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 창립14주년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힘을 다해 교회를 함께 섬겨온 모든 성도님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는 사람의 힘으로 세워지지 않습니다.
우리교회가 14년간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모두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또 겉으로 보기엔 외형적인 교회가 세워지지만 그 속에서 주님의 신부인 각 성도가 세워지고 양육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은 그렇게 신부 된 교회를 구원하여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세상 속에 이런 거룩한 존재가 섞여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정말 신비한 일이죠.
우리는 태어나 보니 동네에 이미 많은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개척하기 전에는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지 잘 몰랐습니다.
오늘 우리교회 창립주일이지만 사마리아땅에 교회가 세워진 것을 통해 교회가 무엇인지를 좀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 믿음에 더 큰 확신을 주시고, 말씀으로 그동안의 수고를 칭찬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사마리아에 교회가 세워지는 데는 고난이 필요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세워졌습니다.
지금도 성도가 되는 것과 교회가 세워지는 데 고난이 필수 조건이라 해도 과한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고난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이라도 우리를 유익하게 한다는 것은 믿어도 좋습니다.
오늘 본문이 큰 슬픔으로 시작되지만 마지막엔 큰 기쁨으로 바뀌는 게 그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가장 먼저 세워진 지역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입니다.
오순절 성령께서 오신 뒤에 제자들의 전도로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지죠.
그런데 몇 해가 지나고도 이 복음이 예루살렘 도시 밖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랬겠어요?
복음을 전하는 게 그만큼 녹록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밖에 가서 예수님 믿으라고 해도 뺨을 맞지는 않잖아요?
당시에는 돌에 맞았습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오늘 본문 말씀 앞에 나옵니다.
스데반집사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전하다 돌에 맞아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스데반은 죽어가면서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성도가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세상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어려울 때 어떻게 하나 유심히 봅니다.
1절을 보면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에 대한 사도행전7장의 긴 내용들은 나중에 누가가 바울사도에게 들은 것입니다.
바울은 왠지 그 모든 것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결국 스데반의 순교가 사울이 바울로 변하게 된 계기가 된 것입니다.
불과 한 장만 넘어가면 사울이 도망가는 성도들을 추격하던 다메섹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사도바울로 거듭납니다.
오늘 예루살렘에 불어 닥친 박해로 인해 성도들은 피신합니다.
1절, 그리고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박해라는 고난을 당한 성도들이 삶의 터전을 버립니다.
신앙으로 인해 재산을 다 잃고 목숨도 잃는다면, 신앙을 버리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그냥 버려두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보다 믿음이 더 크다는 걸 실제로 보여준 것이죠.
아마도 성도들 자신도 그때 자기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내 믿음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동안 별의별 고난을 다 이겨내고, 또 그런 중에도 꾸역꾸역 주님의 일을 감당해 내고 있는 우리의 믿음도 귀합니다.
스데반의 순교는 충격과 두려움과 슬픔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교회가 흩어져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에게 어려움이 있는 게 다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를 생각해 보면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나왔고 시련을 통해서 진실된 믿음이 된 것입니다.
성도의 시련은 나 자신의 구원과 나를 통한 누군가의 구원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그렇게 고난 중에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교회로 세우시고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통해서 주나산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2. 흩어진 성도들 중에 집사 빌립은 사마리아성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서도 어느 순간 기회가 되면 복음을 전하려는 의지가 번뜩이는 걸 보면 복음 안에 기이한 생명력을 느끼게 되죠.
5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교회가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에 대해 전파할 때 믿는 사람들로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하나님을 믿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막연히 아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믿기가 좀 쉽다고 할 수 있죠.
왠지 하나님은 어딘가에 계신 것 같지 않습니까?
모든 종교에서도 하나님과 같은 절대자 신을 인정하고 믿잖아요?
하나님이 없다고 할 정도면 굉장히 양심도 두껍고, 강심장인 것이죠.
