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에서는 우선 예수님의 대속으로 열린 구원의 길이 어떻게 세계를 향해 펼쳐지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등장하는 성도들에서 우리 믿음에 적용되는 부분들을 찾으면 되겠죠.지금도 시대는 다르지만 사도행전과 똑같이 구원의 역사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복음 전파에 차질을 빚었던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계획했던 2차 전도여행은 마가를 동행하냐 아니냐의 문제로 팀이 갈라지게 됩니다.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섬으로 향했죠.
구브로는 현재 지중해에 있는 키프러스섬입니다.
거기에 지금도 바나바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실라와 함께 소아시아로 향한 바울사도는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선교지를 바꾸게 되었죠.
그리고 빌립보, 베뢰아, 데살로니가, 고린도 등지를 다니며 복음을 전합니다.
선교를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다시 복귀한 바울은 곧 3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1) 오늘 본문의 배경이 바울의 3차전도여행입니다.
3차전도여행에는 디모데와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바울과 동행합니다.
3차선교여행에서는 1,2차 선교 때 다녀던 지역들을 주로 재방문합니다.
2차 때 막으셨던 소아시아 전도의 문도 다시 열립니다.
유럽에 먼저 복음의 씨를 뿌린 뒤 다시 아시아쪽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이죠.
우리에게도 지금 막힌 문이 때가 되면 열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2년 이상의 시간을 보냅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튀르키예에 위치한 곳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명칭을 소아시아, 혹은 아시아라고 합니다.
8절을 보면 바울이 처음에는 에베소에 있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죠.
8절,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바울의 선교전략을 보면 도시를 먼저 찾되 유대교인들의 회당에서 전도를 시작합니다.
유대교인들은 일단 하나님을 섬기고, 구약성경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구약의 메시야 예언을 시작으로 예수님을 소개하기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생기면 교회가 세워지게 되는 것이죠.
그 지역의 전도는 세워진 교회에서 맡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베소에도 복음을 거부하고 적대시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9절,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회당에서 석 달을 가르쳤다고 하죠.
얼마나 복음을 잘 가르쳤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깨달은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에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진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비방하지 않고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기적인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유대인들의 비방에 바울사도는 회당을 떠나 다른 집회장소를 구합니다.
9절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바울이 반대하는 자들과 맞붙어 논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계속 유대교인들과 붙어서 논쟁하는 것은 불필요한 소모전입니다.
피할 수 있는 분란은 피하는 게 좋습니다.
내 영적 에너지와 감정만 소모 시키는 사람과는 차라리 빨리 손절하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 대신, 복음을 믿게 된 제자들과 함께 두란노 서원으로 옮깁니다.
당시 대도시인 에베소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교육 장소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학원 같은 개인학당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두란노는 헬라어로 튀란누인데, 아마도 그 학당 소유주의 이름일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이 두란노의 서원을 빌려서 2년 동안이나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그동안 유대인 회당을 중심으로 했던 바울사도의 선교사역이 에베소에서 완전히 달라진 것이죠.
또 그동안 바울사도가 여러 지역을 숨가쁘게 순회하며 전도했던 것과도 다릅니다.
우리가 항상 같은 방식을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예상치 못했던 길,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시기도 하십니다.
인생의 큰 변곡점은 거의 그렇게 예상치 못했던 일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현재 내 상황에 변수들이 끼어들 때는 더욱 기도하며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유대교인들의 방해로 회당 사역을 못하게 되었지만 바울의 사역은 두란노서원으로 옮기게 됨으로 더 광대한 사역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이때에 자기에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다고 기록하죠.
3) 두란노서원에서의 사역이 어떻게 뻗어나갔는지 10절에 나옵니다.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회당에서는 유대인이나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만 상대해야 했죠.
이제는 이방인들에게도 열린 공간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듣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으면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이 다 복음을 들었다고 했겠습니까?
바울이 움직이지 않는 대신 하나님이 사람들을 움직이신 것입니다.
파주의 한 대형교회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어릴 때 부모님이 시골교회를 개척해서 사역하시던 중 일찍 세상을 떠나십니다.
어린 나이에 혼자되었으니 사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래도 부모님의 기도대로 정말 목사가 되길 간절히 원했는데 신학교 시험을 11번이나 낙방합니다.
