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24장22절-27절 (벨릭스의 위험한 거래)

남수연 2018. 9. 7. 15:11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다는 건 일을 미루는 사람이 아주 많다는 뜻이겠죠.

일을 미루는 습관은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버드대학 신입생들의 첫 강의가 시간관리 수업이라고 합니다.

하버드출신 최고의 CEO들이 좋아하는 명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신은 시간을 아끼는 사람을 맨 앞에 둔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에베소교인들에게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라고 경고했습니다.무엇을 가장 중요한 자리에 둘지 시간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나중에 기도해야지, 더 한가한 시간이 나면 성경을 읽어야지

이렇게 미루다 지난주도 성경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나중에 틈이 있으면 하리라고 미뤘다가 구원의 기회를 영원히 놓친 벨릭스총독과 그의 아내 드루실라의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구원과 성장을 위해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깨닫고 실천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오순절에 성령하나님께서 교회에 내려오시며 시작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하죠.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모여 예루살렘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리고 복음이 점차 확산되고 소아시아와 유럽에 까지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전반부는 예루살렘교회가 주 무대이고 후반부에 가면 바울사도의 선교와 유럽의 교회들로 포커스가 옮겨집니다.

예수님의 명령대로 복음이 땅 끝으로 전파되는 것이죠.

이 과정을 바울의 주치의로 함께 다녔던 누가가 기록한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이 사도행전을 읽을 때는 관전 포인트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어떻게 복음을 세상에 확산시키시는 지와 그 선하신 역사에 동역하는 충성된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또 사도행전엔 복음전파를 저지하려 대항하는 사탄의 모습이 현저히 드러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구원과 멸망으로 분명하게 갈라서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그때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복음전도와 구원 역사에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누군가를 보내셨고 우리는 마귀의 집요한 공격을 이기며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이런 관점으로 살펴 보겠습니다.

 

1. 먼저 복음전파와 함께 드러나는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도바울은 지금 그의 마지막 선교의 목적지 로마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유의 몸이 아니라 사슬에 묶인 죄수의 몸입니다.

얼마 전 초로의 바울은 고된 3차 선교 활동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

그에 손엔 가난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유럽교회들이 모아 준 구제헌금이 들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기다리는 것은 그를 죽이려고 작정한 대제사장과 유대교 열성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기독교가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 입장에선 막아서야 할 이단종파였던 것이죠.

예루살렘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결국 바울은 그들에게 붙잡혀 죽기 직전에 소요를 감지하고 달려온 로마군대의 천부장 루시아에게 구조됩니다.

겉으로 보기엔 종교간의 갈등 같지만 그 배후엔 사탄이 활발히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를 말살하려는 사탄의 계략은 사도행전 내내 계속됩니다.

사탄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총력 대응합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온갖 구실들을 만들어다 줍니다.

교회에 왔다면 혼미한 정신으로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을 사역에서 통감한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4장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사람들이 예수님께 관심이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마귀가 그 마음을 혼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복음의 광채가 희미해지고 신앙이 혼미하다면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무언가 나쁜 세력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죠.

그래서 생활에 잘 적용되는 실용적인 말씀을 나눌 때 보다 오늘처럼 신앙의 본질적인 말씀을 나눌 때는 더 정신이 혼미해 질 수 있으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2. 다음은 바울사도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우선 바울을 유대인의 손아귀에서 구조하십니다.

복음을 통해 세상에 택한 자녀들을 부르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해 가시는 일은 당연히 하나님이 주도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죄성과 사탄의 어떤 방해 공장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시나리오는 진행되는 것입니다.

가장 긴급한 순간 가장 극적으로 천부장 루시아에게 구조된 바울은 가이사랴에 있는 로마총독부로 긴급히 압송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벨릭스의 재판을 받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자신이 유대법정에 다시 돌려 보내지지 않도록 로마인의 자격으로 로마법정에 항소합니다.

그렇게 해서 바울의 선교 목적지 로마를 향해 가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일을 하시긴 하는 데 좀 이상하죠?

