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BxgSL3xocME
지난 주 오순절의 성령강림과 예루살렘교회의 탄생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주 말씀은 구원의 전과정과 구원받은 교회의 모습을 조감도처럼 한 눈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걷지 못했던 한 성도의 구원에 집중됩니다.
마치 드론으로 찍은 영상이 마을 전체를 보여주다 점점 한 집을 향해 다가가 그 집을 자세히 보여주는 것과 같은 것이죠.
오늘 말씀에서 삼천명의 구원이 아닌 나 한 사람의 구원에 관심을 기울이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 베드로와 요한이 행한 기적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다들 아실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들어가다 미문이라는 문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보게 되죠.
제자들에게 적선을 구하는 이 장애인에게 베드로가 아주 유명한 말을 하고 이 사람을 고쳐 걸을 수 있게 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1) 성경에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도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성경의 모든 기적은 잘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연 세상 중에서의 초자연적인 간섭을 극도로 제한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법칙 안에서 기적이 없이도 충분히 일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적으로 병이 치료되었다면 병고침 자체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이적들은 먼저 이런 시각으로 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행하셨던 이적의 목적을 가장 분명히 밝히신 부분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헤롯왕의 감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릴 때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질문을 전달합니다.
오실 그 메시야가 당신이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을 보내십니다.
마태복음 11장5절,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것은 구약시대의 이사야선지자가 예언했던 미래 메시야의 사역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통해 이런 기적이 일어나고 있잖아요?
이보다 더 확실한 메시야의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메시야가 나타나서 병 고치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한 걸까요?
인간의 질병과 모든 고통은 죄로 인해 발생한 것이기에 질병이 없어진다는 것은 죄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의 속죄를 통해 영혼과 육체의 구원과 치유가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질병을 치유하고 귀신을 쫒아내실 때 그것을 구원과 결부시키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영혼의 치유만이 아니라 삶과 인격의 치유도 동반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받았는데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고 삶과 인격도 그대로일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또 중요한 것은, 그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이 지금 제자들을 통해 계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제자들의 사역을 의심한다면 똑같이 대답할 수가 있는 것이죠.
지금 제자들을 통해 앉은뱅이가 걸으며 죽은 자가 일어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오늘 이 복음을 받고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처럼 우리도 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고침 받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2) 하나님은 지금도 실제적으로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십니다.
물론 성경의 치유 기적이 현대에 그대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 의미가 충분히 밝혀졌기에 그대로 지속 될 필요는 없는 것이죠.
의학기술의 발달로 기적적인 치료가 필요없는 질병들도 많아졌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역자들의 치유의 은사도 더 이상 없습니다.
현대에도 기적적인 치유가 있지만 그것은 병자의 간절한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개인적인 기도응답인 것입니다.
제가 온누리교회 청년부에 다닐 때 이철0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선교사가 되어 오랫동안 몽골에서 사역을 했더군요.
선교사가 얼마나 희생하며 고생을 합니까?
그렇다고 고생한 만큼 열매가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선교활동으로 지쳐가던 때 한 여자성도가 딸을 데리고 이선교사님을 찾아왔습니다.
다섯 살 난 딸의 머리에 머리카락이 한번도 나온 적이 없다며 머리 수건을 벗겨 보이는 데 정말 반들반들한 민머리였습니다.
그러면서 선교사님이 딸의 머리카락이 나오도록 기도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기도 부탁 받으면 정말 식은 땀이 나죠.
기도로 병을 고쳐 본 적이 없는 이선교사님은 성도와 딸의 모습이 너무 안되서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서 그 성도가 예배시간에 간증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때 기도를 받은 뒤 딸아이에게 머리카락이 자라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릿수건을 벗겨 보여주는 데 새까만 머리카락이 수북이 자라있었습니다.
어린 딸을 불쌍히 여기시고 간절한 모성과 선교사님의 안타까운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신 것이죠.