그런데 오늘 빌립이 전한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마리아사람들은 구약의 모세오경을 믿고, 하나님을 믿던 혼혈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믿는 신명기에서 모세가 말하길, 하나님이 나 같은 선지자 한 사람을 너희에게 보내실텐 데, 너희는 그의 말을 따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처럼, 사마리아의 혼혈 유대인들도 메시야가 오실 것을 믿고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라는 성에 들리셨던 것을 아실 것입니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신 내용이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자 사마리아여인이 이렇게 말하죠.
4장 25절,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예수님도 그리스도이신 자기 자신을 전파하셨습니다.
오늘 빌립도 사마리아 사람들이 기다리던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전파했던 것입니다.
빌립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말들을 가르쳤는지는 12절에 다시 나옵니다.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예수님의 복음에는 우리가 잃어버렸고, 우리가 알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밀과 약속이 들어 있습니다.
천국은 분명히 있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 그 문을 열어줍니다.
빌립이 이 복음을 전했더니 사마리아사람들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이해하고 믿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이렇게 사마리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이 믿음이 생겨서 예배드린다는 게 너무 신비하지 않습니까?
성도님들은 하나님나라를 믿으시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원자시라는 것을 믿으시죠?
그러면 모두 주님의 교회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교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믿고 전하는 진정한 주님의 교회임에 틀림없습니다.
3. 빌립이 복음을 전할 때 많은 기적이 일어납니다.
빌립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전할 때 여러 가지 표적들이 일어납니다.
7절,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지금은 교회에서 이런 기적들이 나타나지는 않죠.
지금도 이런 기적들이 자주 나타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성도님들 아픈 곳 좀 싹 다 낫게 하셨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1) 사마리아성에 성령께서 행하신 기적은 표징의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많이 고쳐주셨습니다.
맹인, 귀머거리, 나병환자, 중풍병자들이 주님께 몰려왔고, 다 고침을 받고 돌아갔죠.
그런데 구약성경 이사야서에 메시야가 오면 바로 그런 기적이 일어날 것을 예언해 놓았습니다.
이사야33장 4절, 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5절,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는 노래하리니
그런 기적을 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걸, 행하신 그 기적으로서 증명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 질병들이 실제적인 병이기도 하지만, 그 속뜻은 죄와 사망의 증상들이 치료됨으로 구원이 임했다는 것을 눈으로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셨을 때 사도들을 통해 주님과 똑같은 기적을 행하셨죠.
사도들이 주님의 복음 사역을 이어간다는 걸 보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빌립집사가 같은 기적을 행하게 하신 것은, 사도의 사역이 성도들을 통해 이어진다는 보증인 것이죠.
즉 성경에 있는 기적의 의미는 ‘예수께서 그 메시야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위임받았다, 사도들을 통해 믿는 성도들이 그 구원 사역을 이어간다.’
그 뜻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미 이것들이 당시의 기적을 통해서 다 확증되었고,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기에 다시 또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의 치유의 기적은 일반적으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2)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기도 응답으로서 지금도 치유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쳐주실 때,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셨다고도 하셨습니다.
병든 우리를 지금도 불쌍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표징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가 고통 중에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의 판단에 따라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전에 영월에서 백 년 된 무너져 가는 교회에 부임한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이 신학생 때 장이 괴사 되는 병에 걸렸습니다.
장이 전부 곪아서 시도 때도 없이 화장실을 드나들면 변기에 피가 가득했습니다.
생업도 사역도 할 수 없는 중환자가 된 것이죠.
결국 장의 대부분을 잘라내야 하는 위험한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얼마나 기도를 했겠습니까?
수술날짜를 잡아놓고 좀 더 기도하고 싶어서 아주 멀리 있는 교회에서 하는 집회에 참석을 합니다.
당시 형편으로 먼 곳으로 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닌데, 간절한 마음으로 교인들 몇 명과 함께 집회에 참석한 것이죠.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돌아왔는데, 다음날부터 이상하게 화장실 가는 횟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수술을 앞두고 의사를 만나게 되는 데, 염증으로 하얗게 덮여있던 장이 거짓말처럼 깨끗하게 회복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이렇게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크고 작은 간증들 웬만한 성도들은 다 한 두 가지씩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많은 성도들이 여전히 기도해도 낫지 않는 질환들을 한 두 가지씩 다 가지고 살아갑니다.