하나님이 굳이 이런 방식으로 바울을 로마로 보내셔야 했을까 의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차가 아니면 바울 같은 일반인이 벨릭스 같은 총독을 만나 복음을 변론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그립바 같은 유대왕도, 궁극적으로는 로마황제도 만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 복음이 권력자와 왕들에게도 전해져야 한다고 바울에게 말씀하셨잖아요?

우리 삶에도 때로 일이 예상 밖으로 흘러가고 당혹하게 꼬이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바울처럼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허용된 일임을 안다면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나리오대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인도하심이 자신의 상상을 넘는 것을 많이 경험했던 다윗이 시편139편에서 이렇게 간증하잖아요?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3. 그리고 바울의 복음을 듣고 벨릭스가 멸망의 길을 선택하는 과정을 본문 성경 말씀과 다른 역사기술들을 참고로 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4장은 가이사랴 법정의 재판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기까지 따라 온 대제사장과 변호인은 바울을 고발하고 바울은 스스로가 변론에 나섭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벨릭스는 판결을 내리지 않고 재판을 중단합니다.

22절이죠.

벨릭스가 이 도에 관한 것을 더 자세히 아는 고로 연기하여 이르되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너희 일을 처결하리라

영악한 벨릭스는 사건의 전말을 이미 꿰뚫었을 것입니다.

판결을 뒤로 미룬 것은 시간을 벌며 이용가치를 따져 보려는 것이죠.

그리고 23절을 보면 죄수 바울에게 굉장한 친절을 베풉니다.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그의 친구들이 그를 돌보아 주는 것을 금하지 말라 하니라

왜 이런 친절을 베풀었을까요?

26절에 보니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랐다고 하죠.

17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변론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바울이 각 교회에서 걷은 구제헌금을 가지고 왔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던 것입니다.

또 죄수의 신분이지만 바울과 동행했던 사람들은 의사 누가를 비롯하여 유력한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들이 바울을 석방하려고 돈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을 계산했던 것이죠.

그리고 며칠 뒤 벨릭스총독은 그 아내 유대여자인 드루실라를 데리고 와서 바울을 대면합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를 좀 들어보자고 합니다.

좀 의외죠?

왜 벨릭스총독은 그리스도에 대해 들으려고 했을까요?

22절을 보면 벨릭스는 이미 예수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 파견된 로마총독으로서 당시 사회적 갈등이 되고 있던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 문제를 조사했고 보고도 받았겠죠.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후 아그립바왕 앞에서 말한 대로 이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한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역사적인 빌라도가 사형판결을 내린 엄정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울당시 이미 총독과 왕과 세상의 중심인 로마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복음이 크게 확산 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역사적으로 믿지 못하는 것은 역사자체를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벨릭스는 자기가 들은 것에 대해 호기심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세속적인 사람이라 해도 본질적인 것에 사로잡힐 때가 있잖아요?
때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이 생깁니다.

우리도 그런 게 있어서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은 것입니다.

이 총독벨릭스와 드루실라에 대해서는 바울과 동시대를 살았던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책에 아주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는 구약성경보다 더 두꺼운 역사책입니다.

그에 따르면 벨릭스는 형과 함께 로마황제 가문의 노예였다고 합니다.

형은 후에 황제의 신임을 얻어 당시 최측근 3인의 실세 중 하나가 됩니다.

벨릭스는 형을 등에 업고 긁어 모은 돈으로 유대총독의 자리를 산 것입니다.

가난하고 무시당하던 사람 중에 출세하면 과거에 대한 보상심리로 권력을 광적으로 휘두르는 부류가 있죠.

벨릭스가 그랬습니다.

같은 시대의 타키투스라는 로마의 대역사가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벨릭스는 노예의 근성으로써 왕의 권력을 떨쳤다'

요세푸스는 벨릭스가 처형한 수가 너무 많아 셀 수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잔인한 학살자였습니다.

또 돈으로 산 권력이기에 벨릭스에겐 돈이 전부였습니다.

돈은 얼마나 가져야 만족할까요?

돈에 대한 만족감은 사람의 욕심보다 더 커야만 채워진다고 하잖아요?

가진 돈보다 사람의 욕심이 항상 더 크기 때문에 아무리 가져도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이 돈의 역설입니다.