그 이후 다른 사람에게서 머리카락이 자라는 기도의 역사는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이런 기도의 응답, 치유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에게도 약을 썼든 아니든, 이건 하나님이 고쳐주셨다고 확신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하나님이 최악의 상황을 면하게 관여하고 계시다는 게 확실한 질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낫지 않는 질병도 있고 해결되지 않는 환경도 있습니다.
인생의 고난은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이기에 경솔히 다룰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병이 나고 삶의 어려움이 왔을 때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야고보서 5장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병원도 다니고 약도 드시되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2. 그러면 걷지 못하던 걸인이 치유되는 기적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이 장애인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셔야 할 죄인들의 영적 상태와 불행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다 죄인이고 불쌍하고 그렇죠.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다리가 불구여서 한번도 걸어본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나면서부터 영적 불구자인 모든 죄인들을 대변하는 사람인 것이죠.
4장에서 나이가 40세 정도 되었다고 하니 40년 동안 한번도 걸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구걸이라도 해서 먹고 살라고 매일 이 사람을 메고 와서 미문이라는 성전 문 앞에 놓아두고 갑니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성전에서 기도하는 규례가 있었습니다.
기도하러 가는 길인 만큼 율법에 명시된 자선을 행하려 동전을 던져 주었을 것입니다.
불구자에다, 구걸하여 먹고 살아야 하는 이 장애인의 인생이 참담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걸인의 앞을 지나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는 한번도 성전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구약시대에 불구는 죄의 결과라는 의미이기에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율법 조항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영적 불구자로 태어나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실제 죄인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이 걷지 못하는 걸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9장을 보면 베드로가 오후 12시 기도시간에도 기도한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든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십니다.
성령님은 기도하는 사람과 함께 일하십니다.
특히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는 기도생활은 아주 중요하다고 제가 계속 강조하죠.
꾸준한 기도와 같은 경건의 훈련은 믿음의 기본기를 탄탄히 다져줍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신앙생활과 기도와 성경을 배우며 성장하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경건한 신앙 훈련은 죄와 세속의 유혹을 거부할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란 자녀들을 악으로부터 지켜주시고 세상과 주님을 위해 가치 있는 삶으로 축복하십니다.
디모데는 외조모와 어머니를 통해 어려서부터 신앙훈련을 잘 받았기에 바울과 동역하며 그 시대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먹고 사는 데만 급급했던 어부였다고 생각하면 틀립니다.
사도요한은 이미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고 사도 베드로 또한 메시야를 고대했던 신앙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경험적으로 만났을 때 잘 다져진 신앙의 기본기가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베드로와 요한의 이 기적은 충만한 기도 없이 이뤄질 수가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평소 기도하던 대로 기도도 하고, 또 기도하러 모인 사람들에게 전도할 목적으로 성전에 갔을 것입니다.
그날 이들의 눈에 늘 거기서 구걸하던 이 장애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성령께서 이 사람을 고치실 것이라는 확신을 이미 주신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성령님의 의도하심을 잘 알아챕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이 장애인과 마주해 주목하여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바라볼 때 내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닙니다.
내게 임재하신 성령님의 눈이 나와 함께 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베드로가 그런 것입니다.
우리도 성령으로 충만해서 항상 그런 눈길로 사람들을 보면 좋겠습니다.
3) 그리고 베드로가 이 걸인에게 ‘우리를 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발밑의 걸인에게 동전 한 푼을 던져주고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나 좀 보라는 사람은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뭔가 특별한 일이 있으리란 기대감을 갖고 걸인이 베드로를 쳐다보았겠죠.
그러자 베드로가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문자 그대로 나에게 돈은 없지만 그 대신 다른 것을 주겠다는 게 아닙니다.
은과 금 같은 것은 있으나 없으나 별거 아니다, 내게 있는 이것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면 된다는 뜻입니다.
