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16장16절-40절 (빌립보 감옥의 바울과 실라)

남수연 2021. 5. 21. 17:53

살면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파만파로 퍼져 곤욕스러웠던 일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오늘 바울과 실라가 그런 일을 당합니다.

지난 주 빌립보성에 들어가 자주색 옷감 사업가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해 믿게 되었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바울사도가 길에서 점치는 여종을 만나 귀신을 쫒았다가 매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히는 속상하고 황당한 일을 당합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마게도냐 선교를 시작했는데 시작부터 고난이 말이 아닙니다.

오늘 빌립보에서 생긴 이 에피소드에서 유익한 교훈을 샅샅이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마음을 열어 잘 깨닫게 하시고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우선 바울과 실라에게 닥친 이 고난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

바울 전도팀은 새신자 루디아성도의 집에 묵으며 빌립보 전도에 힘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다 할 큰 성과를 얻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16절에 보면 바울이 기도처를 오가며 모이는 몇몇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길에서 점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납니다.

이 여종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바울 일행을 따라 다니는 것입니다.

17절,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귀신이 바울에 대해 아주 정확히 알고 있죠.

어떻게 보면 바울의 전도를 도와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은 바울일행을 아주 난처한 상황에 빠뜨리는 사탄의 방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점치는 여자에겐 여러 명의 주인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익을 나눌 만큼 큰 돈을 벌어 주었다는 것이죠.

신접한 점쟁이들이 잘 맞춥니다.

귀신같이 안다고 하잖아요?

귀신들은 과거사를 다 알고 있기에 점쟁이가 그걸 맞추면 소름이 끼친다고들 하죠.

사실 사람들은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궁금합니다.

귀신들도 우리처럼 미래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미래의 길흉을 약간은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흉한 일들은 종종 알아 맞추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요즘 TV에서 부쩍 무속인들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우려가 됩니다.

그런 신세대 무속인들은 옛날 무당들하고 다릅니다.

연예인 출신, 체육인 출신, 가수 출신, 그런 사람들이 무속인이 되는 바람에 거부감 없이 사람들이 받아들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패널로 나온 사람들 중에 분명히 기독교인임을 알고 있는데 거기서 운세를 묻는 것을 재미 정도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점치는 문제를 성경에서 뭐라 하시는지 단단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신명기18장에서 엄히 명령하십니다.

10절,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신접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14절,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개인의 미래와 길흉을 알라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우리에겐 한 가지를 지시하셨습니다.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무당이나 점쟁이 말을 듣지 말고 나중에 하나님이 보내실 선지자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훗날에 오실 예수님을 말합니다.

미래의 길흉을 말하는 점장이의 말을 듣지 말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이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미 다 말씀하셨고 그것은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님께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개인의 미래와 길흉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셨는데, 다른 데 가서 그런 걸 들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접한 사람에게 점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의 이름, 성령님의 이름으로 점 봐주는 사람들도 멀리해야 합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사람에게 자기 미래의 일을 물어보는 것이나 점쟁이한테 가서 묻는 것이나 동기가 다를 게 없잖아요?

사람들이 미래를 알고 싶어 안달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좋은 소리를 들으면 안심하고, 나쁜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것이죠.

세상 사람들에겐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런 힘이라도 빌고 싶지만 성도들은 아니잖아요?

‘기도해 보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네’ 내 자유로운 결정을 간섭하는 사람들은 가까이 하면 안 좋습니다.

그게 점치는 거랑 하등에 다를 것이 없습니다.

TV에서 과거 스케이터였다 귀신을 받은 여자가 해맑은 얼굴을 하다가 운세 좀 봐달라는 패널의 점을 봐주는 데 오싹할 정도로 얼굴이 거만해 지는 걸 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말에 벌벌 떠니 지배감과 우월감에도 그걸 계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다는 사람들도 가만히 보면 그런 경향이 점점 강해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이용해 뭔가 자신의 영광과 이익을 얻고자 하는 자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함께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뭔가 신통력이 있어 보인다, 촉이 좋다, 예지몽을 꾼다, 기도발이 쎄다, 이런 것이 마귀와 인간의 악한 동기에서 나온 것을 알고 단절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바울사도가 이 점치는 여종을 만나 진퇴양난에 빠진 것입니다.

따라 다니며 소리지르는 여자를 그냥 두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주님의 복음과 점술이 뒤섞여 한통속으로 여겨질 위험이 있는 것이죠.

