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승천 (사도행전1장3절-11절)

남수연 2013. 4. 17. 23:19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사명을 다 이루시고 승천하시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우리 마음에 항상 기대와 소망이 솟아나오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사셨던 33년을 돌아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 찬 것이 예수님의 생애였다고 새삼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 자체로도 말할 수 없이 낮아지신 것인 데 예수님은 하필 동물우리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또 목수라는 중산층 이하의 계층에서 30년을 묻혀서 사시고 가장 고통스러운 극형인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 부활하시고 오늘은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또 한번 의아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본문을 읽어 보십시오.

왕의 귀환, 하나님의 귀환인 예수님의 승천은 작은 언덕 위에서 평소 주님을 따르던 고만 고만한 제자들에 둘러싸여 일어납니다.

십자가의 대 역사를 이루시고 돌아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천상의 군대도 천사의 환영식도 없습니다.

주님은 아직 세상의 자녀들이 고통당하고 있을 때 홀로 영광을 누리길 원치 않으십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치루신 모든 일들은 어쩌면 이렇게 성결하고 진심어린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할 때 우리 인생은 너무 거짓되고 허세와 과장으로 포장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추구하는 것들은 어쩜 이렇게 예수님의 모습과 다른 세속적인 가치관에 젖어있나 하는 생각하면 한없이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런 깊고도 진실한 사랑과 인격을 더 알아가며 더 굳세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승천하시는 주님의 기사를 통해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과 함께 하심을 더욱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우선 본문을 통해 주님의 승천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까지 40일간 이 땅에 머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 뒤 바로 승천하지 않으시고 계셨다면 반드시 거기에 이유가 있으실 것입니다.

오늘은 신학적인 고찰이 아니라 본문에서 찾을 수 있는 두 가지 주제정도로 이 40일간 하신 일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는 이 기간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리시고 부활의 몸에 대한 제자들의 확고한 인식을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부활하신 뒤 예수님은 상당 부분 달라지셨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만일 그 낯선 예수님으로 바로 승천하셨다면 제자들은 어땠을까요?

공생애 기간 동안 인격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었던 그 예수님이 아닌 부활하신 영광의 예수님을 하늘로 올려보낸 제자들에겐 틀림없이 큰 갈등과 혼란이 야기되었을 것입니다.

승천해서 하늘에 계신 저 예수님이 낯설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아가며 섬기는 것입니다.

제자들이나 우리들이나 전인격적인 예수님을 알지못하고는 온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보이시건 안보이시건,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계시건 주님의 변함없는 인격을 알고 신뢰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40일간을 제자들과 함께 지낸 것이죠.

말하자면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님과의 적응기간이라고 할까요?

실제 주님께서 이 기간 동안 하신 행적을 보면 부활 전의 예수님과 똑같은 인격을 보이시고 똑같은 일을 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을 보면 그 기간 동안 주님은 평소처럼 제자들과 함께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사도의 증언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제자들이 음식을 먹으며 교제했다고 기록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물고기 잡으러 떠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해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떡과 생선을 구워서 제자들 아침밥을 준비해주십니다.

주님은 부활전과 같은 인격을 가지셨다는 것을 제자들이 스스로 알아보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여기서나 천국에서나 동일하신 분이신 줄 믿습니다.

부활 전과 똑같은 주님을 알아가며 제자들이 완전 주님께 적응했다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4절부터 8절까지를 읽어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치 머리를 맞대고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은 장면이 떠오릅니다.

부활하신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과 인간의 육체를 가진 제자들 사이에 전혀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다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던 제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예수님 앞에 모여 앉아 평소처럼 말씀을 듣고 물으며 무척이나 화기애애해 보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런 몸을 평범한 인간의 옷으로 감싸시고 제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여전히 말씀을 가르치기에 여념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의 너무나 변함없는 모습에 오히려 제자들이 답답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셔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닙니까?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임을 입증하신 예수님이 이전과 똑같이 행동하시는 게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이제 제국주의 로마 앞에, 주님을 못 박은 성직자들 앞에 영광스런 모습을 드러내고 권능으로 징치하고 메시야왕국을 세워야 하지 않냐는 것이죠.

우리도 하나님이 답답할 때가 있잖습니까?

이렇게 일을 해주시면 정말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은 데 하나님이 내 방법만 못하시다고 느껴질 때 정말 답답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이 그 때 일을 왜 그렇게 처리하셨나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하나님이 잘못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 방법과 다른 데 우리 믿음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내 생각에 차이가 점점 줄어드는 것이 바로 믿음이 성숙해간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결국 옳았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춰갈 때 갈등도 점차 사라지고 성급한 마음도 불안한 마음도 사라지는 것이죠.

