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진 것 중 하나가 오늘 본문인 8복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복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고 또 복을 받아야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장해 주신 복이 오늘 본문에 있으니 이걸 놓칠 수 야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실 팔복의 말씀을 읽으면 이게 무슨 복이야?
이런 복은 별로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복하고 너무 다르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마음을 우리가 먼저 이해하면 그 뜻을 깨닫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2000년 전 본문의 장소로 가보겠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무엇에 홀린 듯이 예수님을 따라 이동합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적을 목격한 것입니다.
장님이 눈을 뜨고 험악한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소리를 지르고 떠나자 사람이 온전해 집니다.
문둥병자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깨끗한 새 살로 덮입니다.
믿을 수 없는 수많은 기적이 자기들의 눈 앞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한시도 예수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사람들은 며칠 씩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4,5천명의 엄청난 군중들이 사흘씩이나 생업을 잊고 좇아 다녔다는 것이 마가복음8장2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좀 게으르고 그다지 활동적인 성격도 아니라 무슨 대단한 행사가 있다거나 볼거리가 있다고 해도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TV를 보다 별 볼일 없는 행사장에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인 것을 보면 참 고생들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들은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잠깐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색다른 것이 있으면 왠만한 고생은 각오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희한한 기적을 눈으로 목도한 군중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닐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통 수단도 변변치 못했던 2천년 전에 병자를 떼매고, 수레에 싣고, 들 것에 들고 예수님 주변에 그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무리들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고 연민을 느끼셨다고 성경 여러 부분에서 말씀합니다.
많은 기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권능을 보여주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는 이젠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시기 위해 산에 올라 앉으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가슴이 뻐근해지는 순간인지 모릅니다.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마음에 임했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가르치신 것은 천국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항상 이 땅에 있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를 다 이끌고 완전한 행복이 있는 하늘나라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대한 인간의 잘못 된 생각을 먼저 뒤집어 놓으십니다.
여기 몰려든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다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으므로 천국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을 보장 하는 여덟 가지 복에는 그들이 철썩 같이 믿고 있던 조건이 한 개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을 향한 예수님의 엄청난 선전포고이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다른 조건을 은근히 마음에 두고 계셨다면 오늘 다 버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천국에 이르는 8가지 심령은 하나같이 우리의 본성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죄된 본성을 가지고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십니다.
우리가 마음이 가난한가요?
애통한가요?
우리 마음이 온유합니까?
정말 의에 주리고 목마릅니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이 여덟가지 마음은 인간의 마음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었다 깨나도 이 마음 중 한 개라도 온전히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이 팔복의 심령을 온전히 가진 분은 예수님 밖에 없으십니다.
오늘 예수님 설교의 핵심은 바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주님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천국의 심령을 소유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주님과 함께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어 천국의 백성이 된 사람들에게만 이 팔복의 성품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TV를 보다 동물원에서 태어난 새끼 호랑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찌나 귀여운지 새끼 때는 호랑이나 고양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조련사가 어떻게 만지는 순간 크악 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덤빌 기세를 하는 데 영락없는 맹수의 왕 호랑이더라구요.
우리가 비록 천국백성의 초보자일지 모르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다면 우리에게는 천국백성의 그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팔복의 상태를 하나씩 생각해 보며 나의 심령이 지금 하늘나라에 속해있는지를 점검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하신 조건에 턱도 없이 부족한 우리를 발견할 것입니다.
팔복의 심령을 온전히 소유한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으시니까요.
그러나 그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이제 이런 성품이 자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심령을 다 보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을 꽤 뚫어 보시고 사랑과 권고로 이 말씀을 들려주심을 알아야 합니다.
좌우에 날 선 어떤 검 보다도 예리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을 비추고 변화시키는 은혜가 임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아멘.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입니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가난이고 가난을 축복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맨 처음 터뜨리신 폭탄 선언은 천국은 가난한 자들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한마디에 절반은 일어나서 집에 돌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천국도 좋지만 이 땅에서도 잘 먹고 잘 살아야지 무슨 소리냐는 것이죠.
그러나 오늘 천국의 본질은 심령의 가난에 있다고 합니다.
다행히 물질의 가난이라고 하시지 않아서 참 감사하죠?