점쟁이가 당신은 교회가야 할 사람이라고 한다 해도 그게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만일 여종에게서 귀신을 쫒아 버리면 그동안 수익을 얻는 주인들이 가만있지 않을 게 뻔한 것입니다.

우리가 점쟁이한테 가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물러가라’ 그럴 수는 없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바울사도가 몇 날을 괴로워하다가 결국 사달이 날 것을 알면서도 여종에게서 귀신을 쫒아 낸 것입니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수익이 끊긴 여종의 주인들이 들고 일어나 바울과 실라를 관리들에게 끌고 가 고발을 한 것이죠.

끌려가 심하게 매를 맞고 감옥에 던져집니다.

훗날 바울사도는 이 때를 기억하며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다 이렇게 씁니다.

2장2절,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그날 능욕을 당했다고 합니다.

22절에 보면 옷을 찢어 벗기고 매질을 하죠.

사람들 보는 앞에서 몽둥이로 이렇게 두들겨 맞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존심, 인격이 짓밟히고 짐승처럼 맞은 것입니다.

한 여배우가 어릴 때 엄마한테 슬리퍼로 맞은 게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상처가 되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남에게 따귀 한 대를 맞았다 해도 그 상처는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거잖아요?

왜 하나님은 이런 상황을 막아주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 주님의 명령대로 복음을 전하며 사는 데는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 그래도 고난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 매를 맞을 수도 있지만 사업하러 빌립보에 가다가도 강도를 만나 돈을 뺏기고 폭행을 당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는다면 차라리 복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통총량의 법칙이란 게 정말 있다면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의 일부를 주님을 위한 고통으로 대치하는 것이 복된 것이죠.

세상사엔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그 배후엔 악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붙잡혀 능욕을 당하고 매를 맞는 것은 복음전파에 대한 마귀의 당연한 저항이고 공격입니다.

또 돈 벌이를 최고로 아는 인간들이 수입이 끊겼으니 고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아무렴 주인들이 귀신 쫒아 줬다고 고맙다고 하겠습니까?

그렇게 마귀의 계략이든 사람들의 악행이든 하나님이 그냥 두시는 것 같지만 결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에도 개입하십니다.

지난 주도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 일에 손을 써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개입은 대개는 최대한 비밀스럽게, 최대한 자연스럽게라는 법칙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도움 받은 성도들은 그걸 다 알죠.

단 오늘처럼 감옥 터를 뒤흔들어 감옥 문을 열어 젖히고 죄수들의 착고를 다 풀어놓으시는 특별한 기적도 행하십니다.

바울에게 유라굴로 광풍 때 같은 배를 탔던 이백칠십육명의 영혼을 주셨듯이, 감옥에 있는 영혼들을 바울에게 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 일행은 이 일 뒤에 곧 바로 빌립보를 떠납니다.

특별한 주님의 기적이 필요했던 이유였을 것입니다.

그날 밤 바울과 실라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을 죄수들이 주의깊게 들었다고 본문은 전합니다.

분명 기다시피 감옥에 던져졌는데, 그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드리는 감사의 기도, 빌립보 영혼들을 위한 기도를 그들이 숨죽여 듣고 있었던 것이죠.

바울과 실라가 부르는 찬송이 음습한 감옥에 잔잔히 울려 퍼질 때 죄수들은 어머니의 품 같은 평안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권능이 땅을 뒤흔들고 그들을 묶었던 착고가 터지고 감옥문이 열린 것입니다.

죄를 지은 파렴치한 들이 단 한명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미 주님이 그들의 영혼을 얻으신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당한 것은 상처뿐인 능욕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영혼을 얻은 것입니다.

기도와 찬송이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도 알아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만일 기도하지 않았다면 바울도 감옥 문이 열렸을 때 도망가라시는 사인으로 알고 도망쳐 빌립보를 빠져 나왔을 거잖아요?

베드로가 전에 감옥에 갇혔을 땐 천사가 감옥 문을 열어줘서 도망간 적이 있듯이요.

기도를 해야, 일이 벌어질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지혜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찬송하지 않아서 열리지 않는 문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주님은 십자가에서 구원의 길을 완성하신 것으로 일을 다 마치신게 아닙니다.

그 구원 안으로 죄인들을 모으십니다.

