하루만 나갔다 와도 집이 얼마나 편하고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이스라엘 광야를 투어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말은 광야에서 불평한 이스라엘 사람들 마음이 너무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햇빛 가릴 나무 한그루 없는 바짝 마른 사막에 돌산 뿐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혹독한 광야는 은혜의 동산을 버린 인간이 선택한 세상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인간세상은 메말라 비틀어진 광야와 똑같습니다.

이 인간의 화려해 보이는 문명이 정말 원했던 낙원입니까?

요란한 겉치레만 있을 뿐 그 이면엔 부조리와 타락과 절망의 골이 깊습니다.물질은 넘쳐나는 것 같은 데 왜 우리 삶에 모든 것은 항상 부족하고 고갈됩니까?

하나님이 안 계신 인생의 광야는 다 슬픔과 고통이 가득 찬 곳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낯을 피할 때 우리 심령은 광야같이 메마르게 됩니다.

대자보를 붙인 학생의 마지막 말에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안녕이라는 것, 그런 건 애초부터 우리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왜 그럴까요

우리네 삶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을텐 데.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통치 아래에서만 우리는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의 출생지인 이 광야를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 광야를 건너서 축복의 가나안인 천국을 향해 가는 것이죠.

다만 우리의 광야 길엔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주십니다.

우리의 장막 칠 곳을 예비하시고 안전하게 인도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물을 만드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광야가 싫어서 지나가지 않으려면 방법은 딱 한가지입니다.

믿고 나서 바로 천국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삶이 힘들 때 광야려니 하고 지나는 것이 오히려 위로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엘림이라는 오아시스 지역을 출발해 시내산을 향해 가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르비딤이란 곳에 장막을 쳤는 데 마실 물이 없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시내산 정상엔 물 한 방울, 풀 한포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1절을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광야를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였다고 말씀합니다.

1.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했더니 물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노정대로 행하였다는 말은 계획 된 여행의 경로대로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길에서 이탈한 것도 아닌 데, 물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로를 잘못 짜신 게 아닙니다.

광야를 건너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에 물이 없는 구간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아시스로만 지나간다면 왜 광야라고 하겠습니까?

우리 삶에도 때로 물이 없어 밑바닥이 다 갈라진 메마른 광야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고 힘써 의지하는 데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가 있죠.

오히려 점점 더 곤경에 빠지고 사태가 나빠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당황하고 믿음은 흔들리게 되죠.

그러나 물이 없는 르비딤에 장막을 치라고 하셨다면 분명히 하나님께는 복안이 있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절대 목말라 죽으라고 그 곳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이 나올 수 있는 환경을 찾아 두리번거리지만 르비딤은 원래 오아시스가 없는 곳입니다.

그곳을 지날 수밖에 없는 경로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은 물이 터져나오는 반석이었습니다.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오아시스가 없는 광야를 몇 년에 걸쳐 힘겹게 지났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도저히 물이 나올 수 없는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 기적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셨던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때 참 막막하고 두렵던 마음에 날마다 은혜와 용기를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견뎠을 지 가슴이 철렁합니다.

내 걸음으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아버지의 독수리 날개로 엎고 오셨다는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때로 우리의 형편을 알고 계신다는 하나님의 작은 위로를 받고 눈물을 흘린 날들도 있었습니다.

독일에서 목회하시는 김화0목사님이 그러시더군요.

독일 유학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스타킹을 살 돈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큰 문제로 당하는 고난도 힘들지만 작은 것들조차 해결되지 않는 상황도 참 사람을 비참하게 하죠.

다른 것은 좀 낡아져도 표가 나지 않지만 스타킹은 올이 나가면 여자들이 참 난처합니다.

여기저기 올이 나간 스타킹을 신고 다니는 게 제일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박스가 두 개 배달이 되어 왔습니다.

보낸 사람 이름도 없는 박스를 열어보니 스타킹이 꽉 차있었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렸다고 합니다.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하나님이 알고 계시다는 것이 감사해서 그렇게 울었다고 합니다.

