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출애굽기12장1절-15절)

남수연 2013. 9. 5. 18:36

오늘 본문은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대한 말씀입니다.

벌써 9월이 되었고 추석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일상에서 명절만한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 설레임과 기대를 요즘 세대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옛날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보면 ‘추석이 가까워졌습니다’라는 단원이 있었습니다.

들에는 벼가 익고 감도 익고 밤도 익어갑니다.

어머니는 새 옷을 만들고 아버지는 새 신을 사오셨다는 내용입니다.

추석에 대한 교과서 내용을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만 봐도 명절에 대한 설레임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죠.

사실 그 많은 명절 중에 풍족하고 행복했던 때는 손에 꼽을 만큼이었습니다.

그래도 명절은 각박했던 인생에서 잠시나마 행복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었던 좋은 날이었습니다.

명절은 좋은 날입니다.

그런데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유월절만큼 신비한 명절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은 이 유월절을 가장 큰 명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바마대통령이 유대인식으로 유월절 명절 식사를 하고 있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명절의 배경에는 집집마다 어린 양이 죽고 그 피가 문에 발라지고 문 밖엔 죽음의 사자가 밤새 초태생을 찾아 죽이는 무서운 역사가 있습니다.

유월절 안에는 인류의 구원과 심판의 심오한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진리를 깨닫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이 억압에서 풀려난 출애굽 기사의 하이라이트인 열 번째 재앙, 장자 재앙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사건이 단지 한 민족을 위해 다른 한 민족을 심판하신 내용만을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애굽을 심판하신 이 사실은 우리에게야 은혜지만 기독교 밖에서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편협하고 괴팍하고 호전적인 하나님으로 매도당하기 안성맞춤인 사건이죠.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한다고 애굽의 장자들을 다 죽여 버리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들을 뒤쫓아 온 애굽의 모든 병사들은 홍해에 몽땅 수장시켜 버리십니다.

호전적인 ‘전쟁의 신’이고 자기 백성만 끼고 도는 옹졸한 민족신이고 이 심판은 부당하다고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물론 오늘 심판당한 이집트가 어떤 민족입니까?

한 민족을 짓밟고 짐승처럼 부리던 사람들입니다.

노예민족의 번성을 막으려고 갓난 히브리 남자아기들을 모조리 살해했던 잔인한 민족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과하다고 동정 받을 만큼 선하고 양심적인 인간들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더 나은 자들도 아니고 우리도 다르지 않은 걸 우리가 알잖습니까?

그러나 본문에서 애굽에 내린 재앙은 단지 역사적인 민족간의 구원과 심판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인류가 마귀의 억압에서 풀려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에 대한 예표인 것입니다.

애굽이란 한 민족의 심판을 통해 장차 마귀의 세력과 그 추종자들인 영적인 애굽이 심판당할 것을 상징하는 사건이라는 것이죠.

12절에 보면 애굽사람 뿐 아니라 애굽의 모든 귀신들도 심판하셨다고 하시죠?

아무려면 목석으로 만든 우상의 형상들을 심판하셨겠습니까?

애굽을 지배하고 있는 마귀의 세력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의도하신 바를 정확하게 알고 가지 않으면 불신자들이 알지 못하고 비난하는 말에 믿음이 흔들리고 의혹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에 대해 인격적인 오해를 가질 수가 있고 믿음생활에 치명적인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구원과 심판의 역사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사랑과 정의로 행하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혈통적인 애굽민족에 대한 오늘 메시지는 오히려 심판을 피할 구원의 메시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서7장5절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매

그들에게도 하나님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사야19장22절에서 더욱 명확하게 밝히십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니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 주시리라

19장25절입니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영화 십계에서 모세역을 맡은 찰톤 헤스톤이 명대사를 하나 날립니다.

시나리오작가가 이 유월절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유월절 그 밤에 사망의 검은 기운이 어린 양의 피가 없는 집으로 들어가고 사방에서 애굽사람의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그 때 모세를 길러주었던 새어머니 애굽 왕비가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저들은 내 백성이요’라고 말합니다.

그때 찰톤 헤스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백성이지요’라고 대답합니다.

