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베드로의 투옥과 로데의 믿음 (사도행전12장1절-17절)

남수연 2016. 6. 24. 13:00

전에 갤럽연구소가 이런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다음 한 주 동안 무엇을 하겠냐

이 질문에 대한 미국인들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습니다.

운동하러 가겠다, 드라이브 가겠다, 일하러 가겠다는 응답자보다 기도하러 가겠다는 이들이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미국인들의 하루 평균 기도시간이 1분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원하면서도 정작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 입버릇처럼 기도해야지 하면서 결국은 못하는 우리와 주님 안에서 이들이 한 형제인게 분명하네요.

한국인의 종교의식 통계를 보면 2,3년 전과 비교해 신앙이 성장하지 않았다고 응답한 기독교인이 열명 중 여섯명이나 됩니다.

게다가 열 명 중 1명은 오히려 신앙이 더 나빠졌다고 답했습니다.

교인들의 신앙생활 현황을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열 명 중 네 명은 예배시간 외에는 전혀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열 명 중 세 명은 평소에 전혀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답했습니다.

이런 말에 큰일이네라고 생각해야지 위로를 받으시면 안됩니다.

이런 통계들을 보니 한국교회의 성도들 신앙이 퇴보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결국 신앙과 현실이 따로 논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실제적으로 나의 문제나 일상에서 전혀 상관없이 사는 것은 기독교신앙이 아닙니다.

기도는 매일 하나님과 교통하며 주님을 누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쓰죠.

돈을 들이든지,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든지, 내 능력을 총 동원하죠.

그러나 가장 먼저 할 일은 기도입니다.

저도 무슨 일이 생기면 일단 기도부터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해야 될지 시기적절하게 풀어 나갈 수 있거든요.

기도는 분명히 실제적인 해결방법이고 그 어떤 방법보다 더 확신할만합니다.

사람은 도와줄 듯 하다가 정작 도움이 필요한 순간 외면합니다.

사람은 선심을 쓰는 것 같지만 그렇게 남을 도와줄 만한 선의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진심으로 응답하시고 도와주실 능력도 있으십니다.

또 하나님을 의지해서 살아가야만 우리가 죄와 악의 세력으로부터 숨통이 졸리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래 기도하지 않고 살다보면 왠지 점점 숨통이 조여옵니다.

환경이든, 건강이든, 사람이든, 돈이든, 이런 문제들로 왠지 목이 졸립니다.

그래서 올해 표어가 성령으로 기도하라입니다.

올해는 무엇보다 기도의 장애물을 돌파하고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다시 복된 기도의 자리로 인도해 주시길 소망합니다.

 

누가는 다른 성경 기록자들보다 기도의 실제적인 능력에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은 사례들을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기도교과서를 주신 것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했는데 누가복음에는 기도라는 말이 22번 나오고 이 사도행전에는 25번이 나옵니다.

단 두 권의 성경에 47번 기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죠.

이것은 바울사도가 기록한 14권의 서신서 전체에 기도라는 말이 14번이 나오는 것과 큰 비교가 되죠.

누가가 기도의 중요성을 얼마나 강조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도 십여 차례나 기록했습니다.

누가의 기도에 대한 관찰력은 오늘 본문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오늘 말씀은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불어 닥친 큰 박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와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교회에 이런 큰 부흥이 일어나면 큰 박해도 일어납니다.

이것은 불변하는 시나리오입니다.

교회나 개인이나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때 사탄의 치열한 공격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한 것이죠.

하나님의 나라는 한가롭게 세워진 적이 없습니다.

사도행전은 교회와 성도가 세워지는 가운데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탄의 세력과 이것을 이기고 승리하는 하나님나라를 그리고 있습니다.

악의 도전에 성도들은 즉각적인 기도로 응전합니다.

평소에도 기도하지만 특히 어려움이 생기고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즉시 기도로 대항해야 합니다.

누가는 복음이 세상에 퍼지는 역사를 되짚어 기록하며 교회가 승리한 비결이 기도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7장에 보면 한창 부흥하던 교회에 사탄이 큰 타격을 가하죠.

유대인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스데반을 돌로 쳐 죽입니다.

교회사 최초의 순교자가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보면 열두제자 중 요한사도의 형제인 야고보가 헤롯왕에게 사형을 당합니다.

이어서 교회의 지도자인 베드로를 잡아 감옥에 넣고 명절이 지나면 처형하려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읽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다 아는 내용이죠.

한밤중 감옥에 천사가 방문합니다.

