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애굽의 학대 (출1장1절-17절)

남수연 2012. 6. 13. 14:34

출애굽기는 ‘이집트 탈출기’입니다.

성경에 쓰이는 애굽이란 말은 이집트의 그리스어를 한자어로 옮긴 말입니다.

정확한 한자 음역은 애급이지만 성경에는 애굽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모든 과정에는 구원에 관한 진리가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구원의 영적 지도와 같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를 잘 깨닫게 되면 우리 구원에 대한 큰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출애굽기는 단지 한 민족의 독립사건을 다룬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도면밀하신 행적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관계하신 이 기록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출애굽과정에 일어난 부분적인 사건들을 많이 살펴보았죠.

오늘은 출애굽에 대한 전체적인 큰 윤곽을 살펴보며 구원에 대한 영적 깨달음을 얻길 원합니다.

재미있는 얘기들은 세상에서 많이 들으니 주일에는 우리 영혼을 먹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나누어야 할 줄 믿습니다.

제 경우에도 딱딱하고 지루하게 들었던 말씀과 교리들이 환경이 힘들고 감정이 어려울 때 믿음을 굳게 붙들어 주는 것을 종종 경험합니다.

우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성령께서 오늘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영적인 귀한 지식을 가르쳐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출애굽의 전체적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기 전에 왜 애굽으로 내려갔는지를 먼저 알아야 겠죠.

그 이유는 창세기 요셉의 사건을 통해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식구들이 거주하던 가나안 땅에 극심한 기근이 들어 식량이 바닥나게 됩니다.

마침 애굽에 팔려가 총리가 된 아들 요셉의 초청으로 야곱의 전 가족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의문 부호를 다시는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들 시대에도 분명 가뭄이 있었지만 애굽에 내려가지 말고 가나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약속의 땅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경우는 상황이 좀 다릅니다.

시편 105장 16절에 보면 그가 또 기근을 불러 그 땅에 임하게 하여 그 의뢰하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17절에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기근을 보내고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셔서 총리가 되게 하시고 온 가족을 불러내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야곱의 자손을 애굽으로 보내시고 바로의 종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네요.

출애굽은 우리가 죄의 종에서 구원을 받는 것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인 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인이 되게 하셨다는 묘한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됩니다.
애굽으로 들어간 사건은 들어가게 된 경위에 초점이 있지 않고 죄의 노예 된 상태에서 나오는 데 초점을 맞추는 사건입니다.
한 가지 원리를 모든 사건에 다 적용시키는 것은 성경을 읽을 때 적절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이죠.

그들은 축복의 땅을 약속 받았지만 아직 구원을 받지 않은 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내려갔기에 죄인이 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영적 신분이 본래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앞으로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 당대에 받은 것은 고작 매장할 밭 하나였죠.

하나님은 구원의 때를 준비하시기 위해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때가 차서 드디어 축복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죄의 땅인 애굽에서 출발하는 것이 맞는 것이죠.

그리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기 위해는 준비되야 할 조건들이 있고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구원의 차원에서만 생각하기 쉬운 데 하나님 편에서는 세상에 대한 심판의 양면성을 가지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당장 이스라엘에게 주지 않으신 이유 중에 하나님은 아직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심판할 정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전쟁을 치루기 위해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성장해야 할 시간도 필요한 것이죠.

소수의 야곱 가족이 큰 민족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가나안 부족들과의 불필요한 전쟁을 막기 위해서도 애굽의 고센지역이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또 구원의 과정에 꼭 필요한 의미를 가진 유월절과 홍해와 광야와 같은 영적인 경험을 거쳐야 이스라엘은 축복의 땅에 정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과정 중에 하나가 여호와의 유월절입니다.

애굽을 탈출하려는 이스라엘을 바로왕이 놓아주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10가지 재앙을 내리며 바로왕을 압박하고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움켜쥐었던 바로 왕이 마수를 풀 수 밖에 없었던 사건이 바로 마지막 장자의 재앙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이집트의 모든 집에 들어가 장자들을 죽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모든 집을 다니며 아들을 죽일 때 살 수 있는 유일한 비책은 어린 양의 피를 문에 바르고 집 안에 들어앉아 있는 것입니다.

이 날이 바로 유대인이 기념하는 유월절이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의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바로 어린 양의 피로 자신의 죄를 덮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출애굽 때 심판 받은 이집트인이나 가나안 정벌 때 멸망 받은 가나안의 일곱 부족이나 이스라엘 민족이나 크게 다를 게 없는 죄인들이란 것이죠.

