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베드로의 투옥 (사도행전12장1절-16절)

남수연 2011. 8. 16. 00:30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었던 주후 44년경 유월절 명절은 초대교회 역사상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날이었습니다.

초대교회를 이끌던 사도 야고보가 헤롯의 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사도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고 명절이 끝나면 죽게 될 운명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유대 최고의 명절로 들떠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3백만명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고 기록합니다.

하필 이런 때 사랑하고 의지했던 사도를 잃은 슬픔과 곧 닥쳐 올 또 다른 두려움에 교회가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어릴 때 어느 설날 저녁, 집집마다 시끌벅적한데 전 지지는 기름 냄새 하나 없이 썰렁한 우리 집 부엌을 바라보며 슬펐던 기억이 있습니다.

때로 아픈 현실에 간신히 눈물을 삼키며 길을 나섰는 데 다들 행복해 보이는 모습에 왈칵 눈물이 쏟아져 버린 적도 있습니다.

헤어져있던 가족들이 모이고 성대한 유월절 만찬을 나누는 행복한 날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만으로 고난 받는 교회는 절망감에 빠졌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5절에 보면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기록합니다.

헬라어 원문을 직역한 주석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관한 기도가 교회에 의해서 뜨겁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 번역이 더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교회가 두려워 낙심하고 슬퍼하고만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랬어야 마땅한 데 그러나 그러지 않고 간절히 뜨겁게 더 힘을 내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이죠.

이것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난에 굽히지 않고 믿음으로 일어서는 힘이 교회와 성도에게 있습니다.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다 누군가 감당 못할 고난을 만난다면 교회는 그 성도에 관한 기도가 뜨겁게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 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 교회가 서로를 위해 항상 기도하며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길 간절히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교회의 고난과 성도의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 주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 받고 믿음으로 마음을 추스르지만 또 낙심하고 힘든 한 주간을 사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또 새 힘을 얻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믿음의 여정이란 게 달리 신통한 게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우리가 거룩하고 영험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의 모든 환란을 눈 아래로 볼 수 있는 믿음이 쎈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넘어지고 또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시 일어서고 다시 넘어지더라도 천국 도성을 향해 믿음으로 걸어 나가는 것입니다.

잠언 24장 16절은 말씀합니다.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의인과 악인에게 재앙이 같이 오는 게 인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힘을 주님이 주시고 반드시 일으켜 주시는 줄 믿습니다. 아멘.

오늘 고난과 응답으로 점차 견고해져가는 초대교회를 보며 우리의 믿음의 길을 멀리 바라보고 견고한 믿음의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본문의 역사적 시기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14년 정도 지난 때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셔서 능력을 받은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파하자 하루에 수 천명의 유대인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기적 같은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부흥되고 강건하게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죽인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의 박해가 끊임없이 교회를 도전하는 것이 사도행전에 끈질기게 나타납니다.

이런 끔찍한 교회의 박해 속에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사탄의 세력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악한 사탄의 끊임없는 방해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성도 개인의 삶을 엿보고 시험을 주고 넘어뜨리는 것도 악한 영의 일입니다.

오늘 교회 박해의 핵심에 서서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투옥한 사탄의 하수인 헤롯 아그립바왕은 유대인이 아니고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인 에돔 사람입니다.

에돔 족속은 모세의 출애굽을 방해했던 세력이죠.

예수님 탄생 때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학살했던 살인마 헤롯대왕 역시 에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권력유지를 위해 로마의 안토니우스장군의 연인 클레오파트라에게 접근해 여리고 땅을 넘겨주었던 사람입니다.

나라 땅이 마치 사유지인양 주물렀던 최악의 통치자였죠.

그의 손자 헤롯 아그립바를 조정하는 사탄의 세력에 의해 오늘 교회가 또 박해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이 헤롯왕은 로마황제에 의해 유대왕으로 임명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에돔 혈통이 약점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 초막절엔 왕이 백성들 앞에서 신명기의 말씀을 낭독해야 했습니다.

헤롯이 낭독해야 했던 신명기17장16절을 보면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헤롯이 그 말씀을 낭독하며 울었다는 역사가의 기록이 있습니다.

헤롯왕은 유대인이 자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유대인들은 다루기 힘든 참 독특한 집단입니다.

그런데 유심히 보니 유대인들이 자기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데 그게 바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님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했다고 전하는 제자들 까지 유대인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교회 중에 몇 사람을 해치기로 하고 당시 교회 핵심 지도자인 야고보를 죽인 것입니다.