왜 모든 병을 다 낫게 해 주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신 데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17장15절,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싹다 천국으로 데려가시면 박해도 안 당하고 병으로 고생할 필요도 없잖아요?
그러나 이 땅에서 살면서 모든 악으로부터 견디게 하시는 것이 신비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치료해 주신 것만 놀라운 간증이 아닙니다.
치료해 주지 않으시는데도 ‘성경이 다 사기라’고 떠나는 게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을 믿는 게 더 놀라운 간증입니다.
또 우리가 기도했기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에는 예수님께서 합심기도의 특권을 주시고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전에 예배시간 중, 성순례집사님으로부터 폐혈증으로 중환자실에서 위독한 상태인 김영애씨를 위해 함께 중보기도를 함께 드렸었죠.
그 분이 돌아가시지 않고 회복되셨습니다.
우리교회가 서로의 어려움을 함께 기도하며 여기까지 이기고 온 것입니다.
앞으로도 교회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응답을 늘 체험하는 주나산이 되길 축복드립니다.
4. 복음을 받아들인 사마리아 교회에는 기쁨이라는 증표가 있었습니다.
8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지난 주 인테넷에서 기사를 하나 읽었는데, ‘요즘은 드라마도 도파민이 대세다’ 제목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도파민은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입니다.
쾌락의 호르몬이라고 하죠.
최근 시청률 대박이라는 ‘내 남편과 결혼해 줘, 밤에 피는 꽃’을 보며 시청자들 도파민이 팍팍 나온다는 것이죠.
요즘 사람들은 이전처럼 출생의 비밀이나, 주인공이 빌런에게 늘 당하다 마지막 한편에서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고구마 먹인다고 싫어합니다.
대중들이 기대하는 것은 강도 높은 대리만족입니다.
그걸 보면서 느끼는 짜릿한 사이다 같은 즐거움을 원하죠.
인생이 고되다 보니 드라마라도 재밌는 걸 찾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도파민은 조건이 충족될 때 나오는 호르몬입니다.
또 자극의 강도를 높여가야 계속 그 쾌락을 느낄 도파민이 나옵니다.
부부들이 서로를 보면서 도파민이 저절로 나올까요?
연애시절엔 눈길이 마주치기만 해도 도파민이 나오지만, 그 유효기간이 2년이 채 안된다고 하더군요.
아이 낳고 살다 보면 아무리 눈을 마주쳐도 도파민이 더 이상 안 나옵니다.
부부든 부모 자식간이든 서로를 오래 기뻐하려면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잘 살펴서 그 조건을 충족시켜 주어야 합니다.
내 아내가, 내 남편이 기본적으로는 그래도 나를 좋아하겠지라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저절로 도파민 나오던 시절이 지나면 그 다음은 기브 앤 테이크예요.
서로에게 성실하게 봉사하고 서로를 편하게 하고 인정해야 모든 관계가 오래 갑니다.
이웃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관계가 좋았다고 오늘도 좋을 거라 생각하면 안됩니다.
도파민 연구가들은 사람의 모든 결정과 선택이 결국은 도파민의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오늘 사마리아 성에서 터져 나오는 큰 기쁨은 도파민이 아닙니다.
본문의 기뻐했다는 단어는 세상에서 도파민이 나오는 경우와 정반대 경우에 서 쓰였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기뻐함, 시험당하는 자의 기쁨,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쁨’을 표현할 때만 이 기뻐한다는 단어를 씁니다.
이렇게 기뻐할 조건이 아닌데도 기뻐할 수 있으니 그 파워가 대단한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 기쁨을 뺏을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시험과 고난 중에도 기쁜 데 무엇인들 그 기쁨을 뺏을 수 있겠습니까?
이 기쁨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존재하심 자체가 우리에게 기쁨입니다.
‘아, 하나님이 계시구나, 그럼 그렇지!’ 이것을 알면 그것 자체가 정말 큰 기쁨이 됩니다.