이런 주님의 손길이 얼마나 많이 그동안 우리를 도우셨습니까?

물이 없는 르비딤도 우리 여정 중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은 환경을 뛰어넘을 해결책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제까지 우리를 그렇게 인도하셨음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신뢰하시면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줄 믿습니다.

2. 르비딤에서 보인 이스라엘백성들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장막 친 그곳에 물이 없다는 걸 파악하자 그들도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즉시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이게 인간의 치명적인 약점입니다.

과거에 수많은 하나님이 기적을 체험했어도 현실의 어려움은 과거의 모든 기적을 다 부정하게 만듭니다.

과거에 암이 낫고, 부도를 막아주시고, 합격을 시켜주시고, 그것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해주셨다 해도, 당장 눈앞에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의 존재차체를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시면 이스라엘이 그랬다는 것 아닙니까?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과거에 홍해를 건넌 것은 그만두고라도, 당장 오늘 아침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를 먹었고 머리 위에 현재 구름기둥이 태양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이 떨어지니 하나님의 인도와 선하심을 의심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불신할 때 입에서는 불평과 원망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3절을 보니 그들이 모세에 대해 원망하며 폭동을 일으킵니다.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인간의 죄의 본성은 항상 내가 유리한 쪽으로 사실을 왜곡시킵니다.

이스라엘은 어찌하여 우리를 인도해냈냐고 합니다.

그들은 분명히 노예처지를 벗어나길 간절히 원했었다는 것을 출애굽기2장23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그런데 지금 어찌하여 우리를 그곳에서 끄집어냈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에게 왜 나를 낳으셨냐는 비수같은 말을 해선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도와주고 함께 짐을 졌던 사람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평생을 함께 가정을 일구고 나와 함께 힘든 고비를 넘어 온 가족을 절대로 소홀히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르비딤의 위기에서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막중한 짐을 지고 인도한 모세를 배신하고 하나님을 불신합니다.

우리도 힘든 상황에 지치고 기도응답에 실망하면 옛사람의 본성인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불만하고 불신했던 내면에는 속죄에 대한 감사가 근본적으로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기 전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 억울해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부정하거나, 그 책임을 죄를 지을 환경을 만드신 하나님께 전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핑계하지 못할만큼 확실하게 자각합니다.

그러니 십자가의 속죄와 구원에 대한 진실된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구속의 은혜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 여러가지 환경으로 인한 시련이 올 때 근본적으로 불신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은 절대로 없는 것이죠.

우리 역시 영원히 죄의 종으로 살다 죽어 심판을 받을 비참한 존재였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고 구원받았는지 생각하면, 만일 예수님을 몰랐다면 어쨌을까 생각하면 정신이 아찔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청산해 주셨다는 이 구원의 은혜를 망각하면 작은 일에도 불평하게 됩니다.

분명히 우리는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했던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의 종살이가 자신들의 죄로 인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것 자체가 하나님 책임이지 않냐는 것이죠.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내려간 역사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의 선조 야곱과 칠십명의 가족이 7년의 대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간 것을 아실 것입니다.

마침 야곱의 아들인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입니다.

애굽에 내려간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애굽에서 기근을 피하고 위기를 넘겼지만 정권이 바뀌며 억류되고 노예 신세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가족들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축복의 땅을 떠난 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기근을 주신 하나님의 책임입니까?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정신 속에는 그런 피해의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번번이 고마움을 모르고 뻔뻔하게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분명히 자신의 죄로 가나안을 쫒겨나 애굽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수많은 생명이 죽어나간 7년의 대 가뭄은 죄에 대한 징벌입니다.

구약시대 가뭄과 기근이 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야곱의 가족들이 가나안 부족보다 의로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가족사를 보면 가나안 부족의 죄악보다 결코 빠지지 않습니다.

여동생 디나가 겁탈당했다는 이유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족속의 남자들을 다 죽이고 노략질하지 않습니까?

