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2016년이 두 주간을 남겨 놓았습니다.
카카오가 2016년 올해의 검색어 순위를 발표했습니다.
1위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예상대로 ‘비선실세 국정농단, 즉 최순실게이트’ 가 1위에 올랐습니다.
올 10월에 불거진 사건인데 연간 총 검색어 1위에 오른 것은 그만큼 국가적인 충격이었다는 뜻이죠.
이젠 ‘최순실’이란 말 자체가 매 끼니 올라오는 반찬처럼 우리를 질리게 합니다.
해결되지 않은 국가적인 문제가 있다보니 뭔가 마무리를 못한 채 한 해를 떠나보내는 찜찜한 연말 기분입니다.
그렇잖아도 연말은 항상 아쉬움과 후회가 남죠.
작년에 직장인들을 상대로 한해를 돌아볼 때 잘 한일과 후회되는 일 중에 어느 것이 많으냐고 물었더니 60%이상의 직장인이 후회되는 일이 많다고 대답했습니다.
자기 관리의 소홀이 가장 많이 후회되는 일로 남는다고 하더군요.
성도님들은 다 어떤 한 해를 보내셨는지요?
힘든 여건이지만 다들 열심히 사신 것은 제가 알겠고,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감사하고 만족스런 삶이었기를 바랍니다.
오늘 나누려는 말씀은 바울사도가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보지 못할 에베소교회의 성도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장면입니다.
3년간의 동고동락한 성도들에게 속마음을 털어 놓고 진심으로 교회를 당부하는 내용이죠.
바울의 연설을 보면 정말 이런 후회 없는 인생이 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삶에도 이렇게 후회가 없는 줄 믿습니다.
바울사도가 사랑했던 에베소교회에 호소했던 간절한 훈계와 바울의 삶을 잘 본받아 우리도 후회보다 만족이 더 큰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바울은 4년이 넘는 세 번째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자신의 순교를 예감하고 있었기에 빠듯한 시간 중에도 전도여행 중에 세운 교회들을 차례로 방문해 믿음을 다지도록 격려하고 있었습니다.
지난주에 드로아교회에 들렸고 거기서 설교시간에 졸던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다 살아난 사건이 일어났었죠.
예루살렘을 향하는 일정이 바빴지만 3년을 넘게 목회했던 이 에베소교회를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보내어 배가 잠시 정박해 있던 밀레도로 에베소교회 지도자들을 불러오게 했습니다.
전에 바울의 전도활동에 대한 큰 반대 소요가 있어 에베소교회를 떠났기에 직접 방문은 삼간 것이죠.
바울은 밀레도 항구로 찾아온 장로들과 애틋한 석별을 하며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먼저 바울은 26절에서 모든 사람의 피에서 자신은 깨끗하다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하거니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자기의 사역을 삼년 동안 지켜보아 뻔히 알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바울은 서슴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자타가 인정할 만큼 바울은 정말 이들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이죠.
그리고 이 말은 한편 전도의 엄중함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서에서 죄인의 전도에 대한 의무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악인에게 말로 경고하여 그 길에서 떠나게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를 네 손에서 찾으리라
바울은 이 말을 상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도의 심각성에 대해 하나님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뭐 그런 일이 있으려고’ 라고 흘려 듣는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실언하시는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지역의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간곡히 권유했고 경고했기에 그들의 피에서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 가족의 피에 대해 과연 나는 깨끗할까, 내게 보내준 이 사람들의 피에 대해 나는 깨끗할까 라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엄중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바울사도는 엄중하게 받들었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거라는 경각심을 갖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바울도 사람인데, 비난받고 욕을 먹어가며 그 사람들이 마냥 안타깝고 사랑스럽기만 해서 전도를 했겠습니까?
거기엔 하나님의 엄위하신 명령을 두렵게 생각한 이유가 크다는 것이죠.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일말의 부담감도 없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영이기에 우리는 저절로 증인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전도에 대한 각성과 실천을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대하고 가족을 대하는 모든 이면에는 궁극적으로 그 분들에게 가장 좋은 영생의 선물을 선사하기 위해서라야 맞는 것입니다.
백 명의 사람들과 관계가 좋게 잘 지내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들이 다 구원을 못 받고 심판을 받게 되면 그들을 위한 나의 따뜻한 웃음과 정다운 말들이 그들에게 과연 최선의 호의였을까요?