저도 신앙생활 초반기에 버스를 타고 가다 갑자기 하나님이 계신 것이 선명하게 믿어지는 은혜를 체험했는데, 그 기쁨이 몇 달간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 담당하셨다는 걸 조금씩 알아갈 때 세상에 그런 기쁨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매일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는 것은 또 얼마나 잔잔한 평안과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내가 왜 살아가는지, 죽음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를 자동적으로 알게 되니 두려움과 근심이 사라지고 기쁜 것입니다.
이 기쁨이 현실의 조건들과는 상관 없잖아요?
사도행전5장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 붙잡혀서 매를 맞게 됩니다.
실컷 때리고 다시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말 하고 다니지 말라고 풀어줍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매를 맞을 수 있는 자로 인정받은 걸 너무 기뻐했다고 합니다.
매 맞는 수치심과 육체의 고통도 개의치 않을 정도였으니 최강의 도파민을 능가하는 기쁨이었던 것이죠.
복음이 있는 곳에는 전하는 자나 받은 자나 이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을 알고 구주 예수님을 믿고 이 기쁨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다녀도 아직 기쁘지 않다면 그 기쁨을 아는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쁨의 상태를 항상 유지해야 믿음이 힘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저절로 기쁜 상태가 지속되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도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기쁨의 근원이 없다면 무의미한 명령이겠지만, 우리 안에 기쁨의 원천을 주셨기에 믿으면 가능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기쁨을 구하지 말고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얻는 즐거움을 우리에게 금하지는 않으셨지만, 세상에 빠질수록 하나님께 대한 관심과 추구하는 마음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마리아사람들이 얼마나 세상적인 기쁨만 구하며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구원의 기쁨을 맛보고는 빌립이 가르치는 대로 따랐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 그 기쁨이 세상에서 얻는 기쁨보다 훨씬 크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죠.
사실 세상에서 받는 기쁨이 얼마나 있습니까?
뉴스를 봐도 기뻐할 소식이 하나도 없잖아요?
그런데 오늘 7절을 보면 사마리아교회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하지 않고 사마리아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의 큰 기쁨이 성 전체를 기쁨으로 들썩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간증영상을 자주 봅니다.
성경 말씀이 잘 이해 될만한 적당한 실화들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영상을 보다 보면 간증하는 성도의 기쁨이 보는 저에게도 전달되고, 제 안에도 기쁨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종종 느낍니다.
가족들이 기분이 좋으면 그 기운이 우리에게도 전달되잖아요?
제가 감사한 것은 우리 성도님들이 먼 길을 운전하고 이렇게 예배드리러 오는 것은, 오면 하나님이 기쁨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요란하게 떠들지 않아도 잔잔한 기쁨이 성도님들 얼굴에서 묻어나오고 점점 밝아지는 기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봉사하시는 권사님들이 맛있는 음식으로 또 얼마나 기쁘게 합니까?
전에 똑순이로 알려진 김민0씨 간증을 보니까 연예계에서 상처받고 사람들 피해 미국으로 갔는데, 거기서 작은 한인교회를 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예배를 드렸고, 무엇보다 집사님들이 해 주는 밥 먹는 재미에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게 치유였다고 하더군요.
서로를 위한 섬김과 나눔으로도 주나산교회생활이 항상 기쁨으로 충만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잘 배워서 알고,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사마리아교회가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의 큰 기쁨을 얻은 것처럼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저의 가정 말씀을 드려서 좀 쑥스럽지만 지난 주 제가 새삼 느낀 것입니다.
우리 가족들은 저의 형제들이 믿음의 1세대입니다.
부모님은 우리의 전도로 믿게 되셨구요.
교회를 개척하고 우리 어머니와 형제들이 할 수 있을 만큼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을 섬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정신을 차려보니 모든 형제들과 배우자와 자녀들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가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전율이 느껴질 정도로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아직 가족들이 믿음이 없어서 혼자 다니시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믿고 섬기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면 저처럼 어느 날, 내 혈육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을 눈으로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마리아교회의 기쁨이 사마리아성의 기쁨이 되는 축복입니다.
주님이 세우신 작고 아름다운 우리교회에서 함께 하나님을 섬기며 그런 복을 받으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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