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바울의 회심 (사도행전22장1절-16절)

남수연 2011. 8. 28. 23:05

1961년 6월27일 역사적인 한 만남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메트로 호텔에 연금 되어있던 삼성 이병o회장을 불러 두 사람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당시 탈세와 부정축재로 재계서열 11위까지의 기업대표가 모두 감금 된 상태였습니다.

박대통령이 긴장한 이회장에게 그들을 어떻게 처벌하면 좋겠냐고 뜻밖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병철회장은 자신이 부정축재1위로 지목 된 처지에 있었기에 말문을 열기 난감했습니다.

기탄없이 말해달라는 박대통령의 재촉에 그는 용기를 내 소신 있게 말했습니다.

부정축재자로 지목 된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굴을 찡그리며 박대통령은 듣고 있었습니다.

수익을 훨씬 넘는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현재 전시 비상사태의 조세제도로

정직한 납세를 했다면 아마 모든 기업이 도산했을 거라는 것이죠.

기업인들을 사면시켜 나라를 재건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힘써 말하는 이회장의 말을 듣던 박대통령이 결단을 내립니다.

가난한 농민 출신인 박대통령은 부자들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지만 그 날 국가경제를 살리는 쪽을 선택합니다.

대통령이 부정축재 기업인을 사면하자고 말했을 때 반발하는 수뇌부를 이렇게 설득합니다.

그래도 드럼통 두들겨 다른 거라도 만들어 본 건 그 사람들뿐이니 국가 경제 부흥에 그들 좀 써먹어 봅시다.

그날 그 만남이 없었다면 연매출액 1300억 달러 세계 22위 삼성전자가 존재했을지 의문입니다.

유대인 철학자 마틴 부버가 쓴 ‘나와 너’라는 책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는 인생을 만남이라고 정의합니다.

바른 만남을 가진 사람은 인생을 제대로 살지만 잘못된 만남을 가진 사람은 인생을 잘못 살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말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만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지 않으셨다면 사울은 있지만 바울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역사 속에 잊혀 진 유대교 랍비 사울은 있었지만 열세 번째 사도로 기독교 역사의 한 획을 그은 바울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의 인생은 주님 손에 붙들렸고 초대교회 복음 전파의 선두주자가 되어 힘차게 달렸습니다.

그의 손을 통해 하나님은 신약성경 13권의 서신을 기록하여 지금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울의 회심 사건을 살펴보고 변화 된 바울의 삶을 보며 우리의 삶을 생각하길 원합니다.

바울을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 마음에 찾아오셔서 확신과 소망과 믿음을 더해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먼저 사도 바울에 대해 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 여행을 다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유대인들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걸어 다닌 거리만도 무려 17.000킬로가 넘는 험난한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늙은 사도를 기다리는 것은 결박이었습니다.

이제 사역의 막바지에 이르러 순교를 예견한 바울은 오늘 두려움 없이 유대인들 앞에서 자기의 신앙을 변론하며 주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그는 1절부터 5절 까지 자신의 출신과 열렬한 유대교 신봉자로서 기독교를 박해했던 과거를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로마식민지 하에 유대인으로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한동안 호주 이민 열풍이 불었었죠.

최근 호주 이민법이 많이 바뀌어 교포 사회가 술렁이고 있다고 합니다.

요리사나 미용, 제빵사 같은 2백개 직종이 기술 이민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술 이민을 꿈꾸며 몇 년 씩 고생하던 사람들이 결국 보따리를 쌀 수 밖에 없게 된 것이죠.

호주한인사회에선 영주권을 천국티켓이라고 한답니다.

모이기만 하면 누가 어떻게 받았다더라, 어떤 방법이 좋다더라 온통 영주권 이야기 뿐이라고 합니다.

바울 당시 로마시민권은 거기 비할 게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나면서 로마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그의 집안이 로마제국에 상당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라 추측됩니다.

그는 현재 터어키 서쪽에 위치한 길리기아의 다소란 로마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대교 신앙심이 깊은 부모는 그를 예루살렘으로 다시 유학을 보냈습니다.

그것도 당시 7대 랍비 중 한사람인 가말리엘이 지도하는 명문학교에 입학을 시킵니다.

