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고넬료의 믿음 (사도행전10장1절-16절)

남수연 2015. 7. 16. 18:15

 

성경에서 축복받은 가정 중 하나가 고넬료의 가정입니다.

로마제국의 군대 지휘관이었던 고넬료는 당시 부러울게 없는 적당한 권세와 부를 누렸을 것입니다.

적당한 부자, 적당한 지위, 그 정도를 사람들이 대개 원하죠.

게다가 이스라엘 땅에 파견 된 덕에 유대교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집안과 부하들까지 하나님 앞으로 인도했습니다.

한 사람이 믿음에 바로서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넬료에 대한 기록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믿음이나 인품이나 착한 행실에 빠지는게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의 경건한 믿음이 하나님께 인정되었다고 천사가 말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동원하시고, 베드로를 보내셔서 고넬료 가정에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의 복음을 듣고 다 구원받게 하십니다.

이정도면 이 땅에서 더할 나위 없는 인생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가정이 이런 좋은 믿음의 가정들이 되길 원하며 그러기 위해 오늘 말씀을 통해 귀중한 교훈을 얻고 따르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구원의 복음은 사방으로 막힘없이 뻗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구원의 역사를 담아내던 사도행전의 카메라 앵글이 꽤 오랫동안 고넬료에게 향해 있습니다.

성경 두 장에 걸쳐 아주 길고 상세하게 이 구원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겐 이방인 고넬료의 구원은 천지가 개벽한 사건입니다.

오늘 고넬료 사건의 핵심적인 주제는 복음이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에게 까지 전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대상이 된 것을 당연지사로 여기고 있지만 복음이 탄생 된 이스라엘에선 전혀 그렇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뼛속까지 선민의식으로 채워져 있었고 구원은 선택된 유대인만 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죠.

931절을 보면 현재까지의 상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온 유대과 사마리아까지 교회가 세워졌으면 다음은 당연히 땅 끝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땅끝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주님의 분명한 명령을 이해 못하고 이방인들에겐 아예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한 사실이 예루살렘교회에 전해지자 그들이 격하게 비난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이만저만해서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셨다고 말하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그런 일은 상상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하늘에서 커다란 보자기처럼 생긴 그릇에 온갖 짐승들이 담겨져 내려오는 묘한 환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걸 잡아 먹으라고 하십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동물들인지라 베드로가 못 먹겠다고 버티니까 세 번 똑같이 반복하고 다시 하늘로 올리워지죠.

이게 바로 유대인들이 부정하다고 상종하지 않던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고넬료의 환상과 자신의 환상을 통해 비로서 그 사실을 깨닫고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고넬료의 구원을 시작으로 복음이 이방인인 우리에게 까지 전해진 것이죠.

그런데 저는 오늘 그 쪽보다는 구원받은 고넬료 개인의 믿음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 관심은 오직 성도들의 구원입니다.

구원만 받으면 다른 건 정말 문제될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정말 구원을 받았다면 개인이건, 가정이건, 사회건 하나님에 의해 선하고 좋은 삶으로 이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늘 염려하고 고심하는 것은 어떻게 성도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알게 되나 그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펴볼 고넬료의 경건한 믿음은 2절이 말해줍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다

우리도 솔직히 지금 이정도로 믿지는 못하잖습니까?

그런데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러 간 베드로가 이 모든 각본이 하나님께로 부터 나왔다는 것을 알고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합니다.

35절에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구원하시는 게 하나님의 뜻인 줄 깨달았도다

이 말씀은 구원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졌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 이런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요?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의를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 구원받지 못한다.’

저는 이 말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습니다.

아무리 허물이 많고 죄가 많아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 데, 이 말씀은 그 뿐 아니라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로운 행동도 인정을 받아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고넬료가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했고, 백성들을 많이 구제했어도 그걸로 구원을 받을 수는 없기에 오늘 복음을 전해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삭개오 같은 사람의 구원은 고넬료와 순서가 바뀐 것입니다.