그렇게 많이 떨어진 사람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그렇게 12수 만에 신학대를 들어가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파주에 있는 자기 집에서 10명의 성도들과 개척을 합니다.
그런데 그 이후 매주 수십 명의 성도들이 어디서 알고 왔는지 찾아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년 만에 팔백 여명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듣고 왜 우리교회는 이렇게 성도들이 늘어나지 않는지 더욱 낙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도들이 계속 모여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몰아서 보내 주셨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잖아요?
오늘 바울의 두란노서원에 아시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몰아서 보내주셨던 것 같은 것이죠.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그렇게도 하시고 이렇게도 하시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에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도들을 더 보내주실 것을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살다보면 그렇잖아요?
이건 내 실력이 아니다, 이런 일은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될 일이 아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때가 종종 있죠.
우리 성도님들의 생활 속에 이런 하나님의 몰아주시는 역사도 임하시길 축복드립니다.
4) 하나님은 바울의 복음전파에 놀라운 능력으로 지지해 주십니다.
11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12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어마어마한 치유의 이적이 일어났죠
바울이 에베소에서도 아마 천막을 짓는 일을 하면서 사역을 했을 것입니다.
바울사도를 찾아왔던 사람들이 바울을 만나지 못하면 일할 때 사용했던 앞치마나 땀을 닦던 손수건을 가져다 환자에게 얹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이죠.
베드로의 경우도 그랬잖아요?
베드로가 지나갈 때 그림자에만 닿아도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특히 이런 치유의 기적은 1세기 복음전파의 특수한 상황에서 강력하게 복음전파를 뒷받침해 주시기 위한 목적입니다.
당시 에베소에는 7대 불가사의 건축물 중 하나인 아프로디테 거대 신전이 있었습니다.
에베소가 대도시였고 우상숭배가 만연했다는 걸 알 수 있죠.
우상의 도시인 에베소와 소아시아에서 참 신이신 하나님을 뒷받침할 강한 이적으로 함께 일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계획이십니다.
지금도 복음의 불모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에게 하나님은 이런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십니다.
전에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선교사가 이런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선교사님들이 대개 여러 지역을 전도해 교회를 세우고 순회 목회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데, 어떤 여인이 병든 딸을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딸은 쉴 새 없이 간질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는 거예요.
예배가 끝나고 아픈 딸을 데리고 나오더니 선교사님에게 기도를 해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선교사님은 누구의 병을 낫게 해 본 적도 한번 없는 사람이었으니 당황한 것이죠.
속으로 이런 병이 기도한다고 낫겠나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는 내가 듣는 것이지 네가 듣는 것은 아니지 않니?
믿어지지는 않았지만 거기 사역자들과 함께 간절히 기도를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눈을 떠보니 여전히 딸이 고통스러운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다른 지역 사역을 위해 떠나게 됩니다.
몇 달 뒤에 다시 그 교회로 돌아갔는 데 그때 그 모녀가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아주 온전하게 예배를 드리는 거예요.
기도했던 그날부터 간질병이 완전히 치료가 되어서 교회를 잘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바울의 복음 전도를 통해서 세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믿고 구원받음, 병고침, 악귀가 떠남.
지금도 동일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지금도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계속 듣는 중에 믿고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도 수술과 약을 통해서지만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직 치유되지 않은 병들은 고쳐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안 고쳐지는 병이라면 바울의 가시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스럽지만 내 영혼에는 말할 수 없는 유익이기에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이죠.
가시가 사람을 죽이지는 못하지만 늘 찌르기에 고통스러운 것이죠.
악귀가 떠나는 일도 보이지 않지만 당연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악귀는 흡혈귀처럼 우리의 행복을 빨아들이죠.
처음 교회에 나올 때 사람들의 얼굴은 마치 진액이 다 빠진 것 같습니다.
까칠하고 불안하고 우울한 얼굴로 찾아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습이 정말 변해갑니다.
사도행전에서 일어나는 복음전파와 그것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생명과 복은 지금도 동일하게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도 변함 없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마음도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에게만이 아니라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기도만 해줘도 그 영혼이 당장 파멸에 구렁텅이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우리 삶에서 이런 능력과 기적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24년6월12일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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