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사도행전8장26절-40절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

남수연 2019. 3. 5. 02:09

https://www.youtube.com/watch?v=P07lWJ6nfXM


2019년3월3일 설교영상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열어 놓으신 천국 복음이 땅 끝 까지 전해지는 역사를 기록한 성경입니다.

사복음서는 예수님에 대해서와 하나님나라 진리들로 꽉 차있죠.

그러나 한편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차있습니다.

당시엔 제자들조차도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은 오해와 무지의 장벽에 둘러 싸여 사셨으니 그 답답함이 어떠셨겠어요?

그러나 사도행전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이 똑같은 복음을 듣고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는 못 알아듣더니 빌립 같은 집사가 전하는 데 막 믿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마치 가을철 콤바인이 벼를 베면서 낱알들을 탈곡해 순식간에 저장고에 쏟아 넣는 것 같다고 할까요?
베드로가 노방에서 복음을 설교했더니 하루에 수천명이 우르르 세례를 받잖아요?

그래서 복음서에서 막혔던 속이 사도행전에서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시원하게 뚫립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이 반전의 원인이 무엇 때문입니까?

드디어 성령께서 오셔서 구원받을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성령께서 구원의 진리로 우리들에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사도행전은 큰 망원경의 관점으로 보면 성령께서 구원백성을 모으시는 역사입니다.

작은 관점으로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떻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구원을 받게 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성령께서 전도자 빌립을 통한 도전과 내시의 구원을 통한 은혜를 충만히 깨닫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난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7장에서 스데반집사가 유대교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합니다.

나중엔 로마에 박해를 받지만, 이때 박해 세력들은 예수님을 로마총독 빌라도의 법정에 고발했던 대제사장과 과격 유대교인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 부활했다 하는 것을 유대교법에 따라 신성모독죄로 처벌하겠다는 것이죠.

한참 부흥하던 예루살렘의 교회들은 박해를 피해 사방으로 흩어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도망치는 곳곳마다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합니다.

누가는 81절에 이 일을 의미심장하게 기록합니다.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어디서 많이 듣던 내용이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하셨던 명령이 그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박해로 인해 흩어진 성령 받은 성도들을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와 땅 끝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죠.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성령께서 성령 받은 성도들을 통해 이 구원사역을 완성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초점은 한 개인 전도자 빌립집사에게 모아집니다.

빌립집사는 박해를 피해 북쪽 사마리아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사마리아성에 빌립을 통해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는 큰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러던 중 본문 26절에서 성령께서 빌립의 전도 방향을 완전히 바꿔 놓으십니다.

사마리아를 떠나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지금은 사마리아성에 머물며 교회를 세우고 성도들의 믿음이 든든해지도록 양육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사마리아성이 전도의 전초기지가 되면 주변 지방들도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가야할 곳은 도시도 아니고 여행객들이나 지나쳐가는 광야 길이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명령이시죠.

우리가 기도하다 그런 응답을 받았다면 사탄아, 물러가라그랬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인도는 예측과 다를 때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에 지금 이 순간의 나를 예측했던 분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합리적이고 실현가능한 미래를 계획하고 안전위주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우리 삶이 진행되었다면 현재 믿음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예측과 달리 더 좋지만 불편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박해가 일어난 이유도 그렇게들 이해하잖아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온 유대 땅과 사마리아와 땅 끝 까지 전해져야 만 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위험을 감수할 생각을 안 하고 예루살렘교회에만 모여 있는 것이죠.

그러니 박해라는 물리적인 힘에 쫒겨 복음이 확산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살면서 만나는 예상 밖의 어려움은 의미심장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십중팔구 구원을 성취하시는 성령님의 사역과 맞닿아 있습니다.

빌립은 한창 부흥하는 사마리아교회를 떠나 영문을 알 수 없는 여행길에 오릅니다.

본문에선 단 한 절 사이에 빌립이 간단히 광야에 도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 예루살렘을 거쳐 가사로 내려가는 길은 백 킬로미터가 넘는 거리입니다.

빌립은 당시 가난한 여행자들처럼 걸어서 그 먼 길을 갔을 것입니다.

그 여정이 얼마나 피곤하고 위험했겠습니까?

단 한 사람 내시를 위해 이 과도한 수고를 꼭 해야 했을까요?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 주신, 좀 과도한 낭비 같은 하나님의 희생과 같은 원리인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것도 부족해 자신의 종들을 또 보내시는 게 하나님이십니다.

나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은 정말 남김없이 다 쏟아 부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빌립은 더 안정되고 성공적인 현실에서 내시의 구원을 위해 광야로 보내진 것입니다.