재벌들이 그렇게 많이 갖고도 탈세하고 협력업체 등골을 빼먹는 것도 다 가진 것에 만족이 없어서 아니겠습니까?

벨릭스가 바울 같은 죄수에게도 돈을 바라잖아요?

벨릭스의 세 번째 아내인 드루실라는 역사에 기록될 만큼 미인이었고 헤롯왕의 손녀딸입니다.

그의 첫 번째 아내는 클레오파트라의 손녀였습니다.

벨릭스의 권력도, 돈도, 미모의 아내들도, 인간 본연의 질문에 답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무언가를 들을 수 있을까 그 앞에 앉은 것이죠.

그가 듣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왜 너희 기독교인들은 그런 박해와 갈등 속에서 예수님을 믿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믿는 도의 핵심이 무엇이냐는 것이죠.

이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우리 성도들도 잘 듣고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묻잖아요?

당신 왜 그렇게 교회를 다니는 거요? 대체 당신이 믿는다는 게 뭐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하실 말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대답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정확히 입으로 표현되지 못한다면 오늘 바울이 벨릭스 부부에게 강론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도의 핵심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25절을 보면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강론하다는 뜻은 성경을 들어 내용을 설명했다는 뜻입니다.

신약성경이 없을 때니 물론 구약성경이죠.

바울이 강론한 내용은 의와 절제와 심판이었습니다.

누군가 복음을 듣기 위해 찾아온다면 현대 기독교는 이렇게 시작하겠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멋진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가슴에 와 닿을 거라는 생각은 순진무구한 환상입니다.

실체도 모르는 하나님이 왜 날 사랑하는지 의아할 뿐이죠.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와 절제와 심판으로 복음을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불의에 대해 아는 것이 구원의 출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알든 모르든 공의로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의를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반영한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신명기6장에서 그걸 지키는 게 우리의 의로움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그러나 사람은 의로운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혹시 의롭게 살려고 해도 그 한계에 좌절할 뿐입니다.

이사야가 통탄했잖아요?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사람의 힘으로 의롭게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인간이 의롭게 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강론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인간들을 의롭게 만드실 것이라는 게 구약성경의 메시지잖아요?

여호와가 우리의 의가 될 것이라고 예레미야선지자는 예언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우리의 불의를 의롭게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입니다.

성도님들은 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진리를 잘 알고 계시겠죠?

그리고 이 사실을 믿는 성도들은 자신을 절제하며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고 강론합니다.

당시엔 기독교에 대해 온갖 루머와 가짜 뉴스가 성행했습니다.

성도들이 모이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며 성찬식을 했잖아요?

그걸 가지고 기독교인들이 인육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헛소문이 나돌기도 했을 정도입니다.

바울사도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삶이 얼마나 고상하고 절제되었는지를 강론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가장 고상하기에 그를 따르는 성도들도 그렇다는 것이죠.

과거에는 우리도 나 좋은 대로 살고 죄의 본성과 정욕에 따라 충동적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을 절제할 마음도 없었고, 절제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달라집니다.

갈라디아서에는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아홉가지 성품적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거기 보면 절제가 나옵니다.

자신을 온전히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인 것이죠.

예수님을 믿는 도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자기를 절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여 의롭게 되었다면 적어도 과거보다 더 죄의 본성을 절제하는 삶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지식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벨릭스는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잖아요?
그 지식이 영혼에 실제로 체험되어 완전한 지식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실제 자기를 절제하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 지식은 완전한 신앙으로 바뀌는 것이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셨다면 매일 결심하고 말씀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는 욕망도 절제하고 희생도 감수해야 합니다.

로마서813절에서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호랑이가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도 전심전력을 다한다지 않습니까?

우리를 죄에 빠트리는 육신의 정욕들이 우연히 제거되지 않습니다.

내게 있는 가장 취약한 단점과 약점들을 항상 경계하고 다잡고 절제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모두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다음 바울은 곧 다가올 심판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벨릭스의 모든 것인 이 땅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선지자가 이미 땅의 종말을 보았잖아요?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베드로 사도 역시 이 땅의 종말이 있을 것을 이렇게 알렸습니다.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굉장한 세상이 예수그리스도의 심판의 날에 모든 것이 풀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듯이 모든 만상을 다시 무로 돌리신다는 것입니다.