행실이 나빴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더니 부당하게 착복한 세금을 즉시 돌려주며 삶의 큰 변화가 일어났던 경우죠.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속죄와 의로운 삶의 변화가 반드시 함께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을 통한다는 것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을 최고로 부각시키려면 최악의 죄인이 극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케이스가 가장 먼저 나오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조차도 인정받을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구제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던 고넬료를 먼저 구원하셨다는 것이죠.

그리고 베드로의 말을 통해 중대한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신다.

순서가 어땠든 간에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에 합당한 행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을 믿되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가난한 이웃들에 자선을 베풀지 않고, 항상 기도하지도 않고, 여전히 세속적인 삶을 산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졌을까요, 아닐까요?

교회에 나오는 것 외에 모든 것이 일반인들과 똑같다면 과연 구원받았다고 안심해도 될까요?

혹여 의로운 행실이 구원의 조건으로 보여질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 의인 고넬료를 오늘 이방인 구원의 선두주자로 세우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사람들이 여전히 자기의 본성의 죄를 채우고 살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적처럼 쓰려고 하는 위선과 교활함을 일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진 고넬료의 경건한 믿음을 통해 모든 신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경계를 받도록 하신 줄 믿습니다.

 

고넬료의 믿음을 우리가 살펴볼 때 그의 믿음이 외적으로 드러난 몇 가지 특징을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의 특별난 감정을 표현한 말이 바로 경외감입니다.

경외하는 것은 두려운 마음을 간직한 채 공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경외심은 겉으로 비슷하게 흉내를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면 진짜인지 아닌지 자신은 압니다.

실체가 눈앞에 있어야만 생겨나는 것이 경외심입니다.

그 감정은 지어 낼 수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영으로 대면해 본 사람만이 하나님의 탁월하고 위대하고 영광스런 기이한 실체에 대해 무한한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경외심은 예배를 드리거나, 기도할 때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하나님을 의식하고 계속해서 우러나와 신자들의 독특한 거룩성을 이루게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일상에 삶에서 경거망동 하다면 분명히 그 사람은 하나님의 실존과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의 실체와 조금이라도 대면하는 순간, 느끼는 것은 압도적인 경외심이었습니다.

경외심은 아무런 제약 없이 내게 간섭할 권세와 능력이 있는 대상을 대할 때만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이 경외심은 자신의 주도권을 상대에게 맡기고 순복하는 원천적인 동기가 되기에 신자들이 하나님을 절대 주인으로 인정하고 섬기게 됩니다.

물론 신자들의 경외심은 공포에 따른 두려움이 아닙니다.

공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본능적으로 자기 죄의 자각과 심판을 느끼는 감정이지만 예수님의 속죄로 의롭게 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지극히 위대하고 거룩하심을 감지하고 즐거워하며 공경하는 그런 감정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감정은 즐겁고 감미롭기까지 합니다.

고넬료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뒤에 나옵니다.

베드로를 본 순간 고넬료는 발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넬료는 지배국의 지휘관이고, 주변에 자기의 부하와 종들도 있었습니다.

식민지의 이름 없는 전도자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체면상 어려운 일입니다.

단순히 극진하게 환영하는 인사를 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하나님을 대하듯 경외심으로 베드로를 맞은 이유를 그가 한 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베드로 앞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왔기 때문에 곧 하나님 앞에 있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경외심으로 서있습니까?

하나님에 관련 된 모든 일과 모든 일상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있는지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을 분별하는 체크리스트 1번입니다.

 

다음, 고넬료가 백성들을 많이 구제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백성들은 동족 로마시민이 아니라 식민지 이스라엘의 백성들입니다.

물질이 풍부하지 못하던 그 옛날에 그나마 생산한 것들의 대부분을 로마정부에 바쳐야 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가난했겠습니까?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가난이 뚝뚝 떨어집니다.

고통당하고 굶주린 사람들을 돌보고 도와주는 일은 믿음 여하를 떠나서 다 귀하고 칭찬받을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1511절에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종교인들은 의무적으로 자선을 했습니다.