우리가 정말 가족의 구원 때문에 울면서 다닌다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을 가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에베소교회의 구원을 위해 애썼지만 바울에게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떠나고 난 뒤 교회 안에는 틀림없이 성도들을 믿음에서 탈선시킬 악의 세력들이 생길거라는 것입니다.
에베소는 성경과 복음에 능통한 바울사도가 두란노서원을 열고 삼년을 가르친 곳입니다.
그것도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차 불같은 시련이 이들의 믿음을 시험할 거라고 합니다.
사나운 이리가 양떼를 움키듯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시험해 믿음에서 파선하는 이들이 생길 거라는 것이죠.
이 말씀은 우리 개인의 신앙에 대해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느 교회도, 어느 신자도 역사적으로 시험이 없던 적이 없었고 그 중에 믿음에서 탈선하고 배교하는 일이 없었던 적은 없습니다.
심지어 유대교 사회에서 목숨을 걸 듯 예수님을 믿었던 충성된 예루살렘 교회에도 박해가 일어나 성도들이 다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이런 시련에 대비해 성도들은 언제나 믿음을 점검하고 강화해야 합니다.
결국 훈련 된 참된 성도만이 어떤 시험과 고난이든 이기고 믿음을 확증해 보이는 것입니다.
시험과 역경은 종종 사랑의 진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죠.
각자의 믿음에 대해 안일하게 생각하다가는 누구든 신앙의 큰 위기를 맞을 수가 있다는 것이 오늘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믿음이 약화되면 영적으로 뿐 아니라 심리적, 물질적으로도 타격을 입습니다.
믿음의 경험이 깊은 성도들은 신앙에서 이탈하면 직관적으로 위험이 닥칠 것을 인지합니다.
그래서 늘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만반의 대비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비해야 합니까?
그 대비는 먼저 바울자신이 가르쳐주었던 훈계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스스로 일깨어라, 즉 깨어 있으라는 뜻입니다.
깨어 있는 것은 훈계한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왜 그렇게 힘들여가며 밤낮 쉬지 않고 말씀을 가르쳤겠습니까?
말씀을 지켜 스스로를 검증해가지 않는 신앙은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캐나다의 데이비드 해스켈 교수가 성장 쇠퇴하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대해 연구한 결과를 종교학술지에 발표했는데요.
거기에 보면 성경을 읽는 교회와 성도들이 성장한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구성원인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잘 세워져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명력이 넘치고 능력 있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믿음의 성장과 말씀은 절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믿음이 성장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완전히 오해입니다.
한 주간 말씀을 읽지 않고 살았다면 겨우 믿음을 유지하기도 힘듭니다.
성경을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어떤 분은 하루에 세끼 밥을 먹듯, 세 번 성경을 소리내어 읽는다고 합니다.
눈으로 읽으면 성경이 잘 안 들어오지만 소리 내서 읽으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더 효과적인 성경읽기 방법이 되는 것이죠.
우리 성도님들께도 권하고 싶은 성경읽기 방법입니다.
그것도 힘들면 스마트폰 앱에 음성으로 들려주는 성경이 있으니 틀어 놓은 채로 일을 해도 좋겠죠.
말씀을 읽고 배우는 것이 얼마나 중한지 바울사도는 잘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합니다.
32절에 보면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큰 시험이 불어 닥칠 교회를 바울은 주님께 부탁드릴 뿐 아니라 은혜의 말씀에 부탁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고 지켜주실 때만이 넘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도 성도들을 든든히 세워 위기에서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말씀이 성도에게 허락된 천국의 기업을 소유할 때까지 성도들을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그 말씀으로 삶의 기준을 삼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은 성령님의 비추심 안에서 살아있는 말씀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 있으라고 하신 대로 빛이 생겼듯이 말씀이 그대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말씀을 읽을 때, 풍랑 속에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현재 내 위기에 함께 하심이 믿어지며 두려움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읽을 때, 주변이 다 염려 할 일 투성이지만 그 가운데서 빠져나와 소망의 믿음으로 대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듣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는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죄 속에서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밤낮 쉬지 않고 삼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삶의 교훈으로 새겨지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누구에게 무슨 말을 듣냐에 따라 우리 마음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바르게 하고, 책망하고, 의로운 삶을 가르쳐 온전한 성도가 되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다음 바울사도는 실제 생활면에서 자신의 본을 받으라고 합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바울사도가 목회하던 에베소교회에서 사례를 받지 않고 자기 손으로 일해서 쓸 것을 충당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바울은 천막제조업으로 돈을 벌었습니다.
