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 설교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다들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우리 믿음에 대한 좀 더 확실한 증거들을 받아내기 위해 집중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바로 아테네 법정인 아레오바고에서 했던 바울사도의 설교 전문입니다.
아레오바고 유적지에 가면 오늘 본문인 설교 전문이 비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지금도 그리스의 대법원을 아레오바고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아시아중심의 1차 선교 여행을 끝내고 유럽을 대상으로 한 2차선교 여행 중에 있습니다.
유럽의 첫 관문인 빌립보를 시작으로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1차 전도여행과 달리 유대교인들은 깡패까지 동원해서 선교를 방해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선 야반도주를 해야 했고, 방금 베뢰아에서는 일행도 남겨둔 채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아테네까지 배타고 도망 온 상황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복음이 전해질 때 조용했던 적이 없습니다.
가는 곳마다 반대파들과 격돌하고 온 도시에 소동이 일어나고 시끌벅적 했습니다.
하나님나라와 사탄의 왕국이 거세게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죠.
현재 우리가 평화시대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한주간 내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전투장에서 한바탕 뛰시고 오늘 나오신 것입니다.
사람관계, 건강문제, 생활문제들이 다 자연적으로 일어난 일들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고 피곤하고 갈등이 많았던 것입니다.
물론 이 시간도 영적 전투는 벌어지고 있지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를 새롭고 강하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바울사도가 아테네에 도착하자 다시 거대한 영적 싸움에 직면합니다.
아테네로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 신들의 도시로 꾸며진 곳이죠.
온 도시가 대리석 신전과 신상조각들로 가득 찬 만신당 같은 곳입니다.
제가 미얀마에 가 봤기 때문에 그 분위기를 압니다.
온 천지에 불교 사원이 빼곡해서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뾰족한 절탑이 보이는 데 정말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갑갑함을 느꼈습니다.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이 그랬다고 하죠.
16절에 보면 즐비한 신상들을 보고 바울이 격분했다고 합니다.
바울 시대 더 이전 4백여년전 고대 아테네는 학문과 예술에 있어서 세계 최고였습니다.
우리가 한번쯤 들어봤을 철학자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활동한 곳이 아테네입니다.
오늘 바울이 설교한 아레오바고 재판정은 소크라테스가 무고하게 사형판결을 받고 독배를 마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리스의 조각예술은 최고의 경지에 있었습니다.
비너스상이나 원반 던지는 사람 같은 완벽한 미를 갖춘 유명작품을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니케아 여신상 같은 경우는 날개와 의상의 섬세함이 압권입니다.
이건 돌이 아니라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나이키마크가 바로 이 니케아여신상의 날개에서 착안한 것이라죠.
마크의 가치가 8조가 넘는다고 합니다.
현재의 아테네는 그리스 국가의 수도입니다.
그리스는 사실 국가부도 상태에 있습니다.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친 복지제도인데 국민들이 은퇴 후 받는 연금이 재직 시절의 95%나 됩니다.
나라 살림이 거덜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또 경제활동의 90%가 과거 선조들의 유산을 팔아먹고 사는 관광업과 서비스업이고 대부분의 생필품을 수입하는 취약한 구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국가 부도 났으니 파르테논신전에 빨간 딱지 붙여야 된다는 농담도 했었죠.
반쯤 무너진 파르테논신전을 보려고 그렇게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데 바울 당시 이런 굉장한 건축물과 미려한 조각상에 둘러싸인 아테네시민들의 자부심과 긍지는 말할 필요가 없겠죠.
거기서 바울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전하려고 할 때, 쉬웠겠습니까?
우리가 돈 많고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전도하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는 입을 떼기가 더 어렵습니다.
세계 최고의 문화도시에서 비단 옷을 입고 최신 철학을 논하는 지성인들에 비할 때 바울의 모습이 어땠어요?
단벌옷으로 도망쳐 나온 바울이 초라한 떠돌이 이방인으로 비쳤겠죠.
그러나 바울사도의 눈에 아테네 시민들은 단지 영적 무지를 벗고 하나님을 믿어야 할 죄인에 불과했습니다.
세계가 찬사를 아끼지 않는 도시에서 단 한 성도 사도바울만이 그 실체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휘황찬란하고 멋져 보이는 세상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세상의 물질문명에서는 필요한 것만 적당히 이용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영원한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도시 전체에 웅크리고 있는 사탄의 기운에 취해있는 아테네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과 부활을 소리 높여 외쳤던 것입니다.
거대한 도시에서 성령에 사로잡혀 낯선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기이한 열정이 에피쿠로스와 스토아철학자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최신 학문과 새로운 사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일과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무슨 새 주장을 하는지 들어보자며 바울을 데려다 법정이자 토론장인 아레오바고에 세운 것입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선포한 설교가 오늘 본문입니다.
이전까지 바울은 어디를 가든 회당에 모였던 유대인을 상대로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구약성경을 알던 사람들이었죠.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라는 것만 증명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사람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알던 신이라면 천지신명이나 옥황상제나 귀신 정도지 여호와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이 설교 내용은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전해야 할지 고민하며 최선을 다한 변증입니다.
