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B39UEPGsOOQ
예루살렘 교회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반대로 명예로운 죽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난 주 초대교회는 두 파벌 간의 갈등을 은혜롭게 해결하고 다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살림을 전담할 일곱명의 집사들을 선출하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죠.
그런데 일곱 집사 중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은 것입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해서 칭찬받던 스데반의 난데없는 죽음에 교회는 또 한번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교회 역사 최초의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순교는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 나오는 만적과 같이 자신을 불살라 신에게 바치는 인신공양이 아닙니다.
순교는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병이 들어서건, 수명이 다해서건, 박해를 받아서건, 타의로 인해 죽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나 다 순교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공로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계속해서 배우고 따라가야 합니다.
오늘 스데반을 통해 순교자로 살아가기를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1.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게 된 사건의 경위를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이 일은 스데반이 교포 유대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시작됩니다.
그들이 누군지 6장9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자유민들이란 식민통치를 받는 본토 유대인들이 아니라 로마시민권을 가진 교포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당시 로마시민권자의 자부심은 대단했죠.
게다가 이들은 따로 회당을 짓고 율법을 토론 할 정도로 유대교에 열성파였습니다.
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이라 이들과 문화와 언어가 잘 통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유민들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날 논쟁이 된 부분은 율법과 성전의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고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믿었습니다.
복음은 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라 십자가의 대속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잖아요?
율법을 지켜 온 유대교인들에겐 도전이고 모욕인 것이죠.
또 이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계신 유일한 곳입니다.
성전이 있는 한 이스라엘은 안전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죠.
주님의 몸으로 영원한 성전을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성전도 성전의 제사도 다 예수님을 상징하기에 십자가와 부활 이후엔 더 이상 필요치가 않게 된 것이죠.
지금 이스라엘에서 실제로 다 없어졌잖아요?
이 복음을 유대교인들에게 납득시키는 게 보통 일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다 보면 사람마다 갖고 있는 여러 장애물에 부딪칩니다.
제사 때문에 못 믿는다는 분들도 있고, 한 집에 두 종교는 안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학을 내세우기도 하고, 자기는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 종교가 필요 없다고도 합니다.
사람이 먼저 받아들인 지식이나 사상을 고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듣고 배운 것이고 진리가 아니잖아요?
성경은 신앙을 제외한다 해도 객관적으로 가장 진리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것을 완강히 고집하는 게 보통 사람들 태도입니다.
스데반이 율법에 더 열심을 내기 위해 귀국한 도도한 로마시민권자들과 논쟁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에 통달한 지식과 지혜가 충만했던 스데반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논쟁에 지자 이들은 더 많은 가짜 증인들까지 매수해서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에 정식 고소를 한 것입니다.
죄목은 ‘성전와 율법을 모독했다’입니다.
산헤드린 공회로 말하자면 그동안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교회가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에게서 기적은 일어나지, 백성들은 따르지, 그대로 두면 점점 메시야를 죽였다는 비난이 자기들에게 쏟아질 판입니다.
모조리 잡아 들여 끝장을 내고 싶었지만 백성들이 두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잡아다 매를 때리고 부활을 전하지 말라고 겁박하는 정도밖에 조치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이번엔 주민들 쪽에서 마침 스데반을 고발한 것입니다.
이게 왠 떡입니까?
이 재판의 유죄 판결을 내리고 사도들도 잡아들일 계산을 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기에 자체적인 재판권이 없습니다.
단 대제사장과 장로들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회에서 성전과 하나님을 모독한 종교적인 죄에 대해서만은 투석형을 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두 번이나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셨습니다.
공회가 고발 내용이 사실이냐는 심문에 대해 스데반이 변론하는 내용이 7장에 길게 소개됩니다.
스데반의 설교라고 볼 수 있는 긴 변론의 내용에서 그의 해박한 성경지식을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변론을 보면 복음은 새롭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구약성경과 선지자들이 계속 메시야의 구원을 말해왔던 것을 송곳처럼 정확하게 찍어서 증언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복음을 듣고 믿자고 모인 게 아니죠.
복음을 파괴하려고 악의 가득 찬 그들을 보며 스데반이 무섭게 책망합니다.
51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52절,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조상들은 메시야를 예언을 하던 선지자들을 죽였고 너희들은 그들이 예언했던 메시야인 예수님을 죽인 살인자들이라는 것이죠.
감히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이런 말을 했으니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을지 상상이 됩니다.
사람들이 이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합니다.
54절, 그들이 이 말을 듣고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스데반의 말이 양심에 걸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옳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대개는 자기 생각과 욕심에 맞는 것을 믿잖아요?
싫은데, 그게 옳다 생각하니 오히려 이를 갈며 분을 삭이고 있었던 것이죠.
2. 이 일촉즉발의 순간,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주목합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보이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장면의 신비로움을 아시겠습니까?
성령께서 스데반에 임하셨고, 성부하나님과 성자하나님까지 완전하신 삼위일체로 보이신 것입니다.
한 성도가 믿음으로 살다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하게 보시고 귀하게 영접하시는지를 알 수 있죠.
