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18장1절-11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남수연 2021. 5. 27. 00:11

https://www.youtube.com/watch?v=GpCCCVIZ-Gk 

 

바울사도의 2차전도여행을 따라가며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은 2차전도여행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고린도 도시에서의 전도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동안 루디아와 점치는 여종, 간수가 회개한 빌립보 전도를 마친 뒤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을 거쳐 오늘 고린도에 도착합니다.

고린도에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은혜를 기대하며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고린도에서 바울사도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납니다.

1절,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들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안디옥 교회에서 2차 전도여행을 출발한 바울과 실라는 1차 전도여행 때 전도한 더베, 루스드라, 비시디아안디옥을 들러 윗지방 비두니아를 전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이 아시아 선교를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해변가 드로아에서 밤에 보여주신 환상을 따라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나눠드린 지도상에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을 거쳐 고린도까지 오게 된 것이죠.

이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납니다.

본문에는 남편 아굴라가 본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본도는 지도상에서 아시아의 북쪽에 위치합니다.

아굴라의 아내 브리스길라는 로마의 명문 가문 출신입니다.

이들은 천막을 만드는 사업가였습니다.

오늘날처럼 비닐을 박아서 간단히 설치하는 저렴한 텐트가 아닙니다.

당시 유럽의 대도시에는 도시를 상징하는 신들의 축제가 대규모로 열렸습니다.

그 축제와 경기를 즐기기 위해 도시를 찾아다니는 귀족들은 이동식 주택처럼 고가의 텐트를 사용했습니다.

요즘 캠핑카가 젊은 세대 로망이라는 데 가격이 34억짜리가 있더군요.

고급 주택 한 채를 굴리고 다니는 것이죠.

당시 귀족들의 천막이 캠핑카 못지않게 비쌌다고 합니다.

부부의 사업처는 로마에 있었고 이 사업으로 꽤 큰돈을 벌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4번째 황제로 등극한 글라우디오가 항상 분쟁과 소요를 일으키는 유대인들에게 로마 추방령을 내립니다.

로마에서 일군 사업을 억지로 접고 쫒겨난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에 와서 다시 사업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고린도는 당시에 물동량이 많은 유명한 항구도시였습니다.

돈이 많은 도시였겠고 당연히 환락의 도시였겠죠.

또 아프로디테 신전과 축제로 유명했기에 사업처로 아주 적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 보면 바울도 천막을 만드는 기술자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길리기아의 다소 출신이죠.

‘길리기아’가 헬라어 가죽이란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진 것을 보면 바울의 고향이 가죽이 유명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가죽을 다루고 천막을 만드는 고급 기술을 고향에서 배웠겠죠.

바울은 필요한 경비를 자력으로 마련하기 위해 도시에 들어가면 천막 업체를 먼저 찾았습니다.

이번에도 고린도에 온 바울이 아굴라를 찾아가 함께 살며 일하게 된 것이죠.

이렇게 바울서신에 여러 차례 이름이 등장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의 만남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울을 만난 이 부부의 삶의 변화를 우리는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바울을 만난 시점에서 이 부부에 소개에는 특이점이 없습니다.

그냥 본도에서 난 유대인 아굴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들에서 이 부부에 대한 칭찬은 남다릅니다.

아시다시피 사람은 잘 안 바뀌잖아요?

이들의 변했다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달라졌다면 그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보면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데 사람이 전혀 바뀌는 게 없다면 그것은 의심스러운 것이죠.

우리가 전보다 조금이라도 개선되고 나아진 게 있다면 다 예수님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누구의 전도로 예수님을 믿었는지 누가는 정확히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로마에서 이미 믿었다고 하고 어떤 신학자는 바울이 전도했다고도 합니다.

만일 아굴라가 처음부터 예수님의 제자였다면 분명히 주의 제자라고 소개했을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전도했다면 그 또한 분명히 기록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과 선교사역에 함께 했던 누가의 눈으로 보아도 그것이 분명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까지 전파 된 복음을 듣고 부부가 호의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다 바울을 만나 한 집에서 생활하며 계속 말씀을 배우던 중 진정한 믿음의 일군이 되었던 것이죠.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그렇잖아요?

언제 누구에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대체로 불확실합니다.

어떤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눈물이 나며 예수님을 믿은 것 같은데, 그 이전엔 믿지 않았나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요.

구원의 신비에 대해 바울은 자기가 씨를 뿌리지만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복음 전파자의 수고에 대해선 하나님이 반드시 상을 주시지만 구원 자체가 사역자에게 달린 것은 아닙니다.

사역자가 자기 능력으로 성령을 주고, 구원 받게 만든다는 생각은 심각한 착각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가로채는 범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나오잖아요?

10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하셨기에 듣고 믿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에서 일년 육개월을 머물며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가르칠 때 당연히 아굴라 부부도 배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어느 정도로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 23절부터 26절까지에 나옵니다.

이들이 성경에 능통한 학자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도인 복음을 더 정확히 풀어서 가르쳤다고 하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가 다른 사람을 가르칠 만큼 성장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일반 성도, 집사, 이런 분들이 이 정도를 감당했습니다.

