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이어서 고넬료 가정에 성령께서 임하신 사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구원받을 말씀’을 듣는 중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갑자기 일어났습니다.
성령께서 고넬료의 가족들 위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임하신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은 고넬료 가족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돌아가서 이 사실을 보고한 베드로의 말에 의하면 이 날 상황이 오순절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실 때와 동일하게 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와 동일하게 방언이 나타났으니 성령께서 임하신 것이고, 고넬료는 구원을 받은 것이 분명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 고넬료를 그리스도의 교회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공식적인 절차로 물세례까지 주었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오순절교회에서는 구원받은 증표가 바로 방언이라고 강조하고 성도들에게 방언받기를 권장합니다.
방언 기도하는 것을 들어보았거나 해 보신 분 손 좀 들어보시겠습니까?
이만큼 한국교회 내에 방언기도가 성행하고 있다는 것이죠.
최근 노우0 목사란 분이 한국교회내의 방언은 100% 사탄의 역사다 라고 공개적으로 방언운동에 도전장을 던졌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지금 무수히 날라오는 돌맹이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 처음 신앙생활 하던 때만 해도 방언기도는 장로교에서는 금기시되었고, 오순절 교회나 기도원에서 방언을 받고 온 사람들은 좀 숨기며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방언옹호자들의 세력이 커져 방언에 대해 이의를 달았다간 정말 큰 일 당합니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방언 운동에 대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분들이 방언기도에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도님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는 방언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을 한번 나누려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방언과, 저의 체험 부분과, 신학자들의 견해를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에는 방언이 나옵니다.
몇 군데서나 나올 것 같나요?
사도행전에서 세군데, 그리고 바울서신인 고린도전서에 한번 나옵니다.
그 이외 요한이나 베드로나 야고보 같은 사도들의 서신서에는 방언에 대한 언급이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일단 방언이 성경 상에 많이 나오지 않고 현재 한국교회에 성행하는 것처럼 그렇게 성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처음 나타난 방언은 오순절날 120명 제자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명령대로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바람 같은 소리가 집안에 가득하고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제자들의 머리 위에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말하게 된 다른 언어는 당시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 교포들이 살고 있는 15개국 나라 말이었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가 바로 오늘 본문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하시며 그들이 방언을 하며 하나님을 높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에베소교회에 모인 성도들에게 바울이 안수할 때 방언을 하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당시에 소통되던 각 나라의 언어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고 있는 내용이 하나님을 찬양하거나, 예언이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알아들었다는 뜻이기 때문이죠.
네 번째는 문제의 소지가 되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방언인데 이것은 외국어인지, 사회적 언어가 아닌 신비한 영적 언어인지 견해가 두 가지로 갈립니다.
또 이 고린도교회에 어떻게 해서 방언이 임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진술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행되는 방언은 대체적으로 고린도교회에서 말해졌다는 신비한 영적언어의 부활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방언을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를 살펴보면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방언의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성령께서 당시 외국어로 기도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께서 오셨다는 것을 알리는 가시적인 징표였습니다.
누구든 부인할 수 없이 확실한 성령하나님의 강림을 알리는 것이죠.
그런데 많은 이적 중에 특별히 그 증표로 방언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언어란 곧 사람의 인격을 말하고, 인격끼리의 소통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을 받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죄인들이 다시 교통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는 것이 바로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죠.
또 특별히 유대인 제자들이 15개국의 말을 했고, 각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그들의 말로 하는 복음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것은 세상 만민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고넬료에게 방언이 임함으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방언과 함께 성령이 임하신 것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전파를 허락하셨다는 뜻이니 이제부터 적극적으로 세계선교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죠.
일단 공식적으로 성령의 은사로 확인된 이 세 번의 방언은 초대교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이런 목적을 드러내고나서 종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고린도전서에 나타나는 방언은 견해가 나뉩니다.
초대교회 이후 종식되었다고 보는 측과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측입니다.
오순절교회와 은사주의 측에서는 방언의 정당성을 특히 이 이 고린도교회의 영적 방언과 같은 것으로 주장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 방언이 무엇이었든간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초대교회 이후 그것 또한 사라져 1800년간 교회사에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잠깐씩 나타났던 경우가 있었다 해도 방언을 통해 직통계시를 받고 자신을 성령이나 그리스도라고 주장해 명백하게 이단으로 정죄되었던 집단입니다.
현대에 와서 갑자기 성행한 방언현상이 초대교회의 성령의 은사가 부활한 것이라는 것을 보증할만한 증거들은 없습니다.