시편 116장 15절,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스데반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과 영광에 사로잡혀 소리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감격과 환희에 찬 스데반의 얼굴은 기쁨의 광채가 빛났을 것입니다.
저도 지난 주 공원을 걷는 데 하늘이 정말 깨끗하고 구름은 하얗게 빛나는 걸 보면서 스데반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저 하늘을 열어 주시면 바로 저기 주님이 계실 텐데.
우리는 하나님이 지척에 계시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스데반을 지켜보셨듯이 우리를 보십니다.
죽음으로 순교하는 스데반에게만이 아니라 순교의 마음으로 사는 우리에게도 삼위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57절,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절,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군중들이 귀를 막고 신성모독이라고 고함을 치며 달려드는 광경이 마치 악귀들 같이 소름끼치지 않습니까?
성경에 예수님께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신 기적이 나옵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붙잡혀 있었다’는 단어를 씁니다.
그리고 오늘 이들이 귀를 ‘막았다’는 단어가 그것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들이 스스로 귀를 틀어 막은 것 같지만 병마가 사람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처럼 어떤 악한 힘이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이들을 봉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이들이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다는 단어는 돌진했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거라사지방의 군대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것을 아시죠?
그때 귀신들이 이천마리의 돼지떼에 들어갑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바다로 돌진해서 물에 빠져 죽죠.
거기서 돼지 떼가 ‘돌진한’ 것과 유대인들이 ‘달려든’ 게 같은 단어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사탄이 가득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성령을 시험했듯이 이 유대교인들에게 악령이 가득 차 조정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티기독교인들이 악플을 달고 악에 받쳐 교회를 핍박할 때 그게 자기 마음만은 아닌 것입니다.
광란의 유대인들은 이렇게 스데반을 예루살렘 밖으로 몰고 가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3. 스데반의 순교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순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서 목숨을 버리신 유일한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뭐하러 목숨을 버리라고 하시겠어요?
오히려 살아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인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 역사 속에서 기독교신앙을 금지하고 배교의 위협을 받았던 때도 있습니다.
순교는 이런 상황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거의 모든 한국교회가 살기 위해서 일본 신사에 가서 일본신에게 허리를 숙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신데 일본 신을 섬기지 않겠다고 각오한 주기철목사님 같은 분이 옥고를 치르다 순교자가 되셨던 것이죠.
그런 분들은 죽음으로 주님께 대한 충성을 증명했으니 오히려 부럽고 참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순교자들처럼 예수님을 부인하지 못할 믿음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을 빼고 예수님을 제외해 버리면 뭐가 남습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다면 나도, 이 세상도 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만물과 나를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우연히 생겼다 고생과 탄식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만일 이게 전부라면 우리가 무슨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살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악을 대항해 절대로 이길 수도 없는데요.
이번에 미국 텍사스주 초등학교에서 총기난사로 21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있었죠.
그런 악에 우리가 어떻게 다 대비하고 그걸 막아내고 싸워 이기겠어요?
우크라이나 참극을 봐도 그렇죠.
사악한 악의 세력에 대해 사람이 얼마나 무기력합니까?
인터넷에 그 초등학교 주변에 몰려 슬퍼하는 사람들의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 중 한 사진에 제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대여섯명의 아버지들이 둥글게 서서 한없이 내려앉는 서로의 어깨를 감싸 안고 머리를 숙여 기도하는 사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모든 악을 심판하실 것이고, 지금은 상처 난 우리 마음을 싸매 주시지 않는다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겠습니까?
하나님을 우리 인생에서 뺀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내게 껍데기 인생만 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당장 죽지는 못해도 하나님을 위해 살고 있다고 믿습니다.
어찌 보면 살아 남는 게 순교보다 더 힘들지 모릅니다.
또 질병이든, 사고든, 자연사든, 그 어떤 죽음일지라도 순교보다 쉽고 만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순교자이고 이 땅의 생을 마칠 때 평생 하나님을 위해 살다 죽은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4. 그렇게 순교자처럼 사는 것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오늘 스데반에게 돌진하는 유대인들처럼 마귀는 성도들을 세상 밖으로 몰고 가 매장시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세상에 내몰려 반쯤 생매장 되어 돌아오지도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스데반이 믿음으로 죽을 수 있었던 이유를 성경에서 우리는 발견합니다.
5장5절,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
5장10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7장55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한 사람을 설명할 때 이렇게 거듭 성령으로 충만하다고 하는 게 신기하죠.
성령을 따라 살아야만 죽던, 살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은 거듭 성도들이 성령의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는 동일하게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나 삶의 능력이 되는 성령충만의 정도는 사람을 구별해서 주십니다.
우리 청년시절엔 사도행전 같은 성령충만 받기를 무조건 다 원했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믿음 안에서 살려는 간절함을 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오순절의 집단 성령충만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성령충만은 그들이 그것을 감당할 심신의 경건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기도와 말씀으로 다져진 경건한 유대인이었다고 밝힙니다.
거기에 성령충만이 부어지니 이미 습득한 경건이 큰 역사와 열매로 나타난 것이죠.
