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모세와 불타는 떨기나무-출애굽기3장1절-10절

남수연 2011. 7. 26. 17:54

 

지난 주에 우리는 갈대상자에 담겨 버려졌던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로 하셉수트공주의 품에 안기게 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왕궁에 있어야 할 모세가 본문에서 광야의 양치기목자가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모세가 광야에 있게 된 경위를 간단히 살펴 보겠습니다.

입양 후 모세는 40년간을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성장했습니다.

마땅한 왕위 계승자가 없었던 당시 이집트의 역사로 볼 때 모세는 왕위까지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고 합니다.

그의 양어머니 하셉수트공주는 아버지 투트모세1세가 아들이 없이 죽고 왕위에 오른 사위를 밀어내고 20년간을 섭정을 합니다.

사위인 투트모세3세는 자신의 왕권을 대신 휘두르는 장모와 그의 양아들 모세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었겠죠.

그런 가운데 나이 40세가 되자 모세는 애굽의 학정에 시달리는 이스라엘을 돌아볼 마음을 갖게 됩니다.

본문 앞 출애굽기2장11절을 보면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사도행전7장23절은 더 확실하게 이 부분을 설명해줍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볼 생각이 나더니

히브리서11장24절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모세는 어머니 요게벳에 의해 하나님을 배웠고 하나님이 반드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특별난 출생과 기적적인 구원을 얻은 자신이 그 일에 택함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이제 동족 가운데 자신을 드러내고 지지 세력을 모아 탈출을 도모할 계획을 세우려 현지조사차 히브리인의 노역 현장에 나가봅니다.

노역 현장은 모세의 생각보다 훨씬 비참했겠죠.

가혹한 노역현장을 보자 그만 모세의 의분이 끓어올랐고 노약자를 학대하는 애굽 감독자를 보는 순간 40세 모세는 울분과 혈기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출애굽기2장12절을 보면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참 냉정하게도 모세의 이 행동이 실수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왕궁의 잔혹한 전술과 무예를 익힌 모세는 어느새 세상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가치관 속에서 어떤 사람들 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느냐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서머셋모옴의 레인이란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남태평양의 사모아섬에 배가 정박합니다.

그곳은 연중 7500미리의 살인적 강우량을 보이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큰 비를 만난 배가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오래 머물게 됩니다.

배에는 선교사가 한 사람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에 머무는 동안 여관에 묶고 있는 윤락녀 톰슨을 교화시키겠다고 매일 여인을 만나 오랜 시간을 보냅니다.

하루 하루 시간이 지나며 톰슨의 자태가 정숙해지고 변해가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놀라 수런대기 시작합니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렸고 배는 여전히 마을에 머물러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이 발칵 뒤집힐 사건이 일어납니다.

선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부는 예전보다 더 방탕한 웃음을 웃으며 여관에서 떠들고 있는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었는지 알만하시죠?

선교사의 믿음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죄인인 인간이 죄를 가까이 한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면 죄와 마귀의 일이 현저한 곳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모세는 살인에 대한 아무 죄책감 없이 그 공사현장에 또 나간 것을 보게 됩니다.

이번엔 유대인 둘이 싸우는 것을 보고 때린 사람을 훈계를 합니다.

그러자14절에 그가 이르되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 라고 말합니다.

연이어 노역 현장에 나와 얼쩡거리는 모세의 의도를 이 남자가 벌써 눈치 챘다는 것이죠.

아마도 유대인 중에도 모세의 신분과 권력을 통해 민족을 위한 큰 일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엔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며 히브리인의 자존심을 버린 모세 따위를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부류도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7장25절은 이 부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결국 살인 행위가 탄로 나자 모세는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 일을 알게 된 바로 왕이 그를 죽이려했다고 기록합니다.

일국의 왕자가 노역 현장 책임자 하나 죽였다고 체포되어 죽게 된다는 게 잘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을 보면 이 때는 이미 꽤 나이가 든 하셉수트의 권력이 약화되었다고 봅니다.

공주가 더 이상은 모세를 보호해줄 수 없게 되었고 투트모세3세는 이 기회에 눈에 가시 같던 모세를 죽여 버리려 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죠.

이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 모세의 광야인생 시기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의 중간지역인 미디안광야로 도망 간 모세는 미디안종교의 제사장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을 해 두 아들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광야에서 4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늘 본문은 드디어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셔서 출애굽의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알지만 오늘 모세 사건을 보며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을 또 감히 해봅니다.

40년이면 보통 인생의 절반입니다.

그 세월동안 모세를 광야 학교에 맡겨두시고 하나님은 인기척 한번 안 내십니다.

때로 우리가 믿음의 시간을 보내며 어쩜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를 모른 채 하실까 낙망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오늘 모세를 보고 위로 받으시길 축원드립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를 만나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총80년을 기다리십니다.

