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만달란트 빚진 자와 백데나리온 빚진자 비유(마태복음18장21절-35절)

남수연 2010. 10. 25. 17:47

 

만약 누군가에 의해 한 순간에 사랑하는 가족과 집과 모든 것을 잃게 된다면 우리는 과연 그를 용서할 수 있을까요?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입니다.

2년 전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날 정오 샌디에고의 한 주택 거실엔 행복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백일이 되어가는 하영이는 막 옹알이를 시작했고 두 살난 하은이는 동생 곁에서 재롱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산후 조리를 돕기 위해 한국에서 온 친정어머니와 영미씨는 햇살 아래서 차를 마시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 멀리서 굉음을 내며 미군 전투기가 한 대가 추락하며 이 집을 덮쳤습니다.

순식간에 집은 화염에 휩쓸리고 네 가족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직장에서 이웃친구의 전화를 받은 동윤씨는 가족의 사고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의 부축을 받고 재 냄새가 가득한 현장에 도착한 동윤씨의 발이 집 가까이에서 땅에 붙은 듯 떨어지지를 않았습니다.

도저히 못가겠습니다. 목사님.

저 곳에 부인과 아이들이 있습니다. 가야합니다 목사님의 말에 그의 발이 떨어져 잿더미가 된 자신의 집 앞에 서게 됩니다.

미국 전역의 관심이 집중 된 기자회견에서 그는 비통한 눈물을 삼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은 하나님 품안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추락사고를 낸 조종사를 용서합니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을 저는 압니다.

그러나 나는 내 가족들이 눈 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보다도 더 비참한 경험을 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내게이런 비통한 처지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지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그의 아름다운 용서는 전 미국을 울렸습니다.

그는 4년 전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미국에 와 독실한 믿음을 가진 간호사 아내 영미씨를 만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의 가장 처참한 순간에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용서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용서에 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배우려 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너무 큰 용서를 내놓아서 죄송합니다.

사실 우리는 하찮은 일에도 발끈하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 용서가 구원의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용서에 대한 한편의 설교를 통해 우리 마음 깊은 곳에 해결되지 않은 용서에 관한 해답을 오늘 얻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오늘 본문의 예수님과 제자들은 용서라는 주제로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교사라서인지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반 수업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수업을 보고 있노라면 주님이 가르치시는 데 무척 애를 먹으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주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이 반 학생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대부분의 복음서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엉뚱한 대답과 반응을 보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하늘나라의 윤리는 이 땅에서 살아왔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습니다.

죄인에게 맞추어 죄인이 만든 인간의 윤리는 이 땅에서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젠 다른 나라 국민이라는 것 입니다.

이 땅의 법이 아닌 하늘나라의 법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평생 유대인의 율법을 기준으로 살아왔기에 그 사고를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땅의 나라를 자꾸 하나님의 나라에 가져다 붙이려고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도 과거의 방식 그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동안 살았던 것 위에 예배와 기도 같은 종교 활동을 덧붙이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계속해서 하늘나라의 새 법을 말씀하시고 그들은 계속해서 인간의 법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열심히 듣고 있던 베드로가 질문을 합니다.

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질문도 좀 하지 않습니까?

역시 베드로가 수제자인 것 같습니다.

21절에 보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냥 질문을 하면 좋았을 텐데 약간 오버합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세 번 까지 용서하라고 되어있거든요.

이젠 하늘나라 시민이 되었으니 좀 넉넉하게 써서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되지않겠냐고 묻습니다.

이정도면 자신이 너그럽지않냐 과시하는 의도도 살짝 엿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뒤통수를 탁 칩니다.

일곱 번이 아니다 일곱 번을 일흔 번 씩이라도 용서해라

문자적으로 490번을 용서하라는 말씀이고 그 이상도 하라는 무한대의 용서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상상도 못할 대답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많이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더 깊이 있게 설명하기 위해 오늘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거의 그렇듯이 우리가 한번 읽었을 때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 속에도 역시 아주 깊은 구원의 원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럼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어떤 임금이 신하들과 결산을 합니다.