유대 사회에서 가말리엘의 지위와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5장에 보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공회에 잡혀 죽게 되었을 때 가말리엘이 지혜로운 말로 제사장을 설득해 제자들이 풀려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는 가말리엘의 문하생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자부심과 명예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수학이 끝난 바울의 수하에도 제자가 여럿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에서 기독교인들을 체포할 권한을 준 것을 보면 바울도 유대사회에서 인정 받을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렇게 보면 바울의 미래는 존경받는 랍비와 성공한 율법학자가 보장 된 인생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바울의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으로 완전히 뒤집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 대해 세 가지를 살펴보려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주님과의 만남, 주님을 만난 다음의 삶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울입니다.

사울은 자기의 신분과 학문과 종교적 지식에 대한 오만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납니다.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울이 그동안 예수님을 만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3년 간 단 한 번도 주님의 사역 현장에 와보지 않았던 것이죠.

율법과 종교에 각별한 열정을 가진 그가 온 유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예수님의 사역 현장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는 게 무엇을 말합니까?

그의 종교적 오만함과 율법의 잣대로 이미 주님을 이단으로 정죄했고 알아 볼 가치도 없는 사람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어리석고 편협하고 오만한 존재이죠.

얼마 가지지 않은 지식과 경험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선 먼저 사실을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처음에 이렇게 단지 예수님을 무시하고 무관심했던 바울이 점차 무서운 악의 집행자로 변하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에 퍼진다는 소식에 격분한 바울은 불손세력 소탕에 나섭니다.

예루살렘도 부족해 240킬로나 떨어진 다메섹까지 기독교인을 붙잡으로 떠납니다.

다메섹은 현재 터키의 다마스커스입니다.

이 정도면 종교적 신념을 넘어서 광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사도행전9장에 보면 그가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다고 기록합니다.

자신을 구하러 오신 주님께 냉소적이던 그는 어느 순간 주님을 박해하는 악한 세력의 도구가 되 버린 것입니다.

십자가의 긍휼을 입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고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대개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다른 종교에 대해 무관심한 게 정상입니다.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 안티 세력이 많은 것도 어떤 이유이든 악한 영의 조정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영혼의 중심에 모시기 전 까지 인간은 악한 영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사도행전26장에서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정의하신 인간의 현주소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것 같지만 실은 사탄의 지배 아래 조정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세력이 얼마나 강하고 집요한지 인간 스스로는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주님께서 강탈해온다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사탄이 얼마나 강하게 우리를 자기 거라고 붙들고 있는 지 그것을 결박하고 강탈해 오듯이 우리를 빼내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짓누르던 사탄의 세력을 결박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를 악한 세력에서 빼앗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주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잘나가는 유대교의 차기 지도자처럼 보였지만 실은 사악한 종교의 영에 지배당하는 비참한 죄인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런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는 모습입니다.

그의 인생에 꿈도 꾸지 못한 극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이 계획한 대로 율법사가 되고 존경받는 랍비가 되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나이가 들면 율법학교나 하나 세워 후진을 양성하겠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죠.

우리도 우리 생각과 계획대로 인생이 계속 될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살지요.

저도 교직생활이 언제까지 지속 될 것 같은 막연한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 들어가서 아직 까지 45년이나 학교에 다녔으니까요.

너무나 익숙하고 몸에 밴 이 환경과 삶이 변한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들이 우리 앞에 있고 익숙한 것들과 갑자기 헤어져야 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바울에게 오늘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어제와 똑같은 평범한 태양 아래 바람을 가르며 정오의 길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가슴에 품은 영장을 내밀고 불법한 무리들을 잡아서 줄줄이 꿰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갈 마음에 다급했겠죠.

그런데 그 때 초자연적인 세계가 순간 그 자연스러움을 깨고 들이 닥칩니다.

순식간에 주변은 초현실적 공간으로 돌변합니다.

사도행전26장을 보면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둘러 비추며 동행하던 사람들이 다 땅에 엎드려 졌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사울아, 사울아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다고 그는 말합니다.