당시 천막제조업은 상당한 기술이 필요한 특수직업이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것으로 선교비의 많은 부분을 충당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은 구약시대부터 백성들의 십일조를 통해 성전과 제사일을 돌보는 레위지파 제사장들을 국민 전체가 부양하도록 율법으로 정해졌습니다.
현재에도 이스라엘엔 이 율법정신이 남아서 종교인들은 나라에서 월급을 주고 먹여 살립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에 들어가 땅을 분배할 때도 레위지파에게는 아예 농경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단지 가축떼를 먹일 목초지만 배정되었습니다.
농사지을 땅이 있을 경우 레위인들이 농사에 빠져 성전봉사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셨던 것이죠.
아무리 레위인이고 목사라고 해도 사람이 돈 벌 일이 눈에 보이면 당장 거기에 매달리는 게 인지상정입니다.
구약시대 말에 성도들의 십일조가 부실해지자 제사장들이 다 생업을 갖는 통에 성전일이 소홀히 되고 신앙의 위기가 왔다는 것을 성경은 증명합니다.
그러나 이방나라인 에베소에 세워진 교회에는 그런 개념이 없었고, 바울이 새신자들인 성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자비량으로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범사에 자기가 보여준 대로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우라고 합니다.
돈을 벌어 바울선교팀의 생활만 해결한 게 아니라 약한 사람을 도와주기도 했다는 것이죠.
그렇게 남을 도와주는 것에 대해 주저하는 사람에게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지 않냐는 것입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모을 것이 아니라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주는 삶이 좋겠습니까, 남에게 받기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당연히 남에게 주는 삶이 좋죠.
남을 위해 돈 쓰는 재미가 얼마나 쏠쏠하다구요.
올해도 어김없이 도움이 필요한 곳곳에 일 억이나 되는 돈을 쾌척하고 돌아간 얼굴 없는 기부천사 김달봉씨도 그 맛을 아는 사람이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철왕 카네기는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전반은 돈을 벌기 위해서, 그리고 후반은 돈을 잘 쓰기 위해서 살아야 된다고 말합니다.
뉴스를 보니 우리나라에서 집을 51채 이상 가진 사람이 삼천명이라더군요.
사람이 사는 데 집이 오십 채씩이나 필요합니까?
그런데 할 수만 있으면 하나라도 더 긁어모아야 직성이 풀리는 게 인간입니다.
아흔아홉 석 가진 사람이 한 석 가진 사람에게 백석 채워달란다는 속담이 왜 나왔겠습니까?
재벌 이건0 회장님의 15조원 재산이 우리에게 뭘 깨닫게 합니까?
이제는 그걸 깔고 누워서 남을 위해 쓰고 싶어도 이젠 그럴 수 있는 의식조차 없으십니다.
우리가 많이 벌어서 재산을 증식시킨 뒤에만 남을 도울 수 있는게 아닙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적은 돈이라도 떼어내지 못하면 돈이 많이 생겨도 똑같습니다.
돈은 강력한 우상이기에 없을 때부터 우리가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돈이 커질수록 점점 돈이 스스로 사람을 지배해 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에게 인격을 뺏기고 굴복하잖습니까?
그렇기에 작은 돈 부터 부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작은 돈에도 우리는 치부를 드러내게 되죠.
그러려면 먼저 작은 돈으로도 감사하고 만족하게 누리며 사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대개 서민들은 죽을 때까지 큰 돈 만지기는 어려우니까요.
자동차를 사지말고 속옷에 투자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빨리 새 물건에 적응하기에 돈으로 행복을 느끼려면 고가품 하나 사는 것보다 싼 물건을 자주 사는 게 낫다는 것입니다.
작은 돈일지라도 나를 위해 행복하게 쓴다면 큰 재산 못지 않게 충분히 만족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이죠.
적게 가진 사람들도 행복할 수 있도록 정해 놓으신 한계효용의 법칙입니다.
또 그런 방식으로 작은 돈으로 얼마든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챙겨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께서 너희가 이렇게 좋은 일에 쓰도록 물질의 복을 내려주시기를 원한다. 그런 말이 없습니다.