언약을 받은 야곱의 자손들이 삼백오십년 동안 굉장히 거룩하게 하나님을 섬겼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에스겔20장7,8절에 보면 그들이 내게 반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들의 눈을 끄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였다 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보시기에 예쁜 짓을 한 적이 정말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 구약의 역사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애굽이나 가나안 부족이나 이스라엘이나 공정하게 심판하셔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 할 이스라엘을 위해 값을 치루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그들을 건져내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셔서 무엇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죄값을 대신 치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바로 그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댓가를 치르셨습니다.

나 자신을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여전히 마음 속에 내가 우상이고 하나님의 간섭을 싫어하는 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의 나를 위한 십자가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나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이스라엘은 심판받은 애굽인과 가나안 부족들의 죄의 모습으로 똑같이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살아도 좋다고 우리를 부르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뒤 거룩한 백성의 삶을 살도록 율법을 주십니다.

죄의 욕구대로 살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의 조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세상과 똑같은 법으로 살아선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룩한 삶과 축복을 위해 주신 계명들을 사랑하며 지킬 때 하나님도 마음껏 우리를 축복하실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사건을 보며 억압받는 그들처럼 죄의 종으로 살았던 우리의 처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누누이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종 되었던 애굽에서 건져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우리 믿음의 여정엔 고통도 있고 눈물도 있고 절망도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의 종 되었던 자리에서 저 아름다운 천국의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받았다는 확실한 주제 파악이 없다면 위기 때 마다 광야에서 원망하다 죽어 간 이스라엘과 똑같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탈출했고 지금 얼마나 아름답고 영광스런 천국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지를 날마다 생각할 때 우리 믿음의 길이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다음은 애굽의 고난 중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창세기 마지막 장 요셉의 죽음으로부터 오늘 본문까지 삼백년오십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긴 시간 동안 성경은 아무런 기록도 없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부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올 때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약속을 신실히 지키고 계셨습니다.

7절에 보면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말씀하죠.

70명이었던 야곱 집안이 출애굽할 때는 거의 2백만명에 육박하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출애굽 인원 2백만명이 너무 과장 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바로 왕이 이 백성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어 주신다는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강하게 번성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풍성한 생명의 복을 누리며 우리를 번창케 해주시길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게다가 당시 애굽의 정치적인 상황은 이스라엘민족에게 매우 유리하게 전개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엔 역사로 갑니다.

이스라엘이 거주하던 당시 이집트에는 이스라엘과 혈통이 같은 셈족이 쳐들어와 힉소스왕조를 세웁니다.

이집트는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족 계통입니다.

백 년 넘게 이집트를 지배했던 힉소스왕조 동안 같은 셈족이었던 이스라엘은 큰 어려움 없이 번성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이죠.

여기에 역사를 주관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놀라운 섭리가 있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주변국의 정세를 사용해서도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하나님의 각별한 간섭으로 국가적인 위기를 모면했던 것을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6.25당시 남침한 북한군은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고 한달 만에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유엔군이 급파되지 않았으면 우리나라는 속수무책 공산화가 될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이 긴급히 유엔 11개 회원국을 소집해 안전보장이사회를 개최했습니다.

이 유엔군 파병을 결정한 긴급회의에서 납득하기 힘든 일이 벌어졌습니다.

표결에서 한 나라만 반대해도 안건이 부결되는 안보리 회의에 북한의 남침을 지지했던 소련대표가 불참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소련대표는 롱아일랜드의 공관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보고가 남아 있습니다.

소련이 긴급 안보리 회의에 참석했더라면 우리나라의 운명은 뻔한 것이었죠.

당시 남침 3개월이면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김일성의 예측과 달리 남한에 있던 빨치산들이 적시에 봉기하지 않았던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비화로 전해집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민족과 주의 자녀들을 위해 지금도 역사를 움직이고 계십니다.

요셉의 죽음에서부터 본문까지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사라져 버린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일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때로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신 것 같고 나를 잊어버리신 것 같은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택한 자녀들을 잊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9장 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하나님의 안전한 보호와 약속 아래 지금도 거하는 줄 믿으실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길을 하나님께 안전하게 의뢰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향한 가장 완전한 계획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줄 확신합니다.

 

다음은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영적 세력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8절에 보니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본문의 연대기는 역사의 고증을 참고할 때 주전 14세기 정도로 봅니다.

이 때 이집트의 왕권이 바뀝니다.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다시 정통 이집트 왕가인 함족이 왕권을 회복한 것을 말합니다.

같은 셈족으로 힉소스왕조와 좋은 관계를 맺었던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경계심과 미움을 갖는 게 당연한 일이죠.