바울이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사도행전 9장과 본문인22장과 26장에 세 번 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증거 할 상황 마다 이 사건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큰 충격이나 감동을 받은 잊지 못할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세월이 지나도 그 이야기 할 때 마다 그 현장에 돌아간 듯 실감나고 똑같은 감흥이 일어나는 걸 느낍니다.

바울에게는 오늘 주님을 만난 이 사건이 그랬습니다.

그는 세 군데에서 모두 주님이 자기 이름을 두 번 부른 것을 빼지 않고 기록합니다.

사람의 이름을 두 번 연속 불러보십시오.

이름을 두 번 부를 땐 상대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책망이 들어 있을 때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라고 부르실 때가 그러셨습니다.

또 마태복음 23장 37에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을 흘리신 장면이 나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 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어쩌면 에덴동산에서 범죄하고 숨어있는 아담을 부르실 때도 그러셨을지 모릅니다.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범죄 한 순간에도 긍휼을 베푸시고 오래 참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숨고 싶은 순간에도 주님께 싸늘한 등을 보인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자기의 이름을 두 번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순간 단번에 자기의 인생을 걸었고 평생 그 음성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바울을 부르시는 음성 속엔 그에 대한 진노가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주님은 저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약함을 아시고 우리의 체질을 아시기에 실수하고 범죄 해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그 주님이 바울에게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하실 때 그가 소스라쳐 놀라 묻습니다.

주님 누구시니이까?

바울은 직관적으로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이 분명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그의 이 질문은 저는 결코 그런 적 없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십니까? 란 뜻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실 때 바울에게 더 이상의 아무 질문도 설명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자신이 이름조차 경멸했던 나사렛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걸 그는 섬광 처럼 깨달은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즉시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심도 들고 따지기도 하고 자기의 이성적인 판단을 들어 깐깐하게 굽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한 행동이죠.

그러나 누구든 주님을 체험적으로 만나게 되면 그깟 게 한순간 다 부질없게 되버립니다.

법무법인 세종에 대표 변호사인 김0식 변호사가 있습니다.

그는 서울 법대와 시카고대학 로스쿨을 졸업하고 뉴욕 주 변호사 자격을 가진 국제 통상 법률 전문가입니다.

그가 법대1학년 때 국립원호병원에서 방위병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밥퍼 목사로 유명한 최일0 목사님도 그 병원에서 방위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덩치 큰 최 전도사는 점심 때 마다 도시락 뚜껑을 열어 놓고 한참 동안 식사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김변호사 눈에 그런 최전도사가 그저 꼭 막힌 예수장이로 보였겠죠.

둘은 심심찮게 기독교 교리를 두고 입씨름을 했다고 합니다.

방위병 생활이 거의 끝나가던 여름 어느 날 다방에 앉아 여전히 최전도사와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의 비과학성과 불합리성을 공박하느라 한참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전기에 감전 된 듯 머릿속 필름이 딱 끊기더더더아무 생각도 할 수 없는 멍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잠시 후 퍼뜩 정신을 차려보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환해지면서 예수님의 구원과 부활의 주님이 그냥 믿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그를 가로막고 있던 논리와 과학의 장애가 무너졌고 따질 의미조차 없게 되 버린 것입니다.

마치 두뇌 회로가 순간적으로 음극에서 양극으로 바뀐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김변호사는 그날 예수님이 그렇게 갑작스럽게 자기를 찾아왔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오늘 그가 신봉해오던 구약 성경과 율법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란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즉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의 구원자라고 인식시켜 주십니다.

사실 이 깨달음이 설명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령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께도 말씀의 지식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체험이 늘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 된 바울의 모습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을 직면한 바울은 순식간에 그의 삶의 방식이 바뀝니다.

10절에 보면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묻죠?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은 다 다르시만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공통 된 모습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 대로 살아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26장9절에 바울은 변론 중 과거의 자신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한마디로 내가 생각해서 내 방식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결정권자는 나라는 것이죠.

그러나 진짜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인생의 결정권자는 바뀝니다.

