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개인의 신앙보다 교회의 신앙에 더 비중을 두고 가르칩니다.
교회의 신앙이 개인의 신앙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회를 다니는 것은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는 것만큼 귀합니다.
좋은 교회는 좋은 성도들이 모여서 만들어집니다.
우리교회가 그렇게 만들어져 가고 있다고 믿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좋은 교회의 모델을 보여줄 뿐 아니라 교회에서 발생되는 여러 문제도 보여줍니다.
지난 주에는 나쁜 의도로 헌신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부부를 극단적으로 징계하신 뒤 교회는 다시 부흥했습니다.
오늘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는 답을 요구하는 것이니 풀면 됩니다.
교회 문제는 가정이나 사회 공동체에서 생기는 문제와 뿌리가 같습니다.
성경에서 교회 문제를 풀어가는 걸 보면 우리가 만나는 문제들도 그렇게 답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이번 문제는 차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절,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여기서 ‘그 때에’는 앞의 사건 뒤에 시간이 좀 지났다는 뜻입니다.
이 사건 뒤에 스데반의 순교와 바울의 회심이 나옵니다.
그 연대를 고려하면 교회 설립 뒤로 3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때입니다.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독특한 점이 있었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성도들이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아름다운 헌신에서 불협화음이 발생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은 그냥 놔 두면 저절로 잡음이 생깁니다.
1) 먼저 왜 이런 갈등이 생겼을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초대교회는 두 부류의 성도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입니다.
헬라파 유대인들은 외국에서 태어나 살다 귀국한 사람들로 헬라어를 주로 쓰던 사람들입니다.
개중에는 유월절 순례객으로 왔다 복음을 듣고 주저앉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살던 곳으로 돌아가도 교회가 없으니 신앙을 위해 남았던 것이죠.
초대교회가 그런 성도들까지 있다 보니 구제문제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본토에서 태어나 모국어를 쓰던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두 파가 형성되면서 갈등의 요인이 된 것이죠.
누구나 마음이 통하고 잘 맞는 사람과 더 가깝게 지내고 싶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내면에 있는 남을 차별하는 마음과 세력을 만들어 힘을 키우려는 본성을 찾아내 명백히 죄라고 규정합니다.
그 갈등이 결국 불공평한 구제 문제로 터져버렸습니다.
구제는 매일의 식료품과 생필품을 지급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만 명이 넘던 교회의 성도들은 가정교회로 흩어져 신앙생활을 하고 성전에서 정기적으로 모였습니다.
구제물품 지급에서 교포 출신 성도들 모임에 다소의 차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옛날에 교회서 배식하는 집사님들을 보면 아는 사람 식판엔 반찬을 듬뿍 집어주고 그런 것 보셨잖아요?
그 다음에 받는 사람들은 차별 당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좀 안 좋죠.
초대교회의 차별의 문제가 아마도 한 두 번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결국 헬라파 성도들이 히브리파 성도들을 원망하며 분란이 터진 것입니다.
2) 그런데 이 사람들이 불과 일년 전만 해도 내 것 네 것이 없던 성도들이었습니다.
지금은 왜 내 것이 네 것보다 작으냐고 원망합니다.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섬겼는데 지금은 집어주는 데 인색해졌습니다.
분명히 한마음 한뜻이었다고 했는데 지금은 두 파로 나눠져서 싸우고 있습니다.
대체 초대교회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초대교회 설립 초기에는 성령의 역사를 눈으로 볼 수 있게 성령님의 능력을 극적으로 교회에 부어주셨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런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 성령행전이라고도 불립니다.
사도행전에서만 성령이란 단어가 50번 이상 나옵니다.
교회와 성도의 삶은 시종일관 성령님과 함께라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먼저 배워야 합니다.
이를 알리기 위해 특별하게 기회 된 성령충만의 시기가 지나간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도들도 우리처럼 각자의 믿음으로 성령충만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쉽지 않았기에 오늘 같은 갈등이 생기는 것이죠.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매순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지난 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고 지냈다면 그냥 본성과 습관대로 사셨던 것입니다.
죄의 본성이 얼마나 질기고 강한지 아시나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수련을 통해서 좋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생각은 출발이 틀린 것입니다.
그건 수양하는 종교에서나 그럴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죄의 종이라고 하는지 전혀 모르는 순진한 생각입니다.
노력해서 점점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뭣하러 예수님께서 죄를 대신 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겠어요?
열심히 노력하라고 수련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겠죠.
예를 들어, 사람들은 겸손하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사람들은 자기의 인격과 교양을 위해 겸손하려고 합니다.
신자들의 경우는 좀 다르죠.
내 안의 죄질이 나쁜 걸 알기 때문에 몸을 낮추고 교만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도 모르고 설치는 사람들을 속으로 약간 무시하면서요.
노력은 가상하지만 이정도입니다.
성경이 성도들에게 본으로 보여주는 예수님의 겸손은 완전히 다릅니다.
예수님은 나쁜 것도 없고 불완전한 것도 없는데 겸손하십니다.
