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2장37절-47절 (우리가 어찌할꼬)

남수연 2022. 4. 28. 02:44

https://www.youtube.com/watch?v=-zeNonV-nOE 

 

지난 주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로 지켰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뒤에 어떻게 되셨을까요?

제자들이 기록을 남겨 두었겠죠?

누가는 1장8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마지막 당부를 하신 뒤 승천하심을 전해 줍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9절,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마가복음은 승천하신 주님이 영광을 받으심을 기록합니다.

16장19절, 주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예수님은 복음 전파를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오순절, 약속대로 성령께서 이 땅에 오셔서 대망했던 구원이 시작됩니다.

이 사도행전의 성도들은 구약성경과 복음서에서 답답했던 성도들과 다르죠.

‘그래, 이거지’ 이런 생각이 절로 듭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도, 증인의 말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도 성령님의 역사이십니다.

성령께서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의 뜻대로 역사하시는 것이죠.

오늘 말씀 중에도 성령님의 구원과 충만케 하시는 역사가 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십자가와 부활로 준비된 구원은 믿음을 통해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 구원의 전 과정을 본문 전반부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과정은 대개는 본문의 경우처럼 단시간에, 단번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일시에 구원의 전 과정이 이루어지게 된 것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구원사역을 한 눈에 이해하도록 담아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부분을 잘 이해하고 사진을 찍듯이 마음에 간직한다면 믿음과 구원이 손에 잡힐 듯 분명해질 것입니다.

구원의 방법이 십자가와 부활로 정해졌듯이 이것을 믿고 구원을 받는 절차와 과정도 분명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도장깨기를 하듯 이 단계들을 하나 하나 다 격파해야 하는 것이죠.

1) 먼저 구원의 복음,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증언을 들어야 합니다.

믿기 위해서는 무얼 믿어야 하는지 내용이 있어야 되는 것이죠.

말씀이 전해질 때 성령께서 사람들의 심령에 새창조의 역사를 하십니다.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중에 성령께서 임하고 계시는 것이잖아요?

이해를 위해 본문의 배경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약속하신 대로 오순절에 성령께서 지상에 임하셨습니다.

오순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던 유월절로부터 오십일 되는 날입니다.

유대인들이 꼭 지켜야 할 삼대 절기에 들어갑니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 삼대 절기입니다.

세계 여러나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까지 찾아와 이 절기를 지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은 유월절을 지킨 뒤 오십일을 머물러 있다 오순절 예배까지 드렸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삼대 절기 중에 두 개의 절기를 지키게 되는 것이죠.

이날 성령께서 초자연적인 이적으로 임하셔서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자 당시 예루살렘에 모인 15개국 교포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찬미하기 시작합니다.

전혀 배워보지 않은 외국어를 말하게 되었던 것이죠.

이것은 무아지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고 원문대로 보면 성령께서 각자에게 크게 들려주시는 말을 따라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자기가 태어난 곳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들은 순례객들이 희한하게 생각하며 관심을 보였겠죠.

그때부터 베드로가 구약성경을 능숙하게 인용하며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설교 내용을 보면 논리적이고 신학자의 설교 이상으로 완벽합니다.

뒤에서도 베드로가 공회에서 변론할 때 학문을 배우지 않은 어부 출신으로 설교가 너무 뛰어나 제사장들이 놀라는 모습이 나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일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오늘 베드로의 설교 전체를 보면 구약성경의 메시야 예언과 자기들이 목격한 예수님이 일치됨을 전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바로 그 증거라는 것이 베드로의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구원 얻는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 말씀,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임하셔서 거듭나게도 하시고 충만하게도 하십니다.

 

2) 그 다음은 말씀에 대한 깨우침과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설교의 마무리로 오늘 36절에서 이렇게 말하죠.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베드로가 하는 이 말은 신성모독죄입니다.

어디서 돌이 날라올지 모르는 말이예요.

그러나 베드로는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사람들의 죄를 추궁해 묻습니다.

저번에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그 베드로가 아닙니다.

‘당신들이 무슨 짓을 했나 분명히 알아두시오.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이오’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그들을 조준했습니다.

그 순간 말씀을 듣던 사람들의 마음을 무언가가 강타하고 사방에서 탄식이 터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37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사실 이 사람들은 당시 예루살렘에 머물고는 있었지만 빌라도의 재판정에서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주장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들의 마음이 찔렸을까요?

이것이 복음을 전하고 듣는 상황에서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알았고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십자가형에 동의한 것이고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과 똑같다는 것을 성령께서 송곳처럼 지목해 책망하신 것이죠.

바울사도가 회심하기 전,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에 대해 나는 살인자였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발뺌하지 못하도록 죄의 책임을 지우는 것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죄만 지목하시는 게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 쩔쩔매게 되는 것도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심판을 모른다면 사람들은 죄를 알려줘도 철면피 같은 얼굴을 할 것입니다.