지난번 어벤져스 영화에서 타누스가 조화를 부려 사람들이 스르르 원소로 분해되어 사라지게 하잖아요?

모든 만상이 풀어져 사라지는 심판의 날을 연상시킵니다.

다니엘의 경험은 어떻습니까?
그 이후에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가 심판 받는 광경을 환상으로 보고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불이 강처럼 흘러 그의 앞에서 나오며 그를 섬기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서 모셔 선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

여기까지 듣던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강력한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 것입니다.

거룩한 성령께서 죄를 책망하실 때 사람들은 심판의 두려움에 떱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현현과 성령의 강한 임재를 느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보인 것은 자기 죄로 인한 심판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귀신을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그냥 공포입니다.

자기 죄로 인해 두려워하는 게 아니잖아요?
성령께서 임하시면 죄에 대한 자각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도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삶이 잘못된 것을 아는 길은 성령께서 그 죄와 심판을 직관하게 하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때 회개하고 삶을 돌이켜야 하는 것이죠.

벨릭스와 드루실라는 그 두려움 앞에서 몸서리치며 바울을 중지시킵니다.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다시 부르리라

예수님은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회개하도록 역사하실 때 그것을 가로막고 끊어 버리면 더 이상 회개할 기회는 없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회가 아주 가까이 다가왔지만 그 기회를 잡지 못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이 벨릭스와 드루실라입니다.

벨릭스에게 이때 보다 구원을 얻을 더 좋은 기회는 없었습니다.

벨릭스는 이년 뒤 황제의 소환을 받고 로마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의 학정과 학살에 분노해 황제에게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어떻게든 유대인들의 마음을 되돌려 다시 권력을 되찾을까 해서 바울을 구류해 놓은 채 떠납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년 뒤 권력에서 좌천됩니다.

그리고 드루실라는 아들과 함께 폼페이라는 도시로 내려갑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베스비우스화산이 폭발해 폼페이시가 화산재에 파묻힐 때 드루실라와 그의 아들이 거기서 매장되었다고 역사가는 전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벨릭스와 바울이 비교가 되십니까?

벨릭스가 바라는 것과 바울이 버린 것이 똑같다는 것에 우리는 놀라게 됩니다.

벨릭스는 돈을 바라고 바울을 만납니다.

바울은 유복한 가문과 존경받는 랍비로서의 안전하게 보장 된 삶을 이미 버렸습니다.

벨릭스는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인들의 선심을 사려고 무죄한 바울을 구금해 두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동족인 유대인의 표적과 적의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리스도 영광의 복음의 가치, 그 광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 인간이 탐욕으로 쌓은 모든 것이 다 풀어져 사라질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바보가 아니잖아요?

바울이 배설물처럼 여겼던 그것을 더 모으고 누리려고 벨릭스는 자기 곁을 지나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놓쳐버렸습니다.

우리를 축복하시는 구원의 기회가 오늘도 우리 곁에 가까이 지나십니다.

좀 더 나중에,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렇게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멘하고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이십시오.

오늘 아멘하고 예수님의 도를 따라 끊을 것을 끊고 절제하며 주님을 따르십시오.

우리 영혼에 관한 문제를 뒤로 미루는 것은 가장 위험스러운 일입니다.

이미 구원의 기회를 포착한 우리에겐 어떻게 적용될까요?

이미 구원의 기회를 포착한 우리에게도 매일 기회가 지나갑니다.

더 아름답게 성장하여 나와 하나님과 이웃에 기쁨을 줄 수 있는 복있는 사람이 될 기회가 매일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 예외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오직 그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수고와 헌신은 아름다운 칭찬과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모든 체질이 풀어져 사라질 이 세상에다 인생을 다 투자했다면 그 날에 우리는 기회를 놓친 사람으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중요하게 간직하고 믿음의 성장을 위해 매일 기회를 만들어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절제하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