하나님의 본성상, 남을 귀하게 여기시는데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이런 주님의 성품을 사람이 노력해서 닮아질 것 같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려는 수준은 이렇게 예수님 만큼 깊습니다.
맏아들을 본받게 하시겠다고 하셨잖아요?
이것은 성령충만 할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가 얼마나 사람에게 얼마나 완전한 기쁨이고 행복인지 예루살렘교회 초기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재산을 다 팔아서 섬겼던 그 사람들이 해석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성도들이 지금은 싸웁니다.
성령충만과 본성충만, 우리도 그 둘 사이를 오가며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너그럽다 어떨 때는 쪼잔해졌다, 어떨 때는 어려움에도 웃어지고 어떨 때는 한탄과 원망이 나오고.
우리가 이중인격자 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 유리하다는 걸 알아가면서 기도하게 되고 본성으로 확 치우치려는 걸 절제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보다는 성령을 힘입어 좋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게 맞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으로 살려면 나의 본성이 성령께 감화되길 기도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성령님께 협조해 내 의지로도 나쁜 행실을 버려야 합니다.
다만 오늘 헬라파 유대인들이 불공평에 대해 원망했다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원망이라는 말이 초대교회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출애굽한 광야교회, 이스라엘 선조들에게서 끊임없이 나왔던 그 원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걸 말합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가 불안한 일만 생기면 원망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도 원망을 가장 심각한 죄로 다룹니다.
야고보서 5장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이 뭐길래 심판의 경고까지 받아야 합니까?
그게 믿음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신자의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이 공평했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형제들 간에도 차별 받으며 자라서 상처가 있다는 게 다반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남과 비교하고, 내 권리만 찾는다면 세상은 다 불공평하고 다 원망의 대상입니다.
불공평에 어떻게 반응하냐는 것은 믿음을 묻는 것입니다.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다는 믿음에서는 원망이 나올 수는 없는 것이죠.
믿음은 답답한 상황에서도 원망 대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인내합니다.
헬라파 성도들이 떳떳이 공정을 요구하지 못하고 뒤에서 원망한 것은 자기들이 도움을 받는 처지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살다보면 그런 상황에 놓일 때도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버리고 불평과 원망을 선택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가정과 사회생활 중에도 불평과 원망을 통해서 해결 될 일은 없습니다.
바로잡을 문제라면 충분한 기도와 논의를 통해 서로 덕을 세우며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2. 교회적으로도 이런 문제가 발생한 요인이 있었습니다.
2절,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4절,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문제가 터졌을 때 그 원인을 올바로 진단하는 게 중요합니다.
사도들은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를 즉시 깨달았습니다.
사도들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도들은 기도에 힘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도하고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일도 많아집니다.
그러다 보니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을 제쳐두고 교회 내의 구제와 행정처리에 매달리게 되었던 것이죠.
교회에 기도와 말씀이 약화 되자 본성이 강해지고 갈등이 악화된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일곱교회를 평가해 주시잖아요?
첫 사랑을 잃어버려 덥지도 차지도 않은 교회가 있었고, 이단 사상에 물든 교회도 있었고, 모든 게 차고 넘쳐 부요한 것 같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눈 먼 교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에 대한 평가는 곧 성도 개인에 대한 평가입니다.
교회의 믿음과 교회의 방향성을 성도들은 따라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 된 공동체는 시험에 취약해 집니다.
내 생각과 행위를 제어하고 바르게 이끌 말씀의 권능이 없다면 신자들도 비신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 성령께서 계시해 주시는 말씀을 꾸준히 받아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말씀에 권위에 순종하게 키워야 합니다.
잠언29장18절은 사람의 본성이 말씀을 통해서만 다뤄진다는 걸 보여줍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묵시는 계시와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드러내서 계시해 주실 때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방자히 행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잘못을 누가 가르쳐 복종시키겠습니까?
최근 젊은 신자들에게 성경강사로 인기가 있는 이모 울산법대 교수가 있습니다.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와서 한 때 승려였던 사람입니다.
이교수는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적폐세력이 교회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허구를 밝히고 파괴하자는 집념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어느날 암자에서 기독교를 파괴할 법을 연구하다 머리가 아프고 집중이 안되서 집으로 돌아와 쉬며 기독교 방송을 들었습니다.
기독교를 더 알아야 공격도 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독교방송을 청취했던 것입니다.
그날 한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 데 우리가 죄인이라는 말씀이었어요.
보통 때 같으면 또 교회의 죄인타령이네, 조롱했을 텐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죄라는 말이 가슴에 파고 들어와 갑자기 잘 떠들던 입이 다물어지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엎드려 벌벌 떨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구나 라는 생각이 드는데 머리로만이 아니라 온 몸의 세포가 그걸 느끼고 있더랍니다.
자기가 의로운 사람인 듯 남을 고발하며 까불고 다녔지만 완전 부패한 죄인인 걸 그날 알게 되었던 것이죠.