10절에 보면 새 왕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 번성하면 전쟁이 일어날 때 우리 대적과 합하여 우리와 싸우고 이 땅에서 나가 탈출할 까 하노라

북쪽에서 재 침입을 노리는 힉소스왕조와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고 노예생활에서 탈출할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 왕조가 세운 정책은 이스라엘을 혹독하게 다루고 노예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강제 노역으로 고통당하게 된 정치적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애굽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이 상당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어려운 노동으로 생활을 괴롭게 했다고 했는 데 그 원어의 뜻은 짓이기고 빻았다는 뜻입니다.

뼈를 가는 고통이었다는 것이죠.

노예가 된 이스라엘이 한 일은 날마다 흙을 짓이겨 벽돌을 만들고 바로왕을 위해 도시를 건설하고 창고를 짓는 일을 했습니다.

날마다 건축 현장에 투입되어 채찍에 시달리며 노역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는 애굽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그 종족을 멸절시키려 했던 사건을 단순히 두 나라의 갈등 공식으로 풀어서는 안됩니다.

350년 간 나일강을 중심으로 두 영적 세력이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과 태양신을 믿는 애굽인들이죠.

애굽 왕 바로는 요셉 당시 하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을 주도하신 분이 만물을 지배하시는 절대 신이라는 것을 그는 14년 간 목격했습니다.

창세기41장에서 바로 왕은 자신의 꿈을 해석하고 흉년에 대한 대비책을 내놓은 요셉에게 이렇게 말하죠.

38 바로가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그런데 그들은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유대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 까지도 부정하게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적을 보고 기독교에 대해 잘 안다고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평생 복음을 전했던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후서3장2절에 기록합니다.

또한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지옵소서 하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아무리 조리 있게 진심을 다해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갖는 게 아니라는 것을 바울이 체험으로도 알았던 것이죠.

복음을 거부 할 뿐 아니라 마귀의 편에 서서 박해하고 훼방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요셉의 신실한 증거와 하나님의 기적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믿지 않은 애굽은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훼방하는 마귀의 도구가 되고 맙니다.

12절에 보니 혹독한 노역과 채찍에도 불구하고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강성해지는 이스라엘에 대해 바로가 세운 새로운 정책은 이스라엘의 씨를 말리는 일이었습니다.

태어난 남자 아이를 죽이도록 산파들을 불러 비밀 지령을 내린 것이죠.

영아학살이라는 끔찍한 사탄적 범죄가 바로왕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멸절하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실 족보를 말살하려는 사탄의 끈질긴 공작으로 여러 차례 유대인들은 종족 말살의 위기를 맞이했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괴롭히고 믿음을 갈취하려는 악한 영의 활동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마귀의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습니까?

감독들을 위에 세우고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고 바로를 위해 뼈 빠지게 일하게 합니다.

즉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을 보내고 곤고한 환경으로 몸을 괴롭히고 세상 일에 시간을 다 뺏겨 믿음의 부요한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하루 하루가 너무 바쁘고 몸이 견디기 힘들게 피로하고 세상 일로 쉴 새없어 신앙에 도움 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면 아주 위험한 상태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곤고하게 하고 시험하는 악한 마귀의 목적은 우리 믿음을 뺏고 영생을 훔치려는 것임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애굽은 영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죄악 된 세상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를 때 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속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기를 애써야 할 줄 믿습니다.

사탄의 교활한 지배를 깨닫지 못하고 영적으로 신음하고 짓눌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사탄은 그들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인간을 더욱 고통 속에 몰아 넣을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세상은 전쟁과 테러와 기근과 지진으로 점점 파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번에 내전 중에 있는 시리아에서 무장군인들이 또 어린이 49명을 포함 해 시민 108명을 학살해 국제 사회가 격분했습니다.

극적으로 살아난 11살 소년은 자신의 눈 앞에서 가족 6명이 테러범이 무차별로 쏜 총에 맞아 숨졌다고 합니다.

이런 비인륜적인 극악한 살육의 배후에는 인간성을 짓밟고 파괴하는 사탄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이슬람무장 세력의 잔악한 테러로 지금 이라크에서는 크리스천들이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남편을 죽이고 아이를 데려가 몸 값을 요구하다 돈을 주지 못한 어머니 앞으로 불에 구운 6개월 아들을 소포로 보냈다고 합니다.

공포 영화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얼마 전 목포에서 후배와 함께 부모를 죽이려고 잠든 부모 방에 침입해 벽돌로 부모를 마구 내리 친 10대 아들이 구속되었죠.

부모들이 상당한 액수의 생명보험을 들어 놓은 걸 알고 있던 이 패륜아가 평소 자신을 마땅치 않아 했던 부모님을 살해 하고 보험금을 타낼 생각으로 범행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 있어서는 안 될 반인륜적인 범죄들이 점점 증가하는 우리나라 사회가 큰 걱정입니다.

