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0TDq9QM8dAI
성도들 가운데는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회심을 했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왠지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죠.
법무법인 세0 의 대표변호사인 김0 식변호사의 그런 회심 간증이 있습니다.
김변호사는 기독교에 대해 지독한 반감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하다 밥퍼목사인 최0 도 목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둘의 대화는 항상 김변호사가 기독교 교리를 공박하다 끝났습니다.
어느날 다방에서 김변호사는 어김없이 기독교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며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강한 전기에 감전된 듯 머릿속 회로가 끊겨 멍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려보니 신기하게 방금까지 공박하던 예수님의 구원과 부활이 그대로 믿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두뇌 회로가 순간적으로 음에서 양으로 바뀐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믿음과 안 믿음은 그 정도로 분명히 다릅니다.
저도 신앙의 체험들이 있지만 그 정도 극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김변호사처럼 제 두뇌 회로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한때 기독교를 반박했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과 구주라는 것이 완벽하게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떻게 예수님이 믿어지게 되었는지 물어보면 답하기가 좀 애매합니다.
어떤 이는 좀 분명한 경험 중에 믿음이 생겼고, 어떤 이는 그런 경험도 없는 데도 언제부터인지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도 없는 데 믿어지는 게 사실 더 신비로운 것이죠.
오늘 사울만큼 극적인 회심을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회심은 하나님께 눈을 떠 과거의 삶에서 돌아선 것을 말합니다.
오늘 교회의 박해와 사울의 회심을 통해 은혜주시길 기대합니다.
1. 스데반의 순교를 시작으로 예루살렘교회는 큰 박해를 받게 됩니다.
지난 주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다 돌에 맞아 죽었죠.
그것은 이제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으면 처벌된다는 뜻입니다.
스데반 순교 이후 공회는 성도들을 잡아 들이기 시작합니다.
앞에 8장2절에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서 미묘한 것은 누가가 이 박해를 교회의 비극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는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성취라고 보았기에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듯이 기록했던 것입니다.
2장8절,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교회와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해석이 중요합니다.
해석을 잘 하지 않으면 어떤 사건은 쓴 뿌리가 남습니다.
쓴 뿌리는 원망스러운 마음입니다.
뿌리가 남았기에 틈만 나면 넝쿨이 자라 신앙 성장의 발목을 잡습니다.
아름답던 여대생 나이에 자동차사고로 몸 전체에 3도 화상을 입고 40회의 피부수술을 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이지선씨를 아시죠?
지금은 한동대 교수가 되었더군요.
이분이 그 절망을 통과하고 한 말은 ‘인생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이었다’는 말입니다.
칠흙같은 어둠에서 한 발도 나갈 수 없던 동굴 같은 인생을 끝이 있는 터널로 해석한 것이죠.
그 때 그 박해가 아니었다면, 그 때 그 일만 없었다면, 그런 고리를 끊어 버려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박해로 인해 성도들이 흩어진 것조차도 성령충만한 누가는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의 결과,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다시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31절,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우리가 지나왔던 안타까웠던 사건들, 실패와 아픔의 상황들이 내 불행의 원인이라는 생각을 끊어내야 합니다.
자꾸 과거의 사건이나 실패와 아픔을 심령술사처럼 불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변화 된 현재의 상황들을,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성령의 위로를 받으시고 앞으로만 전진하시길 바랍니다.
교회의 박해는 사울을 통해 다메섹까지 이어집니다.
스데반과 논쟁을 일으켜 이 박해의 시발점이 되었던 사람이 사울입니다.
그래 놓고 스스로 노기가 수그러들 줄을 몰랐습니다.
1절,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절,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다메섹은 현재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으로 부터는 북동쪽으로 한 230킬로 정도나 먼 곳입니다.
걷는다면 거의 일주일 정도 가야 하는 먼 곳이고 유대 영토도 아닌 남의 나라입니다.