그런데 한 신하가 만 달란트를 빚져서 붙잡혀 왔습니다.

만 달란트가 얼마인지 잘 모르실겁니다.

그 당시 헤롯왕이 거둬들인 1년 세입예산이 900달란트였다고 합니다.

화끈하게 요즘 시세로 환산해서 알려드리자면 수 천억원 정도 됩니다.

정말 간이 부은 종입니다. 어쩌자고 그런 큰 빚을 지게 되었는지.

왕은 25절에 그의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으라고 준엄하게 명령합니다.

물론 그 당시 종의 몸값이 10분의 1달란트 이하였으므로 다 판다고 해결 될 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종이 엎드려 절하며 다 갚겠다고 사정을 하자 임금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실제 있을 법한 상황이 아닙니다.

한 인간이 진 거액의 빚도 그렇고 거액의 빚에 집착하지 않고 종을 긍휼히 여겨 모조리 탕감해 주는 임금도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는 왕입니다.

이 비유는 물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죄의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의 빚이 이 종과 같이 천문학적인 액수라는 말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다 팔아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팔아서만 갚을 수 있는 게 바로 내 죄 값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기들의 죄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 지 가늠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선택받은 백성 유대인이고 나름 율법을 지켰으니 죄의 값이야 얼마나 되려나 싶었겠죠.

오히려 자신들을 꽤 괜찮은 사람들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 본연의 무지함입니다.

사람들이 그러잖습니까?

내가 뭐 그리 큰 죄인 이라고 ? 이정도면 남 보다는 훨씬 낫지 않나?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칠 때 당신은 죄인입니다.라는 걸 설명할 때가 가장 어렵습니다.

우리가 죄인 인 것은 성령께서 가르쳐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리가 이런 무지막지한 죄인임을 깨달으셨다면 축복받은 일입니다.

오늘 본장의 1절에서도 이들은 천국에서 누가 제일 큰 자냐고 예수님께 질문을 했었습니다.

질문의 의도는 우리 중 누가 주님나라에서 일인자가 될거냐는 것이죠.

그들은 수시로 누가 더 큰지 다투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 그 때는 그만큼 무지했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먼저 가르쳐주십니다.

너희의 죄가 율법을 조금 지킨다고 해서 용서받을 만큼 약소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 조금 착한 마음을 먹고 남을 조금 도와주는 행위로 해서 청산할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리고 이 큰 죄를 오직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용서해 주셨다는 것을 예수님이 똑똑히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비유를 보십시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일 데나리온이 하루 일당 정도로 계산 되니 백 일치 임금 즉 석달 반 정도의 월급 정도입니다.

한 천만원 안 쪽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빚을 졌던 채무자가 이번엔 포악한 채권자가 되어 그 동료의 목을 잡아 끌고가 빚을 갚을 때 까지 옥에 가두어 버렸다고 합니다.

큰 용서를 받은 자가 할 행동이 아니네요.

그 못된 종의 결국이 어땠습니까?

왕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는 즉시 괘씸죄에 걸립니다.

결국 그의 탕감되었던 빚은 고스란히 그의 손에 돌아가고 그는 다 갚을 때까지 옥에서 나오지 못하는 판결을 받습니다.

그 천문학적인 빚을 어떻게 평생에 갚습니까?

무기징역이죠.

오늘 예수님이 형제의 죄를 무한대로 용서해 주라는 첫 번 째 이유는 너희가 계산할 수 조차 없는 죄 값을 용서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큰 용서를 받았으니 형제의 작은 죄를 용서해주라는 말씀이십니다.

네게 지은 형제의 작은 죄를 용서 못하는 것은 이 못된 종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그리고 엄중한 선고를 내리십니다.

너희가 마음으로 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죄 값을 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우리에겐 구원과 관련 된 가장 중요한 항목입니다.

성도님들 마음에 혹시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으십니까?

우리 정말 큰 일 난 것 같습니다.

