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5장1절-11절 (아나니아와 삽비라)

남수연 2022. 5. 19. 00:03

https://www.youtube.com/watch?v=tQAztNsIrkA 

다시 사도행전으로 돌아왔습니다.

몇 주간 사도행전 말씀에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지난 주 가정에서 많이 사랑하다 오셨나 모르겠습니다.

가족을 계속 사랑으로 보듬고 가정을 잘 세워가시길 축복드립니다.

지혜의 잠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잠언14장1절 무릇 지혜로운 여인은 그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아무리 초라한 가정이고 짐이 되는 가족이라 해도 내게 주신 것들을 감사하며 아끼고 가꾸면 그런 집은 하나님이 반드시 세워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인생의 집을 마구 헐어버린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교회에 열심을 가졌다가 벌어진 일이니 충격적이죠.

오늘 아나니아부부의 사건이 받아들이기엔 좀 쓰지만 그만큼 좋은 약이 될 것입니다.

 

1. 사건의 자초지종을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성령충만한 초대교회에 아주 불미스러운 사망사고가 일어났습니다.

4장을 보면 초대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교회가 어땠는지를 4장32절 한절로도 충분히 알 수있죠.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이 기뻤으면 이렇게 까지 했겠습니까?

돈이 걱정 안될 정도면 이들은 진짜 하나님 눈앞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 교회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가지고 있던 땅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일부를 숨겨두고 일부만 베드로사도에게 가져왔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그 돈이 땅 값의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들의 소행이 성령을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 책망합니다.

일부만 가져왔다고 하면 될 걸 굳이 전부 다 바치는 것 같이 거짓말한 두 부부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이 본문을 읽을 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교회에서 헌금 이야기는 언제나 편치가 않죠.

또, 이 부부가 한 일이 죽을 일인가?

그래도 절 반의 헌신을 했는데 가혹하시다, 구원은 받았을까?

이런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헌금이나 신앙생활에 흠이 없이 정직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지금이 초대교회 때라면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 역사상 가장 완전하던 초대교회 때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으니 어쩌면 이 사건을 세상에 감추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상세하게 기록해 전해주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교 지도자들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도 그냥 두셨습니다.

서신서를 보면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단자들도, 도덕적인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던 신자들도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던 사람들도 그냥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삶도, 육체의 목숨도, 존중해 주십니다.

생명을 임의로 거두실만한 심판은 아주 특별한 뜻이 있으실 경우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진짜 믿음이 있었는지, 아니면 명목적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 놓은 사람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자기 재산의 절반 이상을 교회에 헌납했다는 것을 볼 때 구경꾼으로 다닌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오히려 교회 안에서 충성 된 봉사자로 알려졌을 것이기에 초대교회에 큰 충격을 안겨 준 사건일 것입니다.

 

2. 이 사건은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불완전한 성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실패하고 불완전한지 이들을 통해 배워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완전한 교회의 모형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교회가 항상 이렇게 이상적인 모습으로 존재하지 못할 것을 보여줍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죠.

성령을 선물로 받은 교회 공동체지만 성도들에겐 오랜 세월 나로 살았던 옛인격과 죄의 본성이 남아있습니다.

오늘 아나니아 부부가 저지른 이런 일들은 내 안에 있는 옛사람이 언제고 따라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에 충만함을 힘입지 않으면 언제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사실이 있죠.

3절에서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보며 말합니다.

아나니야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교회와 성도들 속에는 사탄의 집요한 간섭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영향을 거부할 때 사람은 죄의 본성을 자극하는 사탄의 미혹을 받아 들이게 됩니다.

 

1) 오늘 사건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마음에 동기를 주시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동기가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공동체가 기꺼이 자신의 재산을 내놓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함께 먹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고 나니 ‘네 가난’이 ‘내 일’ 같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한 공동체의 특징은 저 성도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다면 가족의 괴로움조차 남의 일 같이 여겨지죠.

전에 한 익명의 50대 독지가가 카이스트에 300억을 기부했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분이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말을 했더군요.

‘살아가는 데 필요 이상의 돈이 쌓이는 것에 대한 부담이 항상 있었다’

‘하늘이 내게 주신 큰 돈에 대한 책임감을 떠 넘기는 것 같아 오히려 미안하다’

사람 안에 남아있는 최소한의 하나님 형상, 양심이 반응을 해도 이런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기부행렬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문 1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우리 말 성경에는 생략되어서 안 나옵니다.

‘그러나’ 는 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겠다는 것이죠.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좀 달랐다는 것입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초대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성도들이 재산을 헌납할 때 아나니아 부부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도 뭐 좀 내 놔야 되는 것 아냐?’