간수들 틈에서 자고 있던 베드로를 깨우고 쇠사슬이 풀리고 감옥문이 저절로 열리며 신비스러운 구출작전이 진행됩니다.

그런데 이 기적의 출옥사건의 앞과 뒤에 어떤 일이 있었다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5절에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12절에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베드로의 출옥이 바로 교회의 기도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죠.

베드로의 출옥은 기도응답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도의 중요성과 능력에 대해 여러 가지로 우리를 독려하고 실제적인 사례들을 들어 기도를 권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 명 중 세 명의 성도들이 전혀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도의 필요성을 전혀 못 느껴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도라면 말로라도 기도해야죠라고 말하고 기도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것은 삶이 바쁘고, 믿음이 부족하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또 다른 내면적인 이유는 기도의 결과에 대한 만족도가 낮기 때문입니다.

웹 사이트를 통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678명의 응답자 가운데서 기도하면서 만족감을 느낀다는 경우는 고작 23명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기도해도 당장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거죠.

오늘 기도하고 내일 당장 응답된다면 기도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기도는 응답되는 과정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과정의 만족감이나 기도한 뒤에 응답에 대한 만족도가 이렇게 낮기 때문에 점점 기도를 소홀히 하게 되는 것이죠.

왜 그렇겠습니까?

앞의 통계에서 보았듯이 거의 기도를 하지 않고 살다가 드문드문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꾸준히 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에 만족을 못 느끼고 그래서 더 기도하지 않는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증거들을 삶에서 체험하고 기도의 놀라운 이익을 절감하기까지는 꾸준한 기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는 누구나 초보자 같은 기분이 듭니다.

신기하게 기도를 매일 하는 사람도 기도의 자리에 앉기까지 힘이 들고, 처음 시작이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그 과정을 잘 이기고 떠도는 생각들을 몰아내고 기도에 몰두하면 성령 안에서 깊이 하나님과 교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거듭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훈련이 된 사람들만 또 꾸준히 기도하고 그 복을 풍요롭게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항상 어려움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죄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 본성에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스타일로 나를 바꾸려는 생각이 사실 별로 없습니다.

스데반집사 같이 되기보다는 지금의 나로 사는 게 더 좋다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나를 성찰하고 나를 하나님께 맞춰가는 것보다 차라리 교회에서 일을 하는 게 우리 본성적 취향에 더 잘 맞습니다.

신앙의 영역을 봉사로만 다 때우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제자는 기도로 세워집니다.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성도들이 세워지는 기록입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기도입니다.

오늘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는 이 집이 그 유명한 마가의 다락방입니다.

여기서 오순절에 120명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이 임하시고 교회가 세워지는 사도행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도전이 있을 때마다 교회는 기도로 이겨냅니다.

교회에서 구제의 불공평으로 인한 원망과 분란을 일으켰을 때도 사도들의 해결책은 역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분란이 일고, 환경에 어려움이 다가오고, 불안의 기운이 느껴지면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모든 문제들에 변함없이 기도로 승리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꾸준히 기도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무기를 주신 적이 없어요.

예수님도 심지어 귀신을 쫒으시며 말씀하셨잖아요,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것들이 쫒겨 나갈 수가 없느니라.’

 

그러나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에게도 어려움은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진실되게 기도했지만 응답되지 않는 기도에 우리는 실망합니다.

야고보사도가 순교할 때 교회가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때도 지금과 같이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할 야고보가 어이없이 초반전에 죽은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악인에게 무참하게 죽는 것에 사람들은 경악합니다.

자기들도 다 죄를 짓고 살면서도 이런 부당한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고 분노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절실하다는 것을 그 순간 직관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전쟁이 일어나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왜 세상에 고통이 있고 하나님이 있다면 왜 악인을 심판하지 않냐고 저절로 부르짖는 것입니다.

분명 야고보의 생환이라는 선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악이 이기는 것을 목격한 성도들은 큰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믿고 열심히 기도했다 응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 정도 기도의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반드시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의 기도한 그대로 들어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런 기도응답의 만능열쇠로 생각하는 성경말씀들의 전후 문맥에는 항상 조건이 있다는 것을 빼먹으면 안됩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뜻에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응답은 하나님의 뜻대로 옵니다.

야고보가 살아 돌아오기를 교회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가 죽어서 그가 전하는 복음이 사기가 아니라 진실이란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진실이라는 것을 믿으라고 의로운 야고보가 죽은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붙잡혔고 교회는 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분명 이들에겐 야고보에 대한 기도가 원대로 되지 않은 것에 대한 상처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베드로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베드로가 문밖에 와 있다는 로데의 말을 듣고 네가 미쳤구나이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도 마찬가지였죠.

