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몇 주에 걸쳐 2천년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가장 심원하고 신비한 사건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50일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과 승천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인간의 자연사 속에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경이롭고 신비할 따름입니다.
이 신비한 하나님의 구원의 작정 마지막에 오늘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로부터 열흘 뒤 오순절 명절을 맞아 하나님의 제3위격이신 성령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역사적으로 강림하신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성령께서 강림하신 이 오순절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오순절 날,
오직 하나의 베들레헴과 하나의 갈보리가 있는 것처럼 오직 한 번의 오순절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베들레헴 마굿간에 오셨던 영광스런 밤처럼, 그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날처럼, 성령께서 강림하신 그 오순절도 유일하고도 위대한 날입니다.
오순절의 기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여러 기적들 중 하나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속죄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처럼 성령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헌신하려고 이 땅에 내려오신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형상을 입고 죄인들 속에서 살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절대자인 하나님의 헌신적인 사랑입니다.
성령하나님이 오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셔서 천박하고 궁색한 사람들 틈에 어울려 전 생애를 보내셨습니다.
성령님은 온갖 더러운 생각과 오만과 비참함으로 가득 찬 바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죄와 함께 거하시는 것은 말로 할 수 없이 자신을 낮추신 겸손한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저는 오순절에 이 땅에 오신 성령님에 대한 설교를 준비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지칠 줄 모르는 성실과 진심을 다해 인간들 가운데 들어오시는구나.
십자가에서 목숨을 주고 죽으신 성자 하나님이 하늘에 복귀하시고 이제 성령하나님이 뛰어 드셨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 생명과 모든 것을 주신 구원의 행동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구나.
사실 그런 하나님은 인간 편에서 볼 때 너무나 이상한 신이십니다.
왜 인간에게 사랑하자고 하십니까?
제우스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부처가 나를 사랑한다고 한다면 얼마나 어색합니까?
누군가 알라신을 너무 사랑한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런 말 들어보셨습니까?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의 신들은 그냥 멀리서 인간이 드리는 제물과 제사나 받고 흉한 일에서 인간을 지켜주는 것이면 충분합니다.
인간들은 신과 사랑을 주고받는 그런 일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신을 자신의 삶에 깊이 끌어들이고 싶어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보기에 가장 이상한 신이십니다.
누가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 데 자청해서 대신 죽으시고 멀뚱히 바라보는 인간에게 끝없이 손을 펴시는 자존심도 없어 보이는 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밀어냅니다.
상대를 나보다 더 사랑하게 되면 자존심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자식에 대해 자존심을 내세우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존심을 내 세우는 연인이라면 상대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이 다가오심의 정체는 바로 사랑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심을 묵상하다 보니 하나님의 사랑이 참 새삼스러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닥 하나님께 소중할 것 같지 않은 나를 이렇게 귀하게 대하시고 목숨처럼 아끼신다니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로 안다면 힘든 시련의 때에도 우리의 눈물과 상처를 싸매주시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넉넉히 위로받을 수 있을텐 데.
고아처럼 쓸쓸하고 허전한 인생을 보내는 성도들을 볼 때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이런 좋으신 우리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고 더 깊은 은혜를 날마다 실제로 체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또 성경을 통해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을 배우고 체험해가듯이 사랑의 성령하나님에 대해서도 배워야 할 줄 믿습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오늘 사건을 우리가 나누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바통터치를 하며 릴레이 사랑을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치지 않는 사랑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아버지는 나의 삶에 모든 좋은 계획들을 준비하시고 예수님은 연약한 나를 위해 날마다 중보해주시고 성령님은 내 안에 함께 사시며 하루 하루를 인도해 주시니 우리는 얼마나 축복된 사람들입니까?
이런 사랑을 더 확신하고 더 깊이 누리는 시간이 되도록 성령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먼저 본문을 통해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역사성을 살펴보고 그 다음 그 성령님과 우리의 관계성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시며 보내주실 것을 약속했던 성령님이 강림하시는 과정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12절에 보면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감람산 정상에는 예수님승천교회가 세워져 있고 성지순례객들이 꼭 들르는 필수코스입니다.
승천교회 안에는 주님이 승천하실 때 남기셨다는 오른 발 모양의 움푹 파인 바위돌이 보존되어 있는 데 과히 신빙성이 있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현장에선 주님이 그동안 말씀해 오셨던 두 가지 예언이 재차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성령께서 이 땅에 강림하실 것과 또 하나는 오늘 본문 11절에 있는 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재림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 말씀대로 성령께서 오순절에 이 땅에 오셨고 재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예루살렘시가 내려다 보이는 감람산 자락엔 무덤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좀 괴이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셨던 감람산으로 다시 재림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먼저 부활하겠다고 그 곳에 무덤을 썼기 때문이죠.