게다가 현대에도 이 방언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집회나 주동자들을 보면 거의가 다 교회사에서 이단으로 판명된 단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발생한 방언이 어떻게 이렇게 전세계의 정통교회까지 휩쓸었는지는 정말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대강 눈치를 채셨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현대의 방언이 성경적인 방언이라는 것에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처음 예수님을 믿고 몇 달 만에 방언을 받았고 25년간 방언기도를 해오던 사람입니다.
집회에서 랄랄라, 뚜뚜뚜 하는 방언기도를 들으면 속으로 제가 좀 비웃었습니다.
제가 하는 방언기도는 혹시 어느 나라에서 쓰는 외국어가 아닐까 스스로가 생각할 정도로 매끈하고 유창한 방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한 나라 말이 아니고 여러나라의 말을 구사하는 것처럼 다양하게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방언과 함께 여러가지 신비적인 은사들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느 순간부터 기도하며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과연 뜻도 모르고 하는 이 방언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물론 기도를 오래하다 보니 나름 통역이라고 하는 것 비슷하게, 방언을 하고 한국말로 통역도 하고 그렇게 기도가 되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한국말로 하면 될 걸 뭐하러 방언으로 하고 또 통역을 해야되는 겁니까?
통역이란 것도 사실 외국어 통역처럼 되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한국말이 나오면 나오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나오면 저렇게 하는 데, 제 스스로의 양심에 이것이 백프로 맞다는 생각이 안드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언 통역을 한다는 사람을 세 명 불러 한 사람이 방언기도하는 것을 듣고 통역을 해보라고 하니 세 사람의 통역이 제각각 다르더라는 보고도 있습니다.
방언기도를 하던 사람 중 많은 사람들이 처음엔 감정적 흥분으로 방언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기도해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니 나중엔 점점 방언이 소멸되었다고 하는 경우도 많이 보았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며 교회에서 바른 말씀을 전해야 된다는 생각으로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다보니 점점 방언에 대해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연세계의 정해 놓은 법칙을 혼란케 하는 초자연적인 간섭을 자제하시지 않냐는 것입니다.
방언은 분명히 자연적인 체계를 뒤엎는 신비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그렇게 초자연적인 기적을 이렇게 만연하게 남발하시겠냐는 것입니다.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방언기도가 큰 힘을 주고 확신을 준다고 합니다.
방언을 함으로써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그것이 믿음인지, 단순한 시인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강화되고 굳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그런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말씀과 삶의 체험들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을 알아가면서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학교에서 해마다 영성수련회가 있는 데, 기도시간이 되면 시작하자마자 학생들이 다짜고짜로 방언으로 떠들썩하게 기도합니다.
왜 자기 생각을 간절하게 자기 말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지 않고 무조건 머리를 하얗게 비우고 입에다 모든 것을 맡길까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방언옹호자들이 고린도전서의 영의 기도를 강조한다면, 말씀에 기록된 대로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공적인 자리에서는 하지 말라는 말도 지켜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또 정말 방언기도가 하늘의 언어이고 깊은 비밀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이면 방언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야 말로 진실된 경건을 이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언기도를 가장 많이 했던 고린도교회는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은사로 인한 교만과 성도간의 갈등, 심지어 살인한 사람, 아버지의 아내와 놀아난 사람도 있다고 바울이 지적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방언으로 하루 두세시간씩 기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엄청난 우월의식을 갖고 있지만 실제 신앙인격의 성숙면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 말로 자기 생각을 말씀드리고, 죄를 고백하고,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로 삶을 정상적으로 조화롭게 꾸려가는 모습이 더 아름답고 진실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방언기도를 하는 사람들 중 많은 분들은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헌신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방언으로 기도하지 않고 자기의 전인격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한다면 더 큰 영적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방언기도야 말로 인격적인 하나님 앞에 나의 전인격을 다해 나가 교제하는 것을 단절시키는 가장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체험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나누겠습니다.
다음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신학자들의 견해로서 존 맥아더목사님이 정리했던 내용을 중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성경적인 방언은 초대교회 때 그 목적을 분명히 완수한 뒤 종료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현재 행해지는 방언기도는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현대에 만연한 방언현상에 대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1. 사탄과 귀신에 의한 현상이라고 봅니다.
모든 방언이 다 귀신의 개입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사탄이야 말로 모든 건전하고 올바른 신앙을 왜곡되고 혼란시키는 배후세력이라는 점에서 볼 때 당연히 귀신의 방언도 있다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것은 이방종교들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도 이방종교의 숭배의식에서 나타나는 방언 현상을 수록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동부에는 귀신에게 사로잡히는 순간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정상적으로 정신이 돌아오면 물론 영어를 한마디도 못합니다.