사람이 지은 죄를 알지만 자기에게 불리한 죄를 순순히 인정하지 않습니다.

뻔히 드러난 죄도 요리조리 변명으로 일관하는 걸 많이 보잖아요?

성령님이 아니시면 누구도 찌를 수 없을만큼 사람의 양심은 두껍습니다.

십자가의 복음과 말씀을 들을 때 찔리는 게 있어야 믿음도 생깁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인정하는 것과 진짜 찔려서 자신의 죄의 본성을 깨우쳐 성경이 믿어지는 것은 다른 단계입니다.

본문에서 ‘찔렸다’는 단어는 비수를 꽂을 때의 느낌처럼 실제로 고통이 감각되는 것을 말합니다.

기막힌 일을 당하면 가슴이 막히고,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은 실제적 고통을 느끼잖아요?

신앙생활이 밍밍하기만 하고 맹숭맹숭하기만 하지 않습니다.

신앙에도 이런 죄에 대한 애통과 슬픔이 실제로 느껴지는 것이죠.

성령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음도 찌르십니다.

하루라도 찔리지 않고 살아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루라도 죄를 안 짓는 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찔림을 주셔서 죄를 멀리하고 점점 거룩한 성도가 되게 인도하시는 것이죠.

찔림이 은혜입니다.

지난 달에 왔던 자매가 그날 말씀에 찔렸다고 기뻐하며 돌아가더군요.

은혜가 뭔지 아는 성도인 것이죠.

마음을 후벼 파는 듯이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3) 이젠 회개를 해야 합니다.

여기서 회개하라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고 죽어 마땅하다 생각했던 잘못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믿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따르겠다고 결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가고 있던 길에서 과감하게 돌이켜 예수님을 따르는 게 회개입니다.

그 결심을 하도록 베드로가 다시 촉구하죠.

40절,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지금 예루살렘은 순례객으로 바글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율법의 절기를 지키겠다고 몰려와 제사를 드리며 북새통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인 소란일 뿐 이 세대는 패역하다는 것입니다.

예배와 신앙이 얼마든지 종교적인 소란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보고 이렇게 한탄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예루살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게 아닙니다.

그러나 책망을 받지 않고 계속 제 길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의로운 길을 촉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셨더니 결국 그 꼴을 못 보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버리잖아요?

예루살렘만 패역한 세대입니까?

이 세상은 어느 시대, 어느 문명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거스를 뿐입니다.

우리 사회가 어디 하나님을 따릅니까, 아니잖아요?

대신 서로에게 악을 행하고 거짓과 죄가 홍수처럼 넘쳐 납니다.

세상에 악의 암세포가 퍼져있지 않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전쟁이란 이름으로 공인 된 살인이 공공연히 일어나고 있잖아요?

사람을 죽이는 데 아무도 살인을 막지 못한다는 게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어떤 사람은 거액의 보험금을 타내려고 남편을 익사시키고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세금을 포탈하고 편법으로 증여를 합니까?

명예와 권력을 왜 부정한 돈벌이와 자식들 출세를 위해 씁니까?

세상은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패역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 세대를 따라 살지 말고 여기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의 공동체가 이 세대와 얼마나 다른지 본문 후반부에 극명하게 대비되잖아요?

회개는 이런 세상에서 그들과 똑같은 길을 가던 데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내가 살았던 세상은 단지 살기가 좀 힘들고 애환이 많은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파멸의 길임을 깨닫고 얼른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잠언 14장 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4)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결단을 합니다.

세례는 교회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민족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잖아요?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믿고 세례를 받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와는 온도 차이가 엄청납니다.

이미 유대사회에서는 예수님을 죄인으로 지정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유대교에서 출교시키기로 합의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더 이상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사회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초대교회를 박해하자 성도들이 집과 땅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는 일이 8장에서 벌어지잖아요?

우리는 세례받는다고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죠.

그래서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가 더 진단할 기회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포기한 게 없으니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한 값어치도 잘 모르는 것이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회개한 자기 심령을 공개하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또 신약성경은 이 물세례의 영적인 의미를 해석해 줍니다.

골로새서 2장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세례가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우리 안에 죽어야 할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나의 옛사람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를 받고도 죽은 사람이 여전히 내 인생을 끌고 가면 안되는 것이죠.

성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얻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새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상태인 내 옛사람이 불안하게 인생을 끌고 가는 것과 비교가 안되는 삶입니다.

세례 받고,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문장대로 보면 앞에 있는 것을 순차적으로 거쳐서 마지막에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것 같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성령께서 이미 역사하고 계시지 않으면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리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겠다는 이런 구원의 과정들이 진행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은 구원의 시작부터 구원의 완성까지 전 과정에서 역사하십니다.

이날 베드로의 전도를 받고 약 삼천 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첫 성도들의 교회 공동체 예루살렘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 절차를 다 통과해 구원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합니다.