그 일에 우리가 함께 할 때 고난이 있지만 주님은 그 십자가를 억지로 지우시지 않습니다.

‘네가 이 고통을 좀 참아 줄 수 있겠니?’

‘네가 맞고 감옥에 들어가야 죄수들과 간수를 구원할 수 있을텐 데’

세상 고난은 동의도 없이 덥썩 우리를 집어 삼키지만 주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은 다 우리의 동의하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싫으면 우리가 안 하잖아요?

물론 내가 동의해서 당하는 고난에 주님도 그 고난을 함께 당하십니다.

주님의 마음은 아마도 ‘차라리 내가 그 매를 다시 가서 맞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주님도 매를 맞아보셨잖아요?

내 자식이 내 집을 위해 그런 수모를 당해야만 한다면 당연히 부모 된 우리가 더 큰 아픔을 느끼는 것처럼요.

그런 하나님을 알기에 그런 성도들은 복음을 위해 매도 맞고, 목숨도 내 놓고, 내 소중한 것들을 다 내어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사도들만 이래야 합니까?

주님께서 똑같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데요.

우리가 바울과 실라처럼 그렇게는 못해도 하나님을 위해 조금 더 피곤하고, 자존심 좀 버리고, 복음을 말하다 좀 민망한 꼴을 당하는 것 정도는 괜찮은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주님을 위해 모욕과 박해를 받는다면 반대로 영혼은 큰 기쁨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런 기쁨과 즐거움이 사라졌다면 주님을 위해 아무 박해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만일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한다면 주님께서는 더 큰 위로와 기쁨으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귀의 생각대로 결론이 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바울과 실라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시고, 죄인이 구원받는 그 큰 기쁨의 현장에 주인공으로 우뚝 세워주십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런 복음의 일군들이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 점치는 귀신들렸던 여종과 구원받은 간수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귀신들린 여종은 누가 봐도 완전히 절단 난 인생이었습니다.

귀신에게 사로잡혔고, 인간 주인에게 속박되어 자기 힘으로는 그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악령과 죄악 환경에 이중으로 속박 된 것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 모든 죄인들입니다.

상한 갈대 같은 자기 스스로가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했지만 실상은 더 막강한 죄와 사탄에 제압당해 사는 것입니다.

점치는 여자가 돈을 벌어 바쳐야 하는 인간 주인에게서, 인격을 지배하는 무서운 귀신에게서 어떻게 자유를 얻을 수 있었겠어요?

인생의 굴레가 죄인들에게 꼭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에 예수님이 찾아 오시는 것입니다.

귀신의 사주로 바울사도의 사역을 망쳐 놓으려 다가갔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오히려 구원의 기회로 역이용하시는 것이죠.

범0 라는 가수가 이런 간증을 하는 걸 들었습니다.

저는 힙합은 모르는 데 꽤 유명한 사람인가 봅니다.

범0 형제가 청소년기에 미국에 이민을 갔는데 적응을 잘 못해서 나쁜 친구들, 갱단과 어울려 진짜 위험하고 방탕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반대파 청년들과 총격이 오가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대로 살면 나도 여기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음악을 하게 되었는데, 힙합 분야에서 인정받을 만큼 성공을 거둔 것이죠.

하지만 옛습관을 고치지 못했고 마약에서 손을 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믿음의 아내를 만나 교회를 한 일 년 다니던 중에, 과거에 있었던 마약문제가 터져 구치소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구치소에서 큐티책을 펼쳤다가 로마서 6장18절이 마음에 와서 박혔습니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죄의 종과 의의 종이 선명하게 깨달아졌다고 합니다.

이전엔 갱단도 하고 마약도 하고 온갖 나쁜 짓을 하고도 자기가 그렇게 죄인인 줄 몰랐다는 거예요.

그런데 구치소에서 얼마나 많은 회개가 나오는지, 도로에서 창문 내리고 지나가는 차에 대고 욕했던 것도 생각이 나 회개했다고 합니다.

구치소에 가면 다 죄 지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 보다 자기가 제일 큰 죄인인 것 같아서 수감 된 게 억울하단 생각이 단 한 번도 안 들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과거 최고의 인기곡이었던 ‘미친 연애’ 이런 노래를 다시는 부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혹시라도 그런 가사가 청소년들에게 나쁜 영향을 줄까봐 안 한다는 거예요.