가끔 6.25전후의 영상을 접하면 가난이 무엇인지 바로 가슴에 와 닿습니다.요즘도 아프리카 빈민국에서는 다 헤어진 옷을 입고 신발도 없이 오가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밥 한 끼니를 구하기 위해 매춘에 뛰어든 아프리카의 16살의 어린 소녀들을 보았습니다.
동생과 자신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그것 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말하는 소녀의 얼굴은 정말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가난한 얼굴이었습니다.
남아프리카에서는 무분별한 매춘으로 인해 우리나라 인구의 절반이상이 에이즈에 감염 된 상태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존심도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마음이 비어 바닥난 사람들을 말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온갖 죄로 가득 차 있고 세상의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 45절에서 인간의 마음에 가득한 악을 꿰뚫어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악한 자는 그 마음에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이 인간 심령에 가득한 악한 것들을 회개하여 쏟아낸 심령이 가난한 심령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종교생활 잘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지도자들은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의 겉모습만 지키며 종교적인 위선으로 가장한 그들은 구원의 조건을 자신들이 다 채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작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며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 행위를 했으니 천국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구세주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의 심령은 스스로 구원받을 조건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누가복음18장11절에 그들은 이렇게 기도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고 했으나 예수님은 자기를 높이는 이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팔복의 말씀을 준비하며 어떤 신부의 팔복강해를 읽어보았습니다.
광대기가 있어 글이 염렵하고 통찰력이 있게 팔복을 풀어놓았더군요.
그러나 그가 말하는 팔복의 가난과 애통과 온유가 그 글에서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드러내며 뽐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겸손마저도 자랑처럼 보였습니다.
설사 예수님이라도 허점을 보였다간 그의 펜 끝에서 난도질 당할 태세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부요해 결코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단언하십니다.
너희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올 수 없다.
하나님 앞에 너희가 자랑할 의는 아무 것도 없다.
너희는 완벽한 죄인들이다.
기도 좀 한다고, 봉사 좀 한다고, 신앙 생활을 오래 했다고 신학을 좀 안다고,,?
그깟것으로 의를 삼은 심령은 결코 천국에 올 수 없다 입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 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십자가에 처형해야 할 만한 죄입니다.
시시한 죄가 아닙니다.
인간의 교만은 절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도 주인으로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을 보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심판 날에 지옥의 판결을 받은 자들이 하는 행동입니다.
그들이 죽었는 데 살아 생전에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게 사실이라 하나님이 계시고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창조주를 몰라본 죄를 회개해야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이 회개했다는 내용은 한군데도 없습니다.
그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간다고 되어있습니다.
심판의 순간에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하나님을 향해 대들 수 있는 것은 인간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절대로 회개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회개하고 구원받으셨습니까?
너무나 감사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죄를 회개하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하찮은 선행 몇 개 정도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고 주제 파악한 가난한 심령이 바로 천국 갈 심령이라고 명확히 가르쳐 주십니다.
헷갈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때 주님은 너의 심령이 가난하냐를 묻고 계십니다.
회개한 마음으로 본질이 아닌 것을 다 들어낼 때 가난한 심령만이 남게 됩니다.
사실은 우리 인생이란 게 다 들어내고 보면 거덜 난 존재들 아닙니까?
우리의 삶은 이미 파산 선고한 것이나 마찬가지고 남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의 가난을 감추려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위선으로 덮고 나다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내려 놓으라고 하십니다.
가난한 심령 그대로 주님 앞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너 심령이 바닥 났는 지 다 아는 데 왜 부요하다고 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심령의 가난을 고백하고 주님 앞으로 나오는 자들에게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천국을 허락하신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모든 부요를 가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가장 가난한 자가 되었음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을 믿을 때 천국을 소유한 부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24절에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요한계시록 3장 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말하나 너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부끄러운 영혼을 보여주심으로 날마다 회개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 심령이 낮아지고 가난해져 날마다 주님 앞에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가난한 마음을 기뻐하시고 우리 마음에 당장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줄 믿습니다. 아멘.
둘째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애통하는 마음을 아십니까?
사랑하는 자의 죽음 앞에서 절망하여 슬퍼하는 것을 우리는 애통이라고 합니다.
