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의 거침없는 복음전도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요즘같이 한명을 교회로 인도하기 힘든 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이 모이고 교회가 생기는 광경은 정말 경이롭고 가슴이 뛰게 합니다.
오늘 베뢰아교회가 세워지는 모습을 통해 우리 각자가 더 강인한 주님의 교회로 세워지고 우리 교회 전체가 주님을 위해 더욱 헌신하고 봉사하는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17장에는 바울의 2차 선교사역 중에 거쳤던 세 도시가 나옵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그리고 아덴입니다.
먼저 이 세 도시에서의 전도활동에 대해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베뢰아 전도 부분을 집중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1차 전도여행 중에 세워진 교회를 방문해 격려한 뒤 아시아 쪽을 2차 전도여행의 코스로 잡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아시아 전도의 문을 열어주지 않으시고 바울의 꿈에 마게도냐인이 나타나 도와달라는 환상을 통해 유럽 쪽으로 발길을 돌리게 하십니다.
그렇게 유럽 선교가 시작되었고 유럽의 첫 도시인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는 매 맞고 감옥에 갇히는 큰 박해를 받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셔서 유럽에 첫 교회인 빌립보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다음에 본문으로 이어져 빌립보를 떠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도착해 먼저 회당을 찾아 갑니다.
바울의 선교전략은 선교지에 가면 제일 먼저 유대인 이민자들이 모이는 회당을 찾아가 복음을 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정기적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양해를 얻고 복음을 증거하기가 쉬웠기 때문이죠.
또 유대인들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구약성경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성경에 예언 된 구원자, 즉 메시야로 소개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하나님이 계시고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이 죄를 짓고, 이런 기본적인 사실들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소개하기에는 빠듯한 선교여행 전략상 효과적이지 않은 것이죠.
먼저 복음을 받아들인 유대교인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고 지역을 전도하게 하는 것이 바울사도의 대체적인 선교전략이었던 것이죠.
베뢰아에서도 먼저 회당을 찾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배경을 좀 넓게 말씀드리는 것은 성경을 볼 때 역사적인 흐름을 어느정도 알고 본문을 읽어야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적용할 수 있습니다.
먼저 데살로니가에서 회당에 들어간 바울은 삼 주 동안 안식일마다 복음을 증거합니다.
2절과 3절을 보면 바울이 자기의 관례대로 그들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라고 되어있죠?
당시 모든 회당에는 구약성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이사야서 두루마리를 펴서 내용을 설교하신 것이 복음서에 나오죠.
바울사도 역시 비치되어 있는 구약성경을 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이 거기서 무슨 설교를 했는지 3절에 나옵니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을 했는 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증언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구약성경의 예언 중에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 사실을 증언했다는 말은 사람들이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이사야의 글을 읽었지만 희한하게도 거기 적힌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까막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열두제자들에게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야 된다고 말씀했을 때 아무도 그 말씀을 현실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부활해야 할 것을 구약성경을 갖고 증명한 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설득했던 것이죠.
그 결과 유대교로 개종해 회당에 나온 많은 헬라사람들이 믿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불량배들을 끌어들여 떼를 지어 성을 소란하게 하며 바울을 잡아 법정에 넘기려고 소동을 벌인 일이 5절부터 9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잡지 못하자 바울일행에게 숙소를 제공했던 야손이라는 사람을 잡아다 법정에 넘겼고, 야손은 보석금을 내고야 풀려납니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그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다고 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믿은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도와 야반도주 시킨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분명히 성령이 보내시는 대로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거기로 갔지만 일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는 게 아닙니다.아니, 되려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는 다 안일하게 현재의 생활을 고수하고 싶어하기에 하나님의 일이 이뤄지려면 둥지가 흔들리고 불편한 상황이 벌어져야 만 하는 것이죠.
내 둥지에 자꾸 가시가 찔리고 나를 불편하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움직거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핍박들을 통해 하나님은 바울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하시는 게 보여지지 않습니까?