하나님의 이 마음을 알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의혹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데 왜 이 때 침묵하시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하나님은 이 위기에 왜 기적으로 응답하지 않으실까?나중엔 하나님은 과연 계신가, 혹시 나를 모르는 게 아닐까 의혹에 빠지기도 합니다.

5초에 한명씩 굶주린 사람들이 죽어가고 기독교 믿음을 지키다 순교하는 사람의 수가 해마다 만명이 넘어가는 이 지구의 현실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서 입증된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게 가장 큰 인간의 비극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만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모든 의혹은 풀리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냐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기에 성도들조차 불안하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6절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잖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방법은 내가 원하는 방법과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추측했던 것과 너무나 다르게 일이 벌어지는 것을 얼마나 많이 경험했습니까?

그러나 당장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결국 모든 것이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한 일이였다는 것을 깨달으며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오늘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예수님의 승천은 어찌 보면 십자가의 죽음보다 더 제자들을 당혹하게 하는 사건이 아니었을까요?

십자가의 죽음에는 눈에 보이는 무덤도 있었고 주님의 시신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던 명백한 잔재가 남아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은 어떻습니까?

무덤에서 일어나신 예수님은 홀연히 하늘로 사라져버리고 이 땅에 아무 흔적도 자취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늘로 훨훨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나 신비하고 황홀한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덤이 있는 것보다 더 못한 일입니다.

아무리 놀랄만한 기적이라도 세월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암에서 치료받고 환상으로 주님의 모습을 보고 눈 앞에서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목격했다고 그 효과가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승천은 세월이 지나면 정말 주님이 이 땅에 존재하셨었다는 사실 조차도 잊혀질 위험천만한 일이란 것입니다.

그렇게 떠나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그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고 제자들은 전에 없던 큰 권능을 덧입고 상상도 못했던 일을 이루어 냅니다.

우리의 현재가 초라하고 낙심되고 때로 비참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결말을 영광스럽게 준비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조차도 마지막 날 장차 받으실 영광을 위해 현재 누리실 모든 영화를 미루고 홀로 승천하셨습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이 변함없이 제자들을 대하고 사랑하듯이 하나님은 변개치 않으십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어떤 장애가 있다해도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붙들어 주신다는 것을 더욱 견고히 믿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음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하신 이유는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주님께서 앞으로 전개 될 하나님나라의 일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지금도 우리를 가르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계속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에겐 하나님에 대해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있습니다.

각자가 머리 속에 갖고 있는 하늘에 계신 어떤 전능자에 대한 자기 생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자기 방식대로 믿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자신을 계시해 주시고 성경을 통해 가르쳐 주시는 바로 그 인격자이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초월신관을 섞어서 마음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거절하십니다.

필리핀이나 남미의 카톨릭을 보십시오.

기독교 사상에다 자기들이 본래 섬기던 온갖 신을 혼합해서 섬기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바알신을 하나님과 혼합해서 섬기려는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주의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우고 그 분을 섬겨야 하는 것이죠.

또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쳐주신데는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지켜야 할 것에 대한 명령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듣기만 하고 지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일컬어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계속해서 우리가 말씀을 듣기만 함으로 착각하는 것이 듣고 있으면 점점 그런 사람이 되어간다는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나중엔 자기가 정말 그런 신앙의 경지에 올랐다고 자기 자신에게 속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위치는 말씀을 얼마나 아느냐에 있지 않고 그 말씀을 얼마나 지켰냐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키지 않은 말씀은 이해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킬 때 만이 그 말씀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말씀들은 지키는 데 이런 데는 관심도 없고 원치도 않는다는 것은 아주 어린아이 같은 믿음의 증거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신앙생활만 계속하는 것은 내 기질이 거기 맞아서 그런 것이지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는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선호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걸러내지 말고 지키는 주님의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통해 배우고 말씀대로 실천해야 믿음이 나의 인격으로 녹아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주의 주인이신 창조자 하나님의 겸손하신 승천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허영과 거드름과 자기과신의 모습들이 예수님의 진실 된 모습과 얼마나 다른지를 깨닫습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런 우리의 고질적인 연약한 모습들은 인생의 상처와 열등감과 두려움을 위장한 서글픈 모습이기도 하죠.

하나님만이 그 모든 것을 아시기에 그런 우리를 미워하지 않으시고 오늘 배신했던 제자들을 다시 끌이시듯 언제나 우리를 용납하고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에서 새삼 주님의 신실하심과 고결하신 사랑과 겸손을 보며 그런 주님이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자랑스럽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나 자신에 실망하지 말고 이런 주님을 더욱 의지해서 말씀대로 지키는 성숙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워가신 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기본 진리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인이 아닌 이상 예수님의 승천을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영이라면 모를 까 어떻게 물질로 된 육체가 하늘로 올라 승천합니까?