유월절은 표면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강하게 드러나고 장차 마귀와 세상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지만 또 한 편은 모든 인류를 향한 구원의 길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날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온 인류를 구원할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차출 된 집단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역사 속에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구원자에 대한 실마리가 구석 구석 정교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유월절이 그런 것입니다.

이 유월절 어린 양이 예표하는 것을 찾는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쉬운 숨은그림찾기입니다.

믿음이 있는 우리는 유월절 양이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님이라는 것이 너무 잘 보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절한 유대인들은 그 의미도 모른 채 아직도 명령하신 대로 유월절 명절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 사람들에게도 이 구원의 신비가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7에서 그 사실을 정확하게 밝힙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유월절 양이 가리킨 예수님께서 희생양이 되시고 그 피가 우리 죄를 속죄하셨기에 우리는 죄와 사망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길은 당장 죄로 심판당한 애굽 뿐 아니라 모든 세상을 향해 열어놓으신 유원한 구원의 길입니다.

2천년전 유월절날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구약의 마지막 유월절은 끝났습니다.

이젠 유월절 어린 양되신 예수님이 피흘려주신 은혜를 기념하는 성만찬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구약의 유월절은 끝이 났지만 그 규례 속에 담긴 의미에는 변함이 없습니다.지금도 우리에게 적용되고 지켜야 하는 것이죠.

본문에 하나님이 직접 제정하신 유월절의 규례를 오늘 우리에게 맞게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먼저 유월절 양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역사가 새로 시작됩니다.

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유월절이 있는 그 달을 한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애굽에 속했던 월력으로 보면 그때는 3,4월에 해당되는 달입니다.

그런데 그 달을 1월, 정월로 정하라는 말씀입니다.

애굽의 노예로 있던 역사는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살 던 그 때는 진짜 삶이라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알맹이가 없어 불면 날라가 버릴 것 같은 존재의 가벼움과 거짓과 허망함만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때부터 우리 인생의 새로운 역사가 씌어지는 것이죠.

세계의 역사시계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AD와 BC가 나뉘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에게도 예수님을 기점으로 구원의 새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셨습니까?

우리 인생에서 그 지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른다 해도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확연히 달라지셨습니까?

구원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번 태어나야 합니다.

죄와 사망의 종으로 살던 삶이 예수님을 믿고 영생하는 삶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매일 자유와 기쁨을 누리는 새역사를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2. 어린 양은 미리 지정 된 양이어야 합니다.

3절에 보면 열흘에 양을 선택하고 6절에 보면 4일 뒤에 그 양을 잡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에 아무 양이나 가서 잡는 게 아니라 미리 죽을 양을 정해서 간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유월절 양은 죽기 위해 미리 정해져 있다는 뜻입니다.

갈보리언덕, 과거의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이 바치려했던 이삭 대신 하나님이 숫양을 준비하셨던 것 기억하시죠?

아브라함은 그 산을 여호와 이레, 하나님의 산에 준비되리라고 불렀습니다.

번제 할 어린 양은 갈보리 언덕에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사역을 처음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이 바로 미리 정해진 그 양입니다.

유월절 양을 정해 놓은 사람들은 그 어리고 순한 양이 자신을 구원할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얌전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어린 양을 볼 때 내가 살기 위해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털 깎는 자 앞의 순한 양처럼 십자가에 오르신 예수님을 볼 때 그 분이 바로 그 양이란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죽어야하는 어린 양을 아무 생각없이 끌고 나와 죽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어린 양이 그들의 눈과 마음에 간직되고 그 양이 자기의 죄를 가리고 자기의 목숨을 구할 것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나를 위해 유월절 양이 되신 예수님을 깊이 간직하는 마음이 있는 지 매일 살펴보며 그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3. 선택받은 민족도 각자 어린 양의 피가 있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애굽 땅을 심판하실 때 이스라엘은 무조건 구원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표적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 집을 넘어가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교회공동체 안에 있다해도 각 사람은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애굽을 치신 열 가지 재앙 중에 앞에 있는 아홉가지 재앙과 마지막 재앙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아홉가지 재앙까지는 회개의 기회가 있는 자연적인 재앙입니다.

거기까지는 하나님이 스스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해 재앙을 내리십니다.