성도들이 이만큼 해주지 않는다면 바울 한 사람, 목사 한 사람이 어떻게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다 전하고 일일이 양육하겠습니까?

또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 인생을 이해하는 관점도 달라지죠.

나만을 위했던 생애를 뭔가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합니다.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직업에 대해서도 당연히 달라집니다.

그동안 아굴라 부부는 돈을 벌 목적으로 로마와 고린도 같은 대도시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만나고 어떻게 변했는지 18절에 이런 기록이 있죠.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사역을 마치고 고린도를 떠날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갔다는 것입니다.

이미 고린도에 사업이 정착되었을 만 한데 바울의 전도 사역에 함께 하기 위해 아시아로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돈을 따라 사업처를 옮겨 다녔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일을 따라 다니게 된 것이죠.

바울의 편지인 서신서에 보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나옵니다.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의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이들이 적어도 두 개 이상의 가정 교회를 개척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어느 곳에 가든 복음을 전하고 자기 집을 교회로 내놓아 예배, 양육, 교제가 되도록 섬긴 것이죠.

세상에서 어떤 직업을 갖고 일하든 그 자체는 귀한 것입니다.

집을 짓는 것, 음식에 관련 된 일, 의복을 만드는 것, 의료기술에 관한 것, 범죄가 아니면 다 일 자체가 타인을 위해 기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겐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축복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제가 은평구에 있는 장례식장에 다녀왔습니다.

그곳에 있는 교회에 다닐 때 알던 후배 선생님의 남편이 췌장암으로 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문상을 갔습니다.

그 때 교사 구역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네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 전에는 저와 동갑이던 한 선생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한 사람이 남편을 떠나보낸 것이죠.

이제 저희 나이만 되어도 이런 저런 사별을 겪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우연히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선생님의 남편을 만난 거예요.

친하던 사람은 죽고 그 남편과 만나 얘기하는 것도 참 기분이 이상하더군요.

그런데 이 분이 이전에 알기로는 아주 돈에 인색해서 아내 선생님이 아주 힘들어 했었거든요.

제가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얘기를 나누다 그분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모은 재산들에 이제 아무 미련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 가져 가겠냐, 자식들에게 준들 의미가 있겠냐

앞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다 쓰고 빈손으로 갈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이 변했더군요.

예수님을 만나신 것이겠죠.

그런데 가면서 하는 말이 아내가 없어 혼자라 참 쓸쓸하다고 그러시더군요.

가정의 달, 특히 지난 주 부부의 날이 있었잖아요?

사람이 만나서 살다가 가족 간에 이별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내 식구들이 곁에 있을 때 아쉽지 않게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열심히 일해 번 돈으로 바울의 복음전파를 위해 후원하고, 자기 집 교회에서 사람들을 섬겼던 삶.

이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일하는 궁극적인 목적 아니겠습니까?

아굴라 부부가 로마에서 짐을 쌀 때는 어디로 가야할지 착찹했을 것입니다.

사업의 앞날이 어찌될지 염려로 가득했겠죠.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고린도에 놀라운 만남을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떤 삶의 고통을 지나왔든, 또 앞으로 어떤 풍랑을 만날 것이든,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를 믿고 안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처럼 우리 성도님들의 사업과 믿음의 사역이 모든 면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같기를 축원드립니다.

 

2. 바울사도의 입장에서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난 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로마에서 추방당해 고린도로 올 때의 아굴라 부부 만큼이나 바울사도 역시 꽤 낙심하고 힘든 마음으로 고린도를 찾았습니다.

고린도에 오기 전 바울사도는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행전17장21절을 보면 그때 아테네 주민들과 거기 모인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워낙 철학과 지식에 조예가 깊던 사람들이 모이던 곳이 아테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바울이 아레오바고 강연장에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이교도들,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정말 논리적으로 지혜롭게 복음을 설명한 훌륭한 설교를 하죠.

그런데 설교를 듣고 예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몇 안 되었습니다.

나중에 서신서들을 봐도 아테네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이 실패의 경험에 바울사도가 유럽선교에 대해 큰 부담을 느꼈을 것입니다.

돈과 향락과 우상숭배에 쩔은 이 고린도 사람들이 과연 복음을 받아들일지에 대해 염려와 두려움이 드는 것이죠.

목사들도 낙담합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바울사도가 자신이 고린도에 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말합니다.

게다가 선교팀이었던 실라와 디모데와 떨어져 혼자 고린도에 왔거든요.

성도들이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함께 하며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할수록 느끼는 것은 나 혼자 제대로 믿는 것도 힘든데, 남의 구원에 뭔가 관여한다는 것이 정말 버겁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제자공동체를 만들어 주셨고, 교회 공동체를 만드신 것입니다.

혼자 사업하기 힘들 듯, 하나님을 위한 사명을 동역자 없이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도 우리 교회를 지키기 위해 함께 최선을 다해 주신 성도님들 모두가 아니면 무슨 힘으로 지금까지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있겠습니까?

5절에 보면 실라와 디모데가 고린도로 온 뒤에야 바울이 다시 힘을 얻어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 밝히 증언했다고 합니다.

