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눌 말씀은 바울사도가 법정에 서고 감옥에 갇힌 이야기입니다.
1. 어쩌다 바울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지를 먼저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사도는 아시아와 유럽 교회가 모아 준 연보를 들고 예루살렘 교회로 돌아옵니다.
유대교인들의 박해를 받던 예루살렘교회는 흉년까지 겹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지 열이틀 만에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죽게 될 위기를 만납니다.
이때 예루살렘에 주둔해 있던 로마군대 천부장이 군사들을 풀어 바울을 구출해 부대에 구금해 둡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시민이라는 것을 알고는 바울의 요청대로 로마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당시 로마총독부가 있던 가이사랴로 바울을 보냅니다.
그 로마총독이 22절에 나온 벨릭스입니다.
본디오 빌라도 총독 이후 여러 명의 총독이 갈리고 벨릭스가 유대총독으로 온 것이죠.
고대역사에 의하면 벨릭스는 노예출신이었다 자유민이 되었고 돈으로 유대총독이 된 사람입니다.
사람도 많이 죽이고, 출세를 위해 온갖 나쁜 짓은 다 했던 사람으로 로마 역사에서 유명합니다.
바울이 가이사랴로 호송되자 대제사장들도 더둘로라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찾아와 벨릭스의 법정에 바울을 고발하게 된 것입니다.
2. 오늘 본문에서 양측 주장을 다 듣고 난 뒤 벨릭스가 판결을 내립니다.
좀 애매한 판결을 내리죠.
22절,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하고
눈치가 9단인 벨릭스는 양측 주장을 듣고 바울에게 죄가 없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지 않고 재판을 연기했다는 것이죠.
바울을 자기에게 보낸 천부장을 다시 불러 자초지종을 더 알아보고 판결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뒤 천부장을 다시 불렀다는 말은 없습니다.
벨릭스는 무엇이 자기에게 유리한지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죠.
총독으로 있는 동안 탈이 없으려면 유대 지도자들의 환심을 사야 합니다.
그러려면 바울사도의 무죄를 선고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그렇다고 바울에게 형을 선고할 마땅할 죄목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유리한 걸 저울질하기 위해 시간을 벌겠다는 것입니다.
하필 바울사도가 이런 야비한 재판장을 만나게 되었을까 생각할 수도 있죠.
그러나 무죄로 풀려나지 않은 게 바울에게 잘된 일입니다.
앞에 보면 바울을 잡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겠다는 사십 명의 자객들이 바울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풀려나 군사들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순간 그들에게 붙잡히는 것이죠.
하나님은 불리한 재판 결과를 통해서도 바울사도를 보호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나쁜 일 가운데는 분명히 무언가 좋은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장 일이 잘 안 돼도 낙심만 할 일은 아닙니다.
벨릭스가 영리한 것은 바울사도에게도 최대한 편의를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23절,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왜 벨릭스가 죄수 바울사도에게 이렇게 너그럽게 대했을까요?
26절에 나오죠.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앞 17절에 보면 바울이 변론 중에 자기가 가져온 연보에 대한 말을 합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 바울은 그 연보금이 거액이었다고 말하죠.
이미 연보는 예루살렘교회에 전달되었지만 벨릭스는 바울에게서 뇌물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고소인들이 돌아가고 난 뒤 벨릭스가 바울사도를 부릅니다.
24절, 수일 수에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벨릭스의 아내가 유대 여자 드루실라라고 하죠.
이 여자는 헤롯왕가의 공주이고 둘의 결혼에는 치정이 얽혀 있습니다.
그런데 드루실라가 유대인이다 보니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있었던 것이죠.
벨릭스는 아내의 궁금증도 풀어줄 겸, 바울이 보석금이라도 제안할지 떠보기 위해서 바울을 불렀던 것입니다.
이때 바울이 설명했던 예수그리스도의 도가 무엇인지 25절에 나오죠.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바울은 벨릭스의 생각에 상관없이 곧이곧대로 복음을 가르친 것입니다.
자기 생사를 쥔 사람 앞이라면 상대의 비위를 맞춰 줄 말을 하지 않을까요?
바울사도는 자기 생명의 주인이 벨릭스가 아니라는 걸 압니다.
오히려 벨릭스의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고 있죠.
그러니 재판에 유리한 판결을 위해 복음에 물을 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벨릭스가 복음을 듣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고 바울을 만만히 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곧이곧대로 믿고 지키려한다면 주변 사람들이 결코 만만히 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높이지 않는 것은 결국 자기의 영적 권위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바울이 벨릭스에게 전한 복음의 내용은 우리가 잘 이해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이대로 전하고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의는 물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이죠.
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교훈에 따라 절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성도의 절제하는 삶은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증표인 것이죠.