아홉가지 재앙들을 보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반적인 재앙들이 강도 높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연재난과 병충해와 질병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구별 없이 혜택을 주시고 돌보시기에 이 땅에 그런 심각한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하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만드셨을 뿐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과장법이 아닙니다.

실제 창조주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만물 하나 하나에 대해 경이로운 지식으로 간섭하고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이 평소에 인간을 돌보던 그 손길을 거두시는 것이 재앙입니다.

애굽에 아홉가지 재앙은 하나님께서 그 은택을 거두시고 그들을 쳤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대단한 능력이 있어 자기 운명을 마음대로 할 것 같지만 어림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은택을 거두시는 순간 순식간에 질병이 찾아오고 환경의 역습이 일어나고 만물은 재앙에 빠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마지막 역사적인 지구종말의 때 나타나는 재앙들이 오늘 애굽에 내린 재앙들과 거의 같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은택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구를 보존하시고 전쟁을 막아주시고 우리 가정을 지켜주시고 우리 행하는 발길을 견고히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좋은 것들을 누리는 것입니다.

아홉가지 재앙까지는 애굽에만 일어나고 여전히 이스라엘 위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마지막에 있을 심판 앞에선 모든 인간이 동일한 조건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직접 대면하는 생명의 심판 앞에서는 대신 죽어줄 제물이 있어야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면 너나 할 것 없이 더럽고 추한 죄인의 모습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뿐입니다.

유월이란 뜻, 넘어간다는 뜻은 하나님께서 그 집의 죄를 살피지 않으시고 건너가신다는 뜻입니다.

오직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하신 어린 양의 피가 표적이 되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이 합법적으로 지정하시고 속건제물로 삼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많이 우리를 대속해 주십니다.

욥기 33장 24 하나님이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사 이르시기를 그를 건져서 구덩이에 내려가지 않게 하라 내가 대속물을 얻었다 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처지임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친히 대속물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스스로 마련해 주신 십자가의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고 계십니까?

우리 인생의 끝날을 위해 꼭 죄를 속죄하실 어린 양을 맞이하시는 복 된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4. 어린 양의 고기를 먹어야 합니다.

8절에 보면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먹으라고 말씀합니다.

유월절의 낯설고도 기묘한 그 밤의 분위기가 느껴지십니까?

애굽의 하늘에 짙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가 애굽인의 목을 조르는 것 같은 숨막히는 그 밤의 분위기를 십계의 한 장면 중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바로왕으로 나온 율브리너와 함께 애굽 시가지를 내려다 보던 노련한 장군이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내가 수십년을 전쟁터에서 살았지만 이런 공포는 처음입니다.’

이렇게 죽음의 공포가 애굽의 모든 집을 덮고 있을 때 유대인지역엔 어린 양의 고기를 굽는 향기로운 냄새가 마을 전체를 덮습니다.

너무나 기묘한 대조 아닙니까?

그 밤이 가면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 축복의 땅으로 들어갈 것을 기대하고 즐겁게 가족들이 모여 고기잔치를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대속물만을 원하셨다면 집집마다 모든 재물을 번제로 태워 올리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기를 구워 잔치를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영생과 함께 이 땅에서도 이렇게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혜택을 누리며 날마다 잔치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노예생활 중에 그들이 언제 고기 잔치를 해봤겠습니까?

그런 그들에게 마음껏 어린 양의 고기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런 데서 좀 느끼셔야 합니다.

영생을 주신 것도 놀라운 데 예수님 안의 모든 풍성한 복을 지금도 먹이고 누리게 하시는 그런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지 우리를 위해 재물로 바쳐지신 예수님을 멀리서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양의 고기를 먹고 그 맛을 즐기듯 우리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생생한 믿음의 나날을 이렇게 즐겁게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 밤에 이스라엘이 대속을 위해 함께 짊어질 고통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날을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유월절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 양을 정하시고 그 어린 양의 피가 부족함이 없이 완벽하게 우리를 구속하십니다.

그 이상 더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받고 보호받고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구원을 누리면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슬픔과 애도가 아닌 축제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항상.