오늘 본문에 와서야 하나님과 모세의 첫 대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대면해 만나지 못했다고 낙심할 일이 아니지요?

모세는 광야학교에서 40년의 교육 기간을 보낸 것입니다.

사도행전7장30절 사십 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 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십 년은 이미 정해진 기간이고 그 기한이 다 채워져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광야교육 기간이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작정하셨다면 반드시 그것이 찰 때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단과 순종이 먼저고 그 다음이 응답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처사가 가혹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온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인 줄 믿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광야인생을 살펴보길 원합니다.

그의 왕궁의 인생 보다 광야의 인생이 더 궁금한 것은 우리가 광야 같은 메마르고 거친 곳에 서있을 때가 더 많기 때문인지 모르죠.

 

도대체 우리 인생에 이 광야는 무엇이고 왜 하나님은 모세에게 메마르고 거친 광야를 통과하게 하는 것일까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광야의 인생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고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를 통과해야만 비로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모세가 왕궁에서 사는 40년 동안 그가 하나님을 특별히 찾았다는 기록도 하나님이 그를 찾아왔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가 시도했던 민족구원 사건에서도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무지했고 하나님의 인도를 바라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출애굽의 지도자로 완벽하게 준비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힘과 능력이 그 일을 해내리라 확신했던 것이죠.

결국 자신의 능력을 믿고 시작했던 일이 그를 한낮 도망자 신세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우리 능력이나 가진 것이 그리 대단한 게 아닙니다.

작은 난관과 시련만 만나도 여지없이 빈약한 실체가 드러나버리죠.

큰 파도와 폭풍을 이겨내며 인생을 건너가기엔 역 부족인게 우리가 의지하는 것들의 실체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결국 광야 학교를 통해서 자신의 죄와 한계를 알게 되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와 같이 민족을 향한 선한 의도로 일했다 광야에 갇히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로버트 0이라는 사람입니다.

미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 로버트 0씨가 미국에서 국가기밀 유출죄로 수감되어 9년의 수감생활을 하고 석방 된 사건을 기억하실런지요

삼선의원인 김0곤 국회의원의 형인 그는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국 퍼듀대학으로 유학을 가 미 해군정보국의 분석관으로 일했습니다.

당시 미 해군은 통신 정보 관련 장비를 한국에 팔기 위해 노력 중이었습니다.

로버트 김은 한국대사관 해군 대령을 만나 이 시스템이 한국 실정에 잘 맞지 않으니 심사숙고 하라고 조언했습니다.

그 후에 강릉무장공비 침투사건 관련 정보 등을 대령에게 우편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해 FBI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이미 다른 국가에 알려진 문건이므로 스파이 혐의가 부당하다는 주장 속에서 그는 9년간의 복역과 출감 후 전자발찌를 착용하고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 김0삼 대통령이 워싱톤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이 사건은 개인적인 일로 우리나라와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럼 누가 나라를 위해 일하겠냐고 사람들이 발끈했습니다.

그의 구명 운동을 벌이고 성금을 걷고 야단이 났었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그에게 9년은 광야의 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도 역시나 암흑 같은 시간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철저한 믿음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출감 후 그는 교도소에서는 하나님만 바라보았는 데 오히려 밖에 나오니까 딴 생각이 많다고 말합니다.

그의 광야생활 9년은 남은 인생은 선교사역과 후진 양성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소명을 받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옥에서 조국이 자신을 버렸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지만 광야는 결국 세상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게 하더라고 말합니다.

40년간 모세 역시 수없는 기대와 실망과 원망을 반복하며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게 됩니다.

광야의 사막 너머로 모래바람만 일어나도 혹시 자신을 데리러 오는 공주의 군대가 아닐까 두근거렸을 것입니다.

히브리인 같은 여행객이 광야를 지날 때 혹시 동족이 자기를 보러오는 건 아닌지 설레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모든 사람들이 실패한 모세를 잊어가고 있을 때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이 그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나의 존재감이 사라져가는 것 같은 외로운 광야에 있을 때 이사야49장15절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오늘 본문 7절에서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질고를 보고, 듣고 알고 계시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는 기다림을 배우는 곳입니다.

로버트 0은 수감생활을 겪고 나서야 역설절으로 하나님은 확실히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이 할 일은 조용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 뿐이라고 말합니다.

기다릴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주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제일 먼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가장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인간 구원이 사람의 수고와 노력과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젊은 모세의 섯부른 출애굽 시도는 큰 실패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자칫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에게 학살 당했을 수 도 있습니다.

모세 자신의 운명도 마찬가지 였을 테죠.

설령 출애굽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민족해방일 뿐이지 영적출애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사고치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과 기대를 모르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더 아름답게 성취되고 우리에게 완전한 축복이 되게 하려면 기다리고 연단 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패했다 생각하고 낭비라고 생각했던 광야 40년은 그의 출애굽 사명에서 가장 완벽한 훈련이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를 헤맨 40년의 경험으로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40년 광야생활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나의 실패로 광야를 헤매게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곳에서 또 다른 내일을 준비시키실 줄 믿습니다.

