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성령강림과 초대교회의 탄생(사도행전2장36절-47절)

남수연 2013. 3. 5. 19:23

성령강림과 초대교회의 탄생

사도행전2장36절-47절

우리교회가 어느덧 창립한지 3주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봉사한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격려하고 축복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해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일하신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창립3주년을 생각하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신다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셨고 지금도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교회가 남들이 보기엔 작고 평범한 교회일지 몰라도 만유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고 예배의 주인공이 되시니 세상의 화려한 어느 곳에 비할 수 없는 존귀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하나님의 눈과 귀가 이곳을 향하고 여기에 임하셔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세 돌을 맞은 우리교회의 성도들에게 무슨 말씀으로 축복하고 교훈하실지를 생각하다 최초의 교회인 예루살렘교회를 통해 듣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교회들이 모델로 삼길 원하는 아름다운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그런 교회를 향해 나가길 원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하셔서 복된 말씀을 깨닫고 큰 은혜를 주시길 소원합니다.

먼저 오늘 예루살렘초대교회의 탄생을 통해 교회가 어떤 곳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속죄하고 부활하신 뒤 승천하셔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 뒤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세상에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나라가 세계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이천년 역사를 뚫고 도도하게 복음이 전파되었고 이곳에도 주님의 교회가 세워진 것이죠.

교회의 탄생과 성장에는 하나님의 뜻과 성령님의 주도적인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누가 돌아올 것도 없는 게 뻔한 데, 교회나 한번 세워볼까? 이런 마음을 갖겠습니까?

아무리 작은 교회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실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에 세우시는 것이고 그 뜻을 이루기까지 붙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악한 마귀가 성도 개인의 믿음도 쉬지 않고 훼방하는 데 성도들의 연합인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얼마나 전력을 다하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교회는 승리합니다.

성령께서 보호하고 일하시기에 교회는 극렬한 마귀의 공격을 이기고 오히려 영혼을 그 손에서 뺏어 와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령께서 교회를 위해 전적으로 일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배경인 오순절 날 신비하고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이 즉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앞부분에 이날 베드로사도의 전도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세에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겠다는 요엘선지자의 예언으로 노련하게 설교를 이끌어 갑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예언대로 역사의 마지막 때 성령이 오셨으니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믿고 구원받으라는 것입니다.

오십일 전 유월절명절에 너희가 보는 앞에서 십자가의 형틀에서 사형당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바로 그 구원의 주가 되셨다고 소리를 높여 증언합니다.

저는 신앙초기에 성경을 읽다 성경이 얼마나 진실 되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지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뒤 주님을 만난 사람 중에 부활을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고 적어 놓은 걸 보았습니다.

그렇잖아도 도저히 믿기 힘든 부활을 기록하면서 이런 말을 뭐하러 기록합니까?

그만큼 주님의 부활에 대해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갈릴리 어부출신의 투박한 제자들이 무슨 이익이 있다고 머리를 써서 돌아가신 스승이 부활했다는 이런 말을 꾸며내고 전파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무슨 이익이 돌아왔습니까?

그들은 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하다 순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36절에 베드로가 얼마나 당당하게 부활을 증거합니까?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아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사도의 이 증언은 언제 돌이 날라올지 모르는 신성모독죄입니다.

본문에서 몇 장만 넘기면 베드로와 똑같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던 스데반집사가 신성모독을 참지 못하겠다는 군중들의 돌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죄목이 무엇입니까?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유대인측의 신성모독죄와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했다는 로마측의 황제에 대한 반란죄였습니다.

아무리 진실이라 해도 죽음을 각오하고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교회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성령께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시고 함께 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오순절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죠.

성령이 듣는 자의 마음을 감동하지 않으면 어떤 역사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얼마나 상식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까?

완고하고 오직 유대교에 열심있던 그들이 삽시간에 뒤집어진 대 변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라고 물어옵니다.