이런 마음 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땅이 팔리는 대로 가져오겠다고 먼저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땅 판 돈이 들어오자 마음이 바뀌어 일부를 감췄다는 것이죠.

솔직하게 말하면 좋았을텐 데 전부라고 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아나니아 부부가 거짓말 한 것에 대해 베드로가 안타까워 묻습니다.

4절,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굳이 속여가면서 왜 이런 헌금을 했을까요?

그들이 교회에서 받은 신임을 생각할 때 사람들이 당연히 땅값 전부를 헌금할 거라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를 가져오는 데 반만 내 봤자 티도 안 나고 빈축만 살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돈도 좀 챙기고 교회의 신망도 얻고 싶었습니다.

자기가 한 것 보다 더 이득을 얻으려는 데서 거짓말이 나옵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헌금의 동기는 결국 자기만족, 자기중심인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고, 남보다 더 인정 받고 싶은 죄의 본성이 수치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CT 엑스레이를 비추면 뭐가 드러날까요?

그냥 솔직하고, 남보다 좀 못하면 어떻고, 나 있는 대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속마음을 다 보이고 살면 너무 창피하니까 또 그럴 수도 없죠.

죄의 본성이 이렇게 우리에게 짐입니다.

이 부부의 복잡했을 마음이 이런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보는 것 같아 비난할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2)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렇게 사람을 의식하며 거짓되게 행동한 이유는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베드로를 속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들이 사람을 속인 게 아니라 하나님을 속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속일 때 사실은 하나님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또 삽비라가 들어와서 남편과 똑같은 말을 했을 때 베드로가 책망하죠.

9절,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여기 ‘시험했다’는 단어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했다’고 할 때 사용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 음식이 없을 때, 하나님을 믿지 않고 과연 도와주실 것인지, 도와주실 수 있을는지 시험했다고 하죠.

하나님을 하나님다우시게 인정하지도 신뢰하지도 않은 불신앙입니다.

아나니아 부부는 돈을 감추고 거짓말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나오시나 보자 시험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지을 때 마음 한 구석에 하나님이 어떻게 나오시나 보자 테스트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항상 이렇게 하나님을 속으로 시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로 한 대 때리시면 멈추고 그렇지 않으면 좀 더 과감하게 죄를 짓죠.

하나님과 겨루기를 하며 죄를 짓는 인간의 교활함을 전도서가 지목합니다.

전도서10장11절,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하나님을 몰라서 이런 죄를 공모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믿음이 없다는 건 핑계일 뿐이지 다 자기 속셈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극단적인 처분을 내리신 것은 그들에게 뿐 아니라 이를 통해 당시 교회에게 백신을 처방하신 것입니다.

후대에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이 성경을 통해 경고를 받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과 힘겨루기를 하려면 뭐하러 신앙생활을 합니까?

그건 헌금 내다 망한 아나니아 부부와 결과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하고 예수님을 순종하며 따르는 신앙생활을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큼 강해지는 것입니다.

경외롭지도 않은 분을 믿는 게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믿음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에서 결판나는 것입니다.

사람과 돈이 두려운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고 두렵게 섬기는지.

사무엘서2장30절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엄히 말씀합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믿음을 박차고 나가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뒤집어 버리는 사람들은 스스로 복을 걷어차 버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 잠언에서 보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충분한 보상을 주십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기는 데 인생의 목적을 두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최선의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3) 아나니아 부부는 성령의 설득 대신 사탄의 충동을 받아들였습니다.

3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성령충만을 받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성령께서 이들의 소행이 악하다는 것을 책망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는 성령이 충만한 게 아니라 사탄이 마음에 가득했다고 합니다.

원문을 따른 정확한 해석은 ‘어찌하여 네가 사탄이 마음에 가득 차게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사탄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억지로 들어온 게 아니라 아나니아가 스스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지만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에 맞는 사탄의 생각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마음에 가득 채웠다는 것이죠.

성령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양심을 통해, 말씀을 통해, 환경을 통해 그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지시를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영향을 받지 않으면 본성과 사탄의 강력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충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것과 성령충만은 다릅니다.

거듭난 후에도 성령충만이 소멸되면 얼마든지 과거대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엔 악령이 온갖 악한 생각을 뿌려 놓아 무성한 가시덤불처럼 자랍니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성령충만을 유지할 수가 있었습니까?

앞에 4장31절이 알려주죠.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성령충만과 기도의 필연적인 관계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듯이 기도도 그렇게 습관이 되게 해야 합니다.

하루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충만은 우리 생각과 행동이 성령님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것을 말합니다.

죄의 본성과 악한 영에 영향을 받느냐 아니면 성령님의 영향을 받느냐로 성도들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 결과 성령의 열매가 맺히는 인격과 삶이 되죠.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아홉가지 열매를 알고 계시죠?

