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래서인지 성령의 단비가 촉촉이 내리고 있군요.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나누는 중에 우리 마음 가운데도 성령의 단비를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느낀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의외로 성령에 대한 친밀도와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은 삼위하나님 중 한 분이신데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에 대해서는 많은 깨달음을 가지고 있고 교제도 친숙한 반면 성령님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령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고 성령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본문은 오순절에 임한 성령강림 사건으로 우리가 아주 잘 아는 내용이고 그동안 많은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나누는 것은 우리도 이와같이 성령충만을 받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할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 충만 할 때 우리에게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성령 충만하지 못한 그리스도인 만큼 불쌍한 존재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세상의 삶도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그렇다고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기쁨과 은혜를 누리며 살지도 못하니까요.
게다가 명색이 하나님의 자녀인지라 악한 영과 세상은 그를 넘어뜨리려 수시로 공격을 가해옵니다.
성령 충만 하다면 모든 환난과 시험을 이기고 값진 믿음의 성숙을 선물로 받겠지만 성령충만 하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넘어지고 쓰러져 항상 곤고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간 제자들과 유하시다가 승천하시며 명령하신 말씀이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그들을 제자로 부르신 목적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24장 46절에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 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 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 어마어마한 사명을 감당하기에 제자들은 턱도 없이 연약한 자들이었습니다.
죽음이 두려워 메시야로 믿고 따랐던 예수님의 고난을 외면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바로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47절에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 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 받지 않고는 사명의 완수는 택도 없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18절에도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요한복음20장22절에도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능력 있는 삶을 살기위해서는 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12장7절에도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7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 라고 말씀하시며 보혜사 성령께서 오심이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하심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저는 이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니의 관심은 언제나 우리에게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릴레이 사랑을 좀 보십시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 친히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위해 대신 죽으시는 상상치 못할 일을 하셨습니다.
그 일을 마치지사 이번에는 성령하나님께서 바톤 터치를 하시더니 이젠 아예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며 함께 사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오물로 더럽고 냄새나는 짐승 우리를 마다 않고 태어나시더니 성령님께서도 온갖 죄로 더러워진 마굿간 보다 더 지저분한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더러운 곳에서 살기 싫으시죠?
작년에 우리 학교에서 수련회를 갔는 데 숙소가 얼마나 낡고 지저분하던지 그 곳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교사들은 정말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런데 명절 마다 식구들이 모이는 부모님 댁은 그 숙소보다 더 비좁게 자리를 깔고 눅눅한 이불 위에 누워야 하지만 우리가 즐겁지가 않던가요?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지성소에 비할 때 쓰레기통 같은 우리의 마음속도 성령님은 좋으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니까요.
우리가 눈물을 쏟으며 비통할 때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우리를 다독여 주십니다.
감당 못할 문제 앞에서 주저 앉고 싶을 때 용기를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조차 못할 때 성령님은 탄식하시며 기도해주십니다.
우리가 과연 이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들인지 정말 송구한 마음이 들지만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런 과분한 성령님의 보호와 인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령님은 우리 속에서 그것보다 더 일하시기 원하신다는 겁니다.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삶은 그것이 다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세상이 감당 못할 사람,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으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에 나타난 바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습니까?
첫째로 죄 문제를 해결하셔야 합니다.
본문인 오순절에 성령 강림 사건이 있기 전 사도행전1장16절부터 26절까지에 베드로가 주축이 되어 죽은 가룟 유다 대신 맛디아를 뽑아 12제자에 가입시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기간 중에 잃어난 이 사건은 큰 의미가 있는 줄 압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판 후 자살해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베드로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공백이 생긴 12제자의 수를 채우려 했습니다.
시편109장 6절 말씀을 통해 그는 가룟 유다 대신에 다른 이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년수를 단축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라고 시편의 말씀이 바로 가룟 유다에 대한 말씀임을 성령께서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선택을 따라 죄의 길로 갔기 때문에 그의 제자 직분을 빼앗고 다른 사람을 세워야 하나님의 교회가 바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기도하고 기다릴 때 개인 가운데 죄 문제를 해결하고 회중 가운데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의 보궐선거를 하는 과정에서 가룟 유다의 끔찍한 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났던 자신들의 죄를 왜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자신들도 예수님을 배신한 유다와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것은 죽음 앞에서 예수님을 팔 수 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모여 있는 이 120명의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이 서신 법정에서 주님을 변호하고 석방을 외친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배신했던 각각의 죄를 떠올리며 통곡하며 회개했으리라 확신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먼저 우리 가운데 있는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이미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항상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걸 알고도 버리고 회개하지 못하고 죄와 짝하여 사는 모습이 아직도 우리에게 있지는 않은지요.
우리에게 늘 마음에 걸리는 죄가 있습니까?
성령 충만을 받으려면 그걸 버리는 결단을 하셔야 합니다.
혹시 죄가 없으시다구요?
그렇다면 더욱 회개하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7장24절에 사도바울은 죄 문제로 갈등하다가 이렇게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바울 보다 더 예수님께 순종하여 헌신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속에 있는 죄의 문제로 그는 괴로워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면 갈수록 경건한 그리스도인 일수록 자신이 얼마나 죄로 오염되어 있는지를 통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혹시 영적으로 너무 둔감한 상태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히브리서12장4절에서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 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적당히 죄와 타협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죄문제에 대해서 명0교회 김0환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김0환 목사님이 바둑을 밥 먹는 것보다 더 좋아하셨다고 하더라구요.