사탄이 예루살렘교회를 박해하고 세찬 복음의 불길을 꺼버리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복음의 불씨를 사방에 흩어 놓는 엉뚱한 짓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죠.
우리는 삶이 매끈하고 이상적으로 점잖게 펼쳐지길 원하지만 죄가 개입되는 이 세상에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바울의 복음전파에서도 스타일 구길 일들이 번번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때로 황급히 바구니를 타고 줄에 매달려 도망치거나 오늘처럼 야반도주를 하고 그런 것이죠.
아무리 우리가 거룩하고 경건하게 믿음을 보이고 싶어도 때로는 이렇게 스타일 구기며 믿을 수밖에 없는 게 이 땅에서의 삶입니다.
이날 이 후 바울은 다시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방문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급히 떠난 데살로니가 교회에 써 보낸 편지가 데살로니가전후서입니다.
이어서 도착한 베뢰아 전도에 있어서는 특이한 점이 눈에 띄죠.
11절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합니다.
베뢰아에서는 말씀을 전했는데, 신기하게 이전 같은 박해가 없고 순순히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매번 똑같지 않다니까요.
베뢰아의 유대교회당에서도 바울은 강력한 반박을 예감했겠지만 뜻밖에 그들은 바울의 전도를 간절하게 듣고 날마다 바울의 말이 맞는지 모여서 성경을 연구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행사가 늘 막히는 것만 아니고 예기치 않게 길이 순순히 열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순순히 복음을 받아들인 베뢰아 사람들은 뭐가 달랐을까요?
11절에 베뢰아 사람들은 ‘너그러웠다’고 합니다.
옛날 번역에는 ‘신사적’이라고 했고, 헬라어 원 단어의 뜻은 ‘고결한, 고상한’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베뢰아 사람들은 왜 누가가 보기에도 이상했을 정도로 특별히 고상하고 너그러웠을까요?
잘 살아서 여유가 있었던 것일까요?
잘 살기로 따지면 대도시인 데살로니가가 더 부유했습니다.
지역특색이었을까요?
물론 지역마다 사람들의 독특한 특성이 좀 있습니다.
경상도 사람과 충청도 사람의 전체적인 특징이 좀 다르죠.
베뢰아 사람들이 고결하고 너그럽다는 것은 단지 이런 환경에 의한 점잖은 인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뢰아사람들의 고상한 인품은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증거는 이들이 바울사도의 전도를 듣고 그 말이 정말인가 해서 날마다 성경을 깊이 연구했다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익숙하다는 것이죠.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성경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갑자기 깊이 판다고 그 뜻이 알아지지도 않습니다.
이걸 봐서 베뢰아 사람들은 평소 성경을 연구했을 뿐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생활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말씀을 소중하게 지키면 무슨 유익이 있는지 오늘 베뢰아 사람들의 경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계시가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해주셨고, 성경 밖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모르고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제각기 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인간의 타고난 지각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자신을 계시해주신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성령께서 우리 영에 하나님을 설명하고 깨닫게 하시는 만큼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경외심을 갖고 읽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게 된 사람은 더욱 말씀에 주의하고 말씀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20절은 말씀합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말씀에 주의하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반드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베뢰아교인들처럼 말씀에 더욱 주의함으로 하나님을 아는 풍성한 지식 속에서 더 깊이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둘째는, 성경을 통해 구원받을 길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바울사도의 말씀에 관심을 갖고 간절한 마음으로 받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베뢰아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을 묵상하면 모든 역사와 사건들이 결국은 다 한 가지 주제를 가르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씻을 수 없는 죄와 그 죄를 속죄하고 구원할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스가랴선지자는 13장1절에서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거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고 예언합니다.
이사야선지자는 49장6절에서 그 구원의 샘이 이방민족에게도 임할 것을 예언합니다.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그리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39절에서 확실하게 못박으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성경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를 믿고 기다리지 않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정치권에 빌붙어서 재산을 증식하고 권력을 누리던 종교인들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메시야가 필요치 않았고 메시야가 올 것을 원치도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안 믿었지만 신성모독이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메시야가 될 가능성이 있기에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사이비가 아니라 오히려 진짜 같아서 죽인 것입니다.