덕택에 석곽묘지 한 개의 값이 1억원을 호가한다고 합니다.
도시 바로 곁에 즐비한 하얀 석곽묘가 예루살렘을 한층 묘하고 신비한 분위기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처음 오셨을 때처럼 한 지역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온 세상이 다 볼 수 있게 오신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감람산에서 주님이 승천하시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 본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14절에 보면 주님의 마지막 명령대로 성령을 받기 위해 임시 거처인 다락방으로 올라가 기도에 전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성령받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것이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성령세례를 받는 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의미 아닙니까?
아무리 부활하고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목도했다 해도 사람 속의 두려움이 쉽게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지도 않습니다.
그런 두려운 일을 자청할 만큼 용기 있던 제자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그동안 살펴보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사역의 힘을 얻기 위해서나 현실에 도움이 될 능력을 얻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구하는 것하곤 상황이 다릅니다.
지금 예루살렘 성내에는 명절을 맞아 로마군인들이 주둔해 있습니다.
황제에 대한 반란의 기미라도 보인다면 잡혀가 십자가형을 받을게 뻔한 시국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미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갔다는 소문을 내놓은 상황인데 거기다 부활을 증거했다 무슨 일을 당하려고요.
어쩌면 제자들은 여전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 땅에 메시야왕국을 이룰 꿈을 꾸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부활한 주님과 함께 지내던 중에도 지금이 메시야 왕국을 이룰 때가 아니냐고 예수님께 물었었죠.
제자들은 대부분 이스라엘 해방을 꿈꾸며 주님을 따랐고 그중에는 열심당원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세례를 받으면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받고 로마도 복음으로 전복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마가복음 16장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이런 성령의 권능을 받아 파죽지세로 로마군을 밀어내고 메시야왕조를 이룩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자기들과 함께 왕 위에 올라 다스리는 시나리오죠.
성령강림은 그러나 그들이 예상했던 대로는 아니었다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의견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성급하게 추측하며 얼마나 많은 소설을 썼다 지웠다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해서 선을 만들어내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잘못 된 선택조차도 결국 좋은 결과로 인도해주시지 않습니까?
심재숙집사님이 말씀하신 딱 맞는 어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네비게이션이다.
우리가 잘못 된 길로 들어서면 그 자리에서 다시 경로를 수정하셔서 목적지로 안전하게 인도하신다.
대단한 통찰력이십니다.
오순절 날이 되자 드디어 그들이 간절히 고대했던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이 땅 위에 강림하시는 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본문을 보니 성령의 강림은 초자연적인 특별난 현상을 동반하고 오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성령이시기에 그 존재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게 가시적인 현상을 동반하신 것이죠.
이 날 일어난 신비하고 독특한 이적을 어떤 신학자는 성령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왕으로 강림하셨다는 장엄한 대관식과 같은 의식이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날 기도하던 마가의 다락방에는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내려와 집 주변에 가득하게 머물고 있었습니다.
마치 태풍 때 밤새 울어대는 바람소리처럼 기이한 소리가 그 한 집에만 나타나 장시간 머물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광경이 너무나 신기해서 오순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마가의 집으로 몰려들었고 베드로의 즉석 설교로 3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이어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의 귀에는 세찬 바람소리가 오묘하게 들렸고 눈에는 불의 혀가 갈라져 불꽃이 하나씩 각 사람 머리 위에 떠올라 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각자 다른 외국말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며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날 세계 각처에서 명절을 지키기 위해 몰려 온 사람들이 각기 자기 나라 말로 하나님이 최근 이루신 큰 일에 대해서 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말한 방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하는 영적인 방언이 아니고 실제 외국어였습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신 증표로 왜 하필이면 외국어 방언이 터져 나오는 이적을 베푸셨을까요?
이것은 성령께서 앞으로 행하실 사역을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말이 다른 땅 끝의 종족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 되고 모든 민족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듣고 구원받게 하실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죠.
이렇게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제자들은 그날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성령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세례와 권능은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권능이었습니다.
로마를 뒤엎을 권능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증거하다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권능이었던 것이죠.
영혼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을 받게 된 것이 바로 성령세례의 권능입니다.
죽음과 두려움에 묶여 자신에게 갇혀있는 제자들이 한계를 뛰어넘는 우주적인 하나님의 경륜에 자신을 던지게 되는 그 놀라운 능력이 바로 진정한 성령세례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지금도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죽음도 관계치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이 성령세례를 받은 제자들을 통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듣는 이의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믿게 하고 구원받은 백성들을 모으시는 사역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날 이후 1900년이 지나서야 우리나라까지 그 복음이 전파되었고 우리가 복음을 듣고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이 세상에서 주님이 재림하실 때 까지 모든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고 계십니다.
