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바울과 실라의 찬송(사도행전16장16절-32절)

남수연 2012. 10. 31. 01:14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것은 너희는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증인이란 사건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이어야 자격이 됩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완전히 숨을 거두시고 무덤에 장사된 것을 보았고 사흘 뒤에 그 무덤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구름에 가려질 때 까지 하늘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았고 다시 오시겠다는 음성을 직접 귀로 들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 현장 중 하나라도 목격했다면 집에 와서 가족들에게 엄청 흥분해서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겠습니까?

내일 직장에 가서 옆 사람에게도 얘기하려고 벼르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증인이 되겠다고 나선 제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바울사도와 실라가 바로 주님의 증인이 되어 유럽에 복음을 전하게 된 이야기입니다.

중동아시아에 위치한 이스라엘에서 복음을 들고 출발한 제자들이 북쪽과 서쪽을 향해 유럽 마게도니아의 첫 번째 도시인 빌립보에 당도한 것이죠.

그리고 그 복음이 우리나라에 오는 데 1900년이 걸렸습니다.

우리나라가 복음을 받게 된 것이 100여년 전 아닙니까?

제자들의 복음을 듣고 그의 제자들이 또 증인이 되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며 지금도 사도행전은 계속되는 것이죠.

전도에 대한 말씀은 설교하기에 사실 좀 부담이 됩니다.

들으실 때도 부담이 좀 될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항상 바쁘고 남을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이 정신없이 산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또 전도하는 게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취사선택해서 듣고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담이 되고 불편한 말씀이라고 한 구석에 밀어 놓아두면 그 말씀을 듣고 지키며 받을 수 있는 놀라운 영과 육의 축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좀 불편한 마음 가지세요.

마음이 편한 게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 걱정 근심은 우리를 쇠약하게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는 걱정은 헤아릴 수 없는 복의 통로가 됩니다.

할 수 만 있다면 전도만큼 축복 받고 전도만큼 주님의 기쁨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습니다.

전도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믿음도 더 강해지고 심령도 담대해집니다.

그리고 전도에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보장 된 상급은 이미 임상실험을 통해 검증된 것입니다.

전도자의 자손들은 또 얼마나 이 땅에서 잘되는 지 모릅니다.

우리의 믿음의 크기에 상관없이 복음을 전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함과 정체성을 더욱 확인하게 됩니다.

비록 입으로 매일 전도하지 못해도 항상 전도에 대한 부담을 갖고 사시길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정하고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겸손한 것으로도 이미 우리는 세상과 다른 제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방법으로 전도라는 미련한 방법을 택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오늘 바울과 실라의 전도를 통해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지금도 크고 작은 전도의 현장에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는 사탄의 방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복음은 고난을 뚫고 역사합니다.

그리고 그 결국은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이죠.

순서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실라를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에 대해서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살리려 할 때 꼭 마귀의 세력이 활동합니다.

마귀의 목적은 전도를 막고 전도대상자의 마음을 미혹해서 복음을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건의 발단은 선교지에 도착한 바울이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쫒아 내면서 일어납니다.

18절을 보면 점치는 여종이 여러 날 바울을 따라 다니며 이 사람들은 구원의 길을 전해주는 하나님의 종이라고 떠들어 대며 바울을 심각하게 괴롭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이 정말 귀신같이 잘 알아보죠.

언뜻 보면 마치 전도를 도와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 점 보러 갔던 사람이 당신얼굴에서 십자가가 보이니 교회에 나가야 잘산다고 해서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도 가끔 있죠.

무당이 전도한다고 생각하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자기의 신통함을 과시하고 무속이나 기독교나 같은 종교니 너는 기독교 믿어라 이런 것입니다.

오히려 우린 이만큼 관대하다라는 오만한 계략이죠.

오늘 본문에서 점치는 여종이 바울을 쫓아다니는 것도 복음전도를 방해하고 거룩하고 유일한 복음에 물을 타려는 마귀의 속셈입니다.

바울이 여러 날 동안 시달리면서도 귀신을 즉시 쫓아내지 않은 것은 마귀의 전략에 휘말려 전도에 차질이 생길 것을 예견했기 때문입니다.

병마는 임의로 들어오지만 인격을 지배하는 점치는 귀신은 당사자의 자발적인 동의하에 들어옵니다.

