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스라엘의 대지도자 모세가 태어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대개 국가나 일반 종교의 지도자들의 탄생엔 과장 된 설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백제무왕의 탄생설화를 보면 어머니가 용과 정을 통해 낳았다고 합니다.
석가는 어머니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 땅에서 금연꽃이 올라와 석가의 몸을 받았고 용이 나타나 물을 뿜어 목욕을 시켰다고 하죠.
목욕을 마치자 아기가 즉시 일곱 걸음을 걷고 사자후를 토하며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고 말하자 해가 갈라져 두 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에 비하면 예수님의 탄생은 참 초라하기 그지없으십니다.
마굿간에서 태어나 말 먹이통에 누워 잠들어 계셨으니 말입니다.
모세의 탄생 또한 그렇습니다.
우리네 인생처럼 기대와 절망이 뒤섞이고 초조와 불안 속에 인생이 시작됩니다.
오히려 그는 탄생과 즉시 죽어야하는 운명 속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모세를 살리시고 또 그를 통해 노예의 철장에 갇힌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인류의 구원을 가로막는 악한 세력을 뛰어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 나타난 사건입니다.
그리고 오늘 모세와 같이 우리 삶이 좁은 공간에 옴짝 달싹 못하게 갇힌 것 같은 절망적인 때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이 선포될 때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관하셔서 깨닫는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먼저 본문의 비극적인 사건이 생기게 된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모세가 탄생한 때는 성경 출애굽기와 이집트의 역사자료들을 통해 기원전 1527년경으로 봅니다.
조상 야곱의 아들 중 형들에 의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된 사건을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극심한 7년 가뭄을 피하라고 가나안땅에 살고 있는 아버지 야곱과 형의 자손들을 애굽으로 초청하게 되죠.
세월이 흘러 총리였던 요셉은 죽고 팔레스타인의 기근은 해소되었지만 야곱의 자손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창세기46장4절에 보면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이스라엘을 이끌고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시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소망하기보다 부족함 없이 부하고 화려한 문명국 이집트에서 살길 원했습니다.
세상에서 죄악의 낙을 누리며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죄성에 더 맞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11장 8절에 보면 마지막 때 심판당하는 세상을 영적 애굽이라고 말씀한 것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이 누리려던 이집트의 광영은 잠시 뿐이었습니다.
요셉은 죽고 새 왕이 등극합니다.
새 왕은 급속히 불어나는 유대민족을 경계 해 감독자를 세우고 고된 노동을 시키며 그들을 노예로 결박해 버립니다.
노예가 되었으니 이제 자기 힘으로는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가나안땅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애굽 왕 바로는 늘어만 가는 이스라엘의 종족 수를 줄이려고 영아학살이라는 끔찍한 명을 내립니다.
남자아기가 태어나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것이죠.
바라던 영화는 간데 없고 집집마다 아이를 빼앗긴 비명이 터져 나오는 가혹한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다는 얘기가 80년이나 더 지나서 출애굽기 2장에 가서야 나옵니다.
인간이 다 털리고 의지할 것 없는 빈 손이 되어야만 두 손을 쳐들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어리석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약속대로 그들을 이끌고 나올 모세를 스스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부르짖는 기도에 앞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필요를 아시고 꼭 맞는 시기에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매일 체험하며 사는 축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 이런 암울한 역사 속에서 모세가 태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나누고 싶은 첫 번째 교훈은 곤경에 처한 여인 요게벳의 믿음입니다.
레위족보에 속한 여인 요게벳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절망에 빠집니다.
혹시 아들을 낳을지 모르니 임신 사실을 감쪽같이 숨겼겠죠.
그랬기에 임신한 몸으로 힘든 노역을 감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출산 할 때 온 집안은 참담한 슬픔에 빠지고 맙니다.
남자아이였습니다.
그러나 요게벳은 아들을 숨겨서라도 키워야겠다고 결정합니다.
부모로서 당연한 일 아니냐고 할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요게벳에겐 이미 미리암과 아론 두 자식이 있습니다.
지엄한 바로의 왕명을 거역하고 아기를 숨겨 키운 사람에게 이미 일벌백계로 온 가족이 몰살되는 최악의 형벌이 내려졌을지도 모릅니다.
아기 울음소리는 몇 날 못가 밖까지 들릴 것이고 기껏해서 얼마나 감춰 키울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가 그런 위험을 감수했던 이유를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다
아기가 핸섬하게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뭔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 눈에 자기 자식이 다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거지요.
사도행전 7장 20절에서 스데반은 설교에서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 달을 길리우더니
이 아기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요게벳은 이 아들이 장차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이끌 지도자가 될 거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애굽 노예 생활은 이미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 때 하나님이 예언하셨던 사실입니다.
