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으로 주신 가정과 가족에 대해 감사하는 달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 하나님나라의 미래인 어린이부와 청소년부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크게 축복해주시길 소망합니다.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잘 배우고 따르는 우리 아이들이 복되고 아름답게 성장해가리라 믿습니다.
우리 자랄 때 어린이날 받고 싶었던 선물은 그렇게 대단한게 아니었습니다.
새 크레파스 한 곽이면 감지덕지했던 시절이었죠.
요즘 아이들이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인지 아세요?
그 이름도 생소한 닌텐도게임기, 핫휠, 터닝메카드 같은 것들이라네요.
전에 한 학습지 회사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초등학생들이 받고 싶은 선물1위는 단연코 스마트폰이라고 합니다.
이미 초등학교 고학년의 경우 열 명 중 여섯 명은 스마트 폰을 쓰고 있다지만 그 아이들 역시 원하는 것은 고가의 새 스마트 폰이라는 것이죠.
확실히 문화적인 면에서 요즘 세대는 우리 세대랑 천지차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부모세대와 전혀 다른 자녀세대가 나옵니다.
부모세대의 신앙이 자녀세대로 이어지지 못함으로 인해 다음세대가 되지 못하고 다른세대가 된 것입니다.
어릴 때 릴레이 경주를 한번쯤은 해 보셨을 겁니다.
뒤에서 달려오고 있는 선수를 볼 때 가장 긴장되는 것은 바통을 넘겨받다 떨어뜨리면 어떡하나 하는것이였죠.
실제로 일등으로 달리던 반 선수가 바통을 놓치는 바람에 엉뚱한 반이 우승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다른세대는 부모세대의 신앙 바통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믿음으로 키워야 할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또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길 소원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사사시대의 서막을 올리는 시점입니다.
사사시대에 대해서는 전에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보김에서 우는 자들’ 설교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가나안정복을 주도한 여호수아장군 이후 사울왕을 뽑을 때까지의 약 삼백년 기간으로, 신앙적으로는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6절을 보면 광야 40년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분배 받은 땅에 잘 정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의 기운이 바로 7절에서 느껴지죠.
그들이 여호수아와 당대 장로들이 살아있는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다는 말은 그 이후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땅에 복이 내려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다스리시기에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우리 가정도, 회사도 축복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가나안땅은 더 이상 축복의 땅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세대가 바뀌자 그렇게 빨리 하나님신앙을 버렸을까요?
본문 10절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나중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하나님에 대해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습니까?
본문의 이 다른 세대는 어디서 뚝 떼어서 데려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분명히 여호수아와 장로들과 부모 세대의 신앙생활을 보고 자란 세대입니다.
자녀들이 우리의 신앙을 보고 저절로 믿음을 갖게 될 거라는 생각은 일단 착각이라는 것을 본문은 말해줍니다.
그리고 후세대가 하나님을 모르는 다른세대가 된 일차적 책임은 부모세대에게 있다는 것을 시편78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법도를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이는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하나님에 대해서 반드시 후대의 자손들에게 가르치고 그 법도를 지키게 하라고 명령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식세대에게 그들의 소망을 세상이 아닌 하나님께 두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구원의 큰일을 우리를 위해 행하셨는지를 자식들이 알도록 얘기해주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힘써 전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삶에 적용하고 지켜내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은 개념이 아니라 활동성입니다.
머리속에서 맴도는 게 신앙이 아니라 마음과 몸이 생활 속에서 움직여지는 게 신앙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런 참된 신앙을 올바르게 자식에게 전수하지 않으면 그들은 완고하고, 패역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께 충성되지 못해 광야에서 멸망한 출애굽 1세대와 같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사람들이 믿도록 모든 세대에 일일이 반복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홍해를 한 번 가르셨다면 똑같은 일을 또 하지 않으십니다.
기적은 그걸보고 믿으라고 번번이 재현되는 게 아니라 이미 보여주신 기적을 듣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시내산 위에 내려오셨던 하나님이 후손들에게 또 내려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생각과 영적인 체험에 따라 신앙이 멋대로 변조되지 않도록 믿음을 위한 완전한 교본을 성경으로 기록해 주셨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 같은 구원의 사건들 역시 그걸 목격한 사람들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주시고 우리가 그걸 믿은 것이잖아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과거 세대에 계시해주신 사실들을 근거로 해서 계속해서 전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서 이젠 손을 떼고 계시다는 말씀이 아니고, 한번 기적적인 응답을 하셨으면 끝이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도움을 구할 때 실시간으로 반응하시고,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을 체험하고 살면서도 어려움이 올 때마다 ‘이번에도 도와주실까, 이번에도 일이 해결될까’하며 또 의심합니다.
그게 바로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 양식이 없을 때,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이번에도 과연 도와주실지 말지, 하나님이 계시는지 아닌지, 하나님이 그런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번번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의심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라고 호되게 야단을 맞았죠.
하나님은 반드시 매번 도와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기대한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이기에 믿고 진득하게 기다리는 게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류의 구원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함축한 역사적 기적은 그 굉장한 일을 목격한 사람에 의해서 후대에 계속 전수되는 것입니다.