여기 ‘찔려’라는 단어의 뜻은 실신시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사도의 설교를 들을 때 마음이 깊이 동요되며 기절할 지경이되었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하며 그들은 필사적으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주시겠다고 수도 없이 약속한 그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니 어찌할꼬, 이제 구원의 소망은 다 사라졌구나.

이런 엄청난 마음의 동요와 뉘우침이 수 천명의 회중 가운데 동시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사도가 38절에서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그 말에 세례 받고 신자가 된 사람이 무려 삼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죄를 깨닫고 죄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실재감으로 느끼는 것도 성령이 하신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날 최초의 예루살렘초대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교회의 조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또 죄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 조건 중에 빠진 것이 있으면 교회가 될 수 없고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삼천명이 예수님의 속죄와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그들이 과감하게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활동무대였던 성전에서 모였다고 하죠?

성도가 되는 데는 지금도 세속적인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따르는 삶으로 목적을 바꾸는 비장한 결심이 필요합니다.

현대교회에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마치 사교단체에 들어오는 것처럼 가볍게 인식되는 것은 우려할 일입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값진 구원을 값싼 구원으로 전락시켰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이제 나오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치르신 구원의 값비싼 댓가를 알고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목적대로 사는 사람들의 거룩한 모임이 진정한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이런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줄 믿습니다.

세상 어느 단체와 교회가 다른 것은 교회가 살아있는 유기체란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을 공급 받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머리로 해서 한 몸을 이루죠.

에베소4장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가 머리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스스로 발육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유기물이 자라듯이 교회가 그렇게 살아있는 조직이고 기쁨과 통증을 함께 느끼는 한 몸이란 것이죠.

그렇게 우리를 주는나의산성교회로 한 몸이 되게 하신 것이고 또 우리교회는 거대한 지상교회에 연결 된 주님의 몸입니다.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이 웅장한 지상교회가 거룩한 주님의 신부로 들려올라 갈 것입니다.

교회하면 교회건물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데 교회는 성도 자체입니다.

교회가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회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건물이 바로 예배당입니다.

다만 이 예배당은 누가 봐도 외형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장소이고 거룩한 성도가 모이는 곳이고 실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가 있는 곳이기에 경건하고 소중한 곳이죠.

이렇게 우리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성도들 모두가 교회의 한 지체라는 것을 기억하고 주님께 굳게 붙어있어 생명과 은혜를 공급받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다음은 가장 아름다운 교회였던 예루살렘교회을 통해 교회가 가져야 할 특별한 표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는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이상적인 교회입니다.이 초대교회의 특징들이 세상의 모든 교회에도 있어야 합니다.

다만 초대교회에는 성령의 강하게 역사하셨기에 교회의 아름다운 특징들이 가장 완벽하게 나타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교회들의 교과서가 되도록 확실한 교회의 본질을 보여주신 것이죠.

초대교회의 특징이 현대교회에 약화된 것은 성도들이 연약하고 세속적이며 성령의 충만함이 부족해서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지상의 모든 주님의 교회가 초대교회와 같은 성령님의 강한 이끌림을 받고 세상을 향해 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충만을 받고 성도 각 사람이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우리 죄성보다 성령의 선한 뜻이 더 강하게 우리 삶을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죄성대로 사는 모습은 아무리 그럴듯하게 꾸며도 참 구차하고 치졸하기까지 합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의 모습이야말로 본문에 나타난 초대교회 성도들 같이 역동적이고 활력에 넘치는 매력적인 모습입니다.

우리가 은혜받고 성령의 충만해졌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못난 내 죄성에 사로잡혀 무기력하고 무능하고 우울하게 사는 모습과 비교할 때 얼마나 확연히 다릅니까?

그들에게 갑자기 나타난 독특한 초대교회의 현상들은 어제는 없었던 일이고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일입니다.

사람들 스스로에게서 발생 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충만히 교회에 역사하고 개인에 역사하실 때 대변혁이 일어나는 것입니.

