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고넬료의 구원(사도행전10장36절-48절)

남수연 2015. 7. 21. 16:51

 

현대는 모든 사람을 다 지치게 하고 피곤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성도란 예수님의 충만한 데서 무엇인가를 받는 사람이고 계속해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주님 앞에 나온 우리 모두에게 영과 육에 충만한 은혜를 내려주시리라 믿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고넬료의 구원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했던 고넬료는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일까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일까요?

그런 거 뭐, 크게 문제 삼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도 괜찮을까요?

우리는 내일 구원받으리라가 아니라 할 수만 있다면 오늘 당장 구원받아야 하고, 현재의 구원 상태를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이미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실은 그렇지 않은 데 거짓 확신에 평생 속을 수도 있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내가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를 확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이미 고넬료가 구원을 받은 의인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넬료의 상태를 분명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1114절에 보면 고넬료에게 나타났던 천사가 베드로를 청해 말씀을 들으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너와 네 온 집이 구원받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그러면 분명히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씀이죠.

그래서 오늘 베드로가 불려 와서 바로 이 구원받을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 중에는 당연히 구원의 핵심이 다 들어있겠죠.

구원을 받기 위해 구체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어떤 것을 믿고, 어떻게 믿어야 하는 것인지를 마침 오늘 말씀을 통해 분명히 정리해야겠습니다.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당신 믿음이 뭐냐고 하면,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구원받을 말씀을 살펴볼 때, 이천년 전 베드로가 이 설교를 할 때, 성령께서 내려오셨듯이 우리 중에 그런 역사가 임하시길 간절히 기대합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사도가 고넬료에게 전하는 구원 받을 말씀은 시종일관 오직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라는 것입니다.

36절에 베드로사도는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시작합니다.

우리말 번역은 밋밋하게 들리지만 원문을 직역해 보면 이런 느낌입니다.

이 분은 모든 자들의 주이시다!’

그런데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에겐 귀를 씻어내고 싶은 신성모독의 말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제가 베드로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여호와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유대인들에게 또 다른 하나님이란 참람하기 짝이 없고 저주받을 일인 것이죠.

신실한 유대교 신자인 로마 장교 고넬료와 모여 있는 유대교신자들 앞에서 꺼내기 조심스러운 말입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한 죄목이 무엇입니까?

내부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신성모독죄이고, 외부적으로는 로마정부에 대항해 독립국가를 세우려한다는 반역죄였습니다.

요한복음518절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셨기에 더욱 주님을 죽이려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1030절에서 거두절미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베드로사도가 여차하면 돌이 날라올지도 모르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당당하게 선언하는 것은 예수님은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이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알아야 할 첫 번째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과 성령하나님과 함께 삼위일체 하나님 중 제2위격의 성자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인간을 속죄하고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셨습니까?

아무나 훌륭한 사람을 하나 보내시면 되지.

이게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계속 보내줄 것을 약속하신 메시야가 다윗의 왕족 중 한명일 거라고 믿고 있었지 하나님이 직접 내려오시리란 것은 꿈에도 생각해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위대한 인간이셨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기만 하셨다면 우리처럼 죄성을 갖고 태어난 것이고, 남의 죄를 속죄할 자격이 없으십니다.

모든 인간은 그냥 태생이 죄인입니다.

그걸 부정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뿐만 아니라 이 성자하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베드로는 이어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이 오직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으로 해 내신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되셨다고 완전한 인간으로 사셨고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을 속죄하시려면 무늬만 인간이 아니라 완전한 인간이 되셔야 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으시고 그냥 하늘에서 내려오셨다면 사람이 아니시기에 사람을 속죄할 피를 흘리실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천사라 해도 그래서 우리를 속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수많은 짐승 제물의 속죄제사들은 생명은 생명으로속죄하고, 오직 가 사람을 속죄한다는 그 사실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신성이나 인성 중 한 가지라도 없으면 속죄는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하고, 또 인간이셔야만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해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은혜로운 실체이십니다.

세상에 예수님 아닌 그 누구도 그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할 수가 없습니다.

시편에는 497절에는 어떤 인간도 이 일을 해내지 못할 것을 이미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런데 현대 기독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이 진리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1984년 영국교회 주교 31명에게 예수님을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으로 믿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말한 사람은 불과 11명 뿐이었습니다.

지금 현실은 더 비관적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분명히 우리가 믿어야 할 절대적인 구원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시켜주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이 진리의 말씀을 환히 비춰주시면 인간의 이성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성육신의 은혜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길이 완전히 막힌 비참한 인간들을 위해 스스로가 인간이 되어 내려오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심오하고도 우리에게 충만하십니까?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신비와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이것이 인간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것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가장 최적의 존재 형태시라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시라면 인간을 구원하러 내려오실 때, 우주만물의 통치 공백을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이 완성해 놓으신 구원을 영이신 성령하나님이 오셔서 인간의 영혼에 내밀하게 역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구원을 각 개인에게 적용시킬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것은 정말 신비롭고, 마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가 그런 존재형태를 취하신 것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마치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것 같은 충격적이고 황송한 사랑과 은총을 삼위일체 하나님을 묵상하며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 되셨던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이 진리가 위협받는 세대 속에서 이 사실을 굳게 붙들어 예수님 말씀대로 복된 사람들이 다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다음 베드로가 전하는 구원받을 말씀은, 예수님은 나무에 달려 죽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사도는 고넬료의 일행들에게 그들도 이미 알고 있는 과거의 일들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은 당대에 이미 다 소문이 나고 알려진 예수님의 일입니다.