이상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셨던 신비하고도 역사적인 그 날의 실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성령님과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입니다.
본문에서 성령이 오신 이유를 명확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우리 안에 두 가지 측면에서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첫 째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며 영원히 내주하시는 것이고 둘째는 거듭난 성도에게 성령충만을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가장 중요한 성령님의 사역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속죄를 우리가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 심령에 다가와 일하십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이 일을 해주지 않으시면 예수님이 이뤄놓으신 구원의 역사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무관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려는 사람들이 완강히 예수님을 거절하는 것은 성령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가장 크고 신비한 사역은 거듭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출생으로는 절대로 영적인 세계와 하나님에 대해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받지도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이 자연세계 속에서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장차 우리가 살아갈 영원한 세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가장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 나와 나의 자녀, 우리 가족들이 거듭났느냐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곧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죄를 용서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영혼은 결코 영생의 복락을 누릴 수 없고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지 않습니까?
어느 누가 예수님보다 더 정확히 내세를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해 늘 관심을 갖고 점검해야 합니다.
리처드 백스터의 회심이라는 책을 보면 거듭난 사람의 증거들을 제시합니다.
오늘 그 회심의 증거들을 말씀드리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제시하는 증거들을 보면 솔직히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 어어, 이러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아직 회심하지 못한 건 데 ..’
거듭남에 대해 우리는 솔직하고 진지하게 나 자신을 살피는 신중함이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그게 안전합니다.
보통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외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편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대 앞까지 가서야 구분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생활을 한 사람들은 종교적 습관인지 성령으로 거듭났는지 인식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죄에 깊이 빠져 살던 사람의 경우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시점이 뚜렷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독교방송에서 한 미국인의 간증을 본 적이 있습니다.
중년의 이 미국 남자는 불행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마약과 폭력과 절도 행각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교도소도 여러차례 드나들고 그의 안에 분노가 가득해 아무나 붙잡고 시비를 걸다 폭행하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어디를 가도 그의 곁엔 나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를 다니고 있던 어린 아들이 술에 취해 소파에 벌렁 누워있는 자신을 한참 내려다 보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아빠도 구원을 받아야 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귀찮아서 네가 교회 다니는 것은 말리지 않겠지만 나한테 그런 소리하지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들은 계속해서 아버지가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끈질기게 설득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마침내 분노가 폭발해 욕을 하며 아들을 나무라며 하나님을 공격했고 아들은 성경말씀을 갖고 조목 조목 아버지의 비아냥에 응대했습니다.
그렇게 말도 되지도 않는 실갱이를 한 참 벌이는가 싶었는 데 어떤 한 순간 갑자기 이 남자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가 순식간에 일어났습니다.
왈칵 폭포수와 같은 눈물이 쏟아지더니 자기가 살아왔던 죄악된 모습이 견딜 수 없어 회개가 터져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바닥에 꿇어 앉아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날 이 남자는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방송에서 이 남자는 자기에게 있었던 그 날의 일들을 침착하게 이야기 하는 데 과연 저 사람이 그런 악한 사람이었을까 의심이 들만큼 차분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성령께서 이런 극악한 부류의 사람들 속에도 들어오시면 이렇게 거룩한 성도의 모습으로 달라지는 것을 극적으로 볼 수 있었던 케이스였습니다.
보는 내내 정말 성령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는 신비가 너무나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났는지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남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면 이 문제를 모든 것을 제쳐두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의논하고 상담과 교육을 통해 확실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우리가 정말 소망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거듭나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거듭난 것도 아니고 자연인도 아닌 중립적인 위치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면 중립은 없습니다.
거듭났거나 아직 거듭나야 하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을 위해 존재합니다.
아무리 멋있게 신앙생활하고 만족을 누리는 교회활동을 한다 해도 구원받지 못했다면 그게 다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믿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아온 것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유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유쾌한 날이 온다고 베드로사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천국의 유업을 확신하고 소망가운데 사는 삶이 얼마나 유쾌한 날들입니까?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아니면 누가 이 땅에서 이런 안전한 보장을 받고 두려움 없는 내세를 맞이할 수 있습니까?
아직 하나님의 축복 안에 들어오지 않고 진노아래 놓인 가족들을 위해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대상자를 정하고 우리는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겨주실 주시리라 믿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뒤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주하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는 체험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입니다.
성령충만이나 성령의 은사가 임하는 것은 물론 체험적인 면이 많습니다.
마음에 평안도 임하고 병이 치료되기도 하고 능력이 임하기도 하죠.
만일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것이 느껴진다면 그것도 오싹한 일입니다.