누구나 용서하지 못한 사람 한 두명은 품고 사는 게 보통 아닙니까?

그러나 다행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용서하지 않는 자는 다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비유에 보면 임금이 종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가 그의 악한 행위를 보고 판결을 번복하여 종을 옥에 가둡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했다가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다시 심판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에는 어떠한 다른 조건이 필요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려 대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본문을 보고 은혜로 용서했다가 죄인의 행위를 보고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랬다 저랬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도 불순종한 유대인에 대한 심판의 경고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선택되었습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는 조건으로 구원을 약속받았던 것이죠.

그러나 그들에겐 심판을 면하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긴 역사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죄악으로 징계 받는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종에게서 탕감 받은 죄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단 한 부분도 표현되지 않은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이 없음을 지목하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47에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라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 같이 유대인은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감사한 것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감격과 감사가 없으니 그들에게는 형제를 용서할 능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율법의 채찍으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사정없이 정죄할 뿐입니다.

율법의 정신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핵심을 다 빼 버리고 자신들만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유대인을 심판하시는 메시지가 본문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 받을 자들이 이 유대인 뿐이 아니라는 것에 주의하십시오.

35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 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같이 하시리라

우리가 마음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잘 모르고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잘 모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즉 용서하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구원받지 못했으므로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받았다면 이제 할 일은 용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먼저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너희 죄도 용서하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구원에 대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주신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잖습니까?

이것은 자녀 된 자들의 윤리요 날마다 지켜야 할 새 계명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해 괴로운 밤을 얼마나 많이 보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명령하셨다면 우리에게 용서의 능력도 주셨다는 뜻인 줄 믿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겐 성령으로 말미암은 용서의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가 할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국의 가장 아름다운 용서와 사랑이 우리들 가운데 이곳에서도 임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주위에서 보면 명절에 형제들이 모여도 화목한 집이 참 드문 것 같습니다.

집집마다 몇 안 되는 형제들 사이에 꼭 불화가 있고 부부 간에도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명절이라 내려 온 아들 내외가 싸움이라도 하고 와서 부모님 앞에 앉아 있다면 부모님 마음이 또 어떻겠습니까?

형제들이 화목한 것 만큼 부모님께 흐믓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제사 중 화목제물은 하나님께 일부를 드리고 나머지는 그 가족들과 함께 뜰에서 먹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과의 화평 뿐 아니라 성도들의 아름다운 교통도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신명기 27장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서 즐거워하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명절에 한상에 둘러 앉아 먹고 즐기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안먹어도 배부르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에 우리는 형제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용서는 죄인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닙니다.

그래서 용서는 훈련이 필요하고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에도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용서해야할 당위성을 말씀합니다.

33절에 임금이 이렇게 말하죠.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내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이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용서는 여전히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교만하고 제멋대로 입니까?

얼마나 자주 주님을 원망하고 등을 돌리는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은 회개할 때 마다 용서해 주십니다.

요한일서 1장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그러므로 우리도 내게 죄를 지은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나의 진심을 악의로 갚은 사람, 나의 사랑을 배신하고 등을 돌린 사람,

나의 존재를 무시하고 짓밟은 사람, 나의 눈에 아픈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

내게 뼈아픈 괴로움을 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루이스 스미디스란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용서하고 내일 미워하다가 다음 날 다시 용서하게 될지라도 당신은 용서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용서의 전문가가 아니다

비록 실패한다 할지라도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용서를 결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

 

그리고 본문에서 예수님이 용서하라고 하신 두 번 째 이유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죄인이라 서로에게 셀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주고 죄를 짓게 된다는 뜻이죠.