그렇기에 당사자의 동의 없이 바울은 귀신을 쫓아내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더욱이 그 일이 돈을 벌기 위한 주인들의 탐욕과 맞물려 있기에 섣불리 행동하지 않은 것이죠.

결국 바울이 참다못해 상황을 정면돌파하기로 마음먹고 귀신을 쫓아냅니다.

그러자 당장 마귀의 계략대로 주인들의 고소가 들어오고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복음전도의 문이 닫히게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습니까?

복음을 전할 때 악한 영의 역사는 대개 관계를 망쳐 전도의 문을 막습니다.

가족이건 친구건 직장동료건 사건을 만들어 자꾸 마음이 상하게 하고 관계를 껄끄럽게 만드는 것이죠.

우린 바울사도가 아니니 논쟁하고 분개하거나 귀신을 쫒아내지 말고 인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내가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무속을 피해야 하고 호기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레위기 19장 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 스로 더럽히지 말라

점보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은 점점 그 인격의 품위가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 사람이 무엇에 집중하느냐는 결국 그것이 그 사람의 인격의 일부가 되는 것이죠.

우리의 모든 영적인 관심을 하나님께 향하기를 축복드립니다.

빛이 강하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어두움의 세력은 우리가 성령충만하고 믿음이 강해지면 저절로 떠나게 되어있습니다.

승리는 사랑으로 우리가 인내하며 저들을 용납하고 섬길 때 일어납니다.

자주 가족과의 다툼이 생기거나 감정을 상하게 할 일들이 이상하게 자주 일어나면 관계를 망치려는 악한 영의 계략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휘말리지 말고 성령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여종의 주인이 바울 일행을 고발했을 때 상관도 없는 빌립보 시민들까지 이유 없이 분노하며 바울을 고소하는 것을 보게 되죠.

복음을 거부하도록 악한 영이 사람들의 감정을 부추기고 분노를 일으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사탄의 선교활동 방해는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옷이 찢기고 매를 맞고 감옥의 가장 깊은 곳에 차꼬에 매인 채 갇히게 되고 말았죠.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거기서 간수를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빌립보에서 예상외로 복음전도가 쉽지 않았습니다.

겨우 옷감장수를 하는 루디아라는 여인과 그 집 사람들이 복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곳의 두 번째 열매인 간수와의 만남이 감옥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를 인도하셔서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주의깊게 보아야 합니다.

심재숙집사님과 제가 서로 좋은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우연히 같은 부서가 되어서 가깝게 지냈고 그래서 이렇게 전도를 받고 나오게 된 것입니다.

악한 영이 우리를 훼방하고 일이 망친 것처럼 보였는 데 신기하게 마치 하나님의 계획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 처럼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환경과 장애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실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우리를 축복하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의지를 막을 장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25절에 보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이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납니다.

너무 많이 맞은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몸도 가누지 못했다 늦은 밤에야 좀 수습이 된 것 같습니다.

남에게 이렇게 사정없이 매를 맞는다면 정말 우리 같으면 자존심이 무너지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전도고 뭐고 다 때려치울 것 같죠.

그런데 바울과 실라가 일어나 앉아 한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그들이 이렇게 말해야 맞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 복음을 전하려고 외국 땅을 찾아와 충성하는 데 좀 너무 하십니다.

뒤는 좀 봐주셔야지 우리도 안심하고 주님의 일을 할 것 아닙니까?

그들이 말을 못하면 우리라도 하나님께 묻고 싶지 않습니까?

왜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꼭 이런 고난이 있어야 합니까?

게다가 이 곳까지 오게 된 것은 복음을 유럽에 가서 전하라고 마게도니야 환상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럽의 첫 도시인 빌립보에서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가는 길에도 이런 불미스런 사건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잘 안된다고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내 기도가 외면당한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의 뜻을 따르면 만사가 형통하게 풀리고 모든 재난이 알아서 물러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기도하고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는 데 형편이 좀체로 나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며 간절히 구하는 데도 전도의 열매가 없을 때 참 마음이 힘들어지죠.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치맛바람 일으키는 어머니처럼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삶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문제들이 그냥 다 발생하도록 허용하시고 지켜 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상황 속에 끝까지 함께 하시며 지혜와 견딜 힘을 주십니다.