사울로 살 때는 스스로를 크게 여기고 인생의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되었을 때 자기의 작음을 발견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결정권을 드리고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이 재미 없고 무력한 삶으로 보이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인생을 위임할 때 오히려 세상이 감당 못할 사람이 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순복한 바울의 변화 된 인생이 비루하고 볼품없이 바뀌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인생의 결정권을 이양한 그는 더 이상 악에 내몰려 무고한 박해와 살인에 가담했던 과거의 사울이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19장11절을 보면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그는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권능의 대행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후에 로마황제인 가이사 앞에서 서서 당당하게 주 예수님의 도를 변론하는 사람이 됩니다.

내가 나의 인생을 경영하는 게 더 안심이 되는 게 인간입니다.

사실 경영하는 것을 이룰 능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잠언 16장3절은 말씀합니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우리 인생의 소원과 결정권을 다 하나님께 맡길 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리고 주님을 만난 바울은 즉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전하기 시작합니다.

같은 사건이 기록 된 사도행전9장20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2절입니다.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박해하러 나섰던 사울이 주님을 만난 후 순식간에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증거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게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고양시 주엽동에 다메0 교회라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인 정0재 목사는 12살부터 부산 소년원을 들락거렸던 문제아였습니다.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 군인출신 아버지와 새어머니 밑에서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94년 그의 주 특기인 소매치기를 하다 저항하는 상대에게 칼을 휘둘러 강도 상해죄로 청송교도소에서 10년간을 복역했습니다.

전과 8범의 그는 감옥에서도 망나니였습니다.

성경책을 찢어 담배를 말아 피우고 나이 든 수감자들을 두들겨 패다 독방에서 형구에 매여 있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방 안에 7명의 죄수들이 누워 자고 있는 데 갑자기 배가 뒤틀려 견딜 수 없었습니다.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극심한 고통으로 곧 죽을 것 같은 공포가 몰려 왔습니다.

떼굴 떼굴 구르다 보니 옆에 담배 말아 피우던 성경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성경책을 집어 안고 뒹굴며 아이고 예수님 도와주세요라고 소리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순간 그의 외침이 방언으로 바뀌고 기도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데 눈 앞에는 그동안 지었던 죄들이 필름처럼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담 안으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의 전폭적인 은혜로 그는 회개하고 다메섹 바울처럼 순식간에 변화 되 버렸습니다.

다음 날부터 신참 전용인 설거지와 청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30분 허용 되는 자유 시간에 비누를 들고 가 변기를 닦았습니다.

목욕시간엔 아픈 수감자를 업고 가 먼저 씻겼고 봉투접기로 받은 돈으로 휴지를 사들고 다니며 전도를 했습니다.

모두들 처음엔 미쳤다고 수근댔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최소 2천명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검정고시를 통해 신학교에 입학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옥탑방에 바울의 회심 장소 이름대로 다메0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부흥시키셨고 지금은 단독 건물을 매입해 목회를 합니다.

그는 시간만 나면 교도소를 돌며 교정 선교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바삐 뛰는 육체는 피곤하지만 영은 너무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와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소망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 살 터전을 주시고 이 세상 속에서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에게 영원한 상급을 위해 일할 자격을 주시고 우리 각 사람에 맞는 사명을 준비하신 줄 믿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 외국에서 출생했고 당시 세계언어라 할 수 있는 헬라어를 배웠습니다.

폭넓은 헬라 철학과 사상들을 배우고 율법에 능통한 학자로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아직 주님을 만나기 전부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모든 준비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은사와 경험들 또한 주님께 드리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귀하게 쓰여지리라 믿습니다.

교도소의 수감 경력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한 능력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얼마나 아름답게 사용하시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바울은 살기를 품은 군중들을 향해 자기가 만난 주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언제 스데반 처럼 날아드는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당당하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에 오르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늙은 바울의 눈엔 그 날 자신에게 말씀하셨던 예수님의 음성과 눈을 멀게 했던 눈부신 빛이 보이는 듯합니다.

바울은 그의 험난한 여정을 마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우리가 다 바울 처럼 주님을 만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의 삶에 찾아 오신 주님이 우리의 심령에 찾아오셨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우리 누구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아직도 주님이 성경 속에나 존재하고 2천년 전 역사 속에 존재하고 계시다면 주님께서 우리 이름을 불러주시길 기도하기 원합니다.

오늘 주님을 만나고 변화 된 바울의 삶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다메섹의 자리로 인도하실 줄을 확신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