우리가 지성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는 2천년 전 이스라엘 땅에서 실제 태어났고,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을 행했던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병자를 고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시고,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런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일들은 분명히 역사 속에서 실제 했던 일이고 당시 이스라엘에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베드로사도는 소문으로 듣기만 했을 뿐 그 현장에서 주님을 만나보지 못했던 고넬료 일행에게 확고부동하게 말합니다.

우리가 바로 그 모든 일에 증인이라

증인은 현장을 보고 목격한 사람만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42절에서 베드로사도는 하나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세우신 제자들에게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다면 복음이 더 빨리 전파되었을 텐데, 왜 베드로의 말처럼 주님이 택하셔서 진리로 훈련된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보이셨을까요?

그 이유는 부활과 같은 초월적인 구원의 신비로운 진리는 아무에게나 경험되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에게 전해질 구원의 복음이 가장 온전하게 보존되고 전수되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도 없고, 성경을 이해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부활의 신비를 제멋대로 각색하고, 떠벌이지 못하게 하신 것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다녀오고, 예수님을 만나보고, 하나님께 직접 음성을 듣는 그런 일이 아무에게나 나타나 복음의 진리가 왜곡되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제자들만큼 예수님께 직접 훈련받고 특별한 목적을 위해 세워져 부활을 눈으로 볼 만한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눈으로 본 것을 더 확신합니다.

그래서 신비스러운 영적 체험을 한다는 사람들은 대개 그들의 경험을 성경보다 더 가치 있게 생각하고, 말씀보다 더 신뢰합니다.

결국 바울사도가 경계했던 다른 복음을 쫓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은 십자가의 순결한 복음을 온전하게 전수하기 위해 사도들을 택하셨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지시하고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그들이 전수해준 복음, 죽음 앞에서도 자신들이 본 것이 사실임을 증언하고 순교했던 그 제자들의 말을 통해 복음이 진실임을 믿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진리는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그리고 후대에 증언되어 전수되는 것입니다.

증인은 직접 현장을 본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현장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증인이 될 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제자들처럼 분명히 목격하거나, 아니면 성령님이 영적 지각을 일깨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믿어져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복음이 마치 눈으로 본 듯이 믿어집니다.

증인의 말에는 확실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들이 본 것이 너무나 확실해서 칼이 들어와도 그 사실을 증언하고 죽었던 이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시길 간절히 구함으로 이 사실이 눈으로 본 듯이 믿어지고 우리 역시 복음의 증인이 되는 신앙을 가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 베드로사도가 증언하는 구원받을 말씀은 이 예수님이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들은 예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이치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요즘은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심판과 지옥에 대해서 말하기를 꺼려합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밝히 의인과 죄인들의 심판과 결말을 말씀함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의 영혼 멸절설을 주장 합니다.

신자들은 구원을 받고 불신자들의 영혼은 그냥 멸절되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거야 말로 이 세상에서 마음껏 죄 짓고 살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고 싶은 인간들의 염원입니다.

성경이 분명하게 죄에 대한 영벌을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인간의 결말을 만들어낸들 성경의 결말은 바뀌지 않습니다.

모든 영혼은 죽은 뒤에 재판장이신 예수님 앞에 소환됩니다.

심판과 지옥이 없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영원토록 형벌을 주시냐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부당함을 늘 강조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영원히 지옥에 가두는 게 말이 되냐

성경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평생에 지은 죄 때문에 당연한 형량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인들은 다 하나님의 심판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오셔서 그 깊은 죄의 뿌리와 죄의 사악함과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닥친 불행들을 낱낱이 보게 하시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성령께서 이것들을 깨닫게 하시면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는 인정이 됩니다.

요즘 제자에게 인분을 먹이고 노예처럼 괴롭힌 모교수 같은 사람이 계속 그렇게 악을 행하고 자기는 잘 살다 죽고 끝이면 좋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 누구도 심판에 대해 시비걸만한 오점 없이 모든 것을 공의롭게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저희 남편이 지금 LA에서 하숙하고 있는 집주인이 80세가 넘으신 권사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이 당뇨에, 우울증에, 불면증과 악몽과 불안감 때문에 얼굴이 무서우리만치 어둡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속마음을 털어놓으시는 데 죽음이 가까운 걸 알겠고, 죽음 뒤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겠는데, 하나님이 믿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다 알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믿어지는 지, 안 믿어지는지.