영적 불구자일 때 사람들은 은과 금 같은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걸인에게 은금이 넘쳐나도 그는 여전히 불구자입니다.
거리에 나와 구걸하지 않아도 될 뿐이지 여전히 움직이지 못하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는 처지는 똑같습니다.
집에 들어앉아 있느니 차라리 거리에 나와 사람 사는 구경이라도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죠.
돈을 주는 것과 다리를 고쳐주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
영적 맹인, 영적 앉은뱅이, 영적 귀머거리, 모든 영적 불구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나사렛 예수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돈은 고치고 나서 벌면 되죠.
사람이 행복감을 느끼는 중요한 영역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재산, 건강, 가족입니다.
이 세가지 행복의 조건에 대해 연구한 결과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재산은 많을수록 더 행복하다는 게 통념입니다.
돈이 많으면 당연히 행복감을 느끼죠.
그런데 직장인들에게 물었습니다.
모두가 연봉 일억을 받는 것과 남들이 다 오천만원의 연봉을 받고 나만 팔천만원을 받는다면 어느 쪽이 더 행복할 것 같냐.
그랬더니 후자를 선택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는 것입니다.
다 같이 잘 사는 것보다 남들이 다 못살고 내가 조금 더 잘 살아야 더 행복할 것 같다는 것이죠.
절대적인 부보다 상대적인 부가 더 행복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못 된 본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건강은 어떨까요?
건강은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건강할 때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내 건강이 행복의 기준이 된다고 합니다.
내가 또래 사람들보다 더 건강하다 해도 한 달 전에 비해 지금 건강이 안 좋다고 생각하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가족으로 인한 행복은 결혼 전후 4년 정도는 배우자가 생기고 자녀들이 생김으로 행복감이 올라가지만 역시나 그 이후로는 행복감이 점점 하락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계속 행복감을 느끼려면 어때야 합니까?
돈은 많되 남과 비교해서 내가 더 많아야 하고, 건강은 하되 어제의 나보다 오늘 내가 더 건강해야 하고, 행복을 주는 가족관계가 되려면 신혼 때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왜 사람들이 다들 안 행복한지 이해가 되시죠?
이런 연구와 통계들이, 사람의 행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세상에서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재벌이 되고 권력과 명예와 인기를 얻은 사람들이 다 행복합니까?
다 얻은 다음 느끼는 건 ‘그래서 이게 뭔데?’
이런 허무감이 든다는 게 심리학 용어로 ‘성취의 멜랑코리’입니다.
부족할 땐 오히려 더 가지면 행복할 거라는 기대감이나 있지만, 갖고 보니 그런 희망조차 없어진다는 것이죠.
저는 지난 주에 잠자리에 드는 데 너무 행복하다, 하나님 너무 행복해요. 이런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꽉 찬 행복감을 느끼며 정말 행복하게 잠들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행복감이 오는지 저도 신기했습니다.
제 경우를 보면 재산도 점점 줄어들고, 건강도 어제보다 오늘 서서히 나빠지는 나이입니다.
외동딸은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났고 지난 부활절에 십오년을 키우던 강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현실적으로 딱히 행복할 게 없는데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에는 이렇게 현실의 어떤 요인도 능가하는 큰 힘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금과 은보다 먼저 이런 복된 구원을 받으시길 축원드립니다.
3. 베드로를 통해 치유의 복음을 주실 때 걸인은 믿음의 반응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1) 이 걸인은 걸을 수도 없고,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죄인들은 자력으로는 구원의 길이 있다는 것, 구원받아 영광스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걸인처럼 주저앉아 세상에서 떨어지는 동전 부스러기를 모으는 것을 전부로 알고 삽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 앞에 와서도 여전히 걸인처럼 은금을 구하고 동전 얼마를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게 필요한 것은 은금이 아니고, 지금 붙잡고 있는 세상의 어떤 것들도 아니라고 하십니다.