3절에 보니 예상이 적중해 유대인들이 기뻐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일이라면 악한 영의 권세 아래 있는 자들은 언제 원수였냐는 듯이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더 환심을 사기 위해 베드로를 체포해 투옥시킨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엔 믿음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이유로 박해가 일어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을 방해하는 악한 세력들은 위장술의 명수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시험하고 고통당하게 하는 환경 속에는 반드시 사탄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영적으로 혼탁하고 미혹하는 악령들이 만연한 세상 속에서 성령께서 올바른 분별력을 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본문을 통해 먼저 교회와 성도의 고난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순교자의 죽음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베드로를 구해주신 주님이 왜 야고보는 구해주지 않으셨나 묻게되죠.

그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예수님과 가장 친밀한 교제를 나누었던 제자입니다.

성격이 무척 과감하고 열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레의 아들이란 별명을 붙여주셨거든요.

주님은 그가 성격대로 담대하게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될 것을 알고 계셨을 테지요.

그는 예수님의 변화산에도 함께 올랐고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실 때도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왜 그를 살려주시지 않았나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이 유독 그를 주님의 영광의 현장과 십자가의 자리까지 데리고 다니신 건 첫 번째 순교자가 될 제자에 대한 안쓰러운 사랑 때문인 줄 믿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기독교의 신비입니다.

고난을 일으키는 것은 사탄의 일이지만 성도는 고난을 통해 거룩해집니다.

교회는 순교와 고난을 통해 이 땅에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선교지에서 고난 받은 선교사들의 간증을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프죠.

자신의 고난과 희생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자녀를 선교지에 묻고 나서 그 땅의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께 나왔다는 눈물의 간증을 들을 때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성도들 개인의 믿음과 이 땅에서 누리는 축복들도 마찬가지로 고난을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신과 전문의 에릭 린드맨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고난당한 사람들의 85%가 자신의 고난이 결국 축복이 되었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고난이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결국 최소85%는 축복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가 노래합니다.

고난이 남기고 간 뒤를 보라. 그 고난의 발자국들이 지나간 자리가 기쁨으로 가득 차 넘치는 걸 보라.

인간의 죄악이 고난의 풀무가 아니면 절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께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자연재해를 통과하며 많은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축복이 임하기도 합니다.

2010년 강진으로 20만명의 사상자를 낸 아이티가 그렇습니다.

국민의 80%가 로마 카톨릭을 믿는 기독교 국가에 왜 이런 고난이 오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사실 아이티의 카톨릭은 아프리카 토착신과 혼합 된 종교입니다.

겉으론 카톨릭 신자지만 내면은 100%가 부두교라는 미신 종교인입니다.

그들은 좀비의 존재를 믿습니다.

영화에서 보셨을지 모르겠는 데 인형을 만들고 핀으로 찌르며 저주하는 종교가 바로 부두교입니다.

아이티에 강진이 일어나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강진이 일어난 후 27일 만에 건물 잔해 속에서 한 청년이 구조된 것입니다.

삼풍사고 때 박승현양이 17일만에 극적으로 구조되었었죠.

CNN보도에 따르면 에반이란 28세 남성이 자신이 일하던 쌀가게가 무너져내려 갇혀있다 구출된 것입니다.

모든 구조활동이 종료되고 시장의 건물 잔해를 걷어내다 갇혀있는 청년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최대시간이 20일입니다.

현재 기네스북에 오른 가장 오래 기록은 18일간 버틴 오스트리아의 한 소년입니다.

청년이 27일간 음식과 물을 끊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구조 된 아이티 청년이 계속 말하기를 흰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나타나 자기에게 물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에게 나타난 천사가 그에게 나타났던 것일까요?

청년의 생존이 전 세계에 알려지며 사방이 닫혀 있는 그 곳에 나타나 물을 준 흰 옷 입은 사람에 대한 궁금증도 증폭되었습니다.

의사들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지만 그의 몸 상태를 보아 반드시 누군가 물을 갖다 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이 표징이 되었는지 지진 후 거리에 나와 울며 회개하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아이티의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달이 되지 않아 4만명의 개신교 신자가 늘어났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와 영혼과 마음의 치유를 받고 있다고 합니다.

고난은 회개하지 않는 영혼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교회의 세속화를 막는 하나님의 방법이십니다.

시편 119장 67절에 말씀하지 않습니까?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다하더라도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변화되어 가는 줄 믿습니다.

우리 고난이 축복이 되기 위해선 반드시 오늘 초대교회 성도들의 기도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 앞에 뜨거운 기도가 일어나야 하는 것인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오늘 교회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신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을 보면 절망적인 순간까지 응답이 도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니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간절한 기도가 올려졌지만 유월절 명절 일주일이 다 지나도록 응답이 없었다는 것이죠.