베뢰앙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전한 대로 증언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구약이 예언했던 그리스도라는 것이죠.
그들이 메시야에 대한 설교를 어떻게 건성으로 듣겠습니까?
간절하다는 단어가 실감이 나십니까?
합격 여부를 클릭하려는 순간에 마우스를 잡은 손이 떨리며 모든 것이 다 화면에 집중되는 그런 것이 간절함 아니겠습니까?
내가 구원받는 일인 데 그 간절함이 그것만 못하겠습니까?
지금 말씀과 구원에 대해 그런 간절함과 경외감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비로서 간절하게 그리스도가 필요하겠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입니다.
베뢰아사람들이 약속했던 그 메시야가 이미 오셨다는 것을 알았을 때 충격과 놀람으로 회당 천장이 들썩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즉시 들뜬 마음으로,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성경을 펼쳐놓고 바울사도의 말이 진짜인지 스스로 검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맞더라는 것이죠.
성경을 읽고 지킬 때 반드시 구원의 길을 발견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셋째로 여기서 베뢰아사람들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은 신앙은 습관화가 될 만큼 훈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습관에 의해 몸이 움직여집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주일예배에 나오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여러 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주일에 예배드리러 나오는 일이 당연하게 저절로 됩니다.
말씀을 매일 읽고 기도하는 게 어려운 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훈련이 안된 것이고 영적 게으름의 문제입니다.
작년 잡코리아에서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가장 고쳐야 할 자신의 문제로 ‘게으름’이 1위로 뽑혔다고 합니다.
중세 수도사들이 제거해야 할 7가지 악 중에 게으름이 들어가 있다는 것은 인간 본성 자체가 다 게으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은 타고 나는 게 아니라 어려서 부터 배우고 훈련한 습관 때문인 것입니다.
좋은 것은 훈련해야 얻어집니다.
인간에게 가장 행복하고 갈등이 없는 순간은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는 순간입니다.
경건훈련은 이런 상태가 얼마나 우리를 완전하게 하고 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지를 점점 알아가게 합니다.
경건이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세상 재미야 말로 진부하고 1시간이 못가서 실증이 나는 것들입니다.
‘와! 야!’ 이런 것들이 얼마나 오래 우리에게 감동을 지속시키고 행복감을 줍니까?
극히 짧은 순간입니다.
그것들이 우리를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쾌락과 부귀와 학문과 인생을 최고로 누려본 사람 솔로몬이 이미 다 해보고 말합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지금 인생들이 부지런히 쫒아 가는 그 곳에 가 봤자 아무 것도 거기에 없다는 것입니다.
CS루이스의 말대로 사람이 그런 것들로 만족하게 채워지지 않는 것이라면 채울 수 있는 것은 뭔가 다른 데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고 했던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완전한 행복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놓쳐버렸던 그 행복을 예수님 안에서 다시 되찾아 오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영적인 훈련을 통해서 다시 입맛을 돌려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보다 더 풍성한 생명을 향유할 수 있는 삶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 안에서 느낄 수 있는 질리지 않는 은혜의 맛을 조금씩 찾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넷째로, 베뢰아 사람들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습관과 말씀을 경외하는 태도는 그들을 고상하고 너그럽게 만들고 결국 구원으로 인도했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중에 사람들이 고상하게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이 배웠든, 무슨 일을 하든과 상관없이 말씀을 듣고 배우고 묵상하는 사람들은 정말 그 성품이 변합니다.
말씀이 사람의 심성을 변화시키기 시작하고 얼굴에 부드러운 생기가 돌기 시작하면 구원이 멀지 않았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드디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베뢰아에도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이죠.
전승에 의하면 바울이 베뢰아교회에 파송한 초대 감독은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박해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는 끈질길 사탄의 세력은 유대인을 선동해서 베뢰아까지 좇아옵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영혼이 구원받는 곳에 사탄의 역사도 치열하게 일어납니다.