아프리카의 통가라는 부족은 노래를 하며 귀신을 내쫒는 데, 자기가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줄루족의 언어로 노래를 한다고 합니다.
또 회교도, 에스키모, 티벳의 승려들 사이에서도 방언 현상이 나타난다고 버지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초심리학 연구소에서 사례를 보고한바 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이교도와 이단들 사이에서 고대로부터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는 장구한 방언 전통입니다.
만일 일부 사람들의 방언이 이런 귀신들의 영향으로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누가 그것을 분별하겠습니까?
성도들이 출처도 불확실한 영과의 교제를 한다면 저는 양심적으로 말씀드려 그것을 분별해 드릴 능력이 없습니다.
2. 다음은 방언이 학습되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는 오늘날 대부분의 방언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오순절이나 은사주의 지도자들은 방언은사를 받는 법을 공공연하게 전수합니다.
먼저 여러 사람들이 모여 분위기를 고조시켜 감정적인 흥분을 일으킨 뒤 몇마디의 음절을 따라 하도록 시킵니다.
칼튼 대학에서 최근 한번도 방언으로 말해 본 적 없고 다른 사람이 방언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60명을 대상으로 시험한 결과가 있습니다.
연구자들이 방언을 담은 오디오 테이프와 비디오 테이프를 보여주며 방언 훈련을 시킨 뒤 30초동안 방언을 말해 볼 것을 요청했더니 모든 사람이 무난히 방언을 했고, 그중에서 70퍼센트는 매우 유창하게 방언을 말했다고 합니다.
방언은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 모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토론토 대학교 언어학 교수 윌리엄 새머린은 5년 동안 오순절교인들의 집회에 참석해 그들의 기도를 관찰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방언은 언어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언어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면 방언이 어떻게 다양한 언어처럼 구사되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방언에 입문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언어이길 원하기 때문에 자꾸 언어처럼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3. 또 하나의 가능성은 심리적으로 유도된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은 운동근육자동증이라는 상태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근육을 의식적 통제에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정신줄을 놓는 것입니다.
실제 방언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입을 벌리고 가르쳐 주는 말을 반복적으로 말하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방언체험의 상황은 최면을 걸 수 있는 상황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런 배경에서 요즘 집회에서 단체로 쓰러지거나 울고 웃고 뒹구는 현상들이 함께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죠.
방언을 연구한 킬달이라는 학자는 복종적이고, 타인의 영향을 잘 받고, 한 지도자에 의존적인 사람들이 방언을 말할 확률이 가장 높다고 합니다.
은사주의 교회의 청중들을 보면 강단에서 나오는 어떤 말이나 이상한 가르침에도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으로 화답하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님들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지만요.
그런 사람들은 암시의 능력에 쉽게 복종하고 무슨 암시를 받으면 그대로 행동에 옮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이렇게 방언이 만연하고 그토록 방언을 추구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영적인 굶주림 때문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영적으로 채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방언이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을 듣게 되면 신비한 영적체험을 놓치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 방언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죠.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초자연적인 세계와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제자의 삶을 살지 않아도, 방언으로 기도가 되면 왠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축복해주시는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죠.
방언기도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방언을 할 때, 영적인 감정을 고양시켜서 자신이 믿음 안에 있는 것을 확신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을 고쳐나가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자신을 희생하며 주님의 사랑을 전하지 않으면서도, 뭔가 영적으로 충만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헛된 안도감을 받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각적인 느낌과 감정이 올바른 그리스도인을 세운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이런 신학적인 연구들과 제 개인적인 성경 묵상과 체험들을 통해 저는 우리 교회에서 방언을 권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방언기도는 정말 쉽습니다.
서너시간 쯤 후딱 지나갑니다.
저는 이제 그런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돌아보며 내 연약함과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께 자백하고, 가족과 성도들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간절하게 우리 언어로 기도하는 것은 굉장한 집중력과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힘든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전 인격을 다해 분명한 의지와 선한 양심을 갖고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할 때, 문제 해결의 지혜를 받고, 더 돈독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의 신뢰가 쌓여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간절히, 때로는 부르짖으며 내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며 기도할 때 점점 더 깊은 은혜를 체험하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고넬료가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충만히 임하시는 것이 다른 언어를 말하는 것으로 눈에 띄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줄은 무엇으로 분별하겠습니까?
46절에 고넬료가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였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베드로가 전했던 바 ‘구원받을 말씀’을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신 증거인 줄 믿으시고 오직 예수님의 본을 따라 행하고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5년7월26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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