, 자선을 자기의 경건을 자랑하는 카드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구제할 때 장터에서 나팔을 불지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제할 음식이나 물건들을 사람 많은 장터에 들고 나가 나팔을 불어서 필요한 사람이 오면 나눠 주던 바리새인들의 행위를 지적하신 것이죠.

구제의 동기가 불순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라입니다.

하나님은 구제하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시는 게 아니라 그 속마음을 감찰하십니다.

고넬료의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다는 것은 그 속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다는 것입니다.

고넬료가 사비를 털어가며 많이 구제한 것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억눌리고 헐벗은 사람들을 보는 하나님의 연민과 긍휼은 성경 전체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의인의 특징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는 것이라고 잠언은 말씀합니다.

예레미야22장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위대한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요시야왕의 아들이 하나님 신앙을 버린 것을 책망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네 아버지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요시야 왕이 형통했던 이유가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돌봤기 때문이고, 그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도움이 필요한 자가 보이고, 절박한 처지에 놓인 사람이 딱해 보이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마음이 냉담하다면 아직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죠.

죄로 온전치 못한 우리도 자식을 사랑할 줄 아는 데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마음이야 어떠시겠습니까?

제가 며칠 전 빨래를 너는 데, 우리 딸 옷이 하나같이 낡고 변변하지가 않은거예요.

그렇게 궁핍하게 키우는 것 같지 않은 데, 아무튼 값싼 옷들을 사 입어서 그런가 봅니다.

그럴 때 우리 부모 마음이 다 같지 않습니까?

잠시 빨래 앞에서 짠한 마음을 갖고 서 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을 위하는 이런 부모의 마음을 하나님이 만드셨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보시는 마음이 이러시겠구나.’

일에 시달리고 마음 상하며 고단하게 살아가는 나를 측은히 여기시며 세심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든든한 아버지이십니다.

그걸 알게 되면 하나님의 그 마음이 내게만 아니라 어려움을 당하는 궁핍한 형제에게도 같은 마음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그래서 측은지심이 있고 동정심과 긍휼한 마음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사도의 편지에 쓴 것처럼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여유롭지 않은데 성령께서는 필요한 곳에 도움을 베풀도록 때때로 우리의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그러나 이기심을 극복하고 실제로 행하는 것은 쉽지가 않죠.

우리가 사실 다 하나님과 남에게는 인색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형제를 긍휼히 여기고 구제하는 것은 신자의 복된 의무입니다.

미국 콜롬비아신학대 전 명예총장인 조지 머레이가 한 이야기를 우리가 잘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머레이총장에게 24살 때 부모에게 기업을 물려받은 친구가 있다고 합니다.

그 기업을 다섯명의 친구들과 공동으로 운영했는데, 그들이 평생 교사수준의 월급만 받고 나머지는 다 세계선교에 쓰기로 했다고 합니다.

얼마를 드려야 하냐가 아니라 얼마만큼만 남기고 드리냐를 결정한 것이죠.

그래서 경영 첫 해에 5천만원을 헌금했습니다.

세월이 지나 지금은 매달 10억씩을 헌금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외식할 때 가는 곳이 맥도널드 햄버거집일 만큼 지금도 검소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도 처음부터 백만원을 구제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지 못한다 해도, 오천원을 쓰고, 그 다음 만원을 쓰고, 그 다음 십만원을 쓰고, 백만원을 쓰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게 우리 형편이 나아지고 있다는 것입니까, 망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최고의 지혜자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자기가 괜히 수고했다고 후회합니다.

알고 보니 내 뒤에 남을 자를 위해 다 남겨줄 뿐이라는 거예요.

또 솔로몬이 가만히 인생들을 살펴보니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신 뒤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시는 대로 하나님나라를 위해 써버리는 데 하나님이 어떻게 다시 채워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자꾸 주실 수밖에 없잖아요?

저도 동네 돌아다니며 슈퍼 앞에 앉아계신 할머니께 하드도 사드리고, 아이들에겐 막대사탕도 건네주고 합니다.