애통은 모든 소망이 끊긴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사라져 버린 그것을 대신해 줄 아무 것도 없기에 위로 받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애통입니다.
저하고 근무하던 여선생님이 사고로 아이를 잃게 되었습니다.
다섯 살난 아들을 유난히도 사랑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집 앞에서 후진하는 덤프트럭이 이 작은 아이를 발견하지 못해 그대로 밀고 지나가 버린 것입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우리가 함께 병원으로 뛰어 갔는 데 할머니는 사고 당한 아이를 안고 와서 피로 범벅이 된 상의를 벗지도 못하고 넋이 나가있었습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가슴을 부여잡고 애통하게 우는 일 뿐이었습니다.
인간의 애통함이란게 무엇인지 그 때 알았습니다.
애통함에 위로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다른 무엇인가로 위로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애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오늘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애통하는 것이 복이라니요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영혼의 죽음 앞에 애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애통하는 마음 역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망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인간을 볼 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엔 태초부터 이 애통이 있었습니다.
인간을 살리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죽음에 내어줘야 하는 애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도 이 애통이 있었습니다.
유일한 살 길이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는 자녀들을 볼 때 예수님의 마음은 애통하게 울고 계셨습니다.
불치병으로 죽어가는 딸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한 젊은 아버지가 인터넷에 동영상을 올렸습니다.
아이를 살리기 위해 수술이 필요하다며 제발 한번만 도와 달라고 간청하는 이 30대의 젊은 아버지는 계속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자식이 죽어가고 있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애통하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이 지금도 이렇게 애통하시다는 것입니다.
너희도 나의 이 애통함을 함께 할 때 천국에서 위로를 받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식이 고통과 죽음 가운데 있을 때 다른 어떤 좋은 것이 있어도 우리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음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자기의 영혼이 구원 얻을 수 없도록 부패했다는 것을 아는 자의 애통함, 구원받지 못한 자들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는 애통함이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위로를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애통이 있어야 위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애통도 없는 데 무슨 위로가 필요합니까?
간혹 중보기도를 하다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을 위해 통곡과 애통함으로 마음이 미어지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 상대방을 위해 쏟아놓으시는 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 영혼과 가족과 이웃의 절망적인 영적인 상태를 볼 수 도 없고 결코 애통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애통함과 함께 할 때 우리에게 본문의 말씀과 같이 그 영혼의 살아남을 보고 기뻐하며 위로 받는 축복이 임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 절 하늘나라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 마음에 영혼으로 인한 애통함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으로 갈 때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애통한 마음을 주님은 축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애통을 통해 우리가 천국의 심령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셋째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입니다.
땅들 좋아하시죠?
먼 친척 할아버지 누군가가 돌아가시며 4대강 근처 어디에 땅이라도 좀 유산으로 물려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 우리는 물려 받을 땅도 없냐고 원망도 좀 해봤습니다.
톨스토이의 작품 중 많은 땅이 인간에게 필요한가 라는 제목의 동화가 있습니다.
땅에 대한 인간의 집착을 통찰한 내용입니다.
항상 땅을 좀 더 갖기 원하는 한 농부가 있었는 데 어느날 먼 부락의 추장이 1000루블을 내면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이 밟고 돌아오는 땅을 전부 주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러나 해지기 전에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면 땅도 없고 돈도 찾을 수 없다는 조건입니다.
항상 더 많은 땅을 원하던 그는 이 뜻밖에 횡재에 웬 떡이냐 싶어 흥분에 들떠 잠을 설치고 일찍 일어나 드디어 땅을 차지하려고 출발점에서부터 걷기 시작합니다.
여기 저기 좋은 땅이 자꾸 나타납니다. 이젠 돌아가야지 생각하다 앞을 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목초지가 펼쳐져 있습니다.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좋은 땅들이 눈 앞에 계속 나타납니다.
중천에 떠있던 해가 어느새 기울어져 감을 보고 깜짝 놀란 그는 아차 싶어 뒤돌아서 출발점을 향해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출발점은 아직 너무나 멀리 있어 해가 지기 전에 도저히 당도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후회하며 달려갑니다.