또 감당 못할 큰 재앙은 피할 길을 주시고 일의 결말을 반드시 선하게 인도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욥기 5장 19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돌아보면 오히려 고난이 없는 것 보다 통과한 것이 내게 더 큰 유익이 되었다는 것도 인정하게 됩니다.

물론 고난당할 때는 당장은 이런 말이 위로가 되지 않죠.

김대0 대통령이 이0호여사에 대해 끝까지 풀리지 않은 섭섭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1980년 군사정부 시절 사형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히셨을 때 이여사님이 면회를 와서 간절히 기도를 해주는 데 빨리 석방되게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인도해달라고 하시더라는 거예요.

사형선고를 받고 불안에 떠는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섭섭했겠습니까?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고난이 유익이란 걸 알지만 지금 당장 힘든 건 사실이죠.

그러니 바울과 실라의 기도와 찬송이 우리에겐 참 따르기 힘든 믿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 매 맞으면 내가 주님을 위해 매를 맞을 수 사람이라는 것에 기뻐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들은 확실히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영광을 목격한 게 분명합니다.

우리가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아직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고 정주0회장이 현대 직원들에게 얼마나 과격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죠.

정회장은 종종 사장들에게 네 돈이면 그렇게 쓰겠냐며 조인트를 까곤 했다고 합니다.

작년에 정몽0회장이 현대차 공장장을 잘랐던 일화가 있었죠.

공장장이란 사람이 자동차 본넷을 못 여는 바람에 현장에서 바로 짤렸답니다.

오랜만에 왕회장님 모습을 본 것 같다고 현대차 직원들이 은근히 기뻐했답니다.

역사의 평가야 어쨌든 창갈이를 몇 번씩 한 낡은 구두를 신고 앞만 보고 뛰었던 정회장은 20만 노동자와 가족들을 품었기에 현대직원들의 정회장님에 대한 회상은 지금도 참 아련한 가 봅니다.

지금도 자기들 끼리 얘기할 때 정회장에게 조인트까인 다리를 내보이며 여기를 왕회장님이 걷어차 주셨다고 자랑스럽게 말한다네요.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위해 자신들이 고난 받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영광인 줄을 알았던 것입니다.

천국에 가서는 자청해도 더 이상 받을 고난이 없습니다.

사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전도하다 매 맞는 고난은 없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낮아지고 때로 창피를 당하고 또 불편한 관계를 이겨내야 하는 이런 고난들이죠.

제가 얼마 전 이 동네로 미용실을 바꿨는데 처음 온 손님이라고 아주 귀빈대접을 해주더군요.

그런데 우리 교회를 소개하고 교회에 나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얼굴에서 어떤 비웃음 같은 게 순간 비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동료를 전도하고 가족을 전도하려면 언제고 우리는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야 하고 때로 무시당하는 자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요즘 얼마나 이 동네 분들께 굽신거리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뭐 하러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 분들이 어떻게든 복음을 듣고 이 축복스런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죠.

내게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누군가가 무시당하며 나를 섬겼지 않습니까?

그리고 참 오랜 세월 얼마나 또 우리가 예수님을 무시했습니까?

무시하는 눈초리를 느낄 때 우리가 이러며 살 이유가 있냐는 생각도 들죠.

괜히 남의 눈치보고 아쉬운 소리하는 것 같고.

그러나 우리의 이런 사랑의 수고와 복음을 위한 헌신의 열매를 천국에서 보는 순간 우리의 기쁨이 얼마나 클 지 기대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을 섬긴 우리의 수고와 고난을 알아주시고 환대 해주실 때 왕회장의 조인트의 영광 따위가 상대가 되겠습니까?

그래도 현재 선교사들이 고생하며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모습을 볼 때 마음이 참 안쓰럽습니다.

하나님은 간수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충성스런 바울과 실라를 단지 도구로 쓰기 위해 고난 속에 내팽개치시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전도하려다 받는 아픔이나 창피가 있다면 주님이 그것을 똑같이 당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울이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을 얼마나 박해했습니까?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뭐라고 하십니까?