기도했는데도 야고보가 죽고, 자기도 투옥되고 나니 자기도 순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려나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천사가 와서 구해 준 다음 어안이 벙벙한 베드로가 11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나를 사망의 위기에서 구해주신 것을 알겠노라.’ 그걸 나중에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몰랐고 어떻게 응답될지 몰랐습니다.

우리만 그런게 아닙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응답될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닷물결 같으니 무엇이든 받을 줄을 생각지도 말라고 하죠.

이 말씀은 기도 중에 생기는 불확실한 믿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 자체를 못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들으시나 더 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

이럴 바엔 그냥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도록 맡기고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문제 앞에서 끈질기게 기도하는 이유는 그 문제에 질식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수장인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성도들이 잠을 안자고 기도했기 때문에 겁에 질려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구출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상황을 알렸기에 내일 죽을 처지에도 천연덕스럽게 잠이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하고 있다면 어떤 문제든지 우리를 넘어 뜨리지 못합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기에 생활의 염려와 방탕과 쾌락에 빠져 뜻밖의 문제와 고난이 덫과 같이 닥쳐오는 것입니다.

어떤 크고 두려운 일도 기도하고 있다면 정신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 일하십니다.

마가의 집에 모여 기도하는 교회는 감옥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기도만 했지만 때가 되니 베드로가 문 밖에서 두드리잖아요?

본장 24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이 있은 뒤 결과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기쁨이 찾아오고 은총은 더 풍성해졌습니다.

기도 안하고 다 도망갔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는 데 아무 일도 안 하고 계시다는 생각은 버리시기 바랍니다.

안심하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교회와 성도들의 삶을 뒤흔들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기도하게 하라, 내 자녀들이 내게 나와 기도하게 하라.’

내가 나의 하나님 됨을 알게 하리라.’

 

오늘 본문에서 돋보이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도 아니고, 마리아의 집에서 밤새 기도하는 성도들도 아니고 그 집에서 일을 돕고 있는 로데라는 여자아이입니다.

모두가 기도했지만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로데는 긴박하게 문을 두드리며 나지막히 부르는 베드로의 음성을 듣고 즉시 베드로인 줄 알았지만 어른들은 네가 미쳤다고 반응합니다.

어른들의 핀잔에도 로데는 아주 확신에 차서 당차게 베드로사도가 왔다고 주장합니다.

여기 당돌한 계집아이 로데는 하나님의 기도응답을 왜 안 믿냐고 어른들을 나무라는 듯합니다.

이런 로데는 커서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만일 로데가 이후로 별 볼일 없이 사라졌다면 로데의 이름이 특별히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시대에 여자, 그것도 심부름하는 여자 아이의 이름을 공문서에 기록한 것은 희귀한 일입니다.

이것은 당 시대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어린 로데의 이야기를 읽을 때, ‘, 그 로데 집사님,’ 하고 누구나 알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로데는 간절한 기도로 죽을 뻔 했던 베드로가 살아온 그 날, 다급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와 베드로의 목소리가 들리던 순간의 그 기쁨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기도해 본 사람만 아는 기도응답의 기쁨이죠.

그래서 로데는 항상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인 집 일을 봐주던 보잘 것 없는 계집아이 신분에서 온 교회에 알려진 귀한 일군이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 전 기사를 보니 부모들은 자녀들의 신분상승을 기대하지만 안쓰럽게도 우리 아이들은 지금보다 더 나은 신분이 될 것을 포기했다고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로데가 어른들 틈에서 기도를 배웠듯이 기도하는 부모와 기도하는 성도들 밑에서 기도를 배워야 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이 험한 세상을 당당하고 능력 있게 사는 하나님나라의 귀한 일군이 되도록 기도의 날개를 달아주도록 함께 힘쓰길 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진지하게 우리에게 기도를 명령하셨을 리가 없잖습니까?

믿음이 생기면 기도해야지 하면 영원히 기도하지 못합니다.

기도해야 믿음이 생기잖아요.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면 거룩해지지 않고, 기도를 안 하면 삶에 능력과 생동감이 없습니다.

맥없이 앉아 계신 분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마음의 수양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의 통로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주저앉으면 짓밟힐 뿐입니다.

기도하고 우리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강하게 일어나서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이번 한 주도 기도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2016년6월19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