아파트에 장서는 날이면 막 튀겨낸 따끈한 찹쌀 도너츠를 한 봉지 사다가 1층 식당 직원들에게 갖다 드립니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누구에게든 걸림이 되지 않고 좋은 인상을 줌으로 교회문턱을 넘어오시기 쉽게 하려는 것이죠.

할 수 있는 대로 우리가 가난한 이웃이든, 복음이 필요한 영적 빈민이든 구제해야 할 줄 믿습니다.

다만 남에게 베풀 때, 우리가 고자세이고 나팔을 불면 역효과가 납니다.

받는 사람들은 우리가 고자세인지 저자세인지 금방 압니다.

저는 저자세입니다.

목사가 되고 나니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저자세가 될 수 밖에 없더군요.

오늘 주님의 명령을 따라 적든 많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구제하고 섬기는 삶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믿음을 분별하는 체크리스트2번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고넬료가 항상 기도했다고 합니다.

3절에 천사가 나타난 제 구시는 모든 유대인들이 하루 세 번 정해놓은 기도시간을 말합니다.

고넬료도 바리새인들처럼 규칙적으로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 기도조차도 자기의 경건을 우월하게 보이려고 사람 많은 곳에 있다가 그 시간이 되면 남들 앞에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차라리 골방 가서 혼자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도한 자신에 대한 만족으로 끝납니다.

성령께서는 기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이 없도록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불어넣어주십니다.

그래서 자꾸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기도에 대해 야고보사도가 정리를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해야 하고, 응답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천사를 통해 고넬료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것은 그가 이렇게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넬료가 항상 기도했던 내용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신 이유가 고넬료의 기도를 응답하시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를 보내셔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을 보면, 고넬료가 항상 기도했던 것은 모든 땅 끝을 구원하실 메시야를 기대하며 구원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구원받기를 갈망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질 은혜의 체험을 간구하는 기도인 줄 믿습니다.

그런 기도라면 하나님은 오늘 고넬료의 기도처럼 반드시 응답하실 것입니다.

또 고넬료의 경건하고 거룩한 믿음은 분명히 그의 규칙적인 기도에서 왔을 것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우리는 죄의 타락한 본성을 파악하게 되고 죄를 다루는 힘을 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습관을 통해 영적인 것을 따분해 하고 실증 내는 것을 점차 바꿔가게 됩니다.

규칙적인 기도는 하나님을 체험하고 은혜를 맛볼 수 있는 통로입니다.

어쩌다 한 번 기도하는 것으로는 문제에 대한 해결도 안될 뿐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맛보는 은혜를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윌리엄 거널은 단 한번의 펌프질에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도록 가득차 있는 우물은 없다고 말합니다.

마중물을 붓고 여러 번 펌프질을 해야 물이 제대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죠.

우리 영혼의 깊은 좌소에 흘려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지속적인 기도생활을 통해서 끌어 올려져 마침내 체험이 되는 것입니다.

운동은 하나도 하지 않으며 단단한 근육을 바라는 약골이나, 힘들여 일하지도 않으며 부자가 되길 원하는 가난한 사람이나, 깊고 견고한 신앙을 위해 아무 영적 훈련을 하지 않는 사람이나 똑 같은 것입니다.

훈련은 성도를 성장시키고 은혜의 체험은 성도를 무게 있게 합니다.

항상 모든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나가고 하나님 앞을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구원받은 신자들의 체크리스트3번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고넬료의 믿음을 세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 구제하는 믿음, 항상 기도하는 믿음.

이 세 가지가 우리에게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런 경건한 자를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구원하신다고 오늘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일상은 변하지 않고 있다면 구원을 받았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경건한 믿음이 아직 나타나지 않음으로 인해 아직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 게 아닐까 안타까워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우리를 죄와 세속에서 돌이키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선한 근심이 될 줄 믿습니다.

오늘 고넬료의 이 세가지 경건한 삶이 또 우리에게 매일 더 증진되어 고넬료의 가정처럼 복된 가정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015년7월12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