‘너에게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생명을 줄 것이다.’
그러면 그 발로 걷고 뛰며 놀랍게 살아가게 될 거라는 것이죠.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며 걸인의 오른 손을 붙잡아 일으켰습니다.
7절,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2) 이때 걸인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두 가지 믿음이 결합되어야 합니다.
한 가지 믿음은 선물로 주시는 믿음, 하나님과 예수님이 믿어지는 믿음입니다.
또 한가지 믿음은 복음을 듣고 인정하고 내 의지로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구원을 위해 이 두 가지 믿음을 함께 언급합니다.
걸인에게는 예수님을 알고 믿으려는 의지적인 믿음이 있었을까요?
그 믿음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16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만일 믿음이 없었다면 그는 이 황당한 말에 ‘돈이 없으면 그냥 가지 별 소리를 다한다’ 생각하고 꼼짝 않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어날 의지가 없는 사람을 일으킨다는 것은 왠만한 힘으로 안됩니다.
베드로는 단지 오른 손 하나만을 잡아서 일으켰을 뿐입니다.
걸인이 자신의 의지로 일어나려고 반응을 했기에 발과 발목에 힘을 얻게 되고 뛰어 서서 곧 걸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앉은뱅이는 어떻게 베드로의 말에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나사렛 예수그리스도’라는 말에 있습니다.
날마다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이 걸인은 누구보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대화를 종일 귀동냥으로 들을 수 있는 성전 미문 앞이 그 사람의 직장이었습니다.
최근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사람들이 한창 흥분해서 나사렛에서 예수라는 메시야가 나타났다고 술렁이던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분이 맹인도 고치시고 앉은뱅이도 고치셨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 맹인 한 사람이 예수님의 명으로 예루살렘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보게 되었다는 소문을 어찌 듣지 못했겠습니까?
삼십팔년 동안 누워있던 병자를 고쳐주셔서 병자가 깔고 있던 자리를 걷어서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소식도 당연히 들었습니다.
우리가 다 핸디캡이 있어서 알지만 거기에 관해 비상하리만치 민감합니다.
그런 소문에 귀를 기울이며 걸인에게도 일말의 희망이 생기지 않았겠습니까?
그 분이 내 앞을 한번만 지나가 주신다면..
누가 나를 그 분 앞에 업어다 줄 수만 있다면..
그런데 나사렛에서 오신 그분이 죄인으로 몰려 십자가형을 받고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걸인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다시 그의 삶은 실망과 절망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죠.
그런데 오늘 누가 와서 너무나 설레었던 그 이름, 그러나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던 그 이름,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을 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걸인은 일순간 놀라움과 기쁨, 기대감과 벅참으로 벌떡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찾아오셨구나!
이렇게 믿고, 믿어지는 신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이 걸인을 치유하고 구원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도 처음엔 누군가에게 전해 듣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듣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아, 주님이 나를 찾으시는구나, 내 이름을 부르시는구나, 손을 내미시는구나’ 이런 것이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얻은 구원이 은보다 귀하고 금보다 귀하다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마음에 사무치며 점점 더 행복한 성도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은과 금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아무 문제가 안되는 것이죠.
그러니 오늘처럼 ‘이젠 일어나 걸으라’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들릴 때 결단하는 믿음으로 박차고 일어나 구원받으시길 축원드립니다.
결단할 때가 되면 결단해야 다음 진도가 나갑니다.
기도도 결단을 좀 하시고 훈련하시기 바랍니다.
또 우리의 구원받은 삶에서 만나는 어떤 장애와 어려움 중에도 주님은 우리가 붙잡고 일어날 수 있도록 손을 내미십니다.
매일 믿음으로 그 손을 붙잡고 주님 의지해 가다 보면 또 한고비를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뒤돌아보면 그것이 더 강한 나를 만들어 준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한평생 붙드심을 믿으시고 기쁘게 주님과 동행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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