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의견이 충돌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길이 더 좋을지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계획을 세우다 큰 의견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때 상황을 좀 살펴보고 우리의 믿음에도 잘 적용해 보겠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하늘에서 자기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했던 말씀을 보았습니다.
1) 그 후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칩니다.
안디옥교회가 얼마나 모범적으로 예수님을 믿었던지 안디옥 성도들에게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이 붙게 됩니다.
안디옥 교인들의 삶이 어땠길래 사람들이 뭔가를 달리 느끼고 그런 이름을 붙였을까요?
보통 사람들의 삶의 기준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부모세대 성도들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과 구별 된 무언가가 있었잖아요?
겉으로 드러난 것은 주일성수였을 것입니다.
주일에 말쑥하게 차려입고 헌금을 다리미로 다려서 성경책에 끼워서 교회로 가던 그 모습들이 세상과 달라 예수쟁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은 사회에 기독교인 냄새를 풍기지 않는 게 매너가 된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드러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 안된다는 것이죠.
실상은 우리 하나님의 세계를 불법 점유하고 살고 있는 게 세상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눈치보며 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쟁이라고 조롱을 받아도 옛날같은 당당함이 그립습니다.
가마치 통닭 대표인 김재0장로는 은혜를 받고 나니 당당하게 주일을 지키고 싶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치킨집에 닭을 납품하고 있었는데, 주일에 치킨집 매상이 제일 높던 때였습니다.
주일에 닭을 대주지 않으면 어떤 치킨집이 거래를 하겠습니까?
거래처를 일일이 찾아가서 내가 예수믿는 사람이라 주일에 일을 못하니 토요일에 정성껏 이틀치 닭을 납품해 주겠다고 하고 주일예배를 지켰습니다.
거래처 다 떨어져 나갈 것을 각오한 결심이었죠.
그런데 결과는 어땠을까요?
장로님의 믿음에서 신실함을 느꼈는지 거래처 한 곳도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어떻게 드러내고 살지를 고민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 안디옥교회는 성령님의 명에 따라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로 파송합니다.
교회의 담임목사를 선교사로 내보내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도록 때로 꼭 필요한 사람을 빼내십니다.
좋아하는 사람, 좋아하는 환경을 오래 누리고 싶다면 악착같이 붙잡기보다는 오히려 슬그머니 잡고 있는 게 좋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선교사 파송문제를 놓고 타당성한 일인지 회의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금식하고 기도하고 바나바와 바울을 파송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운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지를 안디옥교회가 보여주죠.
또 안디옥교회를 통해서 복음은 교회 밖으로 흘려 보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구원의 복음을 받았다면 내게 머물면 안되고 밖으로 흘려 보내야 합니다.
믿음이나 은혜나 은사나 남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은혜를 얻지 못합니다.
내 믿음이 정체된 것 같다면 내면의 믿음을 다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 가능한 선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흘려 보내는 게 필요할 것입니다.
광고판과 네온사인을 제작하는 분들이 모인 선교단체가 있습니다.
이분들은 17년째 농어촌, 섬마을의 미자립교회 십자가를 교체해 주는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할 줄 몰라도 본업으로 봉사는 가능하잖아요?
고장 나고 낡은 십자가를 바꿔서 설치했을 때 좋아하는 모습에 보람을 느끼고 오히려 그분들 자신이 은혜로 충만해 진다고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찾아서 감당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1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과 바나바는 다시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2년 가까이 교회를 가르칩니다.
3) 그러던 중 오늘 바울사도가 바나바에게 2차 전도여행을 제안한 것이죠.
1차 전도여행에서 세워진 소아시아교회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지 얼마나 궁금했겠습니까?
그런데 둘이 2차 전도여행의 계획을 세우던 중 큰 불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바나바는 1차 전도여행 때 동행했던 조카 마가를 이번에도 전도팀에 합류시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의견은 달랐죠.
마가가 1차 때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하고 도중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게 문제였습니다.
이천 년 전 먼 길을 걸어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는 선교의 꿈을 갖고 삼촌을 따라 여행에 함께 했지만 끝까지 감당을 못하고 중도하차 했던 것이죠.
바울사도의 성격상 이런 마가를 또 다시 데려갈 리가 없습니다.
목표가 생기면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드는 바울의 성격과 유약한 마가는 성격이 맞을 수가 없죠.
성격이 안 맞는 사람과 일을 함께 하는 게 피차 힘들잖아요?
4) 이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는 크게 다투고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독보적인 제자들도 싸우고 갈라섰다는 게 신선한 충격을 주죠.
우리는 똑같은 죄인들이고 인간들입니다.
‘저 사람이 저러는 게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은 서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1차 전도여행에서 이 둘을 한 팀으로 묶어주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번엔 이 팀이 깨지도록 그냥 두셨다는 것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다를 때나, 우리 앞에 있는 길을 선택할 때 우리는 기도하죠.