인간의 노력으로 이런 초대교회의 역사들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이걸 흉내내다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었습니까?

성령께서 회개하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생명력을 슬그머니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안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성령님 그 분 자신이십니다.

성령 받은 성도들과 교회엔 바로 이 성령께서 주신 세상과 구별 된 독특한 특성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교회에도 이런 주님의 교회의 증표가 더욱 강렬하게 드러나길 원합니다.

먼저 그 증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과 기도입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는 데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도구로 해서 역사하십니다.

뭘 믿어야 할지 먼저 내용을 알아야 믿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37절에 보면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렸다고 하죠.

40절에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했다고합니다.

42절에 보면 그들이 또 다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날 삼천명 가량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결국 베드로의 설교가 회심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회심이 오늘 한 순간에 일어난 것 같지만 사실 한 사람이 온전한 구원의 확신을 갖기까지는 말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간혹 말씀에 대한 지식이 없이 먼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있는 데 말씀을 배워야만 그 믿음이 확고해 집니다.

또 간절한 마음으로 계속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배우는 사람에겐 반드시 회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몇 시간이나 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그 정도의 말에 설득되어 삼천명 씩이나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할 수 있겠습니까?

고집스런 유대교인들이 그리 쉽게 자신들의 믿음을 바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대회심의 배경을 우리는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이들은 이미 구약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 같은 선지자들과 랍비들에게 성경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또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삼년 반 정도의 구원사역의 대부분을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어부출신인 그가 구약성경을 능통하게 인용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데 열중하셨는지를 알 수 있죠.

예수님의 집회현장에 많게는 수만명이 모였고 며칠씩 계속 설교를 들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께서는 바로 구약성경과 주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회개와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사도들이 소아시아 쪽으로 선교를 할 때 성경을 유심히 보면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서 먼저 전도를 시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구약성경을 들어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메시야가 바로 나사렛예수님이라고 전도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인간이 고안해낸 산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란 한 나라의 역사 속에 임하셨던 하나님의 실제 기록이고 사람이 구원받을 모든 길이 이 안에 있습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하나님이 성경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지금도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에 깨달음을 주고 변화를 주고 결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로마서에 기록하셨죠.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구원을 받고 나면 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생기게 됩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나면 하나님께 대해 관심이 생기게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배우는 뜨거운 열정이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교회도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계속 성경공부를 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 자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굳게 세운 교회와 성도들이 세속과 마귀에게 패배하지 않고 영광과 존귀를 누리게 될 줄 믿습니다.

다음 42절에 보면 그들이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썼다고 말씀하죠?

왜 그들이 즉시 한 일이 기도였을까요?

성령으로 거듭나면 막혔던 하나님과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뭔가 하나님을 향해 자꾸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기도하도록 시키십니다.

그동안 죄로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이제야 아름다운 교통이 이루어질 조건이 되었잖습니까?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자꾸 자신을 알려주고 싶어하시고 우리도 하나님께 자꾸 나를 어필하고 싶어하는 게 정상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 안에서 제사를 목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상행위를 다 둘러엎으시고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나님께서 간절히 우리와 만나기 위해 기다리시는 것을 잘 아시는 예수님이 본질을 잃은 유대인을 향해 울분을 터뜨리신 것입니다.

기도는 교회를 성장시키고 우리에게 모든 선물을 주시는 방편이기에 성령께서는 기도하게 시키십니다.

우리교회가 끊임없이 성도들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나오고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다음 교회의 표징은 사랑의 교제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전혀 모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42절에 보면 그들이 서로 교제하고 같이 음식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과 밥먹고 교제하는 것 우리 내성적인 사람들은 좀 불편하고 힘듭니다.

그래서 ‘언제 밥 한번 먹자’이런 말은 친한 사람들끼리나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 뒤섞여 밥을 먹고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친해지고 사랑하는 관계가 됩니다.