OECD국가 중 살인율이 6위라는 통계가 며칠 전 나왔잖습니까?

검거 된 패륜 아들은 최근 자기 마음 속에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자주 일어났다고 진술했습니다.

가인의 마음 속에 미움을 통해 아벨을 죽이게 한 사탄은 처음부터 살인자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사람의 미움과 분노를 통해 목적을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미움의 정체를 꿰뚫어 보시고 마태복음에서 형제에게 노하는 것은 곧 살인하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요한일서 3장 15에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 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지속되면 마귀에게 틈을 내주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미움이란 감정을 통해 우리를 파괴하려고 노리는 마귀의 세력을 대적하시길 바랍니다.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항상 사랑과 평안 가운데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고 삼키려고 달려드는 사탄의 계획이 아무리 집요하다 해도 하나님은 결국 애굽을 심판하시고 그 백성을 구해내시는 것이 출애굽의 결론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학대 속에 두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고난 속에는 영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애굽은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7년의 기근이 끝난 뒤 사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기억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막상 애굽에서 집을 짓고 안정 된 삶을 살다보니 가나안의 떠돌이 장막 생활이 싫어졌습니다.

내친 김에 눈 질끈 감고 아예 자리를 잡았던 것이죠.

죄의 자리란 것이 그렇습니다.

처음에 마음이 좀 불편하고 신앙 양심에 걸리지만 우리 죄성이 아주 쉽게 그 자리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스스로 돌이킬 수 있을 때를 놓치자 이젠 자기 힘으로는 나가고 싶어도 못나가는 노예 신세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기10장에 보면 악인에 대한 참 재미있는 비유가 있죠.

그는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는 죄 한 두가지 쯤 있을지 모릅니다.

주의 하십시오.

욥기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것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그걸 토해내게 하는 게 고난입니다.

이미 고대문명이 꽃을 피운 이집트의 풍부한 문화와 문명이 이스라엘 눈에 너무 흡족했습니다.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아주 잊고 애굽이 마치 천국인 양 삼백오십년을 눌러 앉아 살고 있었다는 것이죠.

억압과 고통이 없다면 절대로 애굽을 나오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절구공이로 몸을 빻는 것 같은 노예 생활을 겪고도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얼마나 애굽 생활이 그리워 눈물 흘렸는 지 출애굽기에 잘 나와 있지요.

애굽에선 우리가 재미있었다고 한탄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애굽에 고통이 없다면 그 누구도 굳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만사형통하고 아쉬운 것이 없고 이 세상에서 누리고 살 것이 너무나 많다면 그런 사람은 내세의 소망을 갖기가 힘듭니다.

우리가 매 주 두 번 이 인근 지역을 다니며 전도하는 데 참 전도가 힘듭니다.

그만큼 교회주변이 생활적으로 비교적 안정되고 아쉬운 게 없다는 것이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말씀이 이런 이유죠.

때로 우리 형편이 노예처럼 비참하고 내 힘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곤경에 처하게 될 때 우리를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부르심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약함과 고난 때문에 우리 소망을 천국에 둘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나가면 오히려 우리를 축복의 자리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장로교회를 담임하는 나0일목사님이라고 계십니다.

이 분이 너무 성격이 소심해 사람 앞에 서는 게 힘들고 두려웠다고 합니다.

신학교 시절 설교학 시간에 설교 시연 순서가 되었는 데 소심한 성격 때문에 버벅거리다 그만 울면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 사건이 너무 마음에 상처가 되고 설교에 대한 두려움은 점점 더 커졌죠.

처음 전도사로 부임해서 새벽기도 설교를 하게 되었는 데 역시나 울렁증을 이기지 못하고 너무 당황해서 11장 준비한 설교 원고를 읽는 데 마지막 11번째 장을 먼저 읽어버린 것입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다시 1페이지를 찾아 겨우 겨우 읽어내려 갔다고 합니다.

나목사님은 대중 앞에 서기가 두려운 자신의 약점 때문에 더 겸손하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오히려 더 귀하게 보시고 지금 7만5천명의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목사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 약점, 우리 인생의 고통과 다룰 수 없는 문제들이 절대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나갈 때 이길 힘과 지혜를 주심을 우리 청년들 믿으시고 마음을 강하게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출애굽기3장7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난을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녀를 보고 계시고 우리를 돕기 위해 직접 팔을 걷어 부치고 내려오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낙심되고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용기를 갖고 다시 믿음을 추스르고 하나님께 나가시길 축원드립니다.

오늘 나눈 진리들을 잘 간직하시고 영적 애굽에서 우리를 구해주신 하나님께 날마다 감사하는 성도님들 되신다면 우리 믿음의 길에 충만한 기쁨과 축복을 주시리라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