창세기15장13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6절에 이어서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보다 애굽을 선택하고 진력나는 노예생활을 사백년 씩이나 버티며 해나 갈 것을 아셨습니다.
사실 그것도 모자라 애굽을 탈출하고도 광야에서 틈만 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 정도였던 것 아시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의 코를 꿰어서라도 반드시 가나안으로 데려오겠다는 약속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자기들의 능력과 의지 때문이 아니었듯이 우리들 구원도 우리 마음대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하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세상의 낙을 더 즐기던 우리를 인도하여 이 축복의 자리에 앉히신 줄을 믿습니다. 아멘.
유대인들이 아브라함과 야곱에 말씀했던 가나안의 귀환 약속을 알고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요셉은 이 귀환 약속을 알고 애굽에서 죽을 때 이렇게 유언하는 것을 봅니다.
창세기50장25절 당신들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때 꼭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 주시오
그리고 출애굽 때 그 유언대로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메고 나왔다고 기록합니다.
출애굽기13장1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믿음의 여인 요게벳이 그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어린 아이가 그들을 이끌 지도자가 될 것을 또한 알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게벳이 대담하게 왕명을 어기고 모세를 숨길 수 있었던 것이죠.
이것을 믿음장인 히브리서11장에서 이렇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의 뜻을 이룰 아이임을 아셨기에 두려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숨겼다는 것입니다.
신구약의 말씀이 서로 연결되어 사실을 명확하게 해석해 주는 것이 너무 놀랍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서34장16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수록 믿음에 확신이 생기고 점점 견고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씀에 근거하여 세운 믿음이 마지막 때 영적인 혼란과 세속주의에서 우리를 강건하게 지켜 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요게벳은 그렇게 숨겨 키운 아들을 석달 만에 나일강에 버리게 됩니다.
석 달이면 아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때인지 우리가 잘 압니다.
목을 가누고 엄마를 보면 눈을 맞추며 방긋거리고 웃으며 옹알이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아기를 이제 와서 바구니에 담아서 내다 버린다는 게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며칠 전 있었던 폭우로 밀양지역에서 산사태가 집을 덮쳐 세 명이 사망한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습니다.
진흙 더미에 묻힌 아기 엄마만 사투를 벌이다 간신히 구조됐는 데 응급차로 옮기려는 걸 뿌리치고 어디선지 안경을 찾아 쓰고 피로 범벅이 된 얼굴 울며 우리 아기 우리 아기 하고 기어 다니며 아기만 애타케 찾았다고 합니다.나중에 아기의 시체가 엄마가 구조 된 바로 곁 1미터 지점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아기 엄마는 그렇게 가까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더 죽을힘을 냈을 텐데라고 오열했다고 합니다.
아이를 살려낼 수만 있었다면 엄마는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놓았을겁니다.
지난 2008년 중국 쓰촨성 대지진 당시 온 몸으로 몇 십 톤의 무게를 버텨가며 아기를 보호하다 척추가 부러져 사망한 위만만씨가 있습니다.
그는 두 살짜리 딸을 지켜내기 위해 부러진 허리의 고통을 참고 젖을 먹이며 만 24시간을 흙속에 갇혀있었습니다.
나중에 구조대가 흙더미를 걷어내니 죽은 엄마 품에서 아기가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그 때 흙더미 속 속싸개에 발견된 엄마의 휴대전화에는 "사랑하는 나의 보배야 만약 네가 살아남으면 꼭 기억해다오 엄마가 널 사랑했다고"라고 적힌 문자가 남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1964년 일본인을 놀라게 한 작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도쿄 올림픽경기장을 확장하기 위해 3년밖에 안된 인근 어린이집을 헐게 되었습니다.
지붕을 벗겨내다가 지붕 한쪽 벽 모서리에 꼬리에 못이 밖힌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집주인을 불러 그 못을 언제 박았느냐고 물었더니 집을 짓던 3년 전에 박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못이 박힌 채 죽지 않고 3년 동안이나 살아 있었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이 신기한 사실의 까닭을 알기 위해 공사를 잠시 중단하고 그 도마뱀을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변해버린 환경에 두리번거리면서 못에 박힌 도마뱀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못에 박힌 도마뱀에게 3년 동안 먹이를 먹인 것이죠.
나중에 동경대학 동물학 교수가 두 도마뱀을 잡아다가 조사했더니 먹이를 날라준 도마뱀은 바로 못에 박힌 도마뱀의 어미였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동물의 모성애도 이렇습니다.
그러니 어머니라면 차라리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과 함께 죽을지언정 악어가 드나드는 차가운 나일강에 바구니에 담긴 아기를 띠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게벳은 모정을 뛰어넘어 믿음을 선택합니다.