바둑을 좋아하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지나치게 좋아하다보니 한번 잡으면 너 덧시간이 훌쩍 가버려서 말씀 준비도 소홀하게 되더랍니다.
그래서 이젠 바둑을 끊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그게 그렇게 힘들더랍니다.
일주일을 바둑에 흠뻑 빠져서 시간을 보내고 주일 강단에 서면 성도들 머리가 모두 흰 돌, 검은 돌, 바둑돌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날은 도저히 않되겠다 싶어 결단을 하고 그 사랑하는 바둑돌을 다 쓰레기통에 내다 버린 다음 아끼던 바둑판을 엉엉 울면서 도끼로 쪼개어 불에 태우며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난 이후에야 비로서 바둑에서 자유롭게 되셨다고 하니 죄는 정말 끊기가 그렇게 힘든 것이고 대단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룩하신 성령님은 죄와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회개한 심령에만 충만히 임하시는 것입니다.
1907년 1월 6일 장대현 교회에서 시작 된 우리나라의 놀라운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다 아실 것입니다.
이 대각성운동은 길선주 장로의 회개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일입니다.
집회에서 그는 친구의 유언으로 재산을 관리하던 중 100달러를 사취했다며 울면서 고백을 하게 되는 데 이 고백을 시작으로 성령의 강한 임재가 한국교회 전역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본문인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임하시기 전에도 교회의 죄와 개인의 죄를 회개하고 잘못 된 것을 바로 잡고 난 후에야 성령님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받기 원하신다면 철저한 죄의 회개가 우선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와 싸워 이기시고 회개하여 성령충만 받으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둘째로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모여서 기도하며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시고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하나님나라에 대해 들은 사람은 최소한 오백여명이 훨씬 넘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기 위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도한 사람은 120여 명에 불과 했습니다.
약속을 믿고 기도하며 기다린 사람만이 성령 충만을 받은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로마 시대의 신학자 터툴리안은 "신앙이란 불을 켜놓고 기다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는 노력과 고통, 희망을 잃지 않는 인내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기도하고 믿으라는 것에 대해 예수님께서도 누가복음11장 13절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하시며 성령을 구하면 주시겠다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구하여야 합니다. 성령님이 충만히 부어지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의 자발적인 동의와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의식하고 대화하며 의지하면 할수록 성령님은 점점 더 충만하게 우리 심령에 자신을 드러내시고 일하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성령님과 날마다 대화하며 성령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 보십시오.
성령님, 제 안에 계시지요?
저를 사랑하시고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님, 저를 변화시키시고 저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더 충만히 임하여 주세요.
우리가 성령님의 인격과 날마다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기다릴 때 성령 충만을 받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성령충만의 역사가 우리 성도님들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우리 교회 위에 부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래서 토미테니 목사님의 ‘하나님 당신을 갈망합니다’라는 책에 기록된 성령의 강력한 임재 사건을 나누고 싶습니다.
토미테니목사님은 친구 교회의 주일 예배에 설교 초청을 받고 호텔에 머물러있을 때 묵직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느꼈고 성령의 감싸심에 온몸을 떨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교회로 갔는데 예배당에 성령의 임재가 너무나 강력하여 호흡이 곤란할 정도였고, 찬양 인도하는 사람들도 그 임재 앞에 노래도 연주도 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담임목사는 성경을 읽고 난 후 간신히 강대상 귀퉁이를 붙잡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그 분의 혜택을 구하는 일을 그만 두고 그분 자신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 분의 손이 아니라 그분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얼마나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임했는지 목사님은 3m정도 뛰어 올랐다가 뒤로 떨어져 넘어졌고 강대상은 앞으로 넘어와 두 쪽이 나버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교회로 몰려 들었고, 주차장에 들어서면서부터 성령의 강한 임재를 느껴 걷잡을 수 없는 울음을 터트리며 강력한 회개의 역사가 시작되어 아침 8시 30분부터 시작된 예배는 새벽1시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몇 달 동안을 계속해서 밤마다 수 백명씩 줄지어 나왔기에 집회를 계속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토미 테니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곳에서 이렇게 하고 싶다
저는 우리 교회에도 이런 성령세례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성령세례를 경험한 후 놀랍게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은 무디 목사님은
그의 생애를 통해 2억명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느날 무디 목사가 또 집회의 강사로 초대되어 설교하러 나가자 한 사람이 성난 목소리로 무디 혼자만 성령을 독차지 하고 있느냐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그 때 무디 목사가 답변한 말은 무디가 성령을 독차지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무디를 독차지 한 것이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너무나 멋진 말이 아닙니까?
한 구두 판매원에서 세계적인 하나님의 종이 된 무디와 같이 우리도 성령 충만을 받으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로 변화될 줄 믿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이십니다.
매일 성령님과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며 성령 충만 받기를 끊임없이 기도하며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주일에는 우리 모두가 새롭게 체험한 성령님의 은혜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축원드립니다.
20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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