가수가 자기 히트곡을 안 부르는 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지금 자기가 부르는 노래에는 하나님이 안 나오고 예수님이 안 나오지만 그 내용은 다 믿음이 녹아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죄의 종에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전에 가수 김범0 씨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이승0 형제하고 ‘우리’라는 노래를 듀엣으로 불렀습니다.

김범0 씨도 우리 형제거든요.

들어보진 않았지만 전에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 우리라는 노래를 들어보니 완전 복음성가더군요.

우리는 들으면 알잖아요?

범키형제는 마약과 악령에 붙잡혀 살 운명이었지만 그 마약사건이 결국 하나님께로 인도한 것입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들 하죠.

하나님은 사람을 다 고쳐서 쓰십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 주님의 성도들의 공통점은 다 고쳐진 사람들, 고쳐서 쓰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분명하게 하나님이 고쳐서 쓰고 있잖아요?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순간부터 점점 더 개선되고 발전하고 있다는 것 이전에 뭔가 내 근본적인 게 고쳐져 달라졌다는 것이 정확히 인지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와서 고쳐졌다는 확실한 간증이 없다면 아직 쓰실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점치는 여종은 귀신이 쫒겨나 주인들에겐 무익한 종이 되었지만 예수님께는 유익한 종이 된 것입니다.

 

2) 간수의 경우를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간수는 오늘 본문에서 보인 행동으로 볼 때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자기 자신을 믿을 만큼 자존심도 강했던 것 같습니다.

지진이 나서 땅이 흔들리고 옥문이 활짝 열리고 죄수들이 다 탈주했다고 생각되자 그의 강함은 한순간 무너졌습니다.

인간의 강함이란 게 그 정도입니다.

간수라는 직업, 이 세상의 삶이 그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점치는 여종처럼 어떤 영적인 세계에 대한 아무런 인식도 없었습니다.

정말 영혼과 신에 대한 문제,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 그런 데 아무런 관심도 없는 사람이 있더군요.

지난 주 제가 아래 미용실에 갔었는데, 원장이 그러는 거예요.

남편이 불교 책자인 마음공부를 너무 해서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청소년기 때부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그게 건강염려증이 되어서 병원, 약, 마음수련 같은 데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죽음 같은 것 생각도 안 해봤다, 그런 걸 왜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돈 벌고 삶을 즐기는 거지 죽음 생각이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더군요.

오늘 간수가 그런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삶이 전부인데, 그게 한순간 다 무너졌다고 생각하니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진 것이죠.

그래서 당장 칼을 들고 자결하려고 합니다.

뒤에 보면 간수와 가족들이 다 세례를 받는 걸 보면 가족도 있었잖아요?

그는 오직 현세, 오직 나 자신을 위함이 전부로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간수에게도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바울이 자결하려는 간수에게 소리를 칩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그 때 간수가 어떻게 합니까?

29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여기서 ‘무서워’ 했다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오는 경외감과 두려움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 두려워했다고 할 때 쓰인 그 단어입니다.

성령께서 간수를 그 두려우신 임재로 강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경외감에 떨며 즉시 외치는 것이죠.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현세가 전부였던 간수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무언가 죄인에게 행하시면 즉시 그 영은 하나님, 죄, 심판, 구원, 이런 사실을 직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간수에게 전광석화 같이 이런 사실들이 깨달아진 것이죠.

평생 신학을 연구하고 공부하고 가르치는 교수라도 이 분명한 하나님과 자기와의 구원의 관계를 떳떳하게, 명료하게 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평생 농사만 짓던 초로의 노인일지라도, 성령께서 임하시면 구원에 대한 이 진리와 내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아주 명확하게 깨닫는 것이 신비입니다.

그날 성령께서 간수에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영혼이 외치는 구원의 길을 가르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결론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이 가르치려 하시는 것은 우리가 한 면에서는 점치는 여종과 같았고, 또 다른 면에서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하나님과 영의 세계에 맹인이었던 간수와 같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 인정하시죠?

그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스스로를 죽이셨을 뿐 아니라,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제자들이 매 맞고 감옥에 가게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도 예수님은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께는 이 은혜를 깨닫고 바울과 실라 같이 자원해서 주님과 함께 일하는 성도들이 필요하십니다.

우리가 그런 주님과 제자들의 희생으로 이 복음을 받고 구원을 받았으니 삶에서 조금씩 더 십자가를 지며 따르게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