성령께서는 죄로 인해 단절 된 사람들끼리의 관계도 회복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히 임하시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동적으로 일하시면 성도들간에도 놀라운 친밀감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같은 교회에 다닌다고 저절로 친해지지 않습니다.

각기 다르게 살던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 그냥 예배만 드리고 돌아가는 요즘 교회에서 성도들의 아름다운 교제가 점점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다 각자의 삶 속으로 돌아가기 바쁘고 나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죠.

하나님이 우리를 유기적인 교회로 부르신 것은 함께 가야 이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배드민턴 국가선수팀이 맹훈련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선수들이 같이 훈련을 받으니 저렇게 강도 높은 훈련도 이겨내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서 그 훈련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만큼 해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식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사랑과 기도로 격려하며 함께 갈 때 그 어떤 세상적인 도움보다 우리에게 더 용기와 힘을 줍니다.

믿음의 식구들이라 해도 성령이 충만할수록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되죠.

본문에 보면 우리 눈을 의심케 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구절이 보입니다.

44절, 45절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아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들입니까?

축의금도 장부를 찾아보고 딱 받은 만큼 계산해서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연인을 사랑하고 목숨을 내줘도 아마 신용카드는 주기 힘들걸요.

본문에서 정말 믿기 힘든 천지가 개벽할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들에게 확고한 영생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성령의 큰 사랑이 그들 속에서 역사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해야 상대의 결핍과 필요가 보입니다.

언젠가 일일드라마에서 잠깐 보았습니다.

아이가 빨아 널어놓은 속옷이 낡은 것을 보고 선생님이 속상해하더군요.

아이의 낡은 속 옷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가서 사 주잖아요.

철이 들어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되면 어머니가 여름에 들만한 가방이 없다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아버지의 바짓단이 낡아진 것이 보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뭘 싸가지고 와서 서로 건네주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참 좋습니다.

함께 먹자고 과일도 가져오시고 음료도 들고 오시고 작은물건 하나라도 가져와 나누는 이런 모습들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오늘 본문에 초대교회 공동체 속에는 이 사랑의 나눔의 역사가 정말 강력하게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소동은 초대교회 초창기에 아주 강하게 일어나고 그 이후는 잦아듭니다.

자기를 희생하며 다른 이를 섬기는 행동도 역시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하실 때 일어난 것이죠.

오늘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는 이 모습은 교회가 한 생명체라는 것을 증거합니다.

내 몸의 일부가 굶으면 자연스레 먹이게 되는 것입니다.

목마르면 마시게 하는 것이죠.

이 모습은 장차 형제를 내 몸과 똑같이 사랑하게 될 천국에서의 삶의 단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이런 사랑으로 더욱 충만해서 혼자가기 어려운 길을 서로를 의지해 힘차게 나가기를 축복드립니다. 아멘.

다음 초대교회에 일어났던 또 하나의 강력한 증표는 기쁨입니다.

46절에 보니 그들이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식탁에 함께 앉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떡을 떼고 음식을 먹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죠?

먹는 얘기가 많이 나오는 걸 보니 우리교회가 잘 먹는 게 성경적이란 확신이듭니다.

오늘 초대교회에서 역동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의 배경에서 느껴지는 게 있지않습니까?

바로 폭발적인 기쁨입니다.

이들이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고 무언가 선한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실 때 나타나는 가장 확실한 증표 중 하나가 바로 기쁨입니다.

사람은 마음 속에서 스스로 기쁨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기쁨을 만들어 보려고 해도 안됩니다. 멋쩍어 지죠.

사람들이 평생 찾고자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은 바로 이 기쁨이 아닐까요?

무언가를 통해 한번 맛보았던 그 기쁨, 그런데 너무나 순식간에 시라져버리는 감질나는 그 기쁨.

어떤 기쁨도 한순간 최고에 도달했다 아무리 자꾸 되새김질해 보아도 그 맛은 점점 옅어져가죠.

왜 사람들이 추억을 그리워합니까?