가족이 죽으면 육체는 다 땅에 묻고 돌아오는 것이고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이 경험한 육체의 끝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것은 부활한 육신이 머룰 공간적인 장소가 있다는 확증입니다.

주님이 육체를 갖고 올라가셨다면 하늘 공간 다른 차원 속에 물질세계와 마찬가지로 육체가 거할 수 있는 지역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오늘 예수님이 승천하신 빈 하늘을 자세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성령께서 그 영의 눈을 열어주실 때 스데반 집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서신 주님을 보고 감격해 소리쳤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나라에서 기쁨으로 제자들과 함께 포도주를 드시겠다고 했던 그 물질과 영이 아름답게 조화 된 천국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가신 곳으로 우리 역시 부활한 몸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주님의 부활과 승천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이고 소망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옛날에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퍼시콜레라는 사람이 천국에 갔더니 목수였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집을 짓고 계시더라는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완성하고 우리를 불러올리시기 까지 천국에서 계속해서 일하실 것을 말씀하는 것이죠.

그리고 모든 일이 완성되고 때가 되면 예수님이 계신 그 곳으로 우리도 올라갈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완벽한 나라가 주님이 승천하신 바로 거기에 있고 우리의 처소가 거기 있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더욱 굳게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다음은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당부하신 말씀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 5절을 보면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것은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계신 것이 싫어서도 아니고 아름다운 천국으로 얼른 돌아가고 싶으셔서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33년간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억지로 머무르셨다고 생각하면 오해이십니다.

부모들에게 군대 간 아들을 면회 가서 보내는 불편한 민박집의 하룻 밤과 안락한 자기 집에서의 하룻밤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진정으로 자기 백성 틈에 섞여서 그들을 바라보고 인간사의 어려움과 깨알 같은 사소한 기쁨과 보통의 삶에 함께 하는 것을 즐거워하셨습니다.

그걸 너무 기뻐하셨기에 마지막 날 그것을 완벽하게 이루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1장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예수님이 우리를 두고 승천하신 이유는 다만 떠나시는 것이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구속의 조건을 완벽하게 이루신 성자예수님이 하늘로 돌아가시고 성령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구원의 역사를 각 사람마다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이 없다면 누구도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고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죽으심이 내 죄를 용서하는 죽음이었다고 받아들이십니까?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 고개가 끄덕여지고 깨달아지십니까?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셔서 구원을 내게 적용시키신 것이죠.

요한복음 16장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주님은 떠나시고 대신 구원의 사역을 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행할 수 있는 성령님을 이 땅에 파송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을 꼭 닮은 성령님께서 예수님 대신 또 다른 스승으로 우리에게 오셔서 주님이 우리를 섬기고 사랑하신 것과 똑같이 우리를 사랑하며 인도하고 계십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눈에서 벗어나 승천하셨고 우리는 슬퍼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 당신을 우리 가슴 속에서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승천의 의미를 너무나 잘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대속의 임무를 마치시고 아버지께로 가셨고 영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들어오셔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며 돌봐주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주실 때 우리가 성령님의 사역에 동역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 속에는 성령을 받은 우리들에게는 세상 사람에게 없는 권능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또 성령을 받은 우리들에 의해 반드시 예수님이 증거 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면 처음보다 점점 더 권능을 받고 담대한 믿음의 성도로 변해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더 이상 악의 세력에 굴복하지 않고 거친 환경의 억압과 파도더미 같은 힘든 문제 앞에서도 넉넉히 이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든 이 복음을 증거하고 가족과 친구와 이웃을 구원하고 싶은 전에 없던 새로운 관심이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낍니다.

비록 쑥스러워 입을 닫고 있을 때라도 상대가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성도들에게는 크건 작건 다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영혼을 전도하는 일에 아예 냉담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대상자 앞에선 기꺼이 약자가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십자가의 구원을 모든 민족에게 증거하는 증인으로 먼저 성령을 받고 구원받은 성도들을 세우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으시는 방법입니다.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여 예수님을 믿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보내셔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부활과 승천하심을 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개인의 전도를 통해서 2천년을 통해 모든 세계와 민족들에게 증거가 된 것입니다.

성령을 받고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증인으로 부름 받은 것이죠.

천사도 흠모하는 직분이 바로 전도자라는 직분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천사들이 세상을 보며 나도 내려가서 복음을 전해서 죄에 빠진 영혼을 구하고 싶다고 부러워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실 우리에게 짐을 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우리도 벽돌을 한 장 씩 나르게 하신다는 것이죠.

우리도 항상 전도에 대한 마음의 부담을 갖고 나름대로 시도도 해보지만 번번히 실패한 경험이 우리를 주저하게 만듭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은 우리가 손을 놓을 수 없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전도하는 증인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더해 주시고 전도자의 삶에 반드시 영육간의 강건한 복을 주십니다.

