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2장 (부활절에서 오순절로)

남수연 2019. 4. 22. 22:54

https://www.youtube.com/watch?v=Sv-e1QAJPro

2019년4월21일 주일설교 영상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신앙의 밑바탕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이 인간종교의 차원이 아닌 것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대해서 자세한 지식과 믿음을 가져야 하듯이 부활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에만 있는 특별한 신앙입니다.

인간의 종교를 보면 다 창시자의 무덤이 있죠.

이슬람교주인 마호메트의 무덤이 있는 메디나는 이슬람의 성지입니다.

불교의 경우 석가모니를 화장하고 유골을 나누어 여러 탑에 보관했다죠.

예수님은 부활하셨기에 그 무덤이 보존될 의미가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후에 무덤자리를 추측해서 예루살렘에다 성묘교회를 세워 놓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무덤을 두 번도 돌아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우리가 확신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부활하셨냐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이 내게 어떤 직접적인 효력과 변화를 주시냐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세 가지로 부활에 대해 말씀을 나눌 때 큰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성도님들은 다 부활을 믿으시죠?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부활을 믿는 것이죠?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한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믿는 것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제자들이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 라고 쓴 쪽지를 우리가 어느 날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 예수님은 부활하셨구나 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하면 언제든지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 부활입니다.

확신이 빠진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확신 없는 것을 사람은 절대 믿지 못합니다.

부활이 너무 쉽게 믿어진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부활은 자연스럽게 이해 될 그런 현상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정하지만 부활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려면 객관적인 믿음의 근거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단서가 되는 제자들의 증언을 파헤쳐 그걸 얻어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정황적, 이성적, 논리적으로도 충분히 입증이 가능합니다.

그 중 하나는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당시 비어있고 시신이 없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복음서는 부활절 아침 사라진 예수님의 시신으로 인해 당황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해 전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는 것은 제자들은 물론이고 무덤을 지키던 제사장 쪽에서도 인정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진짜 부활하셨던지 아니면 누가 시신을 감추었던지.

만일 누가 시신을 가져다 감췄다면 누가 그랬을까요?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제자들이겠죠.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일 리가 없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이 사흘 뒤에 부활하신다고 한 말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체를 지키려고 무덤에 군사를 배치했었습니다.

시신이 없어지면 제자들이 부활했다고 믿을텐데 왜 시신을 빼돌렸겠습니까?
그렇다면 제자들이 시신을 감추고 부활했다고 퍼트린 것일까요?

이것은 더욱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 매 맞고 박해당하고 순교했습니다.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 놓고 그걸 위해 목숨을 버릴 사람은 없습니다.

두 쪽 다 시신을 감추지 않았다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진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정황들을 따지고 추론해 보면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확실한 사실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 단단히 박혀 보석같이 빛는 부활의 증거들을 다 확인하고 믿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왜 부활하셨는지, 그리고 내게 미친 효력은 무엇인지는 오늘 사도행전 본문을 통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은 베드로의 설교입니다.

제 설교보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게 훨씬 낫겠죠?
특히 이 설교를 듣고 나서 삼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세례를 받은 명설교잖아요?

우리에게도 이 베드로의 설교가 큰 은혜와 확신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베드로가 설교하게 된 배경을 좀 알아야 합니다.

이 설교의 배경은 부활절은 아니고 오순절입니다.

베드로가 이 설교에서 십자가,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을 한 줄기로 완벽하게 꿰어 해석해 낸다는 걸 지금부터 보게 될 것입니다.

그동안 파편으로 알고 있던 진리들을 하나로 다 연결해서 꿰게 되실 것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물이지 이런 속담 있잖아요?

예수님이 유월절에 못 박히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죠.

그리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가르치시고 승천하십니다.

승천하시며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죠?

주님이 승천하신 뒤 열흘이 지나서 오순절이라는 명절이 옵니다.

이 오순절날에 성령께서 드디어 공식적으로 세상에 강림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대속을 사람들이 믿게 하고 구원받게 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성령님이 오시길 기도하던 다락방에 큰 바람소리가 가득차고 불꽃같은 모양이 나타나 제자들 머리 위에 임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고 여러나라 말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요즘 방언기도 한다는 사람들처럼 못 알아듣는 그런 소리 아니었습니다.