설교 속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영적 상태와 거기에 맞는 복음제시가 함축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도 복음의 내용을 확신하게 해 줄 것입니다.
또 주변에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전도하는 데 다시 한번 관심을 갖고 기도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먼저 바울은 아덴 사람들의 종교심에 대해 논증을 시작합니다.
22절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바울이 왜 아덴사람들의 종교심을 실마리로 복음을 끌어내려고 했을까요?
종교는 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종교심이란 그런 신을 믿고 따르는 경건한 마음이죠.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건 공통으로 가진 것은 종교, 종교심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을 모실 종교의 자리를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의 공백감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다 잘 되고 설령 아무 문제와 고통이 없다 해도 인간 심연엔 채워지지 않은 이 종교의 자리로 인한 공허감이 사람을 불편하게 합니다.
‘이상하다, 모든 게 괜찮은 데 왜 만족과 행복감이 없고 뭐가 빠진 것 같지?’
그래서 지성인이든 무학자이든 절대자와 신비자를 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힘으로 찾아가는 것이 참 신이 아니라 거짓 신, 유사 신, 귀신, 만들어진 우상 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모인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철학자들이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입니다.
지성인들이지만 스스로 지어낸 그리스신화의 신상들을 만들어 떠받들고 있는 것이 인간이 찾아내는 신의 한계입니다.
자기가 손으로 만들고 고안해 낸 물건들을 신이라고 섬기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현대 사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첨단의 장비와 기기들을 도입한 회사에서 돼지머리로 고사상 차리고 절하잖아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한계는 아무리 배웠건, 과학이 발달했건 상관없이 타락하고 우둔해진 종교심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무당의 수가 73년도에 3만명이었습니다.
그런데 15년 뒤인 88년 통계에 의하면 80만명으로 급속히 늘어났습니다.
이때가 우리나라 경제와 문명이 급성장하던 시기잖습니까?
과학과 문명이 고도로 발달하고 있는데 무당 수도 급속하게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 전통문화란 명목으로 과거 우리 조상들이 섬기던 갖가지 우상과 미신들이 다 복원되고 있잖아요.
과학시대에 얼마나 근거 없는 미신들이 여전히 사람들을 얽어매고 있습니까?
문지방 밟지마라, 빨간 색으로 이름 쓰지 마라, 밤에 휘파람 불면 뱀 나온다, 시험날 미역국 먹지마라, 심지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
어떤 두려운 존재에 대한 불안감이 한편으로 이런 미신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과학문명이 앞서가고 잘사는 나라 영국과 같은 유럽국가들은 기독교인들이 급속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웅장한 예배당 안에는 백발의 목사와 허리가 굽은 성도 몇 명만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게 흔한 영국교회 풍경입니다.
예배당을 가득 채웠던 성도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다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최근 들어 정령숭배나 샤머니즘, 불교 사원에 다시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양심 깊은 곳에 비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리를 영적인 무언가로 채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날카롭게 지적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많은 신상들은 바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증거이다.’
신이 있지도 않다면 왜 인간의 마음에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자꾸 떠올리고 추구하게 되냐는 것입니다.
23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새긴 단도 보았다.
‘그 많은 신들로도 모자라서 혹시 알지 못하는 신이 또 있을까봐 재단을 만들지 않았냐 이건 참 신을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다’ 라는 것입니다.
만일 참 신을 만났다면 뭐하러 그렇게 많은 신들을 만들고 또 만들겠냐는 것이죠.
이것이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분리시킬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내 마음 중심에 있는 종교의 자리에 모실 때에만 인간의 영적 방황은 끝이 납니다.
그러기 까지 사람들은 계속해서 신이나 그 대용품을 찾아 헤매는 것이죠.
참 신이고 유일한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에 대한 방황과 의혹은 끝납니다.
다들 유일한 해답이신 하나님을 만나셨다고 믿습니다.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누구든 하나님으로 만족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족함이 없이 만족하시기에 다른 무언가를 기웃댈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아테네사람들의 무수한 신들은 그들이 참 신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렁찬 목소리로 기탄없이 말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절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제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만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사람들이 신을 모시기 위해 지어 놓은 신전에 거주하며 사람들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차원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광대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경이로우신 하나님은 사람보다 조금 더 탁월한 정도의 신이 아니십니다.
집을 지어드리고 거기 음식 접시를 벌여 놓고 섬길 그런 신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위대함, 능력, 지혜, 신성에 대해 얼마나 상상하고 얼마나 하나님에 대한 감수성을 갖고 계십니까?
물론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완전한 상상을 할 수 조차 없습니다.
그것이 우주의 넓이 만큼이나 큰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입니다.
인간도 기술의 발전으로 실물과 구별하기 힘든 정교한 장미꽃을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은 겨우내 장미를 잠재우고 봄이 오면 깨어나 꽃을 피우도록 생체주기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죽은 것 같던 마른 줄기에서 무성한 잎이 나고 융단같이 부드럽고 황홀한 색을 입고 향기까지 뿜어내는 저 장미정원의 장미꽃이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요즘 올림픽 공원 장미광장에 장미꽃이 활짝 폈습니다.