아기를 데리고 있으면 아기는 백 프로 죽을 운명입니다.
요게벳은 하나님을 믿고 승부수를 띄운 것입니다.
자신의 보호와 능력의 한계가 다 되었음을 알고 하나님께 아이를 맡기는 결단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자식을 위해 우리의 최선을 다하고 그다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의 힘겨운 현실에서 문제를 놓고 최선을 다했다면 역시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요게벳은 마지막 까지 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는 갈대상자를 준비합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애굽 신앙 중에 신에게 예물을 바치고 모조품을 만들어 갈대상자에 넣고 나일강에 띄우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요게벳은 그렇게 갈대상자를 위장해 죽음을 막으려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어머니는 갈대상자의 틈새로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역청과 나무진을 칠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성경말씀 때문에 큰 덕을 본 기업이 있다고 합니다.
석유왕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한 때 미국내 석유 점유율 88%를 차지했던 기업입니다.
이 회사의 중역 가운데 신앙이 돈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성경 출애굽기 2장을 읽을 때였습니다.
모세의 어머니가 100일 된 모세를 갈대상자에 담아 강물에 띄워 보내야만 했을 때 역청을 가져다가 갈대 상자에 칠했다는 내용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는 역청이 굳은 상태의 석유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곳에 기름이 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장소를 추정해 지질학자를 보냈고 드디어 석유를 캐내게 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스탠더드 오일회사는 세계적인 석유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죠.
말씀을 가까이 하면 이런 축복도 임하는 줄 믿습니다.
당시 배를 만들 때 아스팔트원료인 역청을 방수제로 사용했습니다.
노아의 방주를 만들 때도 이 역청을 발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머니는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다하고 아기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우리가 암담하고 막막한 현실에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다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인생의 결과, 일의 결과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달린 것인 줄 믿습니다.
보십시오.
아기 바구니가 갈대 사이를 따라 떠다니다 바로의 공주의 눈 앞에서 머물렀습니다.
우리가 이런 결과가 오도록 해 낼 능력이 있습니까?
없으시다면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시길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 교훈이 바로 결과를 하나님께 맡겼을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한 이 바로의 공주는 이집트 역사와 문헌을 통해 그 당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왕 투트모세 1세의 딸 하셉수트 공주라고 추정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공주에게는 아들이 없었다고 합니다.
딸이 하나 있었는 데 일찍 죽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공주가 바구니를 발견하고 가져다 뚜껑을 열었을 때 어린 아기 모세가 슬프게 울었다고 6절에 기록합니다.
아기의 울음은 공주의 모성을 일깨웠습니다.
죽은 딸이 생각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아기가 없는 공주의 심기를 염려해 왕궁엔 아기 울음도 웃음도 들리지 않게 했을 것입니다.
정말 오랜만에 아기를 안아 본 공주에 마음에 온기가 느껴지고 긍휼과 사랑이 꿈틀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감동이 공주의 이 마음을 견고하게 붙들었습니다.
아이에 대한 사랑이 일시적인 감동이었다면 요게벳이 데려가 젖을 먹이는 동안 그 마음도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주는 그 아이가 왕명에 의해 버려진 걸 알면서도 젖을 뗀 모세를 데려다 아들을 삼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십니다.
사람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면 유일한 해결 방법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만져주시는 것입니다.
악화 된 관계를 아무리 인간의 힘으로 해결하려 해도 어림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더 꼬이고 더 악화되어 가는 것을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6장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의 대적인 원수의 집에 아기 모세가 왕자로 입양되어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아들이 없었던 바로의 공주는 모세를 왕국의 후계자로 훈련시킵니다.
영아학살이란 참극을 하나님은 오히려 모세를 지도자로 키우는 기회로 사용하심을 봅니다.
만일 모세가 비극적으로 물에 버려지지 않았다면 지도자 모세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그저 애굽의 어른 노예로 성장했을 것입니다.
모세 위엔 이미 세 살 된 아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 모세가 태어날 즈음에 딱 맞춰 영아학살의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 왜 하필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고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지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에게 고난과 시련도 축복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가장 믿을 만한 진리인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에게 역경과 고난이 없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주어지는 양식으로 연명하며 악한 마귀의 노역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영원한 축복의 땅을 고대하게 하시고 소망을 갖고 우리 걸음을 인도해 가시는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 작은 소녀의 믿음을 살펴 보려합니다.
바로 본문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누이 미리암 입니다.
어린 미리암은 죽어줘야 할 운명을 갖고 태어난 동생을 살리기 위한 고통을 분담했습니다.