너희도 나처럼 손으로 수고하여 돈을 벌어서 도우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좋은 아이디어와 생각이 있다 해서 그게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간절히 마음으로 바라는 것을 하나님이 반드시 이뤄주실 것이다 ’
이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누군가는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걸 만들어 냈지만 바라기만 한다고 되는 것은 자연법칙 속에 없습니다.
그걸 가리켜 감나무 밑에서 홍시 떨어지길 바란다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박대통령 교시대로 간절히 바란다고 우주가 나서서 도와줍니까?
간절히 바라는 것을 이 땅에서 주신 방식대로 노력해서 하나하나 실천하며 이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저도 젊을 때 보증선 빚 때문에 울면서 철야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귀인이 나와서 도와 주길 기대했는데, 결국 6년 동안 월급타서 다 갚았습니다.
다만 그 기간을 견딜 힘을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이겨내게 하신 것이죠.
그래서 세상에서 불편하지 않게 돈을 벌고 먹고 살려면 필요한 것들을 어려서부터 잘 준비해가야 합니다.
나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실력을 갖추고 준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야 기회가 왔을 때 무능함으로 인해 눈물을 삼키지 않습니다.
제가 이번에 총신대학교 설교학 박사과정에 응시를 했거든요.
면접고사에서 전공분야는 그런대로 잘 대답을 했는데, 영어지문을 보고 해석하는 문제는 제대로 하지를 못했습니다.
영어공부를 충분히 할 기회가 학창시절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충실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언젠가 그로 인해 발목이 잡힙니다.
역량을 발휘할 기회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의 방식에서 말해주는 것은 이 땅에서는 반드시 수고하여야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만은 위해서 쓰라는 게 아니라 어떤 종류의 것이든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또 약한 사람들을 돕는데 쓰라는 것입니다.
현대에는 교회가 바로 서도록 봉사하고 헌신하려는 사람들은 점점 적어지고 있습니다.
꽤 큰 교회인데도 새해가 되면 주일학교 교사가 해마다 채워지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목사님의 말을 들었습니다.
대형교회에 모여 좋은 분위기에서 은혜로운 예배를 드리지만 그렇게 교회가 굴러가도록 하는 것은 단 5% 성도들의 헌신이라고 합니다.
극히 일부의 성도들이 지치도록 봉사해서 나머지 성도들이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죠.
편안한 신앙생활에서 값진 결과가 나올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곳에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것이잖아요?
건너편에 사랑하는 교회에 교인이 만 명인데 백 명의 식당봉사자를 못 찾아 교회점심을 없애려고 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하는 것이 곧 내게 하는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말을 다 마친 후에 바울과 에베소교회의 사람들은 기도를 합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니
이 모든 선한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입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듣고 배우고 읽어야 성령께서 그 뜻을 깨닫게 해주시고 내게 꼭 맞게 인도를 해주십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을 때도 하나님이 깨닫는 마음을 주시고 내게 말씀을 통해 문제를 해결 할 길을 제시해주시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말씀이 그냥 스쳐가는게 아니라 나의 폐부까지 닿아 뭔가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려면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업과 일과 공부도 기도하며 해야 합니다.
기도하며 번 돈과 그냥 번 돈은 흘러 들어가는 곳이 다릅니다.
그리고 그 결과도 다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항상 기도하며 내 생각과 행동과 모든 생활을 가장 복되고 올바르게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과 에베소장로들과의 눈물의 석별은 왠지 쓸쓸하고 애잔합니다.
결국 바울은 다시는 에베소성도들을 만나지 못하고 로마 감옥에 갇혀 간절한 그리움을 담아 에베소서를 보낸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간곡한 경계에 에베소교회는 진리를 지키려고 애를 썼던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에베소교회가 인내하고 수고하여 이단을 몰아낸 것을 예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거듭 기억하는 것이 우리를 악에게서 지켜 줍니다.
오늘 바울이 본을 받으라고 말씀한 것들을 잘 기억해야 할 줄 믿습니다.
바울의 눈물의 호소는 영적 나태에 빠져 악한 자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성도들을 향한 우리 주님의 마음임을 깨닫고 믿음을 잘 단속하는 연말을 보내시길 원합니다.
2016년12월18일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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