나 또한 그 만큼 많은 잘못을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피차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자신의 영과 육의 건강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가해진 잘못이나 오해, 상처를 쉽게 잊지 못합니다. 심지어 그런 기억을 평생 되씹으며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뇌가 스트레스에 대해 반응할 때 최근 기억과 오래전 기억을 구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수 십년도 더 된 오래전에 벌어진 일이지만 그것을 다시 떠올리는 순간 몸에 생기는 스트레스와 불쾌감은 지금 눈 앞의 현실과 똑같은 비중으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과거의 나쁜 기억을 되새기면서 과도한 스트레스를 자가 발전하여 자신의 정신건강을 스스로 망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귀는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에 기분 좋게 둥지를 틀고 앉아 우리를 조정하고 비탄과 분노 속에서 불행한 삶을 살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용서치 못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가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용서하지 않음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우리의 건강을 해치고 불쾌한 기분으로 사는 것 이상의 심각한 파탄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올해 58세가 된 인천 000교회 이0 전도사는 21년 9개월 동안 미국 교도소에서 무기수로 살아왔습니다.

그의 인생을 회색 벽 안에 가둔 것은 그가 용서하지 못한 한 여인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1985년 5월 3일 한 여자를 살해했습니다.

평생을 함께 하자며 결혼한 여자가 영주권을 받은 바로 다음날 쪽지 한 장을 남기고 가출했습니다.

혼인 무효소송을 냈지만 오히려 깡패를 고용해 협박하는 여인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고 두 번이나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교도소 안에서 한 소년의 전도를 받고 나서 쇠사슬에 발목이 묶인 채 감옥 병실에 누워있는 자신이 변화되야 된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2007년 2월 한인교회 목회자 등의 석방 탄원으로 가석방 결정을 받아 출감했고 곧바로 한국으로 추방됐습니다.

지금은 재소자를 위한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끔찍한 죄를 짓게 하고 21년의 그의 인생을 회색의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오늘 형제를 용서치 않은 종이 옥에 갇혀있는 것이 생각납니다.

그동안 우리를 괴롭게 했던 미움과 섭섭함과 원망의 감옥에서 이제 우리가 나와야 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감정이 더 나를 강팍하고 황폐하게 하기 전에 그것을 주님 안에서 성령님을 의지하여 털어버리라 강권하십니다.

용서는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는 증표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윤동윤씨는 용서할 수 없는 상대를 용서함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자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보내 준 후원금을 평소 아내가 후원하던 복지단체에 기부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원하는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살겠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가 용서하지 못했다면 그는 분명 지금 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동윤씨의 인터뷰를 보면서 함께 울었다는 한 사람은 5년 만에 다시 교회에 나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죄인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죄성은 결코 남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도우시기에 우리가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돌아서면 죄를 짓고 돌아서면 실수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모든 죄를 언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엔도우 슈사꾸의 소설 「침묵」은 많은 사람들을 울린 명작입니다.

일본 도쿠가와 정권 때 기독교가 많은 박해 받고 수 많은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이 때 선교사로 파송 된 크리스토퍼 페레라 신부가 고문을 견디지 못해 굴복하고 배교했다는 소식이 본국에 전해집니다.

그의 배교에 충격을 받은 그를 가장 존경했던 제자 세 명의 신부가 생명을 걸고 일본으로 잠입해 들어갑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로드리고 신부가 결국 붙잡혀서 취조를 당하게 됩니다.

잔인한 고문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옆에 두고 교활한 일본인들은 예수님 상이 새겨진 동판을 밟고 지나가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그는 차마 예수님의 상을 밟고 지나갈 수 없었고 그의 고통에 침묵하시는 주님을 향해 울부짖습니다.

그때 그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밟아라. 나는 본래 밟히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냐?

나를 밟을 때 네 마음이 아플 것이다 마음으로 아파해 주는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다"

예수님의 사랑은 오늘도 우리를 용서하시고 또 용서하십니다.

예수님의 그 큰 용서를 아는 사람만이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로 14절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우리는 우리를 아프게 한 사람을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리의 아픈 기억과 나를 고통스럽게 한 그 사람을 주님 앞에 내려 놓길 원합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못한 내가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용서는 나 자신인지도 모릅니다.

내 맘에 들지 않는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를 내가 미워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결단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할 능력을 주시고 우리의 마음에 참된 기쁨과 평안으로 응답하시리라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