이 권사님이 하나님이 안 믿어지니, 지옥에 갈 것 같고 마음이 불안감과 두려움에 타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이런 갈등 속에 있으니 몸도 마음도 점점 더 병 들어가는 것이죠.

남편에게 제발 좀 구원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성경구절을 좀 가르쳐달라고 하더랍니다.

우리가 오늘 베드로사도가 증언하는 구원받을 말씀들을 정확하게 알고, 이해하고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죽음 앞에서 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사도는 예수님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죄사함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412절에서 말씀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러나 세상은 물론 많은 현대교회들도 예수님만이 우리를 속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점점 부정하고 있습니다.

1992, 한국교회에 엄청난 일이 벌어졌던 해죠.

다미선교회가 예수님의 재림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세력을 모았다가 불발로 끝났던 끔찍한 사태였습니다.

이것으로 한국교회가 사회로 부터 불신을 받게 된 그 타격이 얼마나 컸는지 모릅니다.

그 해에 감리교에서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무후무한 종교재판이 열렸습니다.

김홍0 목사 등이 감신대학의 홍모교수와 변모교수를 감리교단에 고발한 것입니다.

이들이 감리교의 정통적인 교리들을 벗어나 자유주의를 신봉하고 가르쳤다는 이유입니다.

이 재판으로 홍모교수와 변모교수가 출교당하고 목사직을 박탈당했습니다.

홍모교수는 한 정기 간행물에 기고한 글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신의 아들의 죽음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속량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우리를 속량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도덕적이고 자비로운 사랑을 인간들이 본받는 것이 곧 이 사회를 구원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정통적인 믿음을 지키는 복음주의자들이 구닥다리 믿음을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탁구를 좋아하던 사람이 골프시대가 왔는데, 탁구만 알고 탁구만 고집하는 것과 똑같다고 홍교수는 비유하더군요.

이렇게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자신들의 신앙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이 분들은 교회가 반지성적인 동정녀 탄생이나 유일한 십자가의 구원만을 강조하기 때문에 많은 지식인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주장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제대로 안 가르쳐서 떠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회가 끝까지 편협 된 예수님의 유일 속죄를 주장한다면 세상은 교회를 외면하고 기독교는 도태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이야말로 한 세대가 지나면 역사의 창고 속으로 들어가 버리겠지만 복음의 진리는 인간의 사상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장엄함과 신성함으로 면면히 세대를 이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사실 이런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의 글을 읽으면 저도 떨립니다.

이런 분들이 똑똑합니다.

제가 삼십년 간 심도 있게 신앙생활을 해왔고 육년 째 전문적인 신학공부를 하고 있지만, 혹시 내가 틀렸으면 어쩌나 이런 떨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런 사상들을 읽고 나면 그들의 똑똑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진리를 벗어났다는 것이 확연하게 구별이 됩니다.

이들이 어디서 잘못되었는지가 보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자기는 판단을 받지 않는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영과 육의 두 가지 입장을 다 볼 수 있지만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땅의 문제로 밖에 보지 못합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이런 결론 밖에 못내는 것입니다.

모든 종교에는 구원이 있다. 나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당신은 석가모니를 믿고 구원받고, 저 사람은 마호메트를 믿고 구원 받고. 어차피 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니까.’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을 지각하는 감각을 되찾지 못한다면, 인간의 합리성에 맞는 이런 종교적 사상만이 남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고, 성령께서 비춰주시면 사람들은 복음의 웅장한 진리성을 깨닫고 복음이 옳다는 것이 믿어집니다.

왈가왈부하던 모든 입들을 틀어막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 닫혀있는 영의 눈과 귀와 지각들을 일깨워서 이 모든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을 할 때, 사람들은 깜짝 놀랍니다.

저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구나!

십자가에 달리신 저 분만이 나를 구원하시는구나!

이 사실은 대면할 때, 이제까지 알 던 모든 관점이 급변하고, 이생과 내생의 비밀들이 다 풀리고, 사망에 갇혀있던 영이 하늘을 나는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을 말씀을 베드로가 전하는 바로 그 순간 하늘로부터 성령께서 그들에게 임하십니다.

그들이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갑자기 말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이런 구원의 신비를 깨닫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고넬료와 함께 모인 사람들이 다 성령을 받고 거듭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말씀을 나누는 중 성령이 임하시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누군가의 심령에는 오늘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성령께서 방언이라는 초자연적인 신비함으로 이들에게 내려오신 것, 성령세례와 방언에 대해서는 신학적인 갈등이 많은 데, 이 부분은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사도를 통해서 핵심을 정리한 구원받을 말씀에 대해 들었습니다.

헷갈리면 외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해되고, 깨달아지고, 믿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성령을 보내주시고 충만케 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면 이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묵상하면 할수록 복음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영광스럽고, 장엄한지 한없이 더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은 한번 체험하는 게 아니라 매일 매일 더 깊어지고 더 풍성해지는 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오늘 구원받을 말씀을 듣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진리가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성령의 은총을 더하여 주셔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모두가 살게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2015년7월19일 주일설교 남수연