물론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 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통 앞에서 설 때 오히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나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기 위해 그 고통을 꿋꿋히 참아내시는 나의 주님을 똑바로 볼 때 그래서 더 큰 은혜가 있고 기쁨과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끝났다면 지금도 우리는 애통하고 침울한 마음으로 슬퍼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부활하셨고 지금 천국에서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중에 계십니다.

십자가는 사랑의 확증이고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확실하게 느끼고, 더 체험적으로 알고 싶으십니까?

가장 큰 사랑은 이미 우리 모두에게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죄를 속죄할 유월절 어린 양으로 독생자를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면 충분하지 않습니까?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믿음은 이 사실을 의심 없이 믿고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에,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고 십자가에 오르셨기에 우리는 의심 없이 하나님의 그 사랑을 믿습니다.

어떤 체험과 기적과 기도응답도 이 십자가의 증거에 비하면 빈약한 사랑의 증표일 뿐입니다.

먼저 어린 양 되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며 맛보고 느끼고 확신할 때 매일의 삶에서 잔잔하게 부어주시는 평안과 은택을 누리게 하실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린 양의 고기와 함께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다.

무교병은 이스트를 넣지 않아 부풀지 않은 딱딱한 빵을 말합니다.

제가 성찬식에 쓰려고 작년에 인터넷에서 구입해 보았는 데 너무 맛이 없어서 포기했습니다.

맛을 좋게 하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빵을 만드는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신약성경에서 아주 명료하게 해석을 해주십니다.

고린도전서5장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누룩이 없다는 것은 죄를 회개한 깨끗한 심령이 되자는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그 고기를 구워먹을 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며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거의 죄성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만히 분석하면 다 자기 이익과 자기 과시와 자기 성취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선한 동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인 것이죠.

하나님의 일을 할 때조차도 열심히 죄의 본성을 부풀리고 만족시키고 있는 게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죄에 끌려 다니는 무기력한 존재가 아닙니다.

내 내면의 죄의 본성을 직시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서 단호하게 악한 죄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15절에 유월절 양을 먹을 때 유교병을 먹으면 그 사람의 생명이 이스라엘 중에 끊쳐지리라는 엄중한 경고를 하십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죄의 단맛을 둘 다 누릴 수는 없습니다.

죄가 매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신선하고 충분한 은혜와 축복을 가로막지 않도록 버리고 끊고 돌이키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쓴 나물을 먹는 다는 것은 애굽의 종살이의 쓴 교훈을 떠올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며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없던 허무한 인생, 보람도 의미도 없고 이리 저리 부딪치며 상처받고 살던 과거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던 시절, 늦가을 밤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스산하고 허무감이 몰려왔는지 너무 감정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낭만적인 감정일 것 같지만 그 기분은 정말 쓸쓸하고 묘합니다.

매일이 참 불안하고 깊은 한 숨이 있던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좀 어렵고 일이 잘 안돼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또 용기가 생기고 마음이 또 은혜로 채워지지 않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열심히 목회만을 하고 달려왔는 데 어느 날 사모님이 덜컥 암에 걸린 것입니다.

수술실에 아내를 들여보내고 기도실에 앉아 있는 데 하염없이 눈물만 나왔습니다.

그 때 마음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너 지금 슬프니? 네 저 정말 슬픕니다.

너 지금 불안하니? 네 저 정말 불안합니다.

너 지금 불행하니? 그런데 선뜻 불행하다는 말이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불행하지 않다면 행복하다는 것인 데 그렇다고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 목사님이 깨달았다고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어떤 시련과 고통이 있어도 우리가 결코 불행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어느새 우리가 모든 상황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고 신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과거를 생각할 때 더 이상 우리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 기적의 대 탈출을 하고 광야생활이 좀 어렵다고 그 종살이 하던 때를 그리워합니다.

우리의 죄성이 자꾸 우리를 뒤돌아보게 한다면 속지 마십시오.

쓴나물을 먹으며 과거의 불행했던 나를 돌이켜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믿음으로 그 피로 자신을 덮는 자는 사망과 지옥심판을 벗어납니다.

우리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유월절 식사에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나눠주시며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26장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피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죄할 수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흘리신 언약의 피가 내 모든 죄를 사해주심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 믿음으로 사망과 심판을 이기고, 날마다 풍성한 은혜로 잔치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3년 9월1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