그때 오순절 예배를 위해 사방 여러 나라에서 온 유대인 교포들이 , 이거 내가 살던 나라 말인데?’ 라고 했다잖아요?
사람들이 몰려와 이 신기하고 굉장한 광경을 보고 당혹해 할 때 베드로가 서서 오늘 이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설교 앞부분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놀라운 광경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조상인 요엘선지자가 예언했던 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요엘선지가가 예언하길 말세에 하나님이 성령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주시겠다고 하셨던 대로 하나님의 성령이 드디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금 보는 대로 우리가 각 나라 방언을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 오신 증거입니다.

어떻게 성령님이 오시게 된 것인지 지금부터 잘 들으십시오.

그리고 22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이들이 꺼리는 예수님 얘기를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병자들을 고치고 기적을 수도 없이 베푸신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헤롯왕까지도 알고 있었다고 지난 주에 말씀했죠?
그런 능력을 누가 주었겠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이죠.

우리나라 역사엔 기적 같은 걸 행한 인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구약성경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기적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 때 얼마나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습니까?

홍해가 막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그러잖아요?

또 엘리야,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에 의해 얼마나 많은 기적들이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기적을 일으키실 때 많은 사람들이 따랐던 이유가 뭡니까?
이건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설령 그리스도가 아니라 해도, 적어도 하나님이 보내신 의로운 선지자라는 것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객관적으로 충분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는 것이죠.

23, 그런데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인줄 알면서도 죽음으로 몰고 갔던 것이죠.

로마당국에 의해 사형되실 때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었잖아요?

그러니까 결국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를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24,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망에서 풀어내어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왜 부활하셔야 했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왜 부활하셔야 했을까요?
그냥 무덤에 장사지낸 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성자하나님의 위치로 복귀하실 수도 있었잖아요?
예수님이 부활하심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를 위한 주님의 속죄가 성공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게 증명이 안된다는 것이죠.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죄와 사망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를 명명백백하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망하는 것은 죄의 결과, 죄의 삯이잖아요?

사람의 죽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는 것 알고 계시죠?
하나는 모든 사람이 살다가 죽는 육체의 죽음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의 영이 생명의 근원이신 창조주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 죽음입니다.

자연적으로 출생한 사람들은 다 이 두 가지 죽음의 상태로 태어납니다.

영의 죽음은 아담과 하와의 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 먹는 의지적인 죄를 범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육으로 전락할 뿐 아니라 죄로 인해 영원히 하나님께로부터 격리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해서 영이 죽은 결과 계속 태어나는 자손들 역시 죽은 영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죽은 영이 어떻게 살아있는 영을 낳겠습니까?

이 상태는 죽어서도 계속됩니다.

죽어서 복과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고 격리된 장소,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현세에 일어나는 육체의 죽음은 범죄하고 난 후 아담에게 선고되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니라

이 두 가지 사망이 엄청난 권세로 모든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엄중한 효력에 의해 이 두 가지 사망이 위력을 갖고 모든 사람들을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사망 판결을 받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어느 인간도 이 두 사망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한 사람도 죽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실 수 있었던 것도 죄인의 신분이 되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심판은 십자가 위에서 완벽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잖아요?
죄로 인한 심판은 십자가 에서 완벽하게 이뤄졌고 예수님은 다시 죄 없는 상태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니 죄 없는 사람을 사망이 붙잡아 놓을 수 없는 것이죠.

인류 역사 상 그 어느 누구도 벗어날 수 없던 사망의 권세를 예수님만 무력화시키신 것입니다.

우리 죄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해결되었기에 우리에게도 사망은 아무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은 비록 육체의 죽음을 거친다 해도 영적 죽음에서는 이미 다시 살아난 부활의 사람들입니다.

무릇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부활시키신 것은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충족되었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우리 죄가 다 용서되었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사랑하신다면 왜 무조건 용서해 주시지 않냐고 따집니다.

죄 지은 사람이 그런 말하면 안됩니다.

만일 하나님이 죄를 없는 것으로 무마하신다면 하나님 자신의 공의가 훼손되고 하나님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판사들이 정의롭지 않은 처벌을 내릴 때 얼마나 분통이 터집니까?
누가 저 재판부를 좀 싹 갈아엎어 줬으면 좋겠잖아요?
그리고 베드로는 구약성경에 예언 된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까지 조목조목 증명해 갑니다.

베드로가 증거로 내세운 것은 다윗왕이 지은 시편16편입니다.

25절부터 28절에 나와 있죠.

이 시편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내용이 다윗 자신에 대한 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에도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은 것에 대해 다윗이 이미 시편에 예언했던 것을 보았습니다.