네가 왜 내 자녀를 박해하냐고 하지 않고 네가 왜 나를 박해하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의 비참한 테러를 허용하시는 하나님아버지는 그렇게 해서라도 구원하길 원하는 또 다른 죄인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복음의 신비이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귀신에게 인격을 뺏기고 죄의 감옥에 갇힌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귀하게 사용하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받는 고난이야 말로 이 땅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되고도 보배로운 헌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책임져 주십니다.

역사가 확실하게 입증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국가와 개인이 결국 축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사회적 계층이 낮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 분명히 그 집안이 축복을 받고 자식들 대엔 확연하게 신분이 상승됩니다.

그래서 믿음 4대째면 마음만 먹어도 이루어진다는 공공연한 속설이 있는 것이죠.

다만 축복 뒤에 믿음이 약화되고 믿음을 버렸을 때 영광이 사라진다는 것 또한 역사가 입증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은 축복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게 합니다.

고난 중엔 하나님을 바라고 주님과 동행할 수 밖에 없으니 유익한 고난인 것이죠.

세상이 살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요즘 청년들 세대 또한 얼마나 힘든 시기를 건너는 지 스스로를 삼포시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취업과 결혼, 그리고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라고 하니 청년들의 절망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공사장에서 일하는 한 청년의 점심밥이 인터넷에 오른 것을 보았습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공사판 한 켠에서 밥을 먹고 있는 청년의 밥접시를 우연히 보고 너무 마음이 짠해 사진을 찍어서 올렸다고 합니다.

넓은 밥 접시에 맨 밥이 담겨있고 그 옆에 반찬으로 보이는 삶은 달걀 한 개가 점심식사의 전부였습니다.

전쟁의 참상과 보리고개를 이겨낸 부모님 세대조차도 이 시대의 빈곤과 외로움을 견디질 못하고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보도를 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모두가 고통 받는 각박한 인생에서 복음과 함께 또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가혹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엔 반드시 축복도 보장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현실의 문제가 다 해결 된 뒤 주님을 잘 섬기겠다고 한다면 평생 세상일에 쩔쩔매다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바쁜 일터와 이웃과의 만남은 모두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지라는 것을 믿고 섬기며 기도 할 때 생각지도 못한 축복과 기쁨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다음은 이 감옥에 임하신 하나님의 기적과 구원의 역사를 보겠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송하고 있을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옥터가 요동치며 지진이 일어나죠.

땅이 마치 살아있는 짐승처럼 울컥거리며 요동을 하는 지진 장면을 본 적이 있는 데 너무나 무섭더군요.

지진으로 갑자기 자물쇠가 튕겨져 나가며 잠겼던 문이 요란하게 열립니다.

발목에 채웠던 쇠사슬이 죄수들의 눈 앞에서 밧줄처럼 힘없이 끊어집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두렵고도 겁에 질렸으면 옥문이 활짝 열렸는 데도 험악한 죄수들이 한 명도 도망갈 생각을 못하고 떨고 있었던 것을 봅니다.

복음을 전하는 곳에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돕기 위해 기적으로 역사하십니다.

어떤 권사님의 간증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 분이 친구를 전도하려고 지칠 때 까지 찾아가서 설거지도 해주고 반찬도 해다 주고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친구의 마음이 얼마나 완강한지 결국 서로 감정이 상하고 다시는 집에도 찾아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동안 기도하고 애쓴게 너무 억울해서 마지막으로 한번 더 찾아갔다고 합니다.

친구는 어이가 없었는 지 권사님을 바라보다가 마침 들어온 자기 딸을 그 앞에 불러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딸의 두 손을 보여주는 데 사마귀가 피부를 빈틈없이 다 덮어서 보기에도 흉측할 정도였습니다.

아무리 병원에 가서 떼어내도 순식간에 다시 생겨 손을 쓸 수가 없어 포기한 상태라며 친구가 말했습니다.

‘자 봤지? 나 챙피해서 우리 애 데리고 교회 못나가, 어디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 아이 손 좀 깨끗이 고쳐주시라고 해.’

그런데 권사님이 무슨 마음인지 ‘그래? 그럼 일주일만 시간을 줘’하고 자신있게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데 그게 어디 될 것 같습니까?

무슨 신유의 은사가 있는 분도 아니고.