내 안에 다른 영이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 건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신질환자나 신접한 무당 같은 경우 다른 인격체를 자기 속에서 느낀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주하시는 성령하나님은 결코 우리 심령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회식자리에도 사장님 주변을 피해 멀찍이 앉는 게 편한 사람들인 데 하나님이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는 게 느껴진다면 얼마나 우리가 주눅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불편을 느끼고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게 느껴지지 않기에 우리가 마음껏 죄도 짓고 방종한 생활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거룩하신 성령님께 얼마나 희생과 불편을 감수하고 계시는지요.
성령님은 이렇게 느껴지지 않지만 우리 안에 거주하시며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지도하시고 도와주십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통치를 받고 있기에 왠지 모르는 안도감과 평안함으로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가 거듭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분명한 확신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믿으며 두려움 없이 담대한 삶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것은 성령충만에 대해서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것만으로는 이 땅에서 죄에 대항하고 악을 정복하며 능력 있게 살기가 어렵습니다.
성령충만은 거듭난 성도가 성령의 강력한 영향력을 덧입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난 성도들도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면 믿음이 현실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령충만을 경험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초강력 영적무기인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하고 삽니다.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여전히 모든 게 불확실하고 자기의 힘으로 모든 것을 헤쳐나가야 하기에 걱정 근심 염려가 항상 떠나지를 않습니다.
혹시 어려운 문제라도 만나면 얼마나 힘들게 시달리는 지 안쓰러울 지경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강한 영향력과 권능을 받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충만을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오늘 제자들처럼 성령충만을 사모하고 지속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성령충만을 위해서는 내 뜻과 방식대로 내 인생을 살지 않고 완전하신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겠다는 권리의 이양이 필요합니다.
성도들이 성령충만을 받지 못해 무기력하게 사는 이유는 성령께서 날 강하게 인도하시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을 받아 능력 있게 내 삶을 성령님과 함께 운영해가는 유익이 얼마나 큰지 안다면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자주 현실에서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우울감과 실패의식에 빠지곤 합니까?
우리 인격과 능력을 가지고는 항상 기대에 미치지 못하니 실패하고 또 실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충만할 때를 보면 능력은 극대화 되고 우리 생활엔 놀라운 질서와 자신감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유와 너그러움과 사랑이 잔잔히 흘러나올 때도 성령충만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에 대한 확신이 들 때도 역시 성령충만할 때입니다.
내게 주어진 일을 뛰어나게 수행할 때도 가만히 보면 성령충만할 때입니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실패하고 주저앉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출애굽기35장31절을 보면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의 영이 책임자인 브살렐에게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아름답게 일을 완수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시니
성령으로 충만하면 지혜와 총명과 지식에 충족해진다는 것입니다.
직장의 업무나 살림살이나 학업을 감당할 때도 그래서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또 성령충만하면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언지를 정확하게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성령충만해지자 즉시 그 자리가 복음을 증거 해야 할 자리라는 것을 알고 담대하게 복음을 제시하지 않습니까?
성령충만하면 지금 내가 내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를 생각하게 하고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를 깨닫게 됩니다.
현실적으로 닥칠 어려움과 위급한 상황에 대해서도 성령께서 대비하게 하십니다.
며칠 전 오전 기도회를 하고 있었는 데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우리 딸에 대한 기도가 튀어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아무래도 교회와 성도님들에 대한 기도를 우선하게 되고 가족들에 대한 기도는 후순위로 밀리게 되는 데 그 날 참 이상하다 생각하고 간절하게 딸을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그 시간 쯤 자전거를 타고 지하철 역으로 가던 우리 딸이 자동차가 비껴가며 자건거 바퀴를 치고 곤두박질 치는 사고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큰 사고가 있을 수도 있었는 데 미리 기도하게 하셨기에 무릎에 큰 멍자국과 손바닥에 찰과상으로 끝났을지도 모릅니다.
성령충만이 우리를 얼마나 유익하게 인도하시는 지는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풍성한 은혜와 능력 속에서 당당하게 살기를 원하시기에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이 함께 기도했듯이 성령충만을 위해 합심해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하루종일 종종 거리는 것 보다 한 시간 기도하고 성령으로 충만을 받는 게 더 빠릅니다.
과제와 학업을 위해 여러 시간 노력하는 것 보다 삼십 분 기도하고 성령님이 주시는 지혜를 충만히 받는 게 훨씬 더 효율적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오늘 오순절에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임하신 성령하나님에 대해 살펴보며 우리 안에 오셔서 선한 일을 이뤄주시는 성령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령하나님은 예수님처럼 인격적인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우리 안에 내주하시며 때로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우리를 위해 인생의 작전을 짜시고 이끄십니다.
또 우리가 성령충만을 원하며 간절히 기도할 때 더 강한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가족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반드시 구원의 축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 마음을 잘 살펴 죄와 거짓을 멀리하고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여 우리 삶의 현장에서 생명력과 능력이 넘치는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3년4월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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