과도한 보복과 잔인한 학살을 서슴없이 자행할 정도로 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생 요셉을 살해할 의도를 가졌던 것이고, 노예상에게 팔아 넘긴 것 아닙니까?

축복의 땅 가나안을 상속받을 자격이 없는 그들은 결국 죄로 인해 그곳에서 쫒겨난 것입니다.

이것을 뒷받침해 줄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역대하33장8절을 보면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드리는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이 내가 명령한 일들 곧 모세를 통하여 전한 모든 율법과 율례와 규례를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의 조상들에게 정하여 준 땅에서 옮기지 않게 하리라

다시는 가나안 땅에서 옮기지 않겠다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과거에 그들의 죄로 인해 그 땅에서 옮기신 적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의 70인 가족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옮겨졌던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동생을 종으로 팔아넘긴 형들의 자손들이 결국 다 애굽의 종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죄와 사망의 종이 된 것은 모두 자발적으로 죄를 선택한 결과입니다.

인간의 고통의 범인은 자기 자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결박한 죄에서 우리를 풀어주시고 구원해주신 것입니다.

그 애굽의 종되었던 치욕을 불과 한달 만에 다 잊고 이스라엘은 왜 우리를 풀어주었냐며 망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지방에 다녀오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이패스에 달린 전선을 충전기에서 빼서 그냥 걸쳐두고 운전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수서역에서 가락시장 쪽으로 막 우회전을 하는 일차로에서 핸들을 돌렸는 데 핸들이 꼼짝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핸들을 오른 쪽으로 감아야 되는 데 움직이지 않으니 앞 분리대를 들이 받을 상황인 것이죠.

어찌나 당황이 되는 지 차를 멈추고 살펴보니 하이패스선이 차체와 핸들사이의 좁은 틈사이에 완전히 감겨버린 것입니다.

우회전 일차로에서 뒤에 늘어선 차들은 난리가 났죠.

식은 땀이 나는 데 선을 잡아 당기고 돌려봐도 꿈쩍도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떻게 핸들이 조금 움직여서 간신히 차를 도로 가장자리에 댈 수 있었습니다.

별 짓을 다해도 틈 바구니에 옹쳐 매인 전선줄을 풀 방법이 없었습니다.

견인차를 부르는 수 밖에 없겠더군요.

부목사님이 긴급출동에 전화를 거는 사이 간절히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전선 끄트머리를 붙들고 씨름을 하는 데 갑자기 선이 툭하고 풀리는 것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그때 하나님께서 묶인 것을 풀어주신다는 사실을 정말 실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가 결박한 죄에서 우리를 풀어주십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묶어 놓은 환경일지라도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새해에는 성도님들 가정에 모든 묶인 것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다 풀리는 축복이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주신 구원의 은혜를 항상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사랑 안에 거하는 비결이라고 믿습니다.

물이 없는 광야를 지날 땐 현실을 직시하고 더욱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현실을 사실보다 더 과장되게, 더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이스라엘백성들이 그렇습니다.

백성들이 과연 목이 말라 죽어가고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 중 아무도 지금 물이 없어 죽게 하신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목이 말라 죽겠다고 격렬하게 다투고 있습니다.

다툴 힘이 남았다면 아직 갈증으로 죽을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죽을 상황이 되면 인간은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그들이 던질 돌에 맞아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모세는 부르짖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탈진해서 죽어가고 있는 지경은 아니라는 것이죠.

단지 불안하고 불편한 환경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지레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망하고 투덜거릴 때는 가만히 보면 극한 상황이 아닙니다.

전쟁 중에는 정신병자 수가 급속히 줄어든다는 통계가 있죠.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사람들이 정신을 바짝 차린다는 것입니다.

정말 삶과 죽음에 기로에 놓일 만큼 위기에 몰렸다면 인간은 정신을 차리고 방만한 인생과 허영과 오만을 버리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원망은 최후의 궁지에 몰렸을 때가 아니라 원하는 것을 더 조급하게 가지려는 마음에서 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셨다면 끝까지 신뢰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부정적이고 불평하는 태도가 습관이 되면 매일의 만나로 신실하게 우리를 먹이시는 일상의 은혜조차 놓치게 됩니다.