갖가지 장미꽃을 둘러보면 무엇 하나 부족하고 어색한 데 없이 완벽하게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가 너무나 신묘막측해서 저절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그런데 꼭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이 아름다운 것들을 행복하게 누리도록, 그리고 진실 되게 이 자연만물을 대할 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깨닫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27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지요.
이는 사람이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면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부여하고 누리게 하신 생애와 경이로운 자연과 우주에 담긴 무한대의 지식을 통해 더듬어 설계자를 발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이방인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로마서에서 이 사실을 다시 언급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으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조금만 생각을 갖고 우주 만물을 들여다보면 창조주를 깨닫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빅뱅에서 시작되고 가장 단순한 분자에서 저절로 진화되어 이 온 세상이 만들어 졌다는 진화론의 추측은 터무니없는 허상입니다.
장미 정원의 저 다양하고 아름다운 장미들이 자기 스스로 다른 장미들과 차별화 된 옷을 택해서 입었다는 것입니까?
꽃 사이를 날아다니며 꿀을 빠는 가장 작은 새인 벌새가 있습니다.
이 작은 벌새는 일초에 팔십번 날개짓을 하고 수백킬로미터를 날아다닙니다.
자기 스스로 그런 초능력에 가까운 신체를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까?
모든 생물에게 있는 유전정보 DNA에는 이 모든 생체주기와 신진대사의 정보들이 정밀하게 프로그램 되어 있습니다.
바늘 끝만한 DNA에 담겨있는 정보를 읽어내어 책으로 만든다면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의 오백배로 쌓을 만한 방대한 양입니다.
누군가 생명체에 형태를 이루고 움직여 생존하게 하는 정보를 만들어 심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가시의한 창조의 지식은 우리가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현기증이 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피조물인 인간이 가늠한다는 것은 불가능입니다.
다만 이것들을 보고 경탄하며 경이로우신 창조주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또 바울이 주장하는 이 하나님은 다만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우주 너머 멀리 관망하는 초월자가 아니십니다.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 하느니라.
오늘도 하나님은 그 권능과 지혜로 모든 만물을 그 손에 붙들고 계십니다.
만물을 축복하시고 생기로 충만케 하시고 이렇듯 아름다운 세상을 유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지 않습니다.
야곱이 꿈에 땅과 하늘에 닿아있는 사다리를 보고 깜짝 놀라잖아요?
하나님이 바로 여기 내 위에 계시는구나.
하나님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계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감탄을 하는 것입니다.
알고보니 하나님은 우주 저 멀리 관망하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양떼를 곁에서 지키고 위험에서 구하고 신선한 풀로 배불리 먹이는 목자시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하려고 하나님의 자리에 온갖 우상들을 채워 놓고 정작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올려 놓고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더듬어 찾으면 만나질 거리를 유지하며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니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하찮은 우상을 하나님 대용으로 삼았던 삶을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30절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이 준비되지 못했던 시대엔 모든 사람들이 각자의 소견대로 살도록 버려두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젠 때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속죄로 누구에게나 구원의 문이 열렸습니다.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참되신 창조주께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지 못했던 때는 희망이 없이 버려져 있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젠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때가 지나면 예수그리스도로 하여금 천하를 심판하고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성취하실 날을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확실한 증거로 한 사람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설교했는데, 잘 한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지식인들 앞에서, 자기들의 신에게 도시를 만들어 바친 아테네시민들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어요.
그러나 바울사도는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자신의 모든 소양을 총동원해서 복음의 핵심 내용을 최선의 방법으로 전한 것입니다.
오늘 설교에는 위대하고 지혜로우신 창조주 하나님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을 알 수 없는 초월자가 아니라 우리 가까이 계시고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문이 열렸으니 과거의 삶으로 부터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심판의 날을 작정하셨습니다.
바울의 이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그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갈라집니다.
32절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나중에 다시 듣겠다고 합니다.
34절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부활을 조롱하는 사람은 그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아테네시민으로 부여 된 모든 부성한 문화의 혜택을 누리려고 황급히 일어났습니다.
아무 인격적 변화와 도덕적 삶을 요구하지 않는 대리석 석상들을 섬기러 떠난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바울의 말을 듣겠다는 사람들은 그 이후 바울을 다시 만났을까요?
18장1절에 보면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바울은 아덴을 떠나 다음 선교지인 고린도로 갔습니다.
더 이상 바울의 선교여행에서 아테네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결단하고 선택해야 할 시간이 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짧은 시간에 결심하고 바울을 가까이 해서 믿었던 단 몇 사람만이 그 날 아테네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들은 바울의 설교가 믿어지십니까?
이 복음이 믿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이고 축복입니까?
바울의 설교를 들은 아테네의 박사들, 철학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조롱하고 믿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이런 구원의 큰 복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이 수천킬로를 찾아가 전했던 이 사실들을 우리는 내 곁에 있는 가족과 이웃들에게라도 전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7년5월28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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