바울과 바나바가 기도를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했는데 성령께서 어느 한 쪽으로 답을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뭔가를 결정하고 선택해야 할 때 기도해도 답을 얻지 못해서 얼마나 조바심이 나고 답답합니까?
그런데 바로 16장을 보면 바울팀이 소아시아에 세워진 교회를 방문하는 것을 성령께서 강하게 막으십니다.
그리고 마게도니아 환상을 보여주셔서 바울의 선교지를 유럽으로 돌리십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절대 해서는 안될 일이라면 하나님이 정확히 막으십니다.
다 되려던 일도 기가 막히게 한순간에 뒤집어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에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선택과 길이 물론 있겠지만, 그것을 일일이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믿음의 판단을 하고 결정하며 책임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틀에 억지로 구겨 넣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5) 결국 바나바는 조카 마가와 함께 팀을 짜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39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나바가 구브로 섬으로 떠난 이유는 거기가 바나바의 고향이고 1차 전도여행의 첫 행선지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세워진 교회를 먼저 방문한 것이죠.
바울은 실라와 함께 떠납니다.
40절,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바나바팀은 지중해 쪽으로 배를 타고 간 반면 바울은 동선이 겹치지 않게 북쪽으로 해서 소아시아 쪽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여기서 행선지로 택한 길리기아 역시 바울의 고향입니다.
고향을 먼저 전도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죠.
우리가 적어도 내 가족, 내 친지, 내 친구, 내 동료들에게 복음 전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6) 이렇게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결과에도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해외 선교팀이 두 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갈라지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죠.
당장은 나쁜 것 같지만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마음이라면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선교 사역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유능한 선교사는 없잖아요?
바나바는 일을 할 때 사람을 중시하는 스타일입니다.
바울이 처음 회심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의심하고 경계했습니다.
그때 바울을 데리고 가서 교회에 소개했던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이방인 선교의 큰 일군이 될 바울사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마가에게서 그것을 보았던 것이죠.
오늘 바울과 바나바는 크게 다투고 헤어진 뒤 바나바는 더 이상 사도행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서신 중 고린도전서에 바나바를 언급하는 걸 보면 여전히 동역자 관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렇게도 못미더워 했던 마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중에 바울 서신 세 군데에서 바울은 마가를 동역자라고 부르며 무한 신뢰를 보냅니다.
베드로사도는 마가를 내 아들이라고 합니다.
유약한 도련님이 사도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자로 성장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마가는 마가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포기했다면 이런 결과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일 중심인 사람은 가장 합리적으로 성공할 방법을 원하죠.
결국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주요 인물인 실라를 동역자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유럽 첫 성 빌립보에서 둘은 구타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찬송할 때 옥문이 열린 이야기 아시죠?
마가가 과연 그런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아마 또 중도하차하고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에서 사역을 배운 게 잘 된 일인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어느 쪽이든 괜찮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의적으로 악을 택하지 않는다면 설령 어떤 선택이든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를 다시 인도해 주십니다.
6) 오늘 이렇게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땅, 거절과 박해를 뻔히 알면서도 왜 이 사람들은 이 복음 전도의 여정을 걸어가는 것일까요?
이들은 다들 편히 자기 인생을 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가는 부잣집 아들로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장소로 다락방을 제공했었고, 오순절 성령이 임하실 때도 제자들이 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죠.
마가의 집에 백이십여 명이 모일 정도였다면 상당한 저택을 가진 부자였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었던 바나바는 가룟유다가 죽은 뒤 12사도의 보궐선거에 맛디아와 함께 추천되었을 정도로 덕망 있던 제자입니다.
그냥 예루살렘 교회나 안디옥 교회에서 성도들을 가르치며 존경받으며 교회를 이끌 수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차세대 율법학자로 촉망받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과 서신서들을 보면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러 다니며 얼마나 많은 박해와 고난을 당합니까?
폭행당하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누구한테 따귀 한 대 맞아도 우리는 그 모욕감을 견디지 못할 텐데요.
이분들이 왜 그런 힘든 삶을 굳이 택하여 살았을까요?
구원의 값어치를 실제로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 유일한 답이 복음 안에 있잖아요?
구원의 티켓이 복음에 담겨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동해안에 석유가 매장되었다는 발표에 어제 종일 기사가 폭주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게 그 소식만 못합니까?
복음을 전했더니 구원받기로 정해진 사람들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기적을 볼 때 그 기쁨은 세상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죠.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다 사람들에게 거절당했던 상처들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두렵습니다.
그러나 바라기는 우리 안에 다시 복음전도를 위한 마음이 되살아나기를 축복드립니다.
2024년6월5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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