때로 더 의미 있는 하나님의 계획으로 인도하실 때 우리는 안전한 현실을 포기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용기 있게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서원이가 보스톤에 있는 고든콘웰대학의 신학과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전액 장학금을 기도했는데 일부 장학금만 나와서 앞으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해야 합니다.

저도 얼마간 학비를 지원을 해야 할 부담이 생긴 것이죠.

그런데 지난 주 전공이었던 철학 쪽으로 지원했던 보스턴대학과 메사추세스주립 대학에서 합격 연락이 왔습니다.

오년 박사과정 전액 장학금에 한달 생활비 이백만원씩을 지원해 주겠는 조건이었습니다.

어떻게 잠시인들 갈등이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든콘웰 대학을 선택했습니다.

서원이가 철학을 할수록 신앙과 불일치되는 것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세상학문은 출발선부터 다르잖아요?
학자의 양심 상 자신이 절대적 진리라 생각하지 않는 것을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배우고 가르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짧은 인생을 하나님을 위한 학문에 기여하고 싶다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왔기 때문에 좀 힘든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저희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공부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방책을 마련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손해보고 희생하는 맛이 있잖아요?

다윗도 그것을 알았기에 공짜 제물로는 제사 드리지 않겠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자기는 직업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으니 그 댓가가 무엇이냐고 물었었죠.

예수님께서는 금생에 희생한 것의 여러 배를 받고 영생도 받으리라 하셨습니다.

현세의 축복이든 더 높은 영혼의 축복이든 기쁘게 헌신한 성도들이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21장에서 빌립의 결말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빌립은 후에 가이사랴에서 정착해 교회를 섬깁니다.

사도바울이 세 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그 일행이 여러 날 빌립의 집에 머물며 선교활동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빌립이 가난했다면 바울일행이 편히 신세를 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의 네 딸은 신령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들을 예언하고 가르쳤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영과 육의 충만한 복을 헌신했던 빌립과 자녀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가난하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이잖아요?

편리하고 형통한 가운데서 하는 신앙생활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편안함 속에서 신앙은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몇 배의 경건훈련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불편을 감수하고, 희생하고, 고난 받는 중에 믿음은 그 진가가 더욱 빛납니다.

지금 어려움 중에 예배드리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님들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물론 세상에서 안전하게 먹고 살려면 실리적인 계획이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모든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가용한 범위 내에서 하나님의 뜻을 적극 이루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 시간도 삶의 중심과 방향성은 하나님께 맞춰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생활의 염려와 분주함과 세속에 빠져 하나님나라에 길이 남을 일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인생을 보낼 것입니다.

빌립처럼 큰 순종을 하는 것도 힘들지만 작은 일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각자가 맡겨진 주의 일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 놓으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입니다.

성경에서 빌립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그의 순종과 능력의 원인이 성령충만에 있었던 것이죠.

우리도 성령충만을 구할 때 주시겠다고 예수님이 보장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될 하나님의 일들은 크던 작던 선뜻 하기 힘들고 부담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내 가족이나 친구 누구를 주님 앞에 인도하도록 맡기셨다면 그 과정은 빌립이 광야까지 걸어간 것만큼 힘듭니다.

피하고 싶고, 미루고 싶은 신앙의 일들을 성령님의 힘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좀 싫은 일, 부담스러운 일도 의외로 쉽게 해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 각자에게 주신 믿음의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해나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나라의 작은 부분을 세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성경의 초점은 내시에게 맞춰집니다.

27절에 보면 이 내시는 에디오피아 여왕인 간다게의 국고를 맡고 있는 최고 공직자라고 합니다.

내시는 에디오피아에서부터 예루살렘까지 가 예배드리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한 간절함이 있는지를 말해 줍니다.

우리는 오늘 그런 간절함으로 예배하고 있을까요?

무엇이 내시를 먼 곳 예루살렘까지 가서 예배드리게 이끌었을까요?
여왕의 국고를 맡았다는 것은 가장 신임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누구나 돈을 맡길 때는 제일 믿을만한 사람에게 맡기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돈 만지는 사람이 실세입니다.

여왕의 신임을 받지, 국고를 관장하지, 그는 분명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의 삶은 누구나가 그렇듯이 채워지지 않은 부분들도 있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지만 함께 나눌 가족, 자식이 없다는 데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시관리가 그 먼 길을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육적인 갈증이 아니라 영적인 깊은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성령께서 붙드시는 사람은 결코 세상적인 삶에서 만족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잘 될수록 오히려 갈증의 실체가 점점 더 분명해집니다.

내시의 깊어가는 갈증을 예루살렘까지의 긴 거리가 보여주는 것이죠.

간절한 만큼 사람들은 움직이잖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드디어 그 넓은 광야의 한 지점에서 빌립과 내시의 만남이 이뤄집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만나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이 우연은 아닙니다.