전도를 해보면 하나님이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를 얼마나 기뻐하시는 지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우리 마음이 왜 그렇게 기쁜 것입니까?

그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이 그렇게 있어서 그렇게 기쁜 것입니까?

그 사람이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성령님을 통해 내 마음에 그대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내가 노력하고 수고하고 땀 흘려서 내가 잘 된 것보다 더 기쁜 것이 전도할 때 주시는 기쁨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전도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좋지 않습니까?

지난 주일 새로운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을 보고 우리 모두가 얼마나 기뻤습니까?

우리교회가 이렇게 힘을 내서 영혼을 구하면 우리가 다같이 살고 다같이 축복 받는 일입니다.

국가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적으로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는 나라 1위가 미국이고 2위가 우리나라입니다.

미국이 아무리 기독교신앙을 잃고 불의가 만연해도, 우리나라가 정치나 도덕이나 염려스러울 지경에 있다하더라도 선교하는 한 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깨어있어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으면 삽니다.

개인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와 가정은 아무리 현실이 어둡고 미래가 없어 보여도 반드시 현실을 이기고 강성하게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의 전도가 없었다면 어떻게 이런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고 목숨을 잃은 벽안의 외국 선교사들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목숨과 바꾼 것이 우리 민족의 구원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대로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순교의 피를 흘린 사람이 토마스선교사입니다.

24살의 나이로 중국선교를 시작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사랑하는 아내가 임신한 채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더욱 척박한 땅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그가 타고 중국을 떠난 제너럴 셔먼호는 일주일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지만 조선군과 무력충돌이 발생합니다.

대동강변에 좌초 한 셔먼호에 조선군들은 불붙은 나룻배를 띄워 보내 셔먼호를 불태웁니다.

화염에 휩싸인 셔먼호 위에서 백기를 들고 토마스선교사는 사력을 다해 성경이 불타지 않게 강가로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남은 한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토마스선교사는 즉결 처형이 되었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 이라는 사람이였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 품에 있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며서 그에게 내밀었고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습니다.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최취량이라는 사람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전해집니다.

또한 그가 준 성경을 뜯어 벽지로 바른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복음전파로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란 부흥을 이루었고 오늘날 한국교회가 거기서 시작된 것입니다.

전에 이영훈목사님이 평양을 다녀오셨는 데 놀라운 사실을 보았다고 합니다.북한에 옛 기독교의 흔적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지워졌는 데 토마스선교사가 순교했던 그 지역의 이름이 여전히 바뀌지 않고 선교강안거리라고 지도에 적혀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순교한 그 지역구의 명칭이 여전히 선교구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은 평양 지하철이 시작하는 역 이름이 부흥역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얼어붙은 땅에 토마스선교사의 순교의 피가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을 보며 북한에 반드시 복음의 꽃이 다시 필 것을 확신합니다.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전도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것도 아니고 크나큰 박해를 받는 일도 아닙니다.

물론 전도를 위해 한없이 나를 낮추고 내 시간과 물질을 들이고 마음이 성가시고 불편한 것을 감수해야 하지만 그 댓가로 한 영혼을 구한다면 얼마나 가치있는 일입니까?

오래 전 삼풍백화점이 붕괴된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9백여명의 목숨을 빼앗아간 한국사의 가장 큰 참사였습니다.

기쁨의 교회 박목사님의 여동생의 남편이 그 당시 지하 식품부에 근무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건물이 무너졌을 때 요행히 목숨을 건진 목사님의 제부는 정신없이 건물 잔해를 뒤지며 30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현장에서 생명을 건지는 이 충격적이고 잊을 수 없는 사건 뒤 그 분은 영혼의 귀중함을 깨닫고 목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증인이 된다고 본문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증인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증언입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나를 사랑하셔서 내 죄를 뒤집어 쓰시고 대신 죽으신 그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마음을 들여 순종할 때 하나님의 적극적인 후원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우리는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안일과 부와 명예와 행복을 위해 모든 것을 쓰지말고 그저 조금 떼어 영혼을 구하는 일에 쏟는다면 우리 영혼이 살고 만족을 얻고 삶의 목적과 의미가 살아나는 축복이 임하리라 믿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과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에게 임할 화를 생각하면 전도가 얼마나 긴급한 사실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전 하신 명령을 마가복음에선 이렇게 기록합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더 이상의 사랑은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우리를 위해 물과 피로 쏟아부어지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이에겐 구원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에겐 죄에 따른 판결이 있을 뿐입니다.

다음 주 전도할 한 영혼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시길 한 주간 기도하시고 다음 주 예배시간에 전도대상자를 작정하겠습니다.

주님의 지상명령을 순종하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리라 믿습니다.

 

 

 

 

2013년4월7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