바울사도에겐 많은 동역자가 있었고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정말 특별한 동역자였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사도가 이렇게 편지를 쓰죠.

16장3절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절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바울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자기의 목숨 같은 어떤 희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바울을 감옥에서 빼내기 위해 전 재산을 들였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 안에서 만난 성도들은 다 이 사악한 불신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며 주님을 위해 일하는 귀중한 동역자들입니다.

서로를 위해 자기 목을 내 놓을 수도 있는 것이 믿음의 형제들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 있는 베델한인교회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한 구역에 성도님이 신장병으로 고생하던 중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해 신장이식 수술밖엔 살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도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렇듯이 그 구역에서도 신장 기증자가 나오기를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역장이신 집사님이 구역원인 이 분을 위해 간절히 기도를 하던 중에 어느 날 뜻밖의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네가 그 사람에게 신장을 주면 어떻겠니?’

처음엔 당치 않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기도할 때마다 계속 그 생각이 나더니 점점 현실적인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기도 중에 이런 감동이 온다고 말했더니 아내도 기도해 보겠다고 했고 얼마 후에 남편구역장의 말에 동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구역장님이 구역원 성도에게 자기의 신장 한 쪽을 떼어 준 것입니다.

이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바울을 위해 목이라도 내어 놓을 그런 사랑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의 목숨을 받아 구원받음을 깨달은 성도들이기에 가능한 것이죠.

사람의 본성으로는 할 수 없는 그런 사랑의 동역자, 그런 공동체와 함께라면 우리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 많은 사랑은 주지 못할지 모릅니다.

여기선 완전치 못하고 천국에 가서 완전한 사랑을 서로에게 줄 수 있겠죠.

그러나 여기서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몸이 힘들어 잘 섬기지는 못해도 서로의 힘든 문제를 위해 우리가 기도하잖아요?

우리 주나산 공동체가 주님의 사랑을 더 알아가고, 그래서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그런 결과로 나타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3. 예수님께서 바울을 찾아 오셔서 고린도 전도사역에 대한 확신과 힘을 주셨습니다.

9절,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마음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상에서 부딪치는 모든 두려움을 믿음으로 떨쳐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 내 의지와 결심으로 떨쳐지지 않는 큰 두려움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 두려움 속에서 전전긍긍 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그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큰 두려움 속에서 우리가 침몰했을 것이고 매일의 두려움도 넉넉히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의 감정을 아십니다.

하나님께 철벽을 친 사람들의 마음을 대하셨을 때, 바울이 고린도의 유대인들에게서 느꼈던 그 마음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심판받으실 주님께서 십자가 앞에서 인자로서의 두려움을 얼마나 크게 느끼셨는지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우리가 알 수 있잖아요?

그렇기에 우리 자력으로 이겨낼 수 있는 두려움의 한계에 부딪쳤을 때, 찾아와 이길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환경의 변화를 통해, 누군가의 위로를 통해.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보신 하나님이시라는 게 얼마나 다행입니까?그렇지 않다면 신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이 느끼는 그런 두려움, 슬픔, 분노, 아픔, 그런 것을 아시겠어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멸시와 모욕에 찬 욕을 먹을 때 자존감이 무너지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리죠.

그런 때 예수님께서 무지막지한 로마 군사들에게 상스럽고 험한 욕설을 들으셨다는 걸 생각하는 것이죠.

이 기분을 주님도 겪어 보셨잖아요?

배신의 아픔도, 사별의 슬픔도, 부모와 동생들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의 무게도, 신분적인 차별도, 살에 못이 박히는 신체의 고통도.

어느 것 하나 주님이 당하시지 않은 인간의 고통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전 찾을 수가 없더군요.

그 예수님이 내 마음을 헤아리며 항상 내 모든 상황과 삶 속에 함께 하고 계십니다.

오늘 바울사도에게 나타나셔서 그렇게 말씀하잖아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우리는 다가오는 불확실한 일과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들, 부딪쳐야 할 사람들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시는 우리를 해롭게 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얼마나 많은 반대와 조롱과 폭력에 노출되어 왔습니까?

본문 바로 다음에도 보면 유대인 회당장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새 총독이 부임하자마자 바울을 고소합니다.

이런 곤란한 문제들이 없을 수는 없지만 결국 우리를 해롭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고소를 당했으니 얼마나 바울사도 마음이 근심되고 위축되었겠어요?

그런데 결과를 보면 총독이 이건 종교문제니 너희끼리 알아서 하라고 재판 자체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이런 문제로 총독을 번거롭게 한다고 소송을 건 소스데네 회당장을 오히려 매질하는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담대히 일년 육개월 간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한다면 어떤 문제나 환경이나 우리를 해롭게 할 수가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사도의 고린도 사역이 눈에 선명하게 그려지십니까?

바울의 헌신적인 수고, 낙담, 그리고 성공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도하고 함께 하시는 예수님도 보셨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혼자 살 수 없고 혼자 주님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기에 가족과 교회 공동체를 주셨습니다.

이 안에서 함께 성장하며 서로에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되어주며 주님의 뜻을 하나하나 이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