이미 하나님은 앞 장에서 만나도 주셨고 고기도 먹게 하셨습니다.

종려나무 성읍에서 충분한 휴식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매번 더 탐욕을 채우고 더 성공을 보장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도 신실하게 공급하시는 일용할 양식과 건강과 일터를 예사로 생각하십니까?

며칠 전 미국 CNN방송이 갤럽의 조사결과를 인용해서 극빈층의 비율을 보도했습니다.

세계인구 중 다섯명 중 1명은 하루에 1300원이하의 소득으로 살고 있다고 합니다.

남아프리카 국가들은 반 이상이 이런 극빈층이라는 것입니다.

왜 나는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지 못했고, 왜 재능이 부족하고, 왜 원하는 길을 빨리 열어주지 않으시냐고 하나님을 불공평하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누리는 평범하고 소박한 자유와 행복이 저들의 눈에 지독히 불공평해보이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욕심과 미래의 안전에 대한 욕구는 끝이 없습니다.

우리 옛사람의 욕구를 마음껏 키우면 결과는 뻔합니다.

잠시라도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면 하나님도 용서할 수 없다는 교만한 인간이 됩니다.

우리의 탐욕은 먹이면 먹일수록 모든 좋은 것을 당연시하고 불만만 늘어갑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4.이런 축복받을 구석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의 죄인들을 축복의 땅으로 이끄시려는 하나님의 입장은 정말 궁지에 몰리신 것 같지 않습니까?

변하지 않는 끈질긴 죄의 본성,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죽어도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국 죄를 안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축복받을 자격이 없이 늘 불평하고 원망하는 죄의 본성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이들의 반란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 속에는 의미심장한 영적 진리가 숨어 있습니다.

5절을 보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고 가서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을 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퍼포먼스 같은 희한한 행동으로 물을 주시는 것인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성경에 상식적이지 않은 사건이 나오면 우화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주목해서 보고 쉽게 이해하라는 그림 설명 같은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는 하나님이 말씀하고 싶은 깊은 영적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일 강을 치던 그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일강을 치던 지팡이는 출애굽 때 나일강을 피로 변하게 했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죠.

그리고 6절에 보면 내가 호렙산에 있는 그 반석 위에 거기서 네 앞에 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서시겠다 하는 단어는 뜻밖에도 종이 주인 앞에 서있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지팡이로 하나님이 종이 되어 서 계신 그 반석을 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석에서 이스라엘이 먹을 물이 흘러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사건은 대개 다른 성경을 통해 해석해 주십니다.

고린도 전서10장 4절에서 해석해 주십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빌립보서 2장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몸이 쪼개지고 죽으실 것입니다.

반석이신 주님의 몸이 쪼개져야 비로서 생명을 살리는 생수가 솟아나온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을 싫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속죄하시고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7장 38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한이 해석을 덧붙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을 믿으면 성령을 주신다는 약속이십니다.

이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반석에서 나온 생수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스라엘에게 먹이시려는 것은 일순간에 목마름을 해결해줄 단순한 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오늘 주길 원하시는 것은 일시적인 육체의 만족이 아니라 영원히 갈하지 않는 생수입니다.

성령받기를 기도하십시오.

또 성령충만을 더욱 간구하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간절히 구할 때 성령께서 는 언제나 고갈 된 우리 심령에 넘치도록 생수를 부어주십니다.

메마른 우리 가정에도 성령의 생수가 부어져야 사랑으로 회복됩니다.

병든 마음과 몸에도 성령의 생수가 흘러넘치면 놀라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새해에는 우리 삶에서 예수님을 더욱 주목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속한 모든 광야 같은 환경에 큰 강물 같은 은혜가 임하길 원합니다.

시편 105장 4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렀으니

새해에는 이런 축복이 모든 성도님들 심령에, 그리고 가정에, 직장에 우리 교회 위에 충만히 부어지는 역사가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