매 세대마다 홍해를 가르시겠습니까?
매 세대마다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겠습니까?
이것을 자식들에게 퍼 나르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들 세대에게 달린 것입니다.
자식들에게 좋은 습관 하나 갖게 하는 것도 얼마나 잔소리를 해야 하고, 때로 얼굴을 붉히면서까지 가르쳐도 될락 말락이지 않습니까?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명과는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본을 보이는 것만으로는 저절로 따라오지 않습니다.
아무렴 예수님만큼 본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보고도 따라오지 않았던 게 당대의 죄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역사에서 흔히 보는 것은 믿음 좋은 부모 다음에 얼마든지 형편없는 불신 자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부모세대가 자식들에게 하나님을 알리고, 그 말씀대로 지키도록 가르치지 않은 결과 그들이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는 다음세대가 된게 아니라 전혀 다른세대가 되버린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자식들에게 전수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하나님의 계통이 아닌 다른 영의 계통에 끼게 된다는 두려운 사실을 우리가 잘 기억하고 자녀들에게 바른 믿음을 잘 전수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부모세대의 또 다른 잘못은 가나안 문명을 남겨 두었다는 것입니다.
부모 세대 잘못이 많죠?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정벌의 이유가 가나안부족들의 죄악이 수위를 넘어 심판하지 않으실 수가 없었다고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가나안 종족들의 문명은 잔인함과 폭력성과 악령숭배로 대변됩니다.
바로 앞장에 보면 가나안의 한 왕인 아도니 베섹이 주변의 칠십명 왕들을 정복하고 그들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자기 상 밑에서 음식을 주워 먹게 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입니까?
또 가나안 종교는 자기가 복을 얻기 위해 자식을 신에게 인신제물로 바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새 집을 지을 때 그 집의 안전과 복을 위해 자식을 죽여 그 시체를 벽 속에 넣고 바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에스겔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내 자식을 죽였다’고 하십니다.
성적 타락을 말하자면 종교의식 중에 성행위가 포함될 정도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그로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 악을 단절하고 그 문명을 헐어야만 다음세대들이 하나님을 섬기며 이웃을 사랑하는 행복하고 좋은 나라를 이어갈 수 있는 것이고 이방의 모든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통해 복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세워진 세상의 문명과 문화는 발전하면 할수록 고통의 부산물만 많아집니다.
겉으로 보기엔 굉장한 걸 주는 것 같지만 근본적으로 아무도 행복하게 못합니다.
이 세상으로 말하자면 영적 가나안땅이지 중립이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세상을 지배하는 세상 신이 있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해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기 전의 나 자신과 하나님없이 세워진 세상이 결코 하나님나라에 맞지 않고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합니다.
나를 위해 조금이라도 좋을 것 같으면 뭐든 끌어안은 채 하나님 신앙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가나안 정벌은 영적으로 내 안에 뿌리박혀 있는 세속과 죄와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가나안 생활 내내 이스라엘은 바알신앙과의 혼합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사람들의 신앙은 이렇게 자기를 이롭게 할 모든 것과 끊임없이 혼합된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신앙을 관찰해야 합니다.
이전에 누군가에게 들어서, 어깨 너머로 배워서 얻은 신앙은 끊임없이 성경을 통해 검증해 나가야 합니다.
애굽에서 낳고 자란 출애굽1세대가 하나님을 믿은 것을 보면 애굽신과 혼합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 계명을 받으며 오래 머물자 산 아래 백성들이 담박에 애굽의 우상이었던 금송아지 형상을 만듭니다.
그게 하나님이라며 애굽에서 하던 대로 난잡한 제사의식을 하지않습니까?
카톨릭은 로마가 믿던 토속신앙에 기독교를 혼합한 결과로 성경 어디에도 없는 마리아숭배 사상이 출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경우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민속신앙인 천지신명의 개념과 기독교가 혼합되어 성부하나님만을 신앙의 주체로 여기는 경향이 있고, 하나님의 인격성을 천지신명처럼 막연하게 믿는 폐단이 있습니다.
성부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천지신명께 빌 듯 하나님을 섬기니 인격적인 신앙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 미국기독교의 경우는 지금은 또 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당시 카톨릭의 비성경적인 신앙을 벗어나 성경적인 신앙을 갖기 위해 청교도들이 건너가 세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아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경적인 신앙이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른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모르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여호와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 내려오셔서 인간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을 보여주신 예수하나님의 말과 행동을 통해 성령하나님의 역사로 성부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이신 줄 확신합니까?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굴뚝같이 믿고 따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사람들을 향해 보여주신 긍휼의 마음과 십자가에서 목숨을 주신 모든 삶을 통해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와 아들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인격과 권능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오신 하나님을 통해 보내신 하나님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 속의 기독교를 보면 가나안의 모든 악을 제거하라신 당시의 명령에 불순종한 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을 봅니다.
자기 부인이 필요하고 실질적으로 남을 위해 희생해야 하는 참된 예수님신앙을 바르게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최근 기독교는 다분히 세속적인 풍조와 기복주의에 신앙을 혼합시킨 것이죠.