그 자리에서 그냥 하나님의 존재, 예수님을 알게 되더랍니다.
그러고 나니 신기하게도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였습니다.
이분이 늘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 차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보니 세상이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천국만 주신 게 아니라 이 세상도 다시 주신 것이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서 기독교를 변증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더군요.
사람을 그 누가 회개시키고 그 누가 고칠 수 있겠습니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회개도 시키시고 성화도 시키십니다.
사역자들에게는 기도로 구할 때 말씀이 계시됩니다.
기도를 통해 계시 된 말씀이 없다면 성도들을 깨우칠 수가 없습니다.
물론 연구도 하지만, 연구와 공부만 해서 전하는 말씀과 다릅니다.
사도들에게 그것이 부족해졌던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면 아마도 분배와 구제 문제를 개선하는 일에만 또 매달렸을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나 직장이나 대인관계에서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왜 아이들이 말을 안 듣고, 저 사람이 왜 내게 매사에 퉁명스럽고, 일은 번번히 틀어지고, 왜 그럽니까?
문제의 원인을 상대에게서 찾지 말고 나 자신의 믿음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내게 기도와 말씀이 부족했고, 말씀대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았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들이 모든 역량을 그렇게 구제에 쏟았다면 적어도 그 부분은 완벽하게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반대로 문제가 계속 거기서 나왔다는 걸 우리가 잘 보아야 합니다.
공을 들이고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신경을 쏟는다고 그 일이 잘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도와 말씀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매달릴수록 오히려 거기서 잡음이 나오고 사고가 터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문제의 해답도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우선임을 잘 배우시길 바랍니다.
3. 이 문제에 대한 실무적인 해결책은 일을 전담할 사람을 뽑는 것입니다.
3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4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교회는 서로 짐을 나눠 져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구제를 담당할 일곱명의 집사들이 선출됩니다.
5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6절,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여기 뽑힌 일곱 집사들의 이름을 보면 좀 낯설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이 이름들이 헬라식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헬라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헬라파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문제가 헬라파 유대인들이 공동체에서 소외당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 쪽에 이 사역을 맡겼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문제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오늘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서 아름다운 양보를 봅니다.
우리가 초대교회 성도들의 문제 해결의 성숙함을 우리의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잘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가 잘 해결되자 교회는 다시 안정과 부흥이 찾아왔습니다.
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들에게 집중되었던 교회 운영이 일곱 집사에게 분담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이전처럼 기도와 말씀사역에 전념하니 제자의 수가 더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도 이 믿음에 복종했다고 합니다.
유대교의 중심에서 제사 직무를 행하던 제사장들이 예수님의 속죄의 제사로 인해 율법의 제사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직업과 존재 목적이 없어지는 것이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게 구원의 복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할 때 교회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부흥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이런 은혜가 임하시길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늘 이 문제를 통해 구원계획을 한 단계 진전시키십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구원의 복음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큰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단체가 커지면 지도자가 더 필요한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왜 그 일을 이렇게 상세히 기록했냐는 것입니다.
오늘 이 6장은, 5장까지에서 사도들에게 위임되었던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이제 성령이 충만한 일반 성도들에게 위임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들만으로 어떻게 구원사역을 이루실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들은 복음의 증언을 마치고 그들의 시대가 저물 것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령충만한 성도들이 구원 사역을 이어가야 하는 것이죠.
5장까지에서 보면 사도들을 통해서만 큰 기적과 표적들이 나타났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6장부터는 이 일곱집사들에게도 권능과 이적이 나타납니다.
8절을 보면, 스데반이 은헤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8장에서는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성에서 전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6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오순절에 사도들이 받은 능력과 똑같고 그 이전에 예수님이 행하시던 기적과 똑같죠?
이 기적과 권능은 주님의 사역이 평신도들, 성령충만한 성도들에게 위임된 다는 보증으로 성령께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은 사도들로부터 일곱집사에게, 그리고 복음을 듣고 믿는 모든 시대의 성도로 이어집니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는 복음을 다른 이에게, 그리고 다음 세대에 전수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제 곧 초대교회에 큰 박해가 불어 닥칠 예정입니다.
이미 몇 년이 지났지만 복음이 예루살렘 밖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박해를 통해 결국 성도들이 도망가고 흩어지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게 하지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랬더니 헬라파 과부들처럼 매일의 구제품 수나 헤아리며 불평하는 수준의 성도로 살더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일곱집사와 같이 나의 세대에 나를 일군으로 부르셨다는 것을 잘 깨닫고 가장 귀중하고 값진 복음을 나눠주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도로 산다는 것은 성령의 힘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늘 문제가 생기죠.
그러나 항상 다시 기도와 말씀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그 안에 답이 있습니다.
큰 일 난 것 같은 상황도 오히려 오늘처럼 더 좋은 결과가 되기도 합니다.
로마서 8장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 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나의 신앙은 교회의 신앙으로부터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함께 좋은 교회를 세우고, 그로 인해 복을 받고, 받은 복을 다른 이들에게 이어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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