예루살렘은 고사하고 저 멀리 남의 나라에 가서 예수님을 믿는 것도 못 봐주겠다는 것이죠.
사울은 왜 이렇게 까지 그리스도인을 못 견뎌했을까요?
사울은 직업 종교인인 바리새인이었고 유대교 신봉자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인 유대교는 여호와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습니다.
우리도 유일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지만 구약시대엔 삼위일체 하나님이 분명하게 계시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세력이 파죽지세로 퍼져가고 있으니 유일신만 아는 율법학자 사울의 눈에 절대로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죠.
오늘 본문을 기록한 누가는 바울과 가장 절친했던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오늘 사울의 이런 종교적 열성을 하나님께 대한 충정이라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단지 사울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당시 사울은 결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신앙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똑똑했지만, 율법을 신봉하며 예수님을 공격했던 바리새인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악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바울을 성공신화로 포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회심한 한참 뒤 바울의 선교여행 중에 만났습니다.
의원 누가는 평생 바울의 위험한 선교 여정에 동행해 바울을 치료하고 동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바울을 가만히 보니 예수님께 대한 뜨거운 충성심과 복음의 열정 이면에 그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폭력성과 혈기.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과거지사를 기록했다 해도 사랑하는 바울을 위협과 살기등등으로 평가하는 말로 쓰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서신서의 온유하고 사랑이 많은 바울은 특별하게 선량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쩌면 남보다 더 교만하고 편견과 고집이 강하고 폭력성이 있는 다혈질 성격에 자기를 돋보이려는 공명심이 컸던 사람입니다.
뒤에 바울의 간증을 보면 성도들을 잡아다 직접 매질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바울의 평생 이 본성을 콘트롤하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의 마음 속에 항상 이런 탄식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7장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신자들이 평생 곤고해지도록 싸워야 하는 것은 바울같이 내 안에 있는 사망의 몸, 옛사람과의 싸움입니다.
세상과 곤고하게 싸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옛사람을 예수님의 도에 복종시키기 위해 곤고하리만큼 싸우는 게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면 세상과의 싸움에서는 넉넉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 싸움이 없기에 세상 일로만 평생 곤고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거친 욕이 튀어 나오고 버럭 화가 나고 미움이 치솟는 것은 그때 기분이 좀 나빠서가 아닙니다.
그게 우리 안에 있는 근성이고 불변하는 죄성입니다.
저도 점잖게 살다가도 운전 중에 우이씨가 튀어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 내 죄성이 여전히 건재하게 잘 있구나’를 깨닫게 되죠.
가족들이나 성도들이 서로 그런 모습을 볼 때 ‘저 사람이 저런 사람이었네’ 나쁘게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래 저런 사람이 무던히 노력하는구나 라고 보면 은혜가 될 것입니다.
사울은 교회 핍박을 충성으로 알았겠지만 누가는 그 부산하고 요란한 행동의 동기가 단지 그의 죄의 근성이었다고 분명히 지적합니다.
2. 이 다메섹 도상에서 역사적인 바울의 회심이 일어납니다.
다메섹에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사울을 향해 빛이 쏟아집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의 얼굴이 해가 힘있게 비추는 것 같아 요한이 보는 순간 발 앞에 엎드렸다고 증언합니다.
사울 일행도 자연을 초월한 빛에 압도되어 바닥에 꿇어 엎드러집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울을 부르십니다.
4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5절,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스데반이 죽을 때 예수님은 하늘을 열어 자신을 보여주셨었죠.
지금은 사울에게 자신을 또 나타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숨어계실 생각이 없으십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 예수님이시라고 진술하죠.
하나님이 말씀이셨다는 것은 말 그대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성경으로, 환경으로, 마음의 확신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하루 중에 종종, 마치 예수님이 제 이름을 부르시는 걸 들은 것처럼 ‘네, 주님’하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종일 예수님과 동행하려는 생각에서입니다.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옛날 권사님들도 입에 ‘아버지’, ‘주여’가 찰싹 붙어 있었잖아요?