우리의 광야의 고난이 결코 낭비나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그러므로 어떤 광야에 서 있다 해도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견고하게 이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우리가 또 기억해야 할 것은 광야는 우리의 기업을 누릴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1절을 보면 그는 아직도 장인의 양 떼를 치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그가 40년을 일했으나 여전히 남의 양을 돌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역시 도망하여 외삼촌 라반의 집 양을 돌봐주는 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돌아올 때 하나님이 수많은 소와 양을 거느린 거부가 되게 하셨음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여전히 장인 밑에서 자기의 사업이 아닌 남의 일을 거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40년이라면 이미 처가살이에서 벗어나 자기 양을 돌보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왜냐하면 모세에게 하나님이 맡기 실 다른 양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때로 아무리 기도하고 애를 써도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면 하나님이 딴 길을 준비하고 계신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모세 또한 광야에서 기업을 누릴 의사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3절에 보면 그가 불타는 떨기나무가 타서 재가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이 한마디에서 모세의 세상살이에 대한 권태와 지루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 세상일이란 게 그렇지 않습니까?

대단한 일 같았는 데 알고 보면 다 그렇고 그런 일이었다는 거죠.

구경거리에 몰려들지만 곧 허탈하게 발 길을 돌리는 게 세상일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을 보았을 때 모세의 내면에 남아있던 사명에 대한 불씨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 붙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는 40년 광야 끝에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를 부르신 게 아니라 직접 모세 앞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오셔서 모세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4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가 돌이켜 그 광경을 보려고 오는 것을 보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떨기나무에 불을 붙여 놓고 모세가 그걸 보고 구경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떨기 나무 가시덤풀은 언제나 광야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 떨기나무에 오늘 하나님께서 꺼지지 않는 불을 붙이심으로 모세의 관심을 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실 때 사소한 일상 속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무언가를 일으키십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어느 날 하나님은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을 걸어오십니다.

어느 날 우리 인생에서 이런 별 다른 일이 자꾸 벌어진다면 하나님은 이 사인을 보고 돌이켜 하나님을 보라는 뜻인 줄 믿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달라진 어떤 환경 속에서가 아닙니다.

그냥 일상의 한 순간, 우리가 길을 걷고, 차를 타고, 밥을 먹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런 때 그것들에 하나님의 불을 붙이시는 것을 느낍니다.

어느 날 나의 두 다리로 활보하는 이 시간이 특별난 은총이란 것을 깨닫게 되지 않습니까?

막막해 헤쳐 나갈 수 없을 것 같아 걱정하던 문제가 어느 순간 할 수 있을 것 같은 소망의 빛을 쪼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질병과 통증으로 이를 악물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 내 가슴에 확 들어오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명도 우리의 응답과 구원의 확신도 이런 우리 일상에 속에서 준비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뜨겁게 만나지 못했다 해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인도하고 사랑함을 믿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오늘 본문의 모세가 그렇지 않습니까?

일찍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태어나고 인도를 받은 모세가 오늘 처음 하나님을 대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6절에 자신을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는 것을 봅니다.

모세처럼 큰 일에 쓸 사람에게도 80년 동안 보이지 않게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평생에 그를 인도하셨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모세에게 오신 하나님은 네가 선 곳을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흙먼지가 날리고 떨기나무 메마른 덤불이 굴러다니는 광야 같은 인생도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거룩한 곳이 되는 줄 믿습니다.

사무실 내 책상과 컴퓨터 앞에서도 하나님을 바라고 경배하는 곳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볼품없는 가시덤불 속에 오셔서 모세를 부르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의 불은 그 곳이 어디든, 그가 누구든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는 뜻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비록 믿음이 부족하고 세상의 재능과 능력과 권력이 부족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세상의 온갖 더러운 곳을 밟고 다닌 우리의 신을 벗고 순종하면 되는 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신을 신고 나서려하지만 하나님은 네 발의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가는 길은 우리의 의지대로 걸어갈 길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모세는 볼품없고 메마른 떨기나무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왜 그 영광스런 하나님께서 하필 이런 메마른 가시덤불  떨기나무 속에 임재하셨습니까?

오늘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자는 이 땅에 오시기 전 성자 하나님인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가장 보잘 것 없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꺼지지 않는 불처럼 타올라 우리를 구하러 오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해야 할 볼품없이 늙은 모세와 자신을 낮추어 종의 형상을 입으실 성자 하나님이 대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백성을 구하는 일에 나와 함께 하자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광야 같은 메마른 나날 속에 은혜로 나타나시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의 존귀한 사역에 함께 가자는 주님의 초대임을 믿습니다.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하늘의 상급을 위해 오늘도 불타는 떨기나무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일상에 삶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구하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