이 시편16편도 역시 다윗 자신에 대한 시가 아닙니다.

27절만 보겠습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이 말씀을 베드소가 이렇게 해석합니다.

다윗왕의 무덤이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데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신다는 건 말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뼈가 천년이 넘어 이미 다 썩어 없어졌잖아요?

이것은 자기 죽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선지자임으로, 성령을 통해서 이 시편을 썼다고 하죠?

하나님은 다윗 살아생전에 네 후손을 통해 영원한 나라를 세우시겠는 다윗언약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다윗의 자손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 시가 바로 그 다윗의 자손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그 분이 바로 이 예언의 주인공이신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면 이어서 예수님이 승천까지 완벽하게 풀어 냅니다.

예수님은 또 다른 다윗의 시편의 예언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것이죠.

이것이 베드로 설교의 내용입니다.

이해가 잘 되십니까?

그날 모였던 사람들은 다 이 말씀에 찔림을 받아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성령께서 강림하셨잖아요.

설교하는 베드로에겐 성경지식과 지혜와 논리와 담대함을 주셨습니다.

듣는 사람들에겐 그게 이해되게 하시고 그리스도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내 죄라는 것을 깨닫고 찔려 회개하고 주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부활의 영이신 성령께서 죽었던 영을 예수님처럼 다시 살려내신 것이죠.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강림과 구원을 한 줄로 꿰어 놓은 것입니다.

이 사실들은 하나만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걸 하나로 이어 놓은 베드로의 설교가 정말 놀랍죠.

그리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선포되고 성령님이 역사하심으로 사람들이 영적으로 살아나 천국문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그렇게 역사하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부활이 지금 어떤 효력을 내게 일으킨지를 생각하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지난 주에도 보셨지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주변에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그동안 장담했던 믿음은 초라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베드로와 제자들은 골수 유대교인들이 수백명, 수천명 모인 중에 당당히 서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성경과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확신 있게 믿게 되면 사람의 성향이 본질적으로 달라집니다.

다시 살 거고 영원히 살거잖아요?

안 달라지는게 이상한 것이죠.

제자들은 과거에 권력과 세상의 성공에 목적을 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육신의 안위가 가장 중요했기에 위험한 지경에 빠지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잖아요?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들은 짧고 부활해서 살게 될 생애는 영원할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아끼던 모든 것, 생명까지도 다 영원을 위해 던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과 부활을 알리는 게 가장 긴급하고 중대한 삶의 목적이 될 수밖에요.

부활을 통해 영생과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니 두려울 게 없는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 이런 것입니다.

제자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본문 뒤에 보면 이 날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삼천명의 사람들도 역시 완전히 달라집니다.

성도들은 매일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또 자신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이들과 나누었다고 합니다.

더 좋은 것으로 부활할 것이기에 지금 다 누리기보다 영원하고 가치 있게 쓰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화창한 봄에 봄꽃을 보러 나들이를 가는 게 죄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여가를 재미있게 보내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남들처럼 즐길 권리를 주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고 싶어지는 것은 그 가치가 영원하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돈이 필요 없다가 아니라 돈을 가장 가치 있게 사용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것이죠.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데는 누구나 다 크고 작은 희생과 헌신이 있습니다.

오늘도 황금 같은 4월의 휴일을 예배를 드리는데 사용했잖아요?

바울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교인들에게 호소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믿기에 오늘 부활절에 계란을 나누는 우리들을 가장 불쌍하게 볼지 모릅니다.

지난 주에도 제가 한 분께 부활절예배에 오시라고 했더니 호의적이던 얼굴이 순식간에 변하더군요.

그런 걸 누가 믿냐고 무시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에 이끌려 하늘 삼층천을 다녀왔고, 요한사도는 천국의 영원한 영광을 보고 계시록을 기록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 것만큼 분명히 일어날 미래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미래에 대학진학만 있는게 아니고, 결혼만 있는 게 아니고, 성공의 목표만 있는게 아닙니다.

영원한 부활의 삶이 있음을 알고 거기에 맞게 인생을 계획하며 주님을 따르기를 바랍니다.

장년의 때를 넘어가면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나고, 고치며 살기가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은 주님을 믿는 우리가 다 주님처럼 완전하고 아름다운 몸으로 부활할 것을 보여주셨다는 것으로 위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고난의 몸은 일시적이고 부활의 몸으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성령께서 매일 부활의 힘찬 생명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강인한 믿음으로 이 땅의 삶을 보람 있게 완주하도록 도와주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