'땅은 바라던 원대로 많이 소유했으나 하나님은 그 땅에 나를 살게 하실지가 의문이다. 아! 이 고생도 수포로 돌아갔구나!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고 달려 겨우 출발점에 돌아왔으나 결국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맙니다.
그가 그 자리에 묻히는 것을 바라보던 지주는 인간에게 필요한 땅은 자신이 묻힐 단 여섯자 땅 뿐이다라는 독백을 합니다.
땅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인 욕심과 그에 따른 허무한 결말입니다.
많은 땅을 차지하고 남을 지배하고 살려는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이 죽으며 가져갈 수 있는 땅은 없습니다.
동화에서처럼 죽으면 묻힐 여섯자 뿐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소유 할 수 있는 것은 여기에 있는 땅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땅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무리들은 로마제국에 땅을 빼앗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땅을 다시 되찾기 위해 결사항쟁을 각오한 열심당원들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면 철창과 권력으로 압제하는 로마제국을 쳐 부수고 땅을 찾아 주리라 믿고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나라인 천국을 이 땅에서 회복하는 데 그 방법을 쓰실 수 없으셨습니다.
죽음으로만이 사랑하는 자녀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이 스스로 체포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성 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말도 아니고 마차도 아니고 멍에 매고 일하는 짐승 나귀, 그것도 아직 어려서 키가 작아 예수님 발이 땅에 닿을 듯 말 듯 했을 것입니다.
누가 이 예수님을 고대하던 메시야로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이 겸손한 메시야를 스가랴 선지자가 700년전에 이미 예언하기를스가랴 9장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나귀새끼니라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말씀하시길 나는 마음이 온유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누가 마음이 온유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 속을 휘저어 보면 가라 앉혀 놓았던 별의 별 더러운 것들이 다 떠올라오지 않습니까?
감춰놓았던 자존심을 탁 건드리면 혈기가 튀어 올라옵니다.
누가 날 괴롭게 하면 분노가 치솟습니다.
때로는 질투가 마음을 들쑤셔 안절 부절하게 합니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맞추어서 별의 별 죄악이 다 드러나는 게 우리 죄인들입니다.
제가 워낙 죄인이라서 죄에 대해서는 좀 압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온유하지 않으면 천국 땅을 소유할 수 없다고 하시니 큰 걱정입니다.
우리가 거할 새 하늘과 새 땅은 이 땅은 온유하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천국의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시편 37장 11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 로다
온유함은 하나님의 자녀된 증표입니다.
우리 속에 혈기와 난폭함과 다급함과 분노 같은 것들이 온유함으로 다스려져야 하는 것이죠.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저는 성품이 비교적 온순하고 부드러운 편이라고 생각했으나 운전을 할 때 툭 튀어 나오는 난폭한 말에 때로 저 자신이 놀랍니다.
디모데후서3장3절에는 말세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기록하고 있는 데 하나 같이 온유와 상반되는 성품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말세의 성품에 반대 말은 온유 하나면 다 됩니다.
말세의 심판받을 성품을 버리고 온유한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우리가 온유할 수 있는 것은 마태복음 11장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하신대로 예수님께 배워야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나약하고 허약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는 고통 가운데서도 옆에서 구원을 요청하는 강도를 구원하십니다.
자신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나약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기의 피조물에 의해 처형되는 상황가운데서 혈기를 부리지도, 화를 내지도, 욕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품위를 잃지 않고 위엄 있게 죽으십니다.
모든 권능이 있음에도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는 것이 주님의 온유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 두고 온유를 배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 너무나 다른 축복을 전해주십니다.
우리가 추구할 것은 영혼의 축복입니다.
물질의 축복은 추구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받았다고 다 복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다 알고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많은 육신의 복도 그 마음이 고통스럽고 괴로우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따르며 천국의 심령을 배우며 살 때 우리 마음에서부터 천국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마귀는 세상의 자랑과 물질로 우리를 유혹하고 좇으면 좇을수록 갈증만 나는 신기루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영적인 축복이 먼저이고 영적인 축복이 육신의 축복을 더욱 복되게 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마음이 가난한 것이 축복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애통하는 마음이 축복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온유한 마음이 축복입니다.
이런 마음을 사모하며 날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복된 사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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