믿음이 부족한 우리의 기도가 빨리 응답되지 않는 거야 이해가 되지만 대사도 베드로의 긴급한 기도도 빨리 응답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재산을 다 팔아 교회에 맡기고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었던 뜨거운 신앙을 가졌던 초대교회 성도들이 합심하여 드리는 간절한 기도도 응답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드디어 모든 것을 체념할 수 밖에 없는 상황까지 하나님은 듣고만 계십니다.

하나님의 인도와 우리의 요구가 다른 데서 믿음이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떤 기도가 응답되고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모른다는 게 정답일 뿐입니다.

아무리 군침을 흘리고 절절한 눈 빛으로 바라봐도 제가 양념치킨 한 조각을 주지 않을 때 우리 집 강아지가 그 이유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속으로 얼마나 치사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래도 닭 뼈가 목에 걸려 죽는다는 것을 아는 주인들은 절대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여도 주지 않은 이유를 당장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가 지난 날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이 옳으셨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에게는 순교자의 영광이 가장 좋은 길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사형집행 하루 전날 사람의 손이 아닌 천사의 손으로 극적인 구조를 받는 것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과정을 겪으며 흘리는 눈물과 땀과 수고가 힘들지만 필요하기에 허락하시는 고통임을 믿으시고 좋은 결과를 바라며 오히려 감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의 응답의 방법도 모든 사람마다 다른 응답으로 역사하십니다.

보통은 환경과 사람을 통해 극히 자연적인 것처럼 우리 삶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면서도 우연히 된 것으로 오인할 때가 많은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응답처럼 초자연적인 응답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가 베드로의 눈 앞에 보이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쇠사슬을 풀어주고 옥문을 열어주고 큰 거리까지 인도해 줍니다.

사탄의 활동하는 곳에 성령님의 역사도 강하게 일어납니다.

베드로도 기도하다 응답되지 않는 그 밤에 낙심해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6절에 보면 베드로가 두 군인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라고 되어있죠?

발이든 손이든 양 쪽이 쇠사슬에 매여 좌우에 있는 군인과 엮여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은 사형 집행일인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잠이 들어있는 데 천사가 나타나 깜깜한 감옥이 훤해졌는 데 모들 정도로 깊이 잠들었다고 합니다.

조금만 생각할 게 많으면 불면증이 되버리는 예민한 사람으로선 참 신기하고 부러울 뿐이죠?

그런 데 사실 잠든 베드로가 하나님의 도움을 확신하며 편안하게 코를 골고 자고 있던 게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예기치 않은 천사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그가 안도하며 기뻐하는 것을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자서는 안 되는 순간에 자고 있었다는 게 성경에 여러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잡하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난의 잔을 앞두고 간곡한 기도를 드리실 때 베드로가 동행했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만 그가 그날 밤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22장 45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젠 다 틀렸다 싶으면 슬픔에 빠져 자포자기하게 잠드는 기질이 베드로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밤 베드로의 잠이 바로 그런 잠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이 오면 쓰러져 잠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경험합니다.

베드로사도는 자기연민과 낙심과 절망에 빠져 잠들었던 수차례의 경험을 통해 베드로전서 5장 8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영적으로 잠들지 말라는 경고죠.

베드로 구출을 위한 기도가 오늘 정말 극적이고 눈이 휘둥그레질 신비한 방법으로 응답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우리는 초자연적인 천사가 철저히 현실적으로 베드로를 인도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 중에서 재미있는 구절이 7절입니다.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이르되 급히 일어나라고 말한 부분입니다.

천사가 자기가 나타난 것도 모르고 체념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베드로를 냅다 걷어 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직 잠이 덜 깬 베드로에게 속 옷 단단히 여며라, 발에 샌들 끈 묶어라, 겉 옷 주워다 입어라 순서대로 하나씩 지시하는 걸 보시죠?

하나님의 인도가 얼마나 구체적인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 속에 성령으로 오셔서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현실과 괴리되어 있는 분이 아닙니다.

부모가 외출할 때 아이들 옷을 하나 하나 챙겨주듯이 오늘 천사를 시켜 모든 것을 지시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아주 자세하게 아시고 우리의 위기의 순간에 꼭 맞게 도와주시는 줄 믿습니다.

조0기 목사님이 LA에서 부흥회를 하실 때 30층 호텔에 투숙하셨는 데 방이 27층에 있었다고 합니다.

한 밤 중에 자는 데 자꾸 전화가 울려서 받아보니 동행한 장로님이 로비에 서 다급하게 전화를 한 것입니다.

호텔에 불이 나서 벌써 불길에 휩싸였으니 얼른 내려오라고 야단입니다.

전기는 이미 다 나가 캄캄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데 창문을 내려다 보니 소방차가 요란스럽게 모여 들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아뜩해지며 우선 옷을 갈아 입으려고 잠옷을 벗었는 데 깜깜한 방에서 옷이 안 보이는 겁니다.