한시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고단한 인생에서 얻은 아름다운 버릇일 것입니다.
전에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를 잠깐 시청하는 데 한 여가수가 무대에 오르며 ‘주여’ 라는 말이 새어 나오는 걸 듣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신앙은 주일에만 꺼내 보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을 신앙하며 사는 것입니다.
일과 세상에 믿음이 파묻히지 않도록 어떤 방법으로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늘에서 자기를 부르는 음성이 하나님이심을 사울은 직감했습니다.
하나님이 분명하신 데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사울에게는 대경실색할 일이죠.
평생 하나님을 섬겼고 지금도 하나님을 위해 그리스도인을 잡으러 이 먼 길을 달려오고 있는데 박해라니요.
‘주여, 누구십니까?’
‘하나님, 누구십니까?’란 뜻입니다.
하나님이라고 불러 놓고 누구십니까 하는 것은 말이 안되죠.
사울은 이미 그 말씀에서 예수님을 떠올렸기에 그것을 확인하려 했을지 모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하나님,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 하나님이 답을 하시는데 나, 하나님은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그 순간 사울의 머리 속 회로가 불꽃에 확 끊어져 정지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나사렛 예수시라니.’
사울의 모든 세계관이 요동하고 뒤집어지는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온 생을 구약성경을 연구하고 율법을 지키는데 쏟아 부었습니다.
그런데 대체 왜 그 성경에서 줄곧 말씀하신 메시야의 대속, 메시야의 고난, 메시야의 부활, 그리고 인간이 아닌 신적인 메시야의 존재가 그렇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일까요?
어떻게 당사자가 오셔서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시기까지 그렇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구원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뭔가 하나님 편에서 사건을 일으키셔야만 합니다.
우리는 원래 영이 죽은 사람들이잖아요?
스스로는 반응을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빛처럼 사울에게 뚫고 들어오셨을 때 사울은 비로서 하나님을 인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나니 스데반과 논쟁했던 예수님에 대한 것, 공회에서 변론하던 스데반의 설교가 단서가 되어 성경의 모든 그림이 딱 맞춰지게 되는 것이죠.
사울이 자기도 모르게 그때 스데반에게 전도 받은 것입니다.
신자들이 교회에 나와 말씀을 듣다 보면 성령께서 뚫고 들어오시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대부분은 은밀히 일어나지만 그 결과는 다메섹 이전의 사울과 이후의 사울처럼 분명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사울과 같은 주님의 방문이 임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3. 예수님은 박해자 사울을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면 인생은 거의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재편됩니다.
삶이 그대로인 것 같아도 그 내용은 완전히 달라지죠.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로 세우십니다.
그래서 사울에게 여행에 유용한 로마시민권과 최고의 율법교육과 고향 다소에서의 철학교육으로 준비를 시켰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경험들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사용하시죠.
먼저 사울에게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6절,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강렬한 하나님의 빛으로 인해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울은 사람들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앞이 안 보이는 상태로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합니다.
이 사흘은 예수님 없이 죄인으로 살아 온 인생을 회개하는 시간이었겠죠.
16절에 보면 예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에게 나를 위해 받을 큰 고난의 생애를 제안하겠다’고 하십니다.
억지로 시키지 않으십니다.
이 사흘은 예수님의 제안에 대해 사울이 결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에스더서에서 금식하던 사흘이 생각나죠.
이 시간을 위해 그 기세등등하던 사울은 눈이 멀어 사람의 손을 의지해 끌려가야 했습니다.
이 문제에만 집중하도록 어둠 속에서 꼼짝 못하고 붙잡혀 있어야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죄악 속에 살아온 과거를 청산하고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을 때 식음을 전폐할 만큼 힘든 상황과 소경처럼 수족을 묶어 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마침 그런 상황에서 우리를 돕기 위해 주님이 찾아오신 것이겠죠.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시는 절차가 10절부터 18절까지 나옵니다.