 

2. 본문 후반부에서는 이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삶의 증거들이 이어서 즉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오늘 세례받은 삼천 명의 성도들에게 제자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령이 임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이들에게 성령이 임하시고 구원을 받았다는 다른 증거들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변화 된 모습으로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의 증거가 초자연적인 능력이 아닌 인격과 행동의 변화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믿고 구원받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겐 성령의 역사가 강하셨던 만큼 이 때는 완벽을 느낄 만큼 한순간에 성화 되고 변화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때만큼은 아닐지라도 성도들에겐 근본적으로 이런 변화가 다 있는 것입니다.

42절,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1)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알고자 하는 열망이 생깁니다.

2) 그리고 서로 교제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전에 세상 속에서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 보다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하길 더 좋아하게 되어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으면 대개는 교회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합니다.

저희 청년 때는 교회가 왜 그렇게 좋았는지 주일날 교회 주변을 벗어나질 못했습니다.

오늘 이 성도들도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속한 곳, 나의 소속이 어디인지가 이렇게 나타나는 것이죠.

어디 소속이십니까?

회사, 동호회는 영적인 성장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모이는 곳에서 무엇이든 영적 유익을 얻는 것이지 세상에서 얻는 게 아닙니다.

그렇기에 모이기를 힘쓰라고 성경에서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 이제 예배인원 제한이 없어졌지만 설문조사 결과 최소 10%, 최대 40%까지 성도들의 출석 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합니다.

오늘 성령충만을 받은 성도들이 돌아가서 개별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지금도 복음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3) 교회는 모여서 함께 떡을 떼는 성찬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교회가 사교모임이 아니라 성찬식을 통해 예수님을 기억하고 따르는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성찬식은 각자가 예수님을 경험함과 동시에 공동체가 주님의 살과 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가 척 봐도 서로에 대한 사랑이 진심입니다.

각자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인위적인 친교 프로그램이 없어도 더 성령 안에서 친밀하고 견고한 교회입니다.

4) 함께 기도하기에 힘쓰게 됩니다.

여기서 이 성도들이 무엇을 위해서 힘써 기도했을까요?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오히려 재산과 소유를 다 팔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하잖아요?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갖게 됩니다.

우리 중에 예수님의 교훈과 상관없이 살겠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으십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려면 내 의지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성령님의 능력을 주시길 기도하게 되는 것이죠.

또 사도행전의 기도의 많은 분량은 이 복음이 편만히 전해져서 하나님나라가 이뤄지는 것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기도도 이렇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5) 물건을 서로 통용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에 특별났던 것은 재산의 유무상통입니다.

인간 본성으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내 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실 것입니다.

사람이 돈을 내려 놓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 놓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성령충만에서 오는 형제 사랑임과 동시에 정말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팔아서 나눠주고 나면 나는 어떻게 삽니까?

매일의 쓸 것을 공급하실 하나님을 실제로 믿지 않으면 이건 불가능합니다.

성도가 되면 많이 가지는게 목적이 아니라 어떻게 쓸 것이냐에 목적을 둡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채우고 쟁여 놓고 만족하려는 본능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차피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 않습니다.

원하는 대로 가질 수 있었다면 다 부자가 되었겠죠.

성도들은 다 채우려는 만족보다는 있는대로의 자족함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형편에서도 나눌 수 있는게 있다면 나누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돈 있는 성도들이 돈에 마음을 뺏기지 않았듯이 가난한 성도들도 가난에 마음을 뺏기지 않았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기쁨이 충만했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합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주님과의 관계 외에는 다른 것으로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생활에 염려가 많아진다면 예수님을 고려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으며 염려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저도 지난 주에 기도했던 일이 원하는 대로 되지가 않아서 좀 낙심이 되었습니다.

다시 기도하고 힘을 내려고 하나님 앞에 나갔는데 좀처럼 마음이 잡히지가 않았어요.

그러다 주님께서 이런 마음을 주시더군요.

‘너, 내게 다 맡기고 나만 바라본다더니 그게 아니었니?’

‘내 생각이 변했어야 문제지, 네 생각대로 안된 게 무슨 큰일이냐, 나만 바라 봐’

환경보고, 사람보고, 나 자신을 보면, 매일 낙망하고 우울하고 힘이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걱정은 하나님을 향해 괜한 조바심을 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함도, 가난함도, 건강도, 모든 환경도 다루신다는 것을 믿으시고 오늘 이 옛성도들 같은 담대함과 평안을 누리시길 축복드립니다.

오늘 구원받은 성도들의 변화가 우리 삶에서 점점 더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한 눈에 보여주신 구원의 절차들을 잘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아직 과정 중에 계신 성도님들은 전체를 이해하셨으니 끝까지 힘을 내 모든 과정을 도장깨기로 격파하시고 구원에 도달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각자가 아니라 공동체입니다.

본문의 교회의 모습은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가 이 패역한 세대와 얼마나 상반 된 모습인지를 보여줍니다.

각자의 영에 이런 복된 충만이 있고,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성령의 충만하심을 부어주셔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