그 때 그 달콤했고 기쁘고 행복했던 그 맛을 좀 다시 볼 수 있을까 해서 그런 것이죠.

사실 과거는 지금 회상하는 것만큼 그렇게 좋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무언가 인생에 기뻤던 순간이 있었다고 믿고 싶고 지금 우리에게 그런 기쁨이 부재한다는 불만족과 강력한 염원을 말하는 것이죠.

인간에게는 속에서 기쁨을 생성할 능력이 없습니다.

기뻐할 조건이 외부에서 오지 않으면 아무리 기쁨을 가지려고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기쁨이 생기지 않습니다.

웃음치료법을 보면 억지로 웃으면 뇌도 속아서 엔돌핀을 분출한다죠.

기분 나쁜 말 한마디 듣고 나면 억지로 좋은 기분을 만들어 논 게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외적 조건이 없어도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지루하고 즐거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믿음 안에서 지루하고 침울한 광경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다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처지에 놓인 바울사도조차도 그런 상황에서 내가 주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편지를 보냅니다.

사형선고가 앞에 있고 감옥에 갇힌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죽음 앞에선 만용도 허세도 없다는 것이 사형을 집행해 본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최민0 조차도 ‘나 떨고 있니?’ 이렇게 물었잖습니까?

초대교회 기독교인의 표지는 이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기쁨은 교회의 표징이고 성도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환경이나 조건을 뛰어 넘습니다.

물론 상황이 기뻐할 만하다면 더 좋겠지만 삶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기쁠 수 있는 것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주신 기쁨입니다.

싫은 일이 생기고 낙심할 일을 덜컥 만나면 우리도 순간 기가 꺽이고 마음이 약해지는 걸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주신 기쁨의 원천이 있습니다.

시편을 기록한 다윗처럼 내 스스로를 격려하고 하나님을 보면 우리 안에 기쁨이 회복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고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러면 어느새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이 문제도 잘 해결될 거라는 안도감이 생깁니다.

마인드 컨트롤과 힐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 기쁨의 강이 넘쳐흐른다고 하신 약속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고 주님의 기쁨이 우리 내면에 잔잔히 채워질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좋은 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기쁨을 맛본 사람들은 항상 믿음 안에 거하고 기도와 말씀을 통해 성령님이 주시는 이 기쁨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깁니다.

이 기쁨이 있으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도 항상 신선하게 느껴지고 작은 일에도 큰 행복을 느끼고 귀찮은 일도 두려운 일도 넉넉히 해결해 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조금만 기뻐할 일이 있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쁨을 빼앗는 존재는 마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쁘고 행복하면 그 순간 뭔가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까?

기쁨을 빼앗기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빼앗을 자가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기뻐하길 원하기만 하면 이미 우리 안에 기쁨이 존재하고 있습니다.성도들이 항상 기뻐하지 못하는 것은 우울을 좋아하는 죄성 때문입니다.

근심과 염려가 더 우리 죄성에 맞아서 그냥 거기 주저앉아 있으려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죠.

우리가 행복과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기뻐하려고 마음먹고 의지적으로 순종하면 성령께서 기쁨의 샘물을 다시 솟구치게 해주십니다.

초대교회에는 성령께서 크게 임하신 상황인지라 절로 큰 기쁨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교회에도 이런 기쁨이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를 방문하신 분들이 항상 말하는 게 교회가 참 편안하고 밝고 기쁜마음을 준다는 거예요.

성도님들도 마음 속에 이미 성령께서 기쁨의 원천이 되시는 줄 믿으시고 항상 믿음으로 기뻐하는 삶을 사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초대교회의 탄생을 통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을 믿는 믿음 위에 3주년을 맞은 우리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굳게 세우기를 원합니다.

또 주님의 교회의 징표인 말씀과 기도의 열정, 사랑의 교제, 성도안에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기쁨이 날로 증가되고 성장되는 교회가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그럴 때 47절과 같이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고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