문 앞에 지나가는 발소리만 들어도 어린 가슴이 얼마나 조렸을까 생각해봅니다.
갓난 아기 때문에 석 달 동안 집안은 살얼음판 같았을테죠.
부모가 노역장에 끌려가면 어린 남동생은 미리암 손에 맡겨졌을 겁니다.
철없는 어린 누이가 부모들 마음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어차피 옆 집 아기도 다 죽었는 데 우리 집만 왜 이래야하냐는 생각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죽을 남동생이 불쌍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아기가 담긴 갈대상자를 나일 강 갈대 사이에 두고 부모가 떠난 다음에도 누이는 그것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4절에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란 말 속에는 원어로 아주 기대하고 바라보았다는 뜻을 품고 있습니다.
어린 미리암은 하나님의 인도를 믿었고 하나님이 어떻게 동생에게 행하시는지 기대를 품고 지켜보았다는 것이죠.
우리가 이 문제 저 문제 잔뜩 기도해놓고 일어설 때 우리에게 응답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까?
그냥 기도나 한번 해보자란 마음은 아닌지요.
미리암은 하나님의 인도를 확신했고 하나님은 그 확신에 응답하셨습니다.
공주의 품에 동생이 안기자 누이는 달려 나갑니다.
한낮 노예의 딸이 시녀들이 둘러 선 이집트의 공주를 향해 당돌하게 달려 나가 유모를 구해주겠다고 나섭니다.
잘못했다가는 둘 다 위험하게 될 수 도 있는 지경에 어린 누이가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동생에 대한 사랑인 줄 믿습니다.
요게벳에게 미리암의 이 마음이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웠겠습니까?
우리가 아직도 심판과 죽음 앞에 있는 형제를 위해 간절한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기쁘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형제와 자매 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번 수련회에 우리가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성령 안에서 큰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그리고 미리암의 이런 담대한 행동은 그의 어머니에게 배운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살 된 아이를 안고 어머니가 랍비를 찾아갔습니다.
우리 아이를 언제부터 교육을 시키면 좋겠습니까?
랍비는 아이의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었습니다.
두 살이라고 말하자 랍비가 대답했습니다.
벌써 이 년이나 늦었습니다.
어린 아이 때부터 믿음으로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기독교 설문조사 기관인 바르나 리서치가 미국인 4천 2백 명을 대상으로 표본 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19살이 넘으면 기독교인이 될 확률이 6%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미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미리암은 훗날 여선지자 미리암이 됩니다.
미가 6장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미리암을 이렇게 인정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었느니라
우리의 자녀들이 일찍부터 믿음으로 바르게 성장해 하나님의 소중한 일군도 되고 인정받는 지도자도 되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죽을 운명을 갖고 태어난 모세를 살린 것은 갈대상자였습니다.
이 갈대 상자의 원어는 노아의 방주와 같은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십계명이 들어 있던 법궤도 똑같은 단어입니다.
갈대바구니와 노아의 방주엔 죽음의 물결 들어오지 못하도록 반드시 역청을 발라야 했습니다.
방주와 갈대 상자에 발랐던 역청은 몸값이란 다른 뜻을 갖고 있습니다.
역청을 위에 칠하다란 말엔 덮다, 속죄하다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갈대상자와 노아의 방주에 칠했던 역청과 속죄를 위해 법궤에 뿌려졌던 짐승의 피는 모두 예수님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가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죽을 운명을 갖고 태어난 자신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갈대상자에 의해 살았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죽을 운명으로 태어난 인간들입니다.
우리 또한 구원의 갈대상자인 예수님을 통해 새 생명을 얻은 줄 믿습니다.
이번 수련회를 통해 우리의 구원자 되신 사랑의 예수님을 말씀과 기도 속에서 더 깊이 체험하는 은혜가 임하실 줄 확신합니다.
오늘 본문은 또 모든 희망이 끊어진 것 같은 암흑의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을 예비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 개인의 구원의 여정도 마찬가지인 줄 믿습니다.
비록 폭풍우와 흑암이 우리를 둘러 위협하는 상황 속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갈대상자를 예비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 가정이 이 험한 파도가 출렁이는 세상에서 안전하려면 오직 갈대상자이신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방향 키도 없고 닻도 없이 떠내려 가는 갈대상자이지만 하나님이 조정하시니 늘 평안하고 안심하며 인생의 바다를 건널 줄 확신합니다.
오늘 요게벳은 믿음으로 아들을 살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키웁니다.
그리고 당당하게 히브리서11장인 믿음 장에 자신의 이름을 올립니다.
우리 아이들을 갈대상자에 담으시고 기도하며 믿음으로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 알아서 그 길을 인도하시고 믿음의 지도자가 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을 확실히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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