그냥 사울 개인에게 사명을 주시면 될 텐데 그러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루시는 원칙을 분명히 세우시고 전수하시기 위함이십니다.
1) 사울의 위임식을 위해 다메섹 교회의 아나니아를 선택하십니다.
아나니아는 다메섹 시민으로 오래전부터 예수님을 믿던 제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아나니아에게 나타나 다소에서 온 사울을 찾아가 세례를 주고 안수해서 성령충만을 받게 하라고 하십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교회에 얼마나 포악한 핍박자였는지 알고 있었고 성도들을 잡아가려고 다메섹에 온 이야기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나의 그릇이다, 그가 지금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와서 안수할 때 눈이 떠지는 환상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가거라.
그렇다면 왜 이 중요한 위임을 베드로나 요한이 아닌 아나니아에게 맡기셨을까요?
사울을 이방인을 위한 열세번째 사도로 세우시는 데 사도에게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다면 어땠을까요?
바울의 사도로서의 위상에 미묘한 서열의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잖아도 바울이 사역할 때 사도가 아니라고 트집 잡는 사람들이 있었잖아요?
아나니아는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상관없는 선지자 같은 인물이고 예수님께 직접 명을 받아 사울에게 사도직을 위임한 것입니다.
사울이 실제 사도와 똑같이 되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성경을 보면 사도들이 안수하고 성령받기를 기도할 때 성령께서 임하십니다.
일반 성도들은 남에게 그런 성령수여를 한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늘 아나니아의 경우는 예수님을 대행하는 것이라 예외이죠.
그런데 에베소교회에서 이방인 성도들을 위해 바울이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십니다.
바울에게 사도직을 주셨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이죠.
사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부활의 목격자들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과 함께 교회의 신앙을 완성한 독보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전해 준 것 이상 교회의 신앙에 더하거나 뺄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에 세운 교회라고 하잖아요?
이들이 증언하는 예수그리스도와 성경의 진리 위에 세워졌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주님의 교회에 사도들의 신앙을 주시고 전수하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다른 것을 전파하고 믿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2) 사울의 사도직은 교회를 통해서 위임되게 하셨습니다.
교회에 권위를 주신 예수님은 교회의 권위를 세워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자신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는 것은 엄청난 신비입니다.
교회에 천국의 열쇠를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누가 산 속에서 예수님께 계시를 받았다고 성도가 되는 게 아니고, 지도자가 되어서 교회를 이끌 수도 없습니다.
선지자와 사도의 바른 신앙인지 교회의 검증을 받고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사울이 다메섹의 제자들과 며칠을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아나니아를 통해 소개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고 인정을 받게 된 것이죠.
이후 바울의 삶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쏟아 붓고 로마에서 순교합니다.
예수님은 교회에 권위를 주시고 신앙이 변질되지 않게 지켜 오셨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연합체인 교회 안에서 인정받고 세워져 가야 바르고 복된 신앙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많은 세상사람들이 교회를 무시하는 것도 안타까운데 요즘은 성도들조차도 교회를 소중히 생각지 않고 교회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시기에 소중히 교회를 세우는 성도들을 주님께서 반드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예루살렘교회의 박해는 스데반의 순교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은 바로 사울입니다.
결자해지라고나 할까요?
맺은 사람이 풀어야죠.
예수님은 박해의 중심에 있던 사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만드십니다.
스데반도 바울도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이 참 귀한 사람들을 세상에 제물로 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내 놓으신 것처럼 세상에 참 아깝고 귀한 것들을 내주십니다.
귀한 것을 주시는 것은 귀한 열매를 맺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씨앗에서 좋은 열매가 맺히는 것이잖아요?
예수님도, 스데반도, 바울도, 한알의 밀알이 되어 우리와 같은 수많은 구원의 열매를 맺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언제 내게 찾아오시나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잘 받아들이면 반드시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만나서 영원하고 보람된 일에 귀한 나를 헌신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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