오늘 이스라엘 부모세대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본토인과 문명을 남겨둔게 무슨 이유입니까?
사사기를 잘 살펴보면 그것은 본토인을 노예로 부리고 공물을 바치게 할 현실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우리의 세속적인 신앙모습은 결국 자녀세대에게 가나안세속 문명을 선호하는 토양에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녀세대가 어떻게 되었는지 본문 뒤 3장5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5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은 가나안 족속...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딸들을 맞아 아내로 삼으며 자기 딸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고 또 그들의 신들을 섬겼더라
아예 가나안 본토인들과 섞여 살면서 결혼도 하고 그들의 신도 섬기게 된 것입니다.
물론 자녀세대가 스스로 죄의 본성을 따라 가나안문명을 좋아해서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부모세대에게 주신 명령은 그걸 최대한으로 막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세속의 문화를 좋아하고, 세상과 깊이 어울리는 것을 신앙을 가진 부모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자식들이 당장 좋아라하기에 부모 마음이 그걸 이기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전도사님의 대학생 딸이 주말에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합니다.
한달 이십만원 용돈벌이를 한다고 주일도 안 지키고 카페에 나가는 데 딸이 고집을 부린다고 이 분이 그걸 단호하게 바로잡질 못하더군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카페 알바 좋아하죠.
카페의 가볍고 진지하지 않은 분위기가 진지한 걸 싫어하는 젊은이들에게 딱 맞아서 그런가봅니다.
주일예배도 못 드리며 어떻게 바른 신앙을 지켜가겠습니까?
아이들이 아무리 좋아하고 고집한다 해도 하나님이 뜻을 벗어나면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당장 따르지 않더라도 부모의 믿음으로 단호하고 엄중하게 하나님의 뜻을 밝혀야 합니다.
자식들이 부모에게 자기들이 하나님 다음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그렇게 깨닫게 해야지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은연중에 자기 때문에 부모가 하나님의 뜻을 꺾는 것을 보면 하나님도 대단치 않게 생각하게 됩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대하는지를 어려서부터 보며 하나님의 존재를 아이들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신앙의 책임을 부모에게 지우셨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또 다함께 정성들여 이들의 양육을 돕는 것입니다.
우리 청소년부를 맡은 전도사님이 아이들을 위해 새벽기도를 해야겠다고 말하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어린이부를 위해 남사모님이 얼마나 잘 교육시키고 계십니까?
이미 많은 교회에서 주일학교가 사라져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교계의 대표적 교단인 통합측 교단 소속의 교회의 경우 8천3백여 교회 중 주일학교가 아예 없는 교회가 50%에 달한다고 작년에 발표한 바 있습니다.
기독교선교단체의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청년세대는 이미 미전도종족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현재 청년세대의 기독교인 비율이 3% 남짓이라는 통계대로라면 선교대상국가가 되는 셈입니다.
다음세대가 끊어지고 노인들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럽교회와 같은 뼈아픈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오늘 말씀대로 부지런히 신앙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현세대의 신앙이 미래세대에 전수되지 않은 결과는 무엇입니까?
다른세대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풍속을 따르고 다른 신을 섬긴 결과가 본문의 뒤에 이어서 나옵니다.
15절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니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부모들이 분명한 신앙이 없어서든, 아니면 자식들을 이기지 못해서든, 그들에게 올바른 신앙이 전수되지 못한 결과가 이렇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좋아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막지 못했는데, 그 결과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재앙을 만나고 괴로움이 심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늘의 신앙전수의 실패로 가나안땅에서 여러차례 추방되어 세계를 떠돌다 성경에서 말씀한 교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오늘날 유명한 유대교육법을 정립해 나간 것입니다.
세계인구의 0.2% 밖에 되지 않는 유대인들이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막강합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의 65%가 유대인이고, 미국아이비리그에 다니는 학생 세명 중 1명이 유대인, 글로벌 100대 기업 중 40%가 유대인 소유이고, 전세계에서 자산이 1000억 이상인 백만장자 중 20%가 유대인이라는 통계가 있습니다.
철저한 가정교육에 기초한 유대인교육법은 구약성경의 율법과 율법을 실생활에 적용한 탈무드를 세 살 때부터 가르칩니다.
미국 역시 성경을 기반으로 해서 공교육에서 십계명을 가르치고 성경교육을 시킨 나라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개인의 인생을 밝혀주고 견고한 가정과 민족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 다 세 살은 넘었으니 성경교육을 철저히 시켜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어린이주일선물로 교회에서 좀 무리를 해서 성경책을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성경을 펴서 읽고 자녀들이 함께 읽도록 지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같은 본문을 펴서 한절씩 교대로 읽어나가면 좋습니다.
어린이들에겐 좀 어려운 옛날 단어가 많이 있지만 부모님께 묻고 답하며 점점 성경읽기에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도 사도들에 의해 전수된 구원의 믿음으로 굳어지고 우리 자녀들 역시 우리의 뒤를 이은 복된 믿음의 다음세대가 되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6년5월5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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