그리고 역사의 마지막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뼈대에 살을 붙일 수 있도록, 배우고 또 전할 수 있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바울에게 복음을 들은 벨릭스는 모든 것을 올바로 이해했습니다.
25절을 보면 벨릭스가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이해는 바로 했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렇게 대답합니다.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벨릭스는 이해했고 진실에 두려웠지만 믿기로 결단하지 않았습니다.
벨릭스가 그날 복음을 거절한 뒤로 다시 그 두려움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벨릭스는 더 자주 바울을 불러서 대화했지만 구원에 대해 두려웠던 생각은 사라졌고 남은 것은 돈 생각 뿐이었습니다.
교회를 떠난 분들을 생각할 때, 그분들이 다 구원에 관심을 갖고 두려워했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저는 기억합니다.
성령께서 다시 그런 기회를 주시기만을 기도할 뿐입니다.
그렇게 바울을 구금해 놓았던 시간이 얼마입니까?
27절, 이태가 지난 후 브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이어받으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이 년 뒤, 벨릭스는 로마로 소환되어 정치생명이 끝납니다.
후임 베스도 총독이 부임할 때까지 바울을 감옥에 가둬 두었다는 것입니다.
5. 바울이 구금되었던 2년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에 잡혀있는 동안 두 명의 총독을 만납니다.
유대지방을 다스리던 아그립바왕과 왕비도 만나 복음을 변론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된 것이죠.
바울 같은 평민이 임금들 앞에 서서 예수님의 이름을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그런데 그 일이 실현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죄수의 신분이 되어서 주님의 이름을 전하게 된 것이죠.
또 23장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혔던 그 밤에 예수님이 바울사도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그렇다면 이제 로마로 호송되어야 할 텐데,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바울사도를 2년간 감옥에 두신 것일까요?
어떤 목사님 지인이 억울한 일로 한 일년 반 감옥에 있다가 나왔다고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위로했더니 하는 말이 ‘병 다 나았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사람 안 만나고, 스트레스 안 받으니 병이 다 나았다는 거예요.
바울사도는 삼차 전도여행을 해오며 많은 위험과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쉬지 않고 달려왔잖아요?
물론 좀 좋은 환경 속에 쉬게 하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사도가 좋은 환경에서 쉬고 있을 사람이 아니죠.
억지로 사역을 쉬며 주님과의 기도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곳은 어쩌면 감옥이 제격이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는 기도할 수 있는 감옥이 죄짓는 세상보다 더 나을 것입니다.
만일 바울이 풀려나 어디서 선교활동을 했다면 악의를 품은 유대교인들은 바울을 찾아내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것입니다.
2년간 바울이 감옥에 틀어 박혀 있는 동안 그 갈등도 다 사그러듭니다.
우리 삶에서도 때때로 감옥 같은 환경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반복되는 일상도 감옥 같다고 하죠.
놓여날 수 없는 빚, 정신과 육체의 질병, 사람 관계, 가정과 가족의 문제들, 닫혀진 미래.
이런 고통스러운 시간에 있을 때 하나님이 왜 나를 이런 감옥에 두시는지 원망스럽죠.
태어나면서부터 낭포성 섬유증이라는 불치병을 갖고 살다 21살에 세상을 떠난 클레어 와인랜드란 여성이 있습니다.
삼십 번의 수술을 했고 어디를 가든 산소탱크를 끌고 다녀야 했습니다.
클레어는 어린 나이임에도 이런 놀라운 말을 합니다.
‘우리 인생이 꼭 행복해야만 하고, 꼭 건강해야만 하냐’는 것입니다.
어린 여성이 일찍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우리가 너무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매여있는 건 아닐까요?
사실 성경이 가르쳐주신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복이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복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에서 복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마음이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고,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청결하고, 의에 목마르고, 화평케 하고, 의를 위해서 박해받는 자들이잖아요?
신자들이 그 복을 어느새 세상적인 행복으로 바꾼 것이죠.
클레어는 건강하지 않고 행복하지 않은 자기 인생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스스로가 보람된 일을 찾아 했고, 마지막에 정말 가장 뿌듯하게 여겼을 일을 하고 떠납니다.
50명에게 자기의 신체와 장기를 내 주어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줍니다.
바울사도가 감옥에 갇혀 지내게 된 2년, 세상이 볼 때 행복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한 바울에게는 그 어느 때 보다 복된 시간이었습니다.
세 번의 선교여행 중 세워졌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중보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게 좋아야 행복하다는 생각, 행복해야만 좋다는 생각을 조금 바꿔본다면 차라리 힘든 날들을 견디기가 더 쉬울지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클레어보다는 더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을 여건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속상해도 기도할 수 있고, 친절하게 말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든지 많잖아요?
그렇게 어려운 날들에 작은 의미들을 공급한다면 행복하지 않은 날들도 점점 복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나 이런 참된 복을 더욱 알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24년6월26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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