또 성령충만하면 하나님의 성품 뿐 아니라 능력도 충만해 집니다.

성령충만할 때의 지혜는 내 한계의 최고치를 뛰어 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기쁨이 되고 그것이 내 영광이라는 걸 알고 자발적으로 순종합니다.

성령님이 강하게 내 마음과 삶을 이끌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성령충만한지 아닌지는 아주 간단히 체크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있고, 말씀대로 살려는 마음이 있고, 하나씩이라도 지켜가고 있다면 성령님의 충만하심으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인격을 밀어 주실 때, 조금 더 결단하며 행동으로 따른다면 초대교회 성도들에 가깝게 살게 됩니다.

그 반대라면 오늘 아나니아 부부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5장16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 오늘 아나니아의 행동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3.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부부는 구원을 받았나요, 못받았나요?

여러 신학자들이 이 사건과 이 부부에 대해 해석이 구구합니다.

단호하게 구원받지 못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이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때로 믿음에 실패하듯 이들도 시험에 걸려 넘어졌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몸은 징계를 받아 죽었지만 영혼은 구원을 받았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구원을 얻었는지 영벌을 받은 것인지 성경은 정확히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중에서 때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 같은 성도들을 보게 됩니다.

질병으로 죽기도 하고, 사업이 망하기도 하고, 가정과 가족들 간에 큰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이런 겉모양을 보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이번에 말씀을 묵상하다 이상한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6절,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10절에도 있죠.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사람이 죽으면 장례는 누가 치릅니까?

가족에게 시신을 넘겨주고 장례를 치르게 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이들의 장례를 교회가 치러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아무 연고가 없어서 대신 장례를 치러 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이들을 여전히 가족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마귀 짓을 했다고 정죄하고 꺼려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우리는 교회에서 누구든 한 가족으로 여기고 끝까지 사랑하고 선을 행해야 할 것입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구원여부를 알 수 있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면 영혼이 구원을 받았을 것이고, 명목적으로 교회에 나오던 사람들이라면 구원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했냐 안 했냐로 구원과 심판이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헌금을 속이고 거짓말한 것으로 심판을 받았다면 그것은 율법이지 복음이 아닙니다.

심지어 성령의 음성을 따르지 않고 사탄에게 미혹되었지만 그것으로 구원이 결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베드로도 사탄의 미혹으로 주님의 십자가 사역을 반대했었잖아요?

그래도 이들의 죽음이 마음에 걸린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미 사탄이 마음을 장악한 이 가련한 부부가 육체의 죽음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가룟유다의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가룟유다도 사탄이 심어 준 생각을 덥석 받았다가 아예 사탄이 그 안에 들어가게 되었잖아요?

예수님이 죽으신 뒤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 넘긴 자신에 대한 환멸로 스스로 무너져 생을 마감합니다.

사탄은 넌 살 가치가 없다고 유다를 정죄하며 죽음으로 몰고 갔을 것입니다.

만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이미 사탄이 마음을 장악한 상태로 계속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인격은 점점 사탄으로 인해 파탄이 나고 교회에는 더 많은 해를 끼쳤을 게 분명합니다.

온 세상에 구원의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 공동체에 성령의 역사보다 인간과 사탄이 휘저으며 갈등을 일으키고 결국 경건의 능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이들에겐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는 다시 한번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성령님을 따라서 주님을 섬기게 된 것이죠.

우리 개인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을 감당해야 할 우리에게 이런 위선과 거짓이 있다면 때로 하나님이 우리 안의 아나니아를 죽이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죽이셨다고 너무하다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스스로를 변호하실 일입니다.

우리가 아나니아처럼 육신을 따라 살면 인생의 집이 저렇듯 무너져 내릴 것이고 성령을 따라 살면 아름다운 인생 집을 세우게 될 것을 깨달으면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지만 시험에 들은 것이라면 이 땅의 집은 망했어도 영혼의 집은 보존되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을 믿지 않는 형식적인 종교인이었다면 이 땅의 집도 망하고 영혼의 집도 영원히 무너진 것입니다.

오늘 이 사건의 결과가 11절에 나옵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교회가 더욱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왜 이들이 하나님 앞에 두렵고 경외심을 가졌을까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함께 성찬에 참여하고 함께 봉사하고 구제했던 나와 같은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도 이들과 같은 욕심과 위선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 부부와 같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엄격히 하며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으면 죄와 사탄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로 매일 성령께서 강하게 우리 인격을 감화해 주시길 기도하십시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에서 잘 교훈을 받고 이 땅의 집도, 천국의 집도 복되게 세워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