온 몸이 떨리고 정신이 없으니 간신히 찾은 바지를 입는 데 발을 잘못 꿰었는지 도무지 걸음이 걸어지질 않는 것입니다.

벌써 방안으로 연기가 새 들어오고 있는 데 생각이 다 사라지고 멍해지는 데 갑자기 속에서 성령님이 뛰어라, 뛰어라 하시는 겁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나 옷을 집어 던지고 속옷만 입은 채로 문을 박차고 나왔는 데 벌써 복도에 연기가 가득하더랍니다.

뛰어도 뛰어도 계단이 끝이 없는 데 아무 생각도 안 나고 그냥 예수님, 예수님 소리만 외치며 내려오셨답니다.

로비에 도착하니 밑에서 담요를 하나씩 던져 주는 데 뒤를 돌아보니 다들 벗고 뛰었더래요.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면 지혜고 총명이고 어디 갔는지 아무 생각나지 않습니다.

제가 초보운전 때 접촉사고가 났는 데 비상등을 키려는 데 어디 있는지 갑자기 생각이 안나더라구요.

아무거나 막 누르는 데 와이퍼도 움직이고 라이트도 켜보고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정말 큰 재난을 당하면 아무 생각이 안난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그럴 때라도 마음 속에 간절히 주님을 부르면 성령께서 위기를 모면 할 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조목사님은 부들부들 떨면서 옷 입을 생각만 하고 있을 때 성령님이 그냥 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연기에 질식해서 큰 일 당할 뻔했다고 말씀합니다.

기도 응답의 방법이 어떤 종류이든 우리에게 가장 정확하고 완전한 방법으로 세심하게 인도하시는 주님을 믿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베드로를 감옥에서 이끌어낸 성도들의 모습을 좀 볼까요?

5절에 베드로의 석방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감동적입니다.

그런데 14절을 보면 감옥에서 탈출한 베드로가 왔다는 여종의 보고를 받은 성도들의 반응이 좀 엉뚱합니다.

15절에 보면 여종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 지금 미쳤니?

여자 아이가 힘써 정말이라고 하자 그들이 그러면 그의 천사라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바꿔 말한다면 그렇다면 그건 베드로가 죽고 귀신이 온 게 틀림없어.

이건 베드로가 살아 돌아올 수 없을 거란 믿음이 너무나 확고합니다.

뜨겁게 기도하던 믿음 좋은 초대교회 성도들도 사형집행 하루를 앞 둔 시점에서 우리처럼 응답을 포기하고 체념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구원의 결말과 문제의 해결이 온전히 우리 손에 달려있지 않은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우리 장로교에서는 아주 중요한 교리 중 하나가 성도의 견인입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끝까지 붙들어 주신다는 것이죠.

우리 믿음의 여하에 따라 응답되거나 아니거나 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설령 그들이 믿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면 주님 뜻대로 응답하고 간섭하십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다 온전한 믿음이 생기지 않아도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께 담대하게 간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그런데 왜 그들이 그렇게 베드로의 석방에 부정적이 되었을까요?

15절에 보면 그들이 여종의 말을 듣고 너 지금 미쳤냐고 말했죠?

화가 좀 나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야고보를 데려가시고 베드로의 사형 날을 하루 앞두고 까지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화가 좀 났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어지고 어려운 상황과 문제가 지속되면 우리 맘에도 은근히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섭섭함이 자리 잡는 것을 봅니다.

그 마음은 어느새 우리를 완고하고 경직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마음을 닫게 만듭니다.

여종이 아주 강력하게 베드로 음성이 확실하다고 말하는 데도 그의 천사라고 계속 억지를 부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복이 되게 하시려고 때로 기다리게도 하시고 낙심과 좌절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때가 있음을 믿고 인내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젠 구출되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너무 늦은 때는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했으면 끝까지 기다려보는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오지 못하던 베드로가 그 순간 대문 앞에 서있듯이 우리 기도의 응답도 어느 날 우리 대문 앞에 서 있을 줄 믿습니다. 아멘.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의 손길로 붙들어 주시는 초대교회는 기도로 큰 위기와 박해를 이겨 냈습니다.

23절을 보면 교회를 핍박하던 헤롯은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5일간을 끔찍한 고통 가운데 살다 세상을 떠났다고 전합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던 두려운 환경과 심란한 문제들이 반드시 물러갈 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4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위기를 넘긴 초대교회는 베드로 중심에서 사도 바울 중심으로 넘어가며 세계 선교를 향해 달려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고난과 승리 후에는 반드시 믿음의 성장과 우리의 지경이 넓어지는 축복이 임하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확신하며 담대하게 세상과 맞서고 고난을 노려보며 승리하는 한주간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