성령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단계에 맞게 인도하십니다.
새신자에게 초대교회 같은 성령충만을 주시면 본성을 따라 살아온 인격과 오히려 큰 부조화가 생깁니다.
성령님이 내게 영향을 주시는 충만의 정도는 내 인격이 수용하고 순종할만한 경건의 정도와 비례합니다.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담을 몸을 만들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원을 걷다 보면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옛날 가요를 크게 틀고 다녀서 민폐를 끼치는 어르신들이 있죠.
거기에 못지 않게 어떤 분들은 찬송가를 크게 튼 채로 운동을 하십니다.
전엔 그런 걸 볼 때 좀 자제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도 좀 듭니다.
저분이 찬송가를 매일 들을 정도로 신앙이 몸에 배고 습관이 되었다면 그것만도 참 귀한 것이죠.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담을 그릇은 경건의 훈련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함으로 꾸준히 경건을 키워가야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말씀과 기도의 훈련이 없이는 성령의 충만함을 담을 그릇을 키워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훈련을 꾸준히 하는 것 자체도 순교하며 사는 것과 다름 없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에 대해 치닫는 관심을 죽이는 것도 순교만큼 어렵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나섰다면 세상에 대해도 어느 정도 선을 그어야 합니다.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께 속한 것을 감별해서 들여놔야지 그렇지 않으면 세속에 금방 잠식당합니다.
그리고 내게 속한 것들, 시간, 재능, 물질, 지위, 관계,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도록 고민하며 실제로 그렇게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루 하루 순교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성령충만하고 유능한 스데반집사의 죽음이 허망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의원 누가는 이 사건에서 사울이라는 청년에게로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울사도이죠.
앞에 보면 오늘 사건을 일으킨 교포회당엔 길리기아에서 온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바울의 고향이 길리기아 다소라는 도시잖아요?
바울은 처음부터 스데반과 논쟁했고, 회당의 유대교인들과 함께 스데반을 고소했고, 법정에 시종일관 참여했고, 스데반을 죽이는 데 찬성표를 던졌고, 스데반이 죽는 현장을 지켜보았습니다.
성령께서 이 사실을 의미 있게 기록한 것은 바울의 전도의 공로를 스데반에게 돌리신다는 뜻입니다.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의원 누가가 어떻게 법정 진술을 이렇게 소상히 기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날 법정에서 율법학자 바울이 스데반의 변론을 인상깊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스데반의 설교를 복기했을 것입니다.
스데반의 성경 해석이 바울이 복음을 연구하는 기초가 되었을 것이고 제자 누가에게도 스데반의 설교가 전수 되었던 것입니다.
죽어서 순교하든 살아서 순교하든 순교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갔을 때 평생 내 안위만 생각하고 세상과 죄를 버리지 못한 것을 책망하지 않으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스스로 나의 구주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온 것에는 후회와 안타까움이 클 것입니다.
내가 그래도 일생을 순교하는 마음으로 살길 잘했구나 그런 큰 기쁨과 뿌듯함으로 영생을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스데반의 죽음을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그만큼 큰 가치와 행복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행복을 찾으려 좇아 가지만 늘 말씀드리듯 세상이 사람의 욕심과 소원을 결코 채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난 주 오래 전에 알고 지내던 분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습니다.
통화가 끝난 뒤 농협 한우를 선물로 보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제 점심에 그 한우를 후라이팬 한 가득 구워 놓고 먹었습니다.
한우에는 설레임이 있죠.
고소한 지방과 적당한 육즙이 어우러져 고기가 얼마나 맛있던지 사람들이 왜 한우 타령을 하는지 알겠더군요.
한 대여섯점 먹고 나서 부터는 맛은 있지만 그냥 고기맛일 뿐이었습니다.
내일 또 한우 먹겠냐고 한다면 김치찌개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아래층 미용실 원장이 골프를 한 때 열심히 쳤다고 하더군요.
동네에서 같이 다니는 팀이 있는데 이제 같이 안 다닌다고 합니다.
왜 그렇게 매일 돈 자랑들을 하는지 그 소리가 듣기 싫다는 거예요.
세상이 주는 행복의 크기가 한우 다섯 점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나는 돈이 많아 행복하다고 끝없이 자랑하는 것은, 아무리 자랑해도 만족스럽지 않은 마음 속 어떤 구멍 때문 아니겠습니까?
스데반이 죽어도 좋을 만큼 예수님을 위해 살았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 안에 큰 행복과 만족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수록 우리에게도 이런 만족과 행복을 점점 더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은 주님을 인격적으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주님께서 당부하신 복음의 증인이 되는 것도 있음을 항상 기억하고 복음에 빚진 자의 마음으로 사는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질 만한 짐은 어느 정도 지고 가야 신앙의 근육이 생깁니다.
몸의 근육을 만들려면 무게가 나가는 걸 들어 올리고, 땡기고, 밀고, 버티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긴 댓가는 죽어도 놓고 싶지 않은 스데반 안에 가득했던 만족과 보람으로 가득 찬 인생이고, 또 영생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매일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순교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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