내시는 흔들리는 수레에서 이사야서의 말씀을 큰 소리로 읽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는 빌립에게 내시에게 다가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빌립은 달려가서 마차를 멈춥니다.

그리고 가서 말합니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

내시가 읽은 부분은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입니다.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우리가 알고 있는 메시야의 고난에 대한 이사야선지자의 보석 같은 예언입니다.

이사야53장은 메시야가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채찍에 맞고, 찔리고,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시는 이 수난과 굴욕을 당하는 사람이 대체 누구냐고 묻습니다.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은 이 말씀으로 시작해서 내시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시고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소!

예수님이 빠진 하나님 신앙은 인간이 신을 만들고 찾아 가는 자연종교로 전락합니다.

막연히 조물주를 인식하고, 제의에 치중하고, 천지신명에게 비는 종교가 되는 것이죠.

예수님 없이는 구원도 없고 하나님을 바로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빠진 유대교가 종교로 전락했고 바리새인들은 신앙인이 아닌 종교인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내시에겐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갈급함이 있는 것이죠.

사도행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반드시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되게 경외하는 내시에게도 구원을 위해 가장 필요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려주셔야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올 때 예수님에 대해 알고 오는 경우는 드뭅니다.

대개는 하나님에 대한 막연한 종교심을 갖고 교회에 나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특히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아버지 앞에 나왔다면 그 다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인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시의 경우처럼 오직 성경, 오직 성령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배우는 것이 구원의 가장 중요한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믿음의 씨앗입니다.

씨가 없이 무언가 자랄 수는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스스로 활력 있게 일하십니다.

말씀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 나를 열어 놓았다면 반드시 작은 일이라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음이 항상 빈약한 것은 말씀이 빈약한 것입니다.

말씀에 자신을 노출시킬수록 은혜와 진리가 충만해 집니다.

또 말씀이 나의 내면을 샅샅이 조사해서 무엇이 죄인지를 지적해 주시고 생각을 교정해 주셔야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깨닫길 원하는 성도들에게 사역자를 보내주십니다.

성령님께 성경을 배운 설교자와 성경교사들입니다.

오늘 내시에게 빌립을 보내서 이사야서를 해석해 주시지 않았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구원을 알고 세례를 받았겠습니까?
권고 드리는 것은 주중에 우리 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이전 설교 원고들을 꾸준히 읽으시길 바랍니다.

요즘은 동영상도 올리고 있으니 못 나오신 주간엔 꼭 설교영상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설교를 위해 일주일 내내 연구합니다.

또 기도하면서 깨닫게 해주시는 걸 종이에 몇 장씩 적어 나갑니다.

설교 안에는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음성이 어느 부분에건 반드시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안에서 은혜를 받고 살아갈 길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시는 말씀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자 주님이 오랜 갈망의 해답임을 즉각 알았습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죠.

그리고 물 있는 곳에 이르자 망설임 없이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둘의 만남은 좀 환상적인 분위기로 끝납니다.

38,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성령께서 세례를 주고 물에서 올라오는 순간 빌립을 낚아채 가셨다는 것입니다.

40절에서 빌립은 멀리 떨어진 아소도에 나타났다고 전합니다.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사마리아성이 빌립이 머물 곳이 아니었듯이 은혜 받은 내시를 따라가 에디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것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시가 그랬을 것 아닙니까, 에디오피아로 함께 가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자고.

구원의 역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이를 진행하는 성령께 달렸습니다.

 

내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는 구원받은 순간, 세례를 준 빌립이 순식간에 사라졌음을 신경쓰지 못할 정도로 큰 기쁨에 휩싸였습니다.

그래서 기쁘게 가던 길을 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삶과 영생에 대한 해답을 얻은 성도들은 기쁘게 자기의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있던 그곳으로 여전히 돌아가지만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젠 기쁘게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삶에는 고통과 근심과 염려와 걱정이 섞여 있지만 이 큰 구원의 기쁨이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합니다.

지금 있는 곳에서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면 어디 가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행복할 실력이 없는 사람인 것이죠.

예수님 안에서 지금, 여기서, 이 환경에서 믿음으로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젠 구원받은 내시관료에서 전도자 빌립이 되어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이 선포될 때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이 사람들이 둘로 갈라집니다.

믿고 구원을 받는 사람, 안 믿고 멸망의 길을 가는 사람.

우리가 이 구원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상속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의 덕분입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은 우리를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두고 가기 아까운 이 땅의 것들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천국의 좋은 삶을 생각할 때 이 땅이 그렇게 의미가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나라의 완성에 기여하는 영광스러운 사역에 동참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기까지 우리의 표본이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목적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을 따르며 성령님의 능력으로 헌신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