13절에 보면 데살로니가에서 무려 80킬로가 되는 먼 길을 쫓아온 유대인들이 베뢰아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결국 또 다시 바울은 피신해서 아덴으로 떠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를 의아하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11절과 15절을 보면 복음을 믿고 막 신자가 된 형제들이 바울을 데리고 아덴까지 인도했다는 것입니다.
지도상에 베뢰아와 아덴까지의 거리는 무려 320킬로 미터나 됩니다.
다녀오는 데 최소한 십일 이상을 잡아야 할 먼 거리를 생업을 뒤로하고 위험을 무릎쓰고 바울과 동행했던 것입니다.
10절에서도 보면 데살로니가에서 회심한 형제들이 살기등등한 유대인에게서 바울과 실라를 빼돌려 서둘러 베뢰아로 보냈던 것을 봅니다.
야손이라는 사람은 기꺼이 바울을 위해 붙잡혔고, 보석금까지 물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일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알고 스스로 헌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구원의 은혜를 받고 나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일,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일에 자발적으로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도들의 헌신을 통해 세워집니다.
은혜로운 말씀을 들으면 얼마나 영혼이 덩실 덩실 춤을 추고 잘 차린 잔치상을 받은 것처럼 호사를 누리는지 모릅니다.
저도 제가 좋아하는 신학자의 글을 읽으면 정말 심령에 행복감을 느낍니다.그러나 고급 진 말씀을 들으며 귀가 호사를 누리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지적하는 대로 우리가 따라야할 도덕적인 결정을 당장 내려야 합니다.
베뢰아교인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고 서로 모여 친교를 나누는 것으로 끝났다면 에피타이저만 먹고 메인요리를 먹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결단하는 메인요리는 에피타이저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집요하고 흉악한 사탄의 세력이 베뢰아교회를 덮쳤을 때, 이미 바울을 빼돌린 한 무리의 교인들은 야밤을 틈타 위험을 무릎쓰고 남쪽으로 내달리고 있었습니다.
안전한 도시에 도착하기까지 아마 겨우 허기를 때우고 새우잠을 자가며 여러 날 긴장과 피로 가운데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한 복음의 행진이 막히지 않도록 그를 수호하며 함께 걷는 저들의 늠름하고 충직한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 밤에 ‘저벅 저벅 저벅’ 함께 걷는 발걸음 소리가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입니까?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아름답다는 것이겠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렇게 역동하는 삶에는 세상만사가 다 새롭고 흥미진진하고 매순간이 보람차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안하면 몸은 편하고 시간은 내 원대로 더 쓰겠지만 오늘 바울과 베뢰아 교인들이 함께 느낀 가슴 벅찬 감동과 이렇게 쓸모 있는 자기 삶에 대한 뿌듯함과 만족은 없습니다.
저도 주 중에 전도를 하러 주변을 좀 다니는 데, 웃으며 건네는 인사가 무색하게 쌀쌀맞게 뿌리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안 나가면 그런 불쾌감이나 무안함을 당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기에 순종하는 곳에는 당장 냉대를 당해도 내가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생각에 영혼은 말할 수 없이 행복으로 채워진다는 것을 아실라나 모르겠습니다.
이제 거절하고 심통 부리는 사람들도 그냥 사랑스러울 뿐입니다.
뒤 20장에 보면 나중에 바울이 아시아로 돌아갈 때 동행했던 사람 명단 중에 베뢰아 사람 소바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바울을 호위하고 복음의 행진을 위해 달렸던 일행 중에서 소바더는 아마도 이 감격스런 복음 사역에 큰 확신을 받고 자신을 완전히 헌신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생활은 하면 할수록, 하나님나라를 위한 헌신은 하면 할수록 결코 놓치고 싶지 않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좋은 것을 맛본 사람은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믿음의 삶이 한없이 더 있다는 것을 믿으시고 오늘 베뢰아 사람들처럼 경건의 훈련과 헌신을 계속해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권고드립니다.
2015년6월28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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