일주일은 다 되가고 이제 큰 일이 났는데 게다가 권사님의 두 아이들이 수두에 걸려 앓기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 수두는 뒷전이고 친구 딸 사마귀 문제로 애가 타고 있는 데 마침 목사님께서 심방을 오셨다가 아이들 아픈 걸 보고 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때 권사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속으로 하나님, 우리 애들 고쳐주지 않으셔도 좋으니 내 친구 딸 좀 고쳐주세요 라고 간절하게 기도가 나왔습니다.

다음 날, 약속한 일주일이 지났고 마침 친구들 모임이 있었는 데 도저히 거기 나가 친구얼굴을 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전화가 빗발치며 나오라고 성화를 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풀이 죽은채로 모임 장소에 갔는 데 거기 그 딸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친구가 울면서 권사님 손을 붙들고 자기 딸 손의 모든 사마귀가 다 사라져 깨끗하게 되었다며 딸 아이 손을 보여주는 데 정말 뽀얗고 매끈한 살로 덮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에 나온 친구들이 단체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을 전하는 현장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기적을 베푸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나 보통 하나님의 기적은 평범함으로 가장해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일상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일처럼 위장하고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 삶에 항상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인도하실 때도 마찬가지죠.

우리가 오래 기도하고 하나님께 매달리면 사건의 해결이 어느 날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듯 해결 되는 게 아니라 마치 우연히 자연적으로 해결 된 것 처럼 평범하게 응답이 됩니다.

간수 편에서 보면 이 날 그의 인생 최악의 날을 맞이한 듯 보입니다.

요란한 소리에 놀라서 자던 자리를 박차고 나와 컴컴한 감옥 안을 들여다 보니 방마다 문이 활짝 열려있습니다.

죄수들이 다 도망갔으니 그는 문책을 받고 수모를 당하다 결국 죄수의 목숨대신 자기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사태가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직감한 순간 그는 자결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터전이 뒤집어지고 살 소망이 끊어질 때 누구를 향해 도와달라고 두 손을 들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하려는 가족과 친구들은 간수와 같이 인생의 위기 가운데 있고 사실 죽음의 두려움에 쩔쩔 매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자결하려고 칼을 든 순간 가장 깊은 감옥의 어둠 속 정적에 싸인 그 곳에서 급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그대로 있노라.

간수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꿰뚫어 보는 바울의 목소리를 듣고 두려움과 전율을 느낍니다.

20절에 보니 어둠 속의 말을 듣고서 간수가 등불을 들고 감옥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고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그 밤 바울을 사로잡고 계셨습니다.

감옥 안엔 초자연적인 기운이 자연세계를 박차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 성령의 임재에 두려워 죄수들도 꼼짝 못하고 있었고 간수는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립니다.

그때 간수가 바울에게 한 말은 내 생명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치하가 아니었습니다.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겠습니까? 라고 물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면 우리의 관심이 달라집니다.

오직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지에 끙끙거리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면 우리는 내 영혼의 구원이 절박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과거에 우리도 죽은 다음의 내세와 영혼 같은 것에 아무 관심도 없이 살던 사람들입니다.

성령께서 비춰주시지 않는 한 절대로 인간은 구원받아야 할 절대적인 위기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의 어떤 말에도 세상 사람들이 구원에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단지 이들을 마음에 품고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들의 삶 속에 성령이 개입하기 시작하십니다.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만지실 때 비로서 영적인 관심이 생기는 것이죠.

그때 우리는 그들을 향해 주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복음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신실한 주의 자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영광스럽게 동역하는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2천킬로를 여행해 빌립보를 찾아간 바울일행은 거기서 루디아란 여인의 가족과 간수의 가족을 구원하고 박해를 피해 데살로니가로 떠납니다.

아마도 이 두 가족이 중심이 되어 빌립보교회가 탄생하게 되죠.

그리고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선교사역을 위해 여러 차례 후원금을 보낼 정도로 든든하게 성장합니다.

하나님은 뚝딱하고 성장한 교회를 내놓지 않으십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듯 몇 몇의 구원받은 자들로 이루어진 교회는 그들의 전도와 성령의 역사로 성숙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위해 이렇게 함께 노력할 때 우리교회가 주님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견고한 교회로 성장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함께 수고하고 헌신한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큰 칭찬과 넘치는 위로